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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1:55:15

악마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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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probatio diabolica
영어devil's proof
1. 개요2. 사례3. 수학의 경우4. 관련 문서

1. 개요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악마를 보여주면 그만.
그러나 악마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악마를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어딘가에 그들이 숨어서 살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악마의 증명(devil's proof)
중세 유럽에서 사용된 법적 용어.

요지는 존재를 증명하려면 해당 사건에 대한 증거만 찾아서 제시하면 그만이지만, 부재를 증명하려면 있었던 해당 사건의 모든 자료들이 증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므로, 그것은 거의, 어쩌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1]

더 직관적으로는 '부재의 증명'이라 부른다. 이 논리는 막강한 가불기다. 존재를 증명한 것은 1(100%)에 닿은 확실한 행위지만 부재를 증명하는 일은 우주 전체를 샅샅이 뒤지지 않는 한 99.9999%까지 닿을지언정 절대로 100에 다다를 수 없다. 즉, 없음을 아무리 입증해도 "아직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일축하면 그만이고, 상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계속 같은 논리만 반복하면 된다. 내 차고 안의 용도 같은 논리다.

입증 책임과 연관이 있다. '악마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충돌하게 된다면, 입증 책임은 '악마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측에 있다. 왜냐하면 반대로 존재치 않는다는 쪽에 입증 책임이 있다면 없다는 것을 증명 못 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 예를 들어 러셀의 찻주전자같이 어떤 허황된 소리일지라도 없다고 증명 못 한다면 믿어야 된다. 재판에서 피고를 기소한 검사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피고의 혐의를 검사가 입증해야 한다. 피고가 무혐의를 입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피고 입장에서도 현장 부재 증명(알리바이) 등을 통해 자신의 무혐의를 최대한 입증하려 한다.[2]

귀납법과도 관련이 있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를 존재 증명이 핵심인 악마의 증명에서는 "일부 백조는 하얗다"고 바꾼 셈이다. '일부 백조'가 존재함을 보이면 끝이다. 반면에 "나머지 모든 백조가 검다"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말 그대로 모든 백조의 사례를 찾아봐야 하는 귀납법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변형을 한 이유는 악마의 증명이 법정 추론으로서, 효율적이고 강한 설득 논변으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명제를 찾아내는 귀납법은 당장 한두 개 증거가 중요한 상황에서 별 쓸모가 없다. 또한 악마의 증명에서 보듯이 무엇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거로 하는 방식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역시 법정에서 꺼리는 논증 방식이 된다.

논리학적으로는, (두 명제가 증명되지 않았을 때) "A는 존재함도, 존재하지 않음도 증명되지 않았다."라고 하면 옳다.

2. 사례

"외계인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측은 외계인이 이 무한하게 넓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 이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현 인류의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한편 "외계인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측은 외계인을 데려오기만 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으로도 딱히 허점이 없는 강력한 가불기투사 성향이 있는 유신론자들이 즐겨 사용한다. '신을 보여드릴 순 없지만,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당신은 이를 부정할 수 없다'와 같은 식으로, 얼굴에 철판만 깔면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따라서 불가지론의 경향을 띤다. 종교 안 믿기로 유명한 천문학자[3] 생물학자들 중에도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이 반반 정도로 나뉘는 등 부재의 증명은 여전히 강력한 논리로 쓰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상대가 똑같은 논리를 들고 오면 한계에 부딪히기도 쉽다. 예를 들어 신의 정체가 사실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라는 주장에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면 이들도 자신의 논리에 의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양심적 병역거부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대체복무가 생기기 이전, 형사적 처벌의 대상으로 검사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피고에 대해 양심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원칙이다. 형사법상의 입증 책임은 피고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판례(대법원 2018. 11. 1. 선고 2016도10912 전원합의체 판결)는 이에 대해 '진정한 양심의 부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마치 특정되지 않은 기간과 공간에서 구체화 되지 않은 사실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위와 같은 불명확한 사실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불가능한 반면 그 존재를 주장/증명하는 것이 좀 더 쉬우므로, 이러한 사정은 검사가 증명책임을 다하였는지를 판단할 때 고려하여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피고인은 자신의 병역거부가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서는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에 따른 것이며 그 양심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고, 검사는 제시된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악마의 증명이라는 사례가 실제 재판에서 적용됨을 잘 보여준다. 현재는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위와 같은 재판이 반복될 일은 없다고 보이나 최근 양심을 이유로 예비군을 거부한 사례에서 상기 판례가 반복되었다.[4]

연애 관계에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주관적인 느낌만으로는 증명하기 어렵다. 의처증에 걸린 남편에게 아내가 당신의 착각일 뿐이라고 반박하면 그만이다. 배우자가 외도했거나 가평계곡 살인 사건처럼 사망 보험에 들어놓고 죽이려고 시도했다든지 뭔가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법정에서 인정받는다. 물론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라고 할 수 있다. 날 사랑하면 뭘 해달라고 요구한다든지, 불륜 상대에게 배우자와 이혼하라고 요구한다든지 그런 것을 통해 판단의 잣대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사랑을 해도 여건이 안 돼 못 해주는 걸 수도 있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그걸 감수할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고 관계를 청산하는 근거와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듯이, 대개 말보다는 행동에서 진심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혼인빙자간음죄'란 게 있었던 것도 말로는 달콤하게 결혼할 것처럼 꼬시다가 잠적해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며, '의리'를 입만 열면 외치던 친구에게 보증 서달라고 하자 연락이 끊기는 등, 원래 돌팔이나 사기꾼들도 책임을 못 져서 그렇지 말은 참 잘하기에 대개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판단하곤 한다. 가평계곡 살인 사건의 가해자인 이은해가 아무리 본인이 남편을 사랑했다며 결백을 호소해도 사망 보험금 들어놓고 계획적으로 유인한 정황으로 법원은 유죄라고 판단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언가를 해보기 전에는 증명할 수 없다. 일단 부딪쳐 봐야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병역판정검사에서 군대 갈 줄 알았던 사람이 병이 발견되어 면제를 받거나, 면제인 줄 알고 좋아했다가 현역이 나오는 사례가 있다. 또 한번 실패는 실수라며 다시 도전할 수도 있어서 대학 입시도 재수, 삼수까지 하나, 대개 3번 정도 도전했는데 실패하면 단념하는 경향이 있어서 3의 법칙도 있다.(삼세판) 그래서 해보기 전에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가 되어야 한다. 이때 화자는 가타부타를 말할 수 없는 판단 중지(에포케) 상태가 된다. 이것은 멀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인 피론주의와도 연결되고, 가까이는 70년대 한국 선불교의 숭산 스님이 '오직 모를 뿐'이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능성의 부재는 무조건 일단 부딪혀 봐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일례로 병역판정검사에서 외관상 명백한 장애인은 병역판정검사 없이 병역면제로 규정하고 있다. 과거엔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도 마찬가지였으며, 왜소증이나 최홍만이나 하승진처럼 현역 판정 기준[5]을 훌쩍 넘는 초장신이라면 신체 검사를 받으러 가지 않고도 현역 가능성 부재를 증명'''이 가능하다. 이렇게 가능성의 부재를 바로 증명이 가능한 경우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 똑같냐 하면 그건 아니다. 괜히 추론 통계학이 학문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간의 통계를 바탕으로 진단서를 제출했을 시 면제 확률을 대략 알 수 있기에 확률이 높으면 면제를 자신하고 갈 수도 있고, 확률이 낮으면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마냥 불안에 떨다가 면제 판정 나오면 기뻐하기도 한다. 스포츠에서 어차피 승패 확률은 반반이나 그 승리의 확률이 다르기에 확률 높은 팀이 이기면 당연하게 여기고, 확률 낮은 팀이 이기면 업셋이라며 충격을 받곤 한다. 학생들도 취업 전에 적성 검사도 받아보고 자신의 스펙이면 대략 어디 정도쯤이란 견적이 나오기에 그 수준에서 안전하게 지원하거나 탈락 각오하고 베팅해 보기도 한다. 특히 최근엔 컴퓨터가 발달하여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에 따르면 과거처럼 핵 실험을 꼭 직접 해보지 않아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돌려서 빠르게 핵무기를 제작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물론 시뮬레이션으로 해보는 것도 가상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긴 하다.

법학에서 유전자 검사의 경우 집단 유전학적 통계 자료 및 부권 확률 공식에 근거해 유전자 일치율이 99.95% 이상이면 '우연히 두 사람의 유전자가 일치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식과 친부모로 판정한다.# 지문 또한 용의자의 지문과 비교하여 완전히 일치할 경우 '우연히 다른 사람의 지문일 가능성'이 약 870억분의 1에 해당하므로 강력한 증거로 채택된다. 정말로 이 세상에 용의자의 지문과 우연히 지문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사건 현장에 접근 가능한 공간적, 시간적 제약까지 모두 일치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확률은 사실상 0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내려간다. 이것도 손가락 1개를 비교했을 때 이야기이고 손가락 2개를 비교하면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64조분의 1로 내려간다. 다만 현실에서 실제로 지문이 같았던 사건도 존재했으므로 이것도 확신은 금물. 반대로 공간과 시각의 제약을 무시하고 억울한 사람을 잡아간 경우도 있다. 물론 이것도 정확히는 지문 자체의 오류가 아니라 인간과 컴퓨터가 범죄자를 대조되던 과정 중에 오류기는 하다.#

한편, 부존재의 증명은 형사소송에서의 입증책임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범죄의 성립을 구성하는 주요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사실이 부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때에, 그 증명이 다소 곤란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죄에서 허위사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때 허위사실의 종류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① 첫째는 'A라는 사실이 존재함에도 부존재한다는 허위사실'을 피고인이 적시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때는 그 사실의 존재를 증명하면 되는 것이므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② 둘째는 'A라는 사실이 부존재함에도 존재한다는 허위사실'을 피고인이 적시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로서, '그 A가 특정한 기간과 장소 등에 구체화된 사실'인 경우이다. 이러한 증명 역시 여전히 가능한데, (물론 위 ①의 경우보다는 어려울지라도) 그 특정한 기간과 장소 등에 A가 부존재하다는 점을 하나씩 밝혀냄으로써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세 번째로 'A라는 사실이 부존재함에도 존재한다는 허위사실'을 피고인이 적시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로서, '그 A가 특정한 기간과 장소 등에 구체화되지 않은 사실'인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경우가 바로 악마의 증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A가 부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할 길이 요원하다.
이에 대해 판례는 "특정되지 아니한 기간과 공간에서의 구체화되지 아니한 사실의 부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사회통념상 불가능한 반면 그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증명하는 것이 보다 용이하므로 이러한 사정은 검사가 그 입증책임을 다하였는지를 판단함에 있어 고려되어야 하고, 따라서 의혹을 받을 일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의혹을 받을 사실이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그러한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할 부담을 지며 검사는 제시된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허위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때 제시하여야 할 소명자료는 단순히 소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어도 허위임을 검사가 입증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구체성은 갖추어야 하며, 이러한 소명자료의 제시가 없거나 제시된 소명자료의 신빙성이 탄핵된 때에는 허위사실공표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대법원 2008. 11. 13. 선고 2006도7915 판결)라고 하여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

과학에서 부존재를 증명할 때는 표준 편차(시그마)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중력파 검출의 경우 5.1 시그마, 신뢰 수준 99.99994% 의 결과로 나타났는데 이 정도 결과라면 '다른 변수에 의해 우연히 측정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측정 결과가 예측한 값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3. 수학의 경우

반면, 자연 과학과 달리 형식 과학인 수학은 철저히 공리에 근거한 연역 논증으로만 굴러가는 학문이므로 신뢰 수준 99.99994% '따위'의 결과는 논리적으로 참이라 인정받지 못한다.[6] 물론 4색 정리처럼 유한한 경우의 수를 모조리 건드려 증명하는 시행착오법을 동원할 수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경우의 수가 유한히만 존재한다는 것은 직접 논리적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역사에 손꼽히는 온갖 수많은 난제들이 바로 '부재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적 삽질'을 통해 증명되거나 반증되거나 증명 불능성 증명[7]을 거쳤고 이를 해내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의 수학자들은 머리를 굴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주 쓰이는 수학의 필살기(?) 중 하나가 바로 "임의의 x에 대하여 p(x)인데, 이는 만약 어떤 x가 p(x)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이러쿵저러쿵)한 이유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귀류법이다. 악마의 증명이라는 거창한 표현씩이나 동원될 정도로 反형식, 非연역적인 귀납 논증에서까지 '통계적 반례의 부재'를 감히 주장했다간 반례가 발견될 시 두들겨 맞을 수 있으므로 공리계하에서의 무모순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지를 않는 현실 세계를 다루는 논의에서는 블랙 스완의 존재 가능성을 항시 염두에 두고 귀류법 논증에 있어 주의를 기해야 한다.

가장 좋은 예로 '모든 점에서 연속인 함수는 미분가능한 구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거의 정리로 굳어지던 명제가, '모든 점에서 연속이지만, 어디에서도 미분 불가능한 함수'라는 괴물을 만나서 침몰당했고, 다른 예로 콜라츠 추측의 경우 컴퓨터를 이용해 [math(2^{68})]까지 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테렌스 타오가 '거의 모든 자연수에 대하여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를 증명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추측의 완전한 증명 또는 반례는 나오지 않고 있고, 오히려 증명 불능 & 반증 불능 명제일지도 모른다는 비관론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4. 관련 문서



[1] 무죄 추정의 원칙과 비슷하다.[2] 사실 알리바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부재의 증명이라기보다는 범행 가능성에 대한 반박이다. 불가능은 증명할 수 있기 때문.[3] 종교인들의 착각과 달리 종교에 긍정적이던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거대한 스케일을 보며 신에 대한 경외감을 느낀다기보단 무상함 혹은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고 한다. 태양계가 우주의 상당 부분이라는 관념에서 머물러 있다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은하가 별빛처럼 수놓인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사진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우리가 속한 우리 은하의 경우 약 10만 년간 빛의 속도로 직진해야 가로지를 수 있는 크기이며, 이는 은하 중에서도 크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건 그냥 망원경의 한 컷일 뿐이다(...). 이런데 우주에서 유일하거나 선택받은 생물이 인간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건 어쩌면 오만일지도 모른다.[4] 양심상의 이유로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소집에 따른 입영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피고인은 자신의 예비군훈련거부와 병력동원훈련소집에 따른 입영거부가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서는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에 따른 것이며 그 양심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고, 검사는 제시된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이때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소집에 따른 입영을 거부하는 자가 제시하여야 할 소명자료는 적어도 검사가 그에 기초하여 정당한 사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구체성을 갖추어야 한다(대법원 2021. 2. 25. 선고 2019도18442 판결)[5] 204cm 이상.[6] 물론 간혹 수학 명제에서도 '거의 모든(almost everywhere, almost all)'이라는 막연함을 함의하는 듯한 용어가 보이곤 한다. 이는 수학의 세부 분야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지만, 대체로는 '이 성질을 갖지 않는 x의 개수는 극히 적다'는 뜻이다. 실해석학측도론과 그를 응용하는 분야인 확률론에서의 '거의 모든'은 그런 의미로 정의되며, 위상 수학과 정수론 등의 다른 분야에서도 '거의 모든'은 각 분야의 사고방식에 맞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막연한 직관과 크지도 않은 샘플을 대상으로 한 통계 따위 야바위(?)에 의존하지 않는 논리적 증명을 거쳐야 한다는게 문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거의 모든 정수는 합성수이다'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해석적 정수론소수 정리에 의해 n∈ℕ 이하의 소수의 개수는 n/ln(n)과 점근적으로 같다. 이는 달리 말하면 n이 커질수록 소수의 비율은 ln(n)/n만큼이라는 것이고, 이는 n이 양의 무한대로 발산할수록 0으로 수렴한다. 그러니, 거의 모든이라는 말의 의미가 규정되어 있는 한, '거의 모든 정수는 합성수'라는 주장은 참이다.[7] 증명 불능과 반증 불능성이라도 증명되면 차라리 다행이다. 증명 불능 및 반증 불능하다는 사실마저 증명 불능할 수도 있다.증명 불능성 증명 불능성 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