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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3:29:08

베니토 무솔리니/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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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

1. 개요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무솔리니에 대해 내린 평가. 이는 그가 사망한 후에 현실이 되었다.[1]
이탈리아의 인물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2. 평가

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서방국가에서도 평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의외의 사실도 있으나, 히틀러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일각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는 걸 보면 크게 의미를 둘 평은 아니다.[2]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면서도 막상 국내 정치에서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 후발 주자들에 비해선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히틀러야 말할 것도 없고, 헝가리의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의 호리아 시마이온 안토네스쿠, 크로아티아의 안테 파벨리치 등은 피비린내나는 학살과 함께 홀로코스트에 적극 동참했다. 무솔리니의 지원을 통해 정권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자국민 학살을 저지르며 살벌한 국내 탄압을 저질렀다. 반면 무솔리니는 막상 집권 과정과 집권 이후에도 마테오티 살인 사건과 같은 간판 정치인, 핵심 정적들을 살해하고 정치깡패 검은 셔츠단을 동원해 수시로 탄압한 걸 빼곤 자국민 상대로 대규모 폭력적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3] 무솔리니는 심지어 이데올로기, 대중 기반 차원에선 본인도 인정한 가장 위험한 숙적인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옥에 넣기만 했지 죽이지는 않았다. 내전 당시 진공하면서, 그리고 승전 후 샅샅히 공산당원, 사회당원, 아나키스트들을 잡아 족쳤던 프랑코와는 대조적으로 반대 정파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대놓고 반체제 정치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대충 그대로 두는게 일반적이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자국민 대상 대규모 폭력적 통치가 시작된 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 자국이 본격적으로 전장이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43년 강화 이후 나치스가 진주해오며 전국이 파시스트 vs 반파시스트 세력으로 똑 쪼개진 이탈리아 내전 시점에서였다.

한편 외부적으로 눈을 돌리면 무솔리니는 리비아, 에티오피아에서의 대규모 인종청소와 각종 범죄의 최종 책임자이며,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의 주모자였다. 다만 이 역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라는 전쟁범죄에서 한 술 더 뜨는 것이 있어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묻힌 감도 있다. 다만 히틀러처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특정 인종을 집단말살을 한다던지 하는 것은 확실히 적었고, 본인도 반유대주의가 바보같다며 거부하고 리비아 식민지의 정통성을 가지려고 현지 이슬람교도들에게 칼을 선물받는 퍼포먼스도 보였다.[4]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가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보다 온건했던 것은 그 사람들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더 멍청했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고급 문화 영역에 체계 있게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위에서 보듯 점령 지역에서 독일 못지 않은 학살과 탄압을 저지른 것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무솔리니 통치기 마피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가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진주하면서 마피아가 다시 부활하였다. 당시 마피아는 단순 범죄조직이 아닌 군소 군벌급 세력을 갖고 있었고 중앙집권국가를 원하던 무솔리니가 이를 탄압하자 마피아들은 연합군에게 협조하여 상륙지점이나 군기지 위치 등을 알려주는 정보원 역할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저항했다. 당연하지만 마피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무솔리니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윈스턴 처칠은 한때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에 대해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에 맞지도 않는 민주주의 놀이를 하느라 나라 망쳤었는데,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인들에게 어울리는 체제로 개선을 해줬다.'고 돌려까기도 했다. 물론 이건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와 그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국민을 쌍으로 비꼬는 것이고, 처칠과 아타튀르크 등은 원래부터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실체를 파악해 전간기부터 부정적인 언급을 몇차례 하였다.

경제면에서 무솔리니는 미국주의라 부르는 대량 생산체제, 소위 포디즘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경계하였다. 특히 미국의 대량 생산체제를 벤치마킹한 피아트와 마찰을 빚었다. 피아트가 미국식으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공장을 지으려 하자, '노동자들이 기계 옆에서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는 것은 안 될 일이다.'며 안락한 구내식당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결국 피아트를 막진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방의 소기업에게 일감을 나눠주고, 기술 장인들을 대우하는 등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려 하였다. 이렇듯 노동자 대우에 대해서는 생각 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었는데,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정책들은 당시 이탈리아 경제를 허약하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장인들이 한땀 한땀 기술 좋은 레이싱용 차를 만들던 알파 로메오가 비효율성을 견디지 못하고 망해서 무솔리니가 국영화했으나, 전쟁으로 급박한 와중에 가정에서 망치로 두들겨 만든 부품을 도시의 공장으로 가져와 조립하는 식의 생산 방식 때문에 전투기 생산이 매우 지체되었다. 나중에 생산 체제를 개편해서 나아졌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탈리아는 항복했다. 다만 무솔리니의 이런 정책이 가족기업, 10인 이하 영세기업들 간의 네트워크가 중심이 된 이탈리아의 경제구조를 형성하는 데는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소위 장인들이 한땀 한땀 만드는 고급제품(명품) 시장에선 이탈리아가 절대 강자라는 점은 잘 알려져있고, 실제로 1980년대까지는 이러한 경제구조가 이탈리아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어서 한때 이탈리아가 미국-일본-서독-프랑스에 뒤이은 세계 5위 경제대국에 오르는 위엄을 발휘한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이탈리아의 중소기업들이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공세속에서 자금력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못하며 이러한 경제구조는 현대 이탈리아 경기침체에 악영향을 주고있는 중이다.

국내 통치 측면에선 조금만 수틀리면 피를 보는 다른 동업자, 이웃 동맹들에 비해 덜 폭력적이고, 최악의 정적이라고 해도 죽이지는 않았다. 파시즘이 사회 일상에 깊게 침투하며 문화, 예술, 지식인 사회를 틀어막았던 나치 독일, 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달리 이탈리아에선 정권 쟁취 시기나 월드컵 같은 이벤트 몇몇 빼곤 '비정치적 일상'이 상당히 유지되어서 무솔리니의 자국 내 기억은 크게 금기시 되지 않는 편이다. 히틀러나 도조의 경우 자국 내에서도 일부 극우들을 제외하면 평판이 매우 안 좋은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베니토 무솔리니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치"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고 오른손을 곧게 치켜드는 로마식 경례를 행할 경우 처벌대상이 될 수도 있는 독일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현재도 양지에서 버젓히 활동하는 파시스트 정당이 여럿 존재하고 이들 당 행사에서는 파시스트식으로 공공연히 경례한다. 국가 파시스트당의 법적 후계인 FdI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중견급 원내정당이며 조르자 멜로니는 후술하듯 총리까지 되었다. 정치적 혈통으로 왕따당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어서 우파 선거 연합에 공공연히 참가한다.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나치당의 직접적 후신이 아님에도 독일을 포함한 EU 내에서 정치적 왕따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단 걸 알 수 있다. 전후에 나치 전범들의 자식들이 대체로 성을 바꾸거나 남아메리카로 이민해 은둔 생활했던 반면, 무솔리니의 자식들은 아버지 사후에도 그다지 곤란을 겪지 않아서 장남은 예술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막내 아들 로마노는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쳇 베이커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협연하고 1995년에 내한 공연도 했다. 내한 당시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한국 기자들에 질문에 "멋있었던 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2010년대 중반부터 극우적인 여론이 커진 상태로, 무솔리니에 대해 19.8%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1] 다만 이 평가가 논리적인 분석에 의한 예측인지 그냥 감정적으로 한 말인데 우연히 들어맞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2] 실제 2차대전이 개전되기 직전인 1937년, 미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존경하는 현대인물 2위에 랭크되었다. 1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위는 아돌프 히틀러였다.[3] 단,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마치 1978년 호르헤 비델라를 연상시키는 병크를 저질렀다.[4] 다만 궁극적으로 파시즘이 반제국주의 타령해놓고 제국주의 일직선으로 간 모순점과, 그 이론적 부실함 때문에 무솔리니의 이런 태도는 대게 일관적이지 못하였으며, 에티오피아를 지독하게 탄압한 것도 당연히 그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순수혈통 민족주의와 시민내셔널리즘 등은 파시스트 개인들마다 의견이 다른 문제이고, 제국주의 국가 영국과 러시아를 침략해 '해방(정복)'하자면서 조선 독립에는 반대했지만 정작 조선인들을 일본인과 완전히 똑같이 대우하자던 기타 잇키도 좋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