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fff> 박춘석 朴椿石 | Park Chun Seok | |
<colbgcolor=#C60C30> 본명 | 박의병 (朴義秉) |
출생 | 1930년 5월 8일 |
경기도 경성부 의주통 1정목[1] | |
사망 | 2010년 3월 14일 (향년 79세)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 |
학력 | 서울봉래초등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 / 중퇴) 신흥대학 (영어영문학 / 학사) |
데뷔 | 1954년 '황혼의 엘레지' |
활동기간 | 1954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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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이다.2. 생애
1930년에 경성 의주로(서소문)에서 조선고무공장 사장 박영근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 풍금을 능숙하게 다루며 음악에 재미를 붙여왔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과 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고교 졸업 직후 1949년에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1년만에 중퇴하고 신흥대학(現 경희대학교) 영문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그는 1954년에 '백호'라는 필명으로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처음으로 작곡하며 KBS 경음악단장도 맡았고,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되어 19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이 히트하면서 주목받아 스타가 되기 시작했다. 1957년 영화 <진리의 밤>을 시초로 영화음악 작곡에도 손을 뻗었다.
1964년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후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면서 작풍을 트로트로 급선회했고 그동안 그는 이미자와 함께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를 비롯해,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무려 500여 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1967년 3월,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째 발표'라는 이색 타이틀 공연을 가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춘석 창작가요 2000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열었다. 이때부터 '박춘석 사단'으로 불리는 패티김,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와 히트곡 행진을 이어갔다.
거기에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마포종점'(은방울자매), '아리랑 목동'(박단마),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가시나무새'(패티김)까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심지어 영화/연극음악까지 큰 업적을 남겼으며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94년까지 쉴 새 없이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해왔고, 1986년 KBS 일일연속극 <여심> 등 드라마 주제곡들도 맡았다.
그 외에 19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의 의뢰를 받아 명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1981년 길옥윤, 송재리와 함께 '태양음향'을 세워 1983년에 회장으로 재직했고, 1988년에는 독자 음반제작사 '거성레코드'를 세웠다. 또한 1987년부터 3년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지냈다.
1982년에는 길옥윤, 엄기돈, 정서봉과 함께 문화방송 시보음을 작곡하였으며 이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현행 32비트 신디사이저 음으로 편곡되어 지금에 이른다.
그는 '음악과 결혼했다'라고 믿길 정도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40년간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700여 곡을 작곡했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09년에 찍힌 그의 마지막 모습 |
1994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2010년 3월 14일 오전 6시에 타계했고, 장례는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거행되어 시신은 성남 모란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가족들 중 동생인 박금석도 작곡가로 활동했는데, 2010년 형이 숨을 거두면서 저작권까지 승계했다.
3. 동성애 스캔들
1965년 그가 키운 가수 금호동[2]이 박춘석과 자신이 동성 연인이었다고 폭로했다.1965년 1월 금호동은 공전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도중 돌연 은퇴를 발표했는데, 처음에는 '깡패와 팬들의 성화로 가요계를 은퇴한다'고 설명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가서 은둔했다.
그러나 서대문경찰서가 현장검증을 위해 금호동을 부르자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3년 전부터 박춘석과 동성연애를 했다. 그 관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가요계를 은퇴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당시 금호동의 얼굴에는 손톱자국이 나 있었는데 이 손톱자국을 깡패에게 맞아 생긴 것이라고 둘러댔다가 이후 박춘석이 저지른 것이라고 정정했다.
박춘석은 이 소문에 대해서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금호동의 은퇴 선언 이유는 ‘동양방송 개국 때 10대 가수로 뽑히지 못해 홧김에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금호동의 얼굴 상처는 1964년 12월 28일 금호동이 박춘석의 자택으로 찾아와 그만두겠다고 말해 화가 나 때리던 도중에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금호동은 한국연예협회에 의해 제명당했고 박춘석은 근신처분을 받았다.
21세기 이후 관점으로 치면 금호동이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라고 주장한 셈이나 당시 둘은 동성연인으로 보도되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알고 보니 추잡한 남자애인 때문'이라고 제목을 잡았을 정도... 물론 박춘석은 이를 부정했고 당시 사회상 탓에 수사나 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당시 경찰은 둘의 일은 경찰이 관계할 일이 아니라며 금호동을 돌려보냈다.
당시 연예협회가 조사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보도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아니었는지는 불명이다. 금호동은 당시 이 사실을 밝히며 기자에게 절대 비밀을 말하지 말아달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는데,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굳이 비밀을 보장해달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기는 하다.
사건 이후 금호동은 1년여 간 휴식을 가진 후 제명이 풀리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하다가 67년에는 다시 앨범을 내는 등 재기하려 노력했으나 그후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1972년 가수협회회장 선거에 낙선하자 가수생활을 그만뒀다. 그 후 유부녀와의 간통사건에 휘말려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결혼해 아들을 둔 것을 보면 금호동은 동성애자는 아니었고 이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춘석은 가수 백일희를 무척 사모하여 백일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실망하여 독신을 고집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가 동성애자였는지는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