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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빈/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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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로 경력
2.1. 화려했던 데뷔와 짧은 전성기2.2. 이후의 부침
2.2.1. 1996년 ~ 2000년2.2.2. 2001년 ~ 2002년2.2.3. 2005년 ~ 2006년2.2.4. 선수 시절의 평가
3.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서용빈의 선수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프로 경력

2.1. 화려했던 데뷔와 짧은 전성기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1994)

파일:attachment/서용빈/용빈.jpg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unctum_287885_54%5B638301%5D.jpg

드래프트 순위가 전체의 뒤에서 두 번째[1]였을 정도로 신인 드래프트 당시만 해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2] 선린상고와 단국대를 거치는 아마시절 단 한번도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이 없었지만 단국대와 LG 2군의 연습경기 중 LG 2군코치였던 최정우의 눈에 띄었다. 서용빈의 숨겨진 타격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입단을 구단에 요구해서 서용빈은 막차로 LG에 입단할 수 있었다.

'94시즌을 대비하던 LG 트윈스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3] 당시 타격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캠프에 머물던 일본프로야구레전드 장훈이 "넌 타격 폼에 특별한 단점은 없다."면서 서용빈의 부드러운 스윙을 칭찬하게 되는데, 이에 피그말리온 효과가 발휘되어 서용빈은 자신의 타격에 확신을 가지고 훈련에 매진할 수 있게 되고, '미스터 LG' 김상훈이적으로 공백이 된 1루 자리에 경쟁자허문회를 제치고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응답하라 1990 - LG 우승의 주역, 서용빈과 허문회의 '엇갈린 운명'.

신인 데뷔 시즌('94) 뛰어난 1루 수비와 타격 4위, 그리고 사이클링 히트까지 기록하며 1루수 골든글러브도 획득, 김재현, 유지현과 함께 1994년 LG의 신인 3인방으로 등장해 신바람 야구로 LG의 우승에 기여했다. 개막전 태평양과의 2연전은 김선진에게 밀려 벤치에서 출발했지만 타석에서 2경기 6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눈도장을 받았고, 급기야 1994년 4월 16일 사직 롯데 원정에서 6타수 5안타 4타점 사이클링히트를 치고 타격 여러 부문에서 1위에 오르자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인 4월 24일 만원관중 앞에서 열린 잠실 해태전에서 이대진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역전 3점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며 김선진, 허문회를 제치고 확실한 주전이 되었다.

당시 신인으로서 최다안타왕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무려 196개의 안타를 기록한 이종범의 압도적 활약으로 아쉽게 안타 2위에 그친다. 이해 서용빈이 기록했던 안타 157개는 2017년까지 KBO 리그 사상 신인 데뷔 시즌 최다 안타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17년 9월 5일 서용빈의 데뷔 시즌 최다안타왕 등극을 저지한 슈퍼스타의 아들이 넘어섰다.[4] 잘생긴 외모로 많은 팬을 거느렸으며 당시 인기스타 유혜정과의 결혼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조성민 - 최진실 커플과 함께 대표적인 야구선수-톱스타 부부이었지만 두 부부 다 파경을 맞이하게 되었다.[5]

이듬해인 1995년에도 126경기에 모두 출전해 작년보다 성적은 약간 떨어졌을지 언정 여전히 3할 타율을 기록하며 2년차 징크스는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데뷔년도인 1994년의 등장이 화려해서 그렇지 wRC+만봐도 94년의 133.2에서 95년은 126.8로, 그리 큰 차이는 없었으며 여전히 A급 1루수의 성적이었다. 다만 1996년에는 크게 부진하여 이전의 절반 정도의 타석을 소화하며 2할 4푼대의 낮은 타율로 대체선수만도 못한 성적을 냈으나, 1997년에 다시 재기하여 95년과 비슷한 정도의 타격을 보여주며[6]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2.2. 이후의 부침

2.2.1. 1996년 ~ 2000년

1998년 시즌 개막 직전에 교통사고로 턱관절 손상을 당하며 시즌을 통째로 쉬었다. 다행히 포스트 시즌에는 출전하여 맹타를 기록, LG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의 공신이 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9년,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18일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시즌을 날렸고[7],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은 2000년 다시 복귀하였지만 부상과 무려 2년이라는 공백기 동안의 훈련부족으로 인해 커리어로우였던 96년과 별반 차이없는 성적을 남겼으며, 1루수 서용빈의 경쟁력은 사실상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스텟은 OPS 7할을 턱걸이로 넘기긴 했으나 96년의 극심한 투고타저를 반영한 wRC+는 96년과 00년 모두 80 중후반대로, 1루수임을 감안하면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시즌 이광은 감독과의 불화, 양준혁 영입 후 출전시간이 줄어들었던 게 불만이었는지 시즌이 한창이던 2000년 6월 초 부산 원정 도중 팀을 무단이탈했다가 3일만에 돌아온 적도 있다.LG 서용빈 팀 무단이탈 '무단 이탈' 서용빈, 팀합류

2.2.2. 2001년 ~ 2002년

2000년에 양준혁 영입에 불만을 표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광은 감독의 경질 후 김성근 감독대행이 부임한 2001년 시즌에는 김성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포지션 불만없이 야구를 했다[8]. 그럼에도 사실 실제 성적은 2000년과 거의 흡사한 수준으로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풀타임 1루를 뛰었음에도 sWAR*이 0.57로, 이정도면 진짜 선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기용하는 정도에 불과한 성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결국 2001년 소송에서 패하고, 졸지에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할 위기에 몰린 서용빈은 단 하나 남은 희망이었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승선을 목표로 야구에 매진하게 된다. 팀의 주장을 맡게 된 2002년 초반에는 3할을 넘나드는 타격을 보여주며 2002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승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승엽, 장성호에 밀려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 후에 모든 것을 놔 버렸는지 힘빠진 타격을 보여주다가 최소한 시즌만이라도 끝내고 입대하게 해달라는 LG 구단의 요청도 병무청으로부터 거절당하며[9] 서용빈과 LG 구단으로서는 그 당시 대한민국 전체를 붉은 물결로 물들였던 2002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입대 연기 요청 논란이 크게 이슈화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2.2.3. 2005년 ~ 2006년

2005년 소집해제 후 선수로 돌아왔으나 이미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와 2년간의 공백으로 인해 결과는 당연히 신통치 않았다. 2006년에는 주장을 맡았으나 사실상 1군에서 전력 외로 분류되었고, 결국 시즌 막판 김정민과 같이 동반 은퇴를 하게 된다. 참고로 은퇴식이 있던 잠실 야구장에는 은퇴식 장내 아나운서로 송인득 MBC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았고, 시구는 안재욱[10] 했다. 그리고 여러 관계자들의 은퇴 격려 메시지가 전광판을 비췄는데, 그중 김재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신바람 야구를 주도하던 신인 3인방 중 한 명은 은퇴식의 주인공, 한 명은 코치로, 마지막 한 명은 다른 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당일 관중석을 채운 수많은 LG 팬들은 팀의 부진한 성적이 더해져 여러 모로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11]

2.2.4. 선수 시절의 평가

LG 팬들의 추억 속에 신인선수 서용빈은 비교적 좋게 남아있으나, 그 이후까지 포함한 통산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함께 3인방으로 묶인 선수중 신장염과 고관절 부상을 겪고 말년에는 플래툰에 묶여 통산 성적에서 손해보고도 통산 WAR이 50을 넘기는 김재현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단과의 마찰로 비교적 일찍 은퇴한 유지현과 비교해도 한참 모자라다. 데뷔 후 주전으로 뛴 시즌이 1994년, 1995년, 1997년, 2001년이 전부이며 나머지 시즌은 부상으로 시즌 중 낙오하거나 개인사로 제대로 시즌을 치루지 못했다.

통산 타율은 2할 9푼대이지만, 통산 sWAR은 10.81밖에 안 된다. 그 이유는 선수 생활이 짧기도 했고 포지션도 1루수인데다가 출루율, 장타율이 낮아서 세이버상으로는 고평가를 받을 수가 없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LG 팬들의 기억에 좋게 남아 있는 이유는 우선 1994년 신인 3인방으로서의 임팩트가 강했으며 몇몇 중요한 시합에서 좋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신인 최초 사이클링 히트를 쳤고 당대 최고의 마무리 정명원에게 역전 끝내기 안타를 친 일이 있으며 한국시리즈에서 OPS 1.257의 맹타를 휘둘러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다른 사례가 1997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9회말 주자 1, 2루에 4대 5로 뒤진 상황에서 성준을 상대로 친 우중간 가장 깊숙하게 떨어진 끝내기 2루타. 당시 천보성 감독은 최동수를 대타로 쓰려고 했지만, 서용빈은 "자신있습니다." 라며 이를 거부하고 그대로 타석에 나와서 경기를 끝냈다. 특히 당시에는 좌타자는 좌완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이 강한 시절이었는데, 그럼에도 끝내기를 쳤으니 인상이 강하게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임팩트에 비해 아쉬운 타격 성적과는 달리 1루 수비 능력은 훌륭했다. 특히 포구 능력이 좋아서 어깨가 약했던 유지현의 바운드 송구를 유연하게 처리했으며 신국환, 박종호 등의 아리랑 송구나, 기습타구들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처리했다. '94 입단동기 김재현은 "서용빈도 수비를 굉장히 잘 했다. 그런데 포구할 때 다리를 너무 찢어서 재수없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슷한 후배 야구인으로 채태인, 박종윤 등이 있는데, 채태인은 2013 시즌의 활약으로 서용빈보다는 통산 기록이 좀 낫다. 반면 박종윤은 통산 WAR이 고작 0.57으로 2500타석씩이나 들어선 것이 신기하다는 평을 듣는다. 일본 치바 롯데 마린즈프랜차이즈 스타 1루수 후쿠우라 카즈야와도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다. 수비는 좋지만 발이 느리고, 보통 중장거리포 스타일이 주류인 1루수와는 다른 교타자 스타일의 타격에 큰 경기에 유독 강한 해결사 스타일까지 닮았다. 심지어 한 팀에서만 뛰었고 홈구장이 홈런을 치기 힘든 구조라는 점까지..[12] 다만 후쿠우라는 통산 2,000안타와 100홈런을 비롯해 통산 기록 비교에서 서용빈보다 훨씬 우수한 타자다.[13] 게다가 전성기 때가 일본프로야구의 역대급 타고투저란 점을 감안해도 두 자릿 수 홈런을 여러 번 기록하는 등, 서용빈보다는 파워가 뛰어난 타자였다. 여담으로 후쿠우라와 서용빈이 닮은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둘 다 팀내 최하위 지명자로[14] 팀에서 별 기대도 안 하고 복권 긁어보듯 뽑았는데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성했다는 것이다. 후쿠우라도 입단 당시 등번호는 코치들이나 달던 70번이었다. 다만 입단 첫 해부터 주전을 먹은 서용빈과 달리 후쿠우라는 고졸이라 몇 년 지나서야 1군에 올라왔다.

외국인선수 제도가 1998년이 돼서야 도입됐기 때문에 서용빈이 똑딱이 3할을 기록했던 1997년까지는 그래도 리그에서 평균 이상의 1루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이론 우즈 등 1루수 강타자 외국인의 유입, 비슷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승엽, 장성호 등의 등장, 세이버매트릭스의 도입과 함께 서용빈의 1루수로서의 타격 생산성에 대하여 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LG 트윈스 126 493 .318
(4위)
157
(2위)
30
(2위)
4 4 72 72
(4위)
6 44 .420 .371
1995 126 441 .306 135 28
(5위)
2 4 53 48 6 42 .406 .365
1996 95 248 .242 60 4 2 4 29 28 3 29 .323 .319
1997 120 399 .316 126 25 6
(4위)
4 69 51 4 45 .439 .379
1998 1군 기록 없음
1999
2000 100 288 .274 79 12 2 2 40 29 4 37 .351 .355
2001 126 371 .286 106 19 4
(4위)
0 49 36 4 42 .358 .357
2002 88 273 .286 78 16 1 3 27 35 4 25 .385 .344
2003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2004
2005 15 39 .128 5 1 1 0 2 3 0 1 .205 .150
2006 32 73 .192 14 4 0 1 9 7 0 5 .288 .241
<rowcolor=#373a3c> KBO 리그 통산
(9시즌)
828 2625 .290 760 139 22 22 350 307 31 270 .384 .353


[1] 2차 6라운드 전체 41순위 지명으로, 서용빈 다음(이자 94 드래프트 마지막)으로 지명된 선수는 영남대 출신의 외야수 김성이다. 이 선수는 쌍방울에 지명되어 2시즌 동안 32경기 22타수 3안타 타율 0.136이라는 성적을 남기며 은퇴하였다.[2] 선수시절 그의 등번호 '62번'도 이의 방증인데, 당시만 해도 일부 예외는 있었지만(예: 정민철55번, 염종석68번) 대체로 낮은 번호대의 선수가 주전이고, 50~60번대 번호를 달고 있으면 1군의 주전 외 내지는 2군급 선수, 70번대 이후는 코칭스텝이라는 인식이 존재했었다. 데뷔 이후 몇년 간 서용빈이 승승장구하면서 62번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996년한국프로야구 최초이자 신인 최초 30-30 클럽의 멤버가 되어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게 되는 현대 유니콘스이 선수도 역시 62번을 택하면서 서용빈의 62번은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서용빈은 이후 미디어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저 선수가 내 기운을 뺏어간 거다."(...)라면서 아쉬워했다는 후문.[3] 드래프트 6순위가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었다. 이광환 감독은 모든 신인을 오키나와로 데려가게 되는데, 이는 팀의 주전 중 두 명인 송구홍, 김동수가 군 문제 때문에 전지훈련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과도 무관하다 볼 수 없다. 서용빈 역시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4]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서용빈의 시즌 157안타는 당시 페넌트레이스가 총 126경기였던 반면, 이정후는 128경기만에 서용빈의 기록을 경신했다. 다만 이정후가 서용빈과 달리 고졸 신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쪽 역시 대단한 업적임은 분명하다.[5] 다만 은퇴식 직후에 이혼 발표를 해 심란하긴 했겠지만 서용빈은 평범하게 잘 살고 있고 유혜정도 딸과 잘 살고 있지만, 조성민과 최진실은 둘 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6] 그의 선수 경력중 유일하게 OPS 0.800을 넘긴 시즌이지만 93~96년이 투고타저가 심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7] 한 달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LG 구단은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출전시키지 않는 방침을 세웠다.[8] 김성근이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뒤 불화가 생긴 외국인 타자 댄 로마이어 대신 서용빈을 전폭적으로 주전으로 기용했다.[9] 더욱이 그 당시는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 병역 문제가 매우 민감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번 병역비리로 구속된 주제에 입대를 시즌 후로 연기해 달라는 서용빈과 LG 트윈스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매우 싸늘했다.[10] 서용빈과는 동갑내기로 친한 친구 사이며, LG 트윈스의 팬으로 유명하다.[11] 게다가 2006년은 LG가 창단 첫 꼴찌를 한 시즌이었다. 팬들과 선수들 모두에게 여러모로 암울한 시즌이었다.[12] 마린즈의 홈구장 치바 마린 스타디움은 바닷바람이 거세기에 홈런이 잘 안 나오기로 악명높다.[13] 어느 나라에서든지 개인 통산 2,000안타에 세자릿수 홈런, 타격왕 경력과 6년연속 규정타석 3할을 기록한 선수는 리그에서 손꼽을만큼 훌륭한 선수임에 분명하다.[14] 심지어 후쿠우라는 그 해 드래프트 전체 최하위 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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