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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3:00:31

정훈희

정훈희
Jung Hoon Hee
파일:가수정훈희.jpg
<colbgcolor=#ece6cc><colcolor=#000> 출생 1951년 5월 11일 ([age(1951-05-11)]세)
경상남도 부산시 아미동
(現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거주지 경기도 고양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가족 배우자 김태화[1], 아들 김유진, 김진성
학력 아미초등학교 (졸업)
부산여자중학교 (졸업)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2]
데뷔 1967년 노래 '안개'
장르 발라드
소속사 테이크 노트

1. 개요2. 생애3. 수상4. 대표곡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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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발라드 가수.

2. 생애

정훈희는 1951년 5월 11일 경상남도 부산시 아미동(現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서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정근수와 밴드 마스터였던 작은 아버지, 기타리스트인 큰 오빠 정희택 등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수 김태화의 부인이고 가수 J.ae의 고모이다.

당대 최고 작곡가 이봉조 와의 인연으로 곡 <안개>를 받아 1967년 17세의 나이로 1집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입문하였다. 고교 1학년이었던 67년 당시 방학을 맞은 정훈희는 서울 그랜드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이트 클럽 밴드 마스터였던 삼촌을 따라와 연습삼아서 몇 곡을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이봉조가 들어왔다. 나이트 클럽 옆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그는 정훈희의 목소리를 듣고 '필이 꽂혀' 단숨에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다. "쪼맨한(조그마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 하네." 당시 이봉조는 1967년에 개봉하는 동명의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하기 위해 '안개'라는 곡을 만든 후 자신의 색소폰 연주로 취입한 상태였는데 그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봉조는 정훈희에게 연주곡이 담긴 레코드 판을 건네며 멜로디를 외워두라고 말한 후, 며칠 뒤에 영화 OST 녹음실로 불러 가사를 주고 한두 번 연습 후 바로 녹음하였다. 그렇게 나온 '안개'가 수록된 정훈희의 데뷔앨범은 40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정훈희에게 각종 신문사 및 방송국의 1967년, 1968년 신인 가수상을 안겨 주었다.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훈희는 이봉조와 함께 1970년과 1972년 두 차례 야마하음악진흥회가 주최하는 도쿄국제가요제에 참가하였다.[3] 정훈희-이봉조는 히트곡인 <안개>(Foggy; 霧の街)를 가지고 38개국 44개 팀이 경연을 펼친 제1회 대회에 참가하였며, 한국어 가사로 불러 베스트 10에 선정되었다.[4] 정훈희의 '안개'는 한국어 가사로 불러 국제 경연대회에 입선한 최초의 국내 가요가 되었다. 정훈희-이봉조는 1972년 제3회 대회에는 <좋아서 만났지요>(One I love; 孤独は重く)를 가지고 참가하여, 입선과 함께 우수가창상 및 작곡가 상을 수상하였다.[5]
1970년 대한뉴스,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 정훈희 양의 공연
1972년 봄에 개최된 아테네국제가요제에는 곡 〈너〉를 가지고 참가하여 유일한 아시아 수상자가 되었다. 1975년 칠레 가요제에서는 곡 〈무인도〉로서 3위 상과 최고 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Isleta Desierta, Festival de Viña del Mar 1975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었다. 곧 훈방되었지만, 방송 출연을 정지당한다.#

정훈희의 주장에 따르면 그냥 담배를 피웠던 것인데, 명백한 증거도 없이 대마초 혐의가 씌워졌다고 한다.# 지금처럼 모발 검사 같은 조사를 했던 시절이 아니라서 의혹만으로 혐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시대 분위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마초는 대한민국에서 금기가 아니었으며, 시골에서는 약으로 쓰이기도 했었다. 당연히 상당수의 가수들이 담배처럼 대마초를 피워 왔으나, 1973년에 갑자기 대대적인 단속이 벌어졌던 것이고, 그런 분위기로 인해 애연가인 정훈희까지 대마를 피운다는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

1979년 제20회 칠레가요제에 다시 출전한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이종택이 작사한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안한 <Un Día Hermoso Como Hoy>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를 불러서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한다.
Un Día Hermoso Como Hoy, Festival de Viña del Mar 1979
이는 한국에서도 화제가 된다. 당국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고, 정훈희의 칠레가요제 실황 필름은 전국에 방송되었다. 자신은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유일하게 훈방으로 나왔지만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으로 인해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81년 규제가 풀리고, 그녀는 재기 무대가 순탄하지 못했으나 이후 88년 발표된 곡 꽃밭에서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가수 김태화와 결혼한다. 임신한 상태로 앨범 《우리는 하나》를 남편과 녹음하기도 했다. 그 것을 빼고는 정규음반은 내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노래해도 사소한 것으로 버림받는다는 좌절감과 섭섭함” 때문이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다.

약 30여 년만인 2008년,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40th Anniversary Celebrations》을 발매하였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임랑해수욕장에서 남편과 함께 라이브카페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현재 주말만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3. 수상

4. 대표곡

5. 여담

지금은 금연한지 꽤 되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흡연해 온 애연가였다. 시어머니를 20년간 모시고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시어머니 또한 애연가이셔서 며느리가 피울 담배를 사다 주신 적도 있었다고. #

1987년 당시, 지금의 남편인 가수 김태화와 3년간 혼전 동거를 했다.#

훗날, 정식 부부가 된 후 자니윤 쇼에서 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방송국으로 항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혼전동거를 방송에서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인데, 정훈희가 그만큼 시대를 앞선 솔직한 스타일이었다는 얘기다.
파일:김태화정훈희.jpg
남편 김태화와 정훈희
김태화는 대한민국의 1세대 로커 중 한 사람이다. 대표곡으로는 안녕이 있다. 한때 위키피디아에 서울시장 김현옥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고, 지금도 연예인 소식을 다루는 블로그엔 사실인양 기록되어 있으나 본인이 방송에 나와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 김태화의 아버지, 즉 정훈희의 시아버지는 9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방송이 나간 2020년 시점에선 사망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김현옥 전 서울시장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훈희가 같은 가수로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수는 미국의 다이애나 로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두 사람이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더이상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훈희에게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라는 칭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나서 “다이애나 로스의 데뷔 연도가 1970년인데 그렇다면 그녀를 '미국의 정훈희'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썰렁한 아부를 했다. 정훈희는 웃으면서 "다이애나는 솔로로 나오기전 1960년대 초반부터 슈프림스라는 그룹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치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수미의 남편 정창규와 먼 친척이다. 김수미가 정훈희를 만난 자리에 정창규도 나와 같이 영화를 본 게 김수미 부부의 첫만남이었다고.

[1] 1950년생으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2] 교회 집사.[3] 1970년 제1회 대회는 '도쿄국제가요음악제(東京国際歌謡音楽祭)'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고, 제2회부터 '세계가요제(世界歌謡祭)'로 대회 명칭이 변경되었다.[4] 第1回東京国際歌謡音楽祭[5] 第3回世界歌謡祭 훗날 스웨덴 팝 그룹 ABBA를 결성하는 벤뉘 안데르손(Benny Andersson)과 비에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도 제3회 대회에 참여하였으나 빈 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