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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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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북원의 붕괴3. 오이라트의 발흥4. 몽골의 부활5. 만주족의 청나라에 복속

[clearfix]

1. 개요

북원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북원의 붕괴

파일:북로(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영역 지도.png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
16세기경 몽골의 판도

1368년 원혜종 우카가투 칸 토곤테무르(제15대)는 강남에서부터 급격하게 세력을 확산시켜 나가면서 북벌을 단행한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맹공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수도인 대도를 빼앗긴 채 북쪽의 상도[1]로 도주했고, 곧 응창(應昌)에서 할거(割據)했다. 이로써 중원은 완전히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혜종은 얼마 못가서 시름시름 앓다가 붕어했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원소종 빌레그투 칸 아유시리다라(제16대) 역시 응창이 무너진 후 다시 카라코룸으로 도망갔다. 1372년 명나라의 홍무제는 다시 한번 대규모 원정군을 몽골에 보냈지만 북원군은 이를 격파했으며, 명장 코케 테무르의 활약으로 북원은 다시 한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북원이 도움을 구할 수 있었던 세력은 만주의 나하추와 부마국이었던 고려뿐이었다. 나하추가 명나라의 요동 전진기지였던 우가장을 파괴하는데 성공하면서 북원 조정과 나하추는 긴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때 고려에도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써 마땅히 북원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2][3]

하지만 북원의 반격은 거기까지였다. 소종과 명장 코케 테무르의 사후,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어갔고, 다시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후, 1382년 윈난의 바자르오르미가 자살하고, 1387년 나하추마저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락할 수 밖에 없었다. 끝내 1388년 부이르 호수의 동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나라군에게 대패했다. 이때 북원은 나하추와 협력하기 위해 중심지를 케룰렌강과 부이르호 일대로 옮겨놓은 상황이었는데 이 전투로 인해 사실상 쿠빌라이 황통의 북원은 공중분해되었다. 당시 황제였던 천원제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제17대)의 차남과 수많은 황족, 고위관료, 몽골 식솔, 가축 등이 명나라군에게 사로잡혔다. 천원제는 카라코룸[4]으로 도주하던 중 툴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피살당했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해 제18대 대칸위를 이었으나, 북원의 황제 지위는 본래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선포한 것이었고, 예수데르 자신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으므로, 중원 황제의 칭호를 포기한 뒤, 몽골의 대칸 지위만 유지했다. 원나라라는 이름은 이때 사라지게 되지만, 이후 몇몇 칸이 원나라의 황제에 스스로 오르기도 했다.[5]

3. 오이라트의 발흥

조리그투 칸 예수데르의 치세때부터 오이라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이라트는 아리크부카의 후손들과 계속해서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이라트 세력은 15세기까지 몽골을 지독하게 괴롭혔는데, 악연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날 몽골의 제20대 대칸이었던 니굴세그치 칸이 토끼 사냥을 하던 도중 토끼처럼 하얀 여자를 만나고 싶다며 한탄했다. 이에 오이라트의 초로스 부족장 고오하이 타이유('태위')가 올제이투 비자라는 유부녀를 추천해주었고, 칸은 남편을 죽인 후,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올제이투 비자는 살해된 남편의 복수를 위해 그녀를 추천했던 고오하이를 모함했고, 니굴세그치 칸은 고오하이의 가죽을 벗기며 죽였다. 나중에 모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칸은 자신의 딸이었던 사무르 군즈를 억울하게 죽은 고오하이의 아들 마하무드[6]와 혼인시키고, 오이라트 4부의 수장으로 봉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오이라트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고, 니굴세그치 칸은 오이라트의 토르구트 부족장 우게치 '카스하'[7]와 마하무드에게 살해되었다.(1399년) 당시 오이라트는 훕스굴 호수를 중심으로, 몽골은 케룰렌강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서쪽의 오이라트, 동쪽의 몽골 구도가 시작되었다.

한편, 남쪽의 중원에서 정난의 변을 일으킨 후, 최종 승자가 된 연왕 주체가 명나라의 제3대 황제로 즉위했다. 야심만만한 정복형 군주였던 성조 영락제는 몽골의 당시 제23대 대칸이었던 올제이테무르 칸에게 조공을 요구했지만(1408년) 칸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간 급사중 곽기를 살해하는 것으로 응답했다.(1409년) 이에 격노한 영락제가 구복을 보내 몽골에 보복하도록 했지만, 구복은 오히려 대패했고, 만리장성과 요동이 공격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영락제는 이에 분노하여 몽골에 대한 친정을 개시했다. 몽골은 대패했고, 영락제는 당시 몽골 재상이었던 아룩타이[8]를 화령왕(和寧王)[9]에 책봉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오이라트가 급성장하자 명나라는 오이라트에 대한 친정을 감행했다. 기가 꺾인 오이라트는 한동안 혼란에 빠졌고, 이를 틈타 몽골의 아룩타이가 다시 세력을 크게 키웠다. 영락제는 아룩타이의 거듭된 도발에 맞서 3차에 걸친 친정을 감행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영락제의 친정으로 오이라트의 힘이 약해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몽골이 반격을 시작했다. 황금씨족이었던 아다이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26대 대칸이 되고, 아룩타이와 함께 진군하여 델베그 칸(제24대)[10]과 오이라트 일족 다수를 죽였다.(1415년) 곧이어 마하무드가 아룩타이에게 피살되자,(1416년, 4월) 오이라트는 마하무드의 아들 바하마(토곤)를 재빠르게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고, 임의로 오이라다이를 새로운 대칸인 에세쿠 칸(제25대)으로 추대했다. 이후 20년 동안 몽골에는 2명의 칸이 존재하게 되었다. 사실상 아다이 칸을 꼭두각시로 만든 아룩타이는 스스로를 '타이시'[11]라 칭하고, 오이라트를 공격했다. 오이라트는 아룩타이에 밀려 초원의 서쪽땅 1/3만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오이라트의 지도자 바하마는 아룩타이에게 사로잡혀(1425년) 그의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하마는 이때 '토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를 보다못한 토곤의 어머니, 사무르 군즈의 간청으로 토곤은 풀려나게 되었고, 치욕을 잊지 않은 토곤은 몽골에 맹공을 가해 마침내 1430년에 이르면 아다이 칸과 아룩타이는 사실상 세력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1433년 톡토아부카[12]타이순 칸(제27대)으로 옹립한 오이라트의 토곤은 1434년 아룩타이를, 1438년 아다이 칸을 살해하고 마침내 몽골 초원 전체를 장악했다. 이후 토곤은 죽고 그의 아들 에센이 타이시의 자리를 차지했다.

에센은 초원지대 밖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에센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명나라는 어린 영종 정통제(제6대)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센을 견제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발하쉬호, 동쪽으로 만주 평원, 북쪽으로 바이칼호, 남쪽으로 만리장성까지 세력을 확장한 에센은 명실상부한 초원의 최강자가 되었다. 타이순 칸을 꼭두각시로 만든 그는 대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대칸은 몽골의 황금씨족만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타이순 칸을 쫓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만리장성 지역에서 열린 마시(馬市)에서 에센이 사기에 가까운 교역을 시도하자, 당시 명나라의 실세였던 환관 왕진이 교역을 중단시켰고, 이에 격노한 에센은 명나라의 북변을 공략했다. 왕진은 갓 성인이 된 정통제와 함께 오이라트에 대한 보복 원정을 단행했지만 토목의 변(1449년)에서 궤멸적인 참패를 당했다. 에센은 정통제를 사로잡았지만 이미 명나라에서 새 황제인 대종 경태제(제7대)를 추대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정통제를 아무 조건없이 명나라에 돌려보냈다. 이후 에센은 그의 여동생이 타이순 칸과 혼인한 뒤 낳은 자식, 즉 외조카를 대칸으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 타이순 칸과 이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면서 에센은 타이순 칸을 죽였고,(1452년) 제28대 대칸으로 옹립했던 오케크트 칸 아크바르진(악바르지)[13]을 연회에 유인하여 살해한 후, 스스로 제29대 대칸이 되었는데,(1453년)[14] 다시 '대원'(大元)의 이름을 사용하고, '첨원'(添元)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 하지만 1년 뒤 에센의 부하 알라크가 자신을 타이시에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에 앙심을 품고 다이온타슨다이 칸 에센을 살해했다.(1454년)

4. 몽골의 부활

파일:1520년 몽골 지도.png
1517년 다얀 칸의 붕어 이후, 몽골과 오이라트의 판도
에센이 살해당한 뒤 초원에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었다. 대칸이 연달아 옹립되고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다가, 한동안 대칸이 없는 공위시대가 이어졌다. 1475년 만돌(만두굴)이 제32대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또한 살해당하고,(1478년) 만돌 칸의 아내였던 만두카이가 아크바르진(악바르지) 칸(제28대)의 손자였던 바얀 뭉케의 어린 아들을 제33대 대칸으로 즉위시키니 그가 곧 몽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다얀 칸이었다.

제20대 니굴세그치 칸 이후 줄곧 몽골의 골칫거리였던 오이라트는 다얀 칸의 치세 이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만두카이 카툰은 아린 다얀 칸을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오이라트가 몽골의 가장 큰 위협이라 판단하고 직접 오이라트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는데, 이 원정은 꽤 성공적이었다. 성인이 된 다얀 칸이 직접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대오이라트 원정을 개시했는데, 이때 오이라트의 타이시였던 이스마일을 죽이고, 오이라트에 대한 몽골의 우위를 확인시켰다.

오이라트를 정리한 다얀 칸의 다음 목표는 몽골의 통합이었다. 에센 사후 몽골 초원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대칸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해서 일본의 천황과 다름없는 수준이 되었고, 각 부족들은 힘의 논리로 약한 부족들을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상황이었다. 1479년 15세의 어린 바투 뭉케는 오르도스에 있는 성지인 나이만 차강 게르 앞에 가서 대칸 즉위를 선언하고, 스스로를 '다얀 칸'이라고 칭했다. 이는 '대원의 칸'이라는 뜻으로,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써 다시 한번 몽골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행동 하나로 수많은 몽골 부족들은 다시 대칸의 권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고비 사막 이남에 있는 여러 부족들은 대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세력은 바로 융셰부부였다. 당시 융셰부부의 지도자는 이브라힘으로 오르도스에 있다가 융셰부부의 부족장이 된 후 오르도스, 튀메드, 카르친, 아수드 등 여러 부족과 힘을 합친 당대의 유력자였다. 다얀 칸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부족들을 좌익 3투멘이라 하고, 이브라힘이 다스리고 있는 부족들을 우익 3투멘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남 울루스 볼라드를 지농[15]으로 임명해서 우익 3투멘을 다스리도록 했다. 하지만 울루스 볼라드는 나이만 차강 게르에서 참배를 하던 중 일이 잘못되어 이브라힘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다얀칸은 분노하여 직접 우익 3투멘에 대해 친정을 단행했다. 1510년 이브라힘은 달란 테리군[16] 전투에서 대패하고 청해(코코 노르) 지역으로 도주했다. 다얀 칸은 대칸이 우익 3투멘을 직접 지배하라는 조언을 듣지 않고, 대신 3남 바르스 볼라드를 지농으로 임명했다. 대칸이 좌익 3투멘을, 지농이 우익 3투멘을 다스리는 이러한 체제는 다얀 칸의 손자인 제35대 알라그 칸(보디 알락 칸) 때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몽골은 다시 통합되었고, 그 범위는 서쪽으로 황하에서 동쪽으로 만주 평원에 이르렀다.[17]

이렇듯 조리그투 칸 이후 계속 분열하며, 한때는 오이라트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했던 몽골의 부족들을 재통일한 영웅이 다얀 칸이었다. '다얀'이라는 칸호도 한자인 '대원'(大元)을 몽골어로 음차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내인 만두카이 카툰은 현명한 왕비이자, 절멸될뻔 했던 황금씨족을 다시 번창시킨 여걸로 유명해 오늘날에도 몽골에서 존경받고 있다. 다얀 칸은 에센 타이시 때부터 정립되어가던 6대 부락을 6투멘 체제로 재정비했는데, 이는 곧 현대 몽골족의 정체성 및 행정구역 등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다얀 칸은 황금씨족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각 투멘의 수장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봉했다. 3투멘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파일:6투멘 지도.png
6투멘 지도

좌익 3투멘: 대칸의 지배를 받는 3투멘
우익 3투멘: 지농의 지배를 받는 3투멘
1517년 다얀 칸이 붕어한 이후, 그의 3남이었던 바르스 볼라드가 스스로 제34대 대칸이 되었으나, 곧 내전을 우려해 정통 후계자였던 보디에게 대칸의 자리를 넘겼다. 다얀 칸이 만들었던 시스템은 제35대 알라그 칸의 치세까지는 유지되었다. 6투멘의 지도자들은 어찌되었든 대칸의 지위를 인정해주었고, 대칸도 나이만 차강 게르에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했다. 우익 3투멘의 지배자였던 지농 또한 휘하의 우익 3투멘에 대해 분명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바르스 볼라드 칸의 차남이었던 알탄 칸에 의해 망가지게 되었다. 알탄 칸은 자신의 훌륭한 능력을 입증하여 몽골 사회 전체에 자신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오이라트와 명나라를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보여주었고, 우량카이 투멘의 반란 진압에 있어 대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조부인 다얀 칸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브라힘을 잡아내 제거했다. 알탄 칸의 뛰어난 능력을 치하해 알라그 칸은 그에게 '투시예트 세첸 칸'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알탄 칸은 알라그 칸 사후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라그 칸의 아들로 제36대 대칸이었던 구덴 칸에게 요하 상류로 떠나라며 강요했고, 명나라와 접하는 모든 몽골 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명나라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기 위해 북경의 조정에 통공을 요구했지만 명나라의 계속된 거절에 분노한 그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포위하면서까지 명나라에 계속 압박을 가했다.(경술의 변) 이후 명나라의 제12대 목종 융경제로부터 극적으로 통상을 허락받았다.(융경화의) 알탄 칸의 활동으로 다얀 칸이 만들어놓은 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좌익 3투멘과 우익 3투멘을 각각 다스려야 하는 대칸과 지농은 차하르부와 오르도스부만 지배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대중국 무역시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튀메드, 오르도스, 융셰부 투멘들은 사실상 알탄 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세첸 칸'이라는 호칭을 받아서 대칸의 권위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이 때문에 이후 스스로 칸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알탄 칸은 몽골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또 하나 남겼는데, 바로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전의 몽골 사회는 무당 중심의 샤머니즘 계통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알탄 칸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청해(코코 노르)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곳은 티베트와 몽골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티베트와 접촉이 잦아진 알탄 칸은 달라이 라마 3세를 만나 티베트 불교에 귀의했고, 그를 따라서 몽골의 다른 부족장들도 티베트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제37대 대칸으로 차하르부의 수장이었던 자삭투 칸 투멘은 몽골 부족장들을 모으고, 티베트 불교와 관련된 법령을 지정해 '자삭투 칸'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부[22]의 젊은 부족장 압타이 사인 칸[23] 또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하고, 그의 부족 사람들에게 티베트 불교를 전파했다. 압타이 칸은 고도 카라코룸의 폐허 잔해들을 이용해 바로 앞에 커다란 사원을 지었는데(1585년) 이곳이 바로 에르덴 조 사원이었다.

1639년 할하 좌익 투시에트부의 수장 곰보도르지 칸[24]의 차남이었던 자나바자르[25]가 제1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되어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제1대 젭춘담바 후툭투 자나바자르는 다양한 저술 등을 남기면서 몽골 문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티베트에서 수련을 마친 뒤 카라코룸 근처에 승려들을 위한 게르 공동체인 우르거(Örgöö)를 만들었다. 이후 자나바자르가 준가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우르거 또한 그를 따라 내몽골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이곳저곳 떠돌다가 마침내 18세기에 툴강과 셀베강이 만나는 지점에 완전히 정착하고, "후레"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이 오늘날 울란바토르이다. 티베트 불교는 이후로도 몽골 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19세기에 이르면 몽골은 사실상 종교 민족이 되었다. 당시 몽골 남성의 30%가 승려였고, 1889년 후레의 인구 20,000명 중 14,000명이 승려였다고 한다.

서쪽의 오이라트에 대한 원정도 계속되었다. 할하 우익의 자삭투부[26]의 부족장이었던 라이후루는 오이라트 부족들을 정복하고, 사촌이었던 숄로이 우바시[27]에게 오이라트 부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 이에 오이라트는 4오이라트 연맹을 결성하고 그에게 저항했다. 마침내 숄로이 우바시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오이라트는 곧 내분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 중 토르구트 부족이 다른 오이라트 부족 일부와 함께 서쪽으로 세력을 옮겨서 칼미크 칸국을 세웠고, 호쇼트 부족은 티베트로 내려가 호쇼트 칸국을 세웠다. 남은 오이라트 부족은 초로스 계통의 준가르 부족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는데, 이것이 최후의 유목제국이었던 준가르 홍타이지국이었다. 준가르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쯤 되면 북원은 사실상 만주족청나라에 의해 붕괴된 상황이었다. 할하 계통의 부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몽골족이 청나라 아래로 들어갔다. 준가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준가르 항목 참고.

동쪽에서는 요하 상류로 거점을 옮긴 대칸 휘하의 차하르부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청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외조부였던 왕고를 휘하에 둔 차하르부는 그의 도움을 얻어 요동 지역에 집중적인 공세를 가했고, 명나라에 상당한 공포를 심어주었다.[28] 하지만 당시 조선족 출신의 요동총병이었던 이성량이 이를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차하르부의 대칸이었던 투멘 자삭투 칸은 해서여진과 건주여진(만주족의 전신)을 휘하에 두었다. 여진족은 이 시기 몽골의 문화에 많이 노출되었고, 후에 누르하치가 건국하게 되는 후금은 몽골의 제도, 생활양식, 문화, 언어 등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또, 몽골족의 요동에 대한 공격이 잦아지자, 요동 지역의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군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이것은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는데(1616년) 큰 도움이 되었다. 투멘 자삭투 칸의 아들 부얀 세첸 칸(제38대 대칸)은 명장 이성량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적이 있었던 이여송을 사로잡고 그를 처형했다.

5. 만주족의 청나라에 복속

몽골족끼리 각자도생하던 상황에서 차하르부의 수장이었던 링단 칸이 제39대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분열된 몽골족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금씨족의 적통인 자신의 입장에서 몽골족을 다시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상당히 억압적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몽골족이 당시 떠오르던 누르하치후금에 투항했다. 링단 칸은 계속해서 후금에 대항했지만 떠오르던 신흥 강자인 후금을 꺾을 수는 없었고, 서쪽으로 계속 밀리다가 칭하이호 근처에서 붕어했다. 2년 뒤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홍타이지 한에게 투항하면서 대원전국옥새를 바쳤는데, 이때가 1635년이었다. 한 주위의 한족, 만주족, 몽골족은 이를 하늘의 뜻이라 했고, 이에 홍타이지 한은 마침내 황제에 즉위한 뒤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꿨다.

이후 만주족의 한(汗)이자 청나라의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대칸위에 올랐다. 그래서 청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한족에게는 중국식 황제호를 썼으나 만주족에게는 만주식 호, 몽골인에게는 몽골식 호를 썼다. 한 예로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면서 중국식이 아닌 "텡그린 술데투"라는 몽골식으로 연호를 선포했으며.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부터는 칸호로 스스로를 호칭했다. 참고로 청태종의 칸호는 "복다 카간"이었다. 청 황실은 공문서도 만주어, 몽골어, 한어로 기록하는 등 3국을 모두 정복한 정복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나갔으며, 초창기에는 황금씨족보르지긴씨, 즉 보르지기트씨와 통혼하여 만주족 군주의 지배에 대한 몽골족의 거부감을 줄였다.

후금군이 링단 칸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차하르 투멘, 튀메드 투멘, 오르도스 투멘, 융셰부 투멘을 모두 복속시켰고, 할하 투멘은 좀더 나중에 일어난 준가르 홍타이지국과의 분쟁 과정에서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에게 복속했다. 그래서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먼저 복속한 몽골인들의 영역이 중국 본토에 가까웠으므로 이들을 내몽골, 좀더 이후인 강희 연간에 복속된 할하 몽골인들의 영역은 더 먼 곳에 있었으므로 이들을 외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내몽골 및 외몽골이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몽골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가 찰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몽골족과 만주족이 싸우는 동안 러시아도 남하를 해서 할하 아래에 있었던 부랴트 부족을 편입시켰다.

차하르부와 할하부의 몽골족이 청나라의 아이신기오로 황실에 복속한 것은 청나라를 한족이 아닌 만주족으로 봐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훗날 1912년 한족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미련없이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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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도는 몽골 제국이 전 중국 대륙을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원나라의 수도였고, 천하통일 후에는 여름 피서용 수도로 쓰이던 도시였다(상도 유적 문서 참조).[2] 2월 을해, 북원(北元)에서 파도첩목아(波都帖木兒, 바투테무르) 및 어산불화(於山不花, 에센부카)를 보내 조서에서 이르기를, “근래 병란(兵亂)으로 인해 북쪽으로 피난해 왔지만, 지금은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 코케테무르)를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거의 다시 일으켰다. 국왕도 원세조(世祖)의 손자이니 마땅히 다시 천하를 바로 잡는 일을 힘써 돕도록 하라.”라고 했다. 처음에 두 사람이 〈고려에〉 들어왔을 때 왕이 사람을 보내 살해하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억류하여 〈북원으로〉 돌려보내고, 경사(京師)로 잡아서 보낼 것을 세 방책으로 내 의견을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돌려보내자고 했다. -《고려사》 권44 <세가> 공민왕 22년 2월[3] 물론 당시 공민왕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4] 카라코룸을 중국에선 화림(和林)이라 불렀고, 몽골 제국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설치한 화령로총관부(和寧路摠管府)의 하위구역이었다.[5] 대표적으로 에센 타이시다얀 칸 등이 있었다.[6] 무함마드에서 나온 이름이었으며, 마흐무드, 마합목, 마하무, 바툴라(Батула), 바하투르, 바하무(Бахаму)라고도 한다.[7] '울타리'라는 뜻이었다.[8] 몽골 아수드(알란, 아스, 아스트)부의 수장이었다.[9] 카라코룸의 왕이라는 뜻으로, 사실상 '중국이 인정한 몽골의 지배자'라는 의미였다.[10] 오이라트의 마하무드가 옹립했다.[11] 당시 몽골에서 카안(대칸)과 보르지긴씨 황족 아래로, 가장 높은 자리의 관직이었다. 이름은 중국의 '태사'에서 유래했는데, 원나라 시절의 관직이 이어져 온 것이었다.[12] 토크토부카[13] 타이순 칸의 동생으로 형을 배신하고 에센에게 붙은 후 대칸이 되었으나 패륜과 배신을 저질렀으므로 인망은 최악이었다.[14] 이때 황금씨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했다. 오이라트 가문과 결혼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보르지긴씨 황족을 살해했는데, 얼마나 악독하게 살해했는지 다얀 칸 바투 뭉케 이전까지 황금씨족은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원전국옥새[29], 족보, 문서 등이 사라지거나 불에 타서 에센 이전 몽골의 역사가 빈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다.[15] 중국의 친왕(親王)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나 이견이 있다.[16] Dalan-Terigün: 지금의 인산산맥[17] 당시 오이라트는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북원 초기에는 형식상으로 몽골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몽골의 대칸을 스스로 뽑기도 했으나, 다얀 칸 시절부터는 사실상 남남이 되었다. 이후 튀메드부의 알탄 칸과 라이후루의 정벌로 다시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8] 북원 초기 대칸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19] 몽골의 가장 중요한 평원들 중 하나였다.[20] 부랴트인 등을 가리킨다.[21] 1261년에 건립된 황실 행궁이었던 찰한뇌아성(察罕脑儿城)를 수비하는 역할을 하던 부서였다. 찰한뇌아성은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구위안현(沽源县) 囫囵淖에 위치했다.[22] 오늘날 몽골의 중앙과 동쪽을 차지했다.[23] 1554년~1588년. Abtai Sain Khan(몽골어: ᠠᠪᠲᠠᠶ ᠢᠰᠠᠶᠢᠨ ᠬᠠᠨ Абтай сайн хан)[24] 1594년~1655년. 곰보도르지 칸은 압타이 사인 칸(1554년~1588년)의 손자였다.[25] 1635년~1723년[26] 몽골 서쪽 일대와 준가리아 일대에 있었던 부족이다.[27] 러시아에서 그를 '알탄 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알탄 칸'이라고 알려져있다. 참고로 그의 부족은 엄연히 자삭투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칸을 칭할 수 없었다. 숄로이 우바시는 스스로 '홍타이지'라고 칭했다.[28] 대칸이었던 투멘 자삭투 칸의 이름이 상당히 크게 각인되었는지, 이후 차하르부의 지도자들을 '투멘 칸'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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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때 사라진 옥새를 부얀 세첸 칸이 찾았다고 하는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1635년 대원전국옥새가 후금의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손에 넘어간 뒤, 이 옥새는 그가 청나라의 황제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