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6-08-09 02:06:45

박수량

<colbgcolor=#b82642><colcolor=#fff>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
朴守良
파일:장성_박수량_백비.jpg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박수량의 백비(白碑).
시대 조선 중기 (중종 ~ 명종)
출생 1491년 (성종 22년) 전라남도 장성군
사망 1554년 (명종 9년) 재직 중 별세
자 / 호 군수(君遂) / 아곡(莪谷)
시호 정혜(貞惠)[1]
본관 태인(泰仁)[2]
가족 고조부 박연생(朴衍生)[3]
증조부 박문아(朴文雅)
조부 박현손(朴賢孫)
부 박종원(朴宗元)
처부 유옥로(庾玉輅)
자녀 박사우(朴思愚) · 박평(朴平)
최종 관직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주요 경력 사헌부 장령 (1530)
호조참판 (1539)
전라도 관찰사 (1546)
청백리 녹선 (1546)
형조·공조·호조 판서 역임
한성판윤 (1552)

1. 개요2. 생애3. 주요 활동 및 일화
3.1. 청백리의 표상3.2. 백비(白碑)
4. 가족 관계5. 사후 추증6. 유적 및 현창7. 여담8.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이다.

30년 넘게 관직 생활을 하며 판서(장관)와 참찬(부총리급)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생전에 집 한 채 없을 정도로 청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후 그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명종이 하사한 백비(白碑,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비석)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밀양 박씨 돈재공파의 4세조(파시조의 현손자)이며, 가문 내에서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모셔져 부조묘(不祧廟, 영구히 신주를 모시는 사당)가 설치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알려진 박상의(朴尙義)가 그의 종손(從孫)[4]이다.

2. 생애

1491년(성종 22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태인 박씨의 일원으로, 계유정난 이후 전라도 장성 소곡(小谷, 現 황룡면 아곡리 하남)에 은거한 파시조 박연생(朴衍生)의 현손자이다. 아버지 박종원(朴宗元)은 학생(學生) 신분으로 관직이 없었으나,[5] 그 뜻을 이어 박수량은 과거에 뜻을 두었다.

1513년(중종 8년) 진사시에 2등 25위로 합격하였고,[6] 이듬해인 1514년(중종 9년)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 2위(전체 4등)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7] 전라도 시골 출신의 무명 가문에서 나온 인물이 문과 전체 4등으로 급제한 것으로, 이로써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되었다.

관직 초기에는 주로 성균관과 언관직(言官職)을 거쳤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장령 등을 역임하며 권신들의 비리를 탄핵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실무 능력도 인정받아 1531년에는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변방의 군사 및 행정 문제를 점검했고, 1537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선위사(宣慰使)로 활동했다. 지방관으로서의 이력도 풍부하여 고부 군수, 보성 군수, 나주 목사 등을 지내며 민생을 돌봤다.

1539년(중종 34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기도 했다. 당시 중종은 "지금 사람이 부족하니 사직은 안 되고, 오가며 부모를 뵙도록 하라"며 그를 신임했다.[8]

이후 지방관과 중앙직을 번갈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의 관직 행로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중종~명종 연간에 언제나 '청렴함'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정평을 얻어, 훈구파·사림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랜 기간 자리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1546년(명종 1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고, 이해 조정으로부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9] 청백리는 의정부·이조·예조에서 합의 추천하고 왕이 최종 낙점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현직 관료가 녹선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영예였다.

청백리 녹선 이후 중앙으로 복귀하여 형조, 공조, 호조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했다. 1552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1554년(명종 9년) 향년 64세로 재직 중 별세했다.

3. 주요 활동 및 일화

3.1. 청백리의 표상

30년 넘게 관직에 있었고 판서와 참찬 등 고위직을 지냈음에도, 서울에 본인 소유의 집 한 채가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실록의 졸기에는 "위에 임해서는 정밀하고 상세했으나, 집에는 저축한 곡식이 없었다(位至六卿, 其卒也, 家無甔石之儲)"라고 기록되어 있다.[10]

하루는 자녀들이 서울에 집을 짓으려 하자, 이를 크게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우연히 성은을 입어 이 자리에 이르렀는데, 너희가 어찌 감히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

3.2. 백비(白碑)

그가 사망했을 때, 집안에 모아둔 재물이 전혀 없어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고향으로 내려갈 여력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은 "청근(淸謹)한 사람이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며 특별히 부의를 내리고, 관원을 보내 시신을 호송하게 했으며 장례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명했다.[11]

또한 명종은 그의 묘소에 세울 비석을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고 한다.
"박수량의 청렴함은 비석에 글을 새겨 알리는 것조차 사족(蛇足)이다. (오히려 글을 새기면 그 맑음을 더럽힐 수 있다.) 비석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고 그대로 세우라."

이에 따라 그의 묘소 앞에는 글자가 없는 비석, 즉 백비(白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백비는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위치해 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비는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이다. 조선 시대에는 관료의 공적을 비석에 새기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오히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비석이 최고의 청렴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한 것이다. 이 백비는 오늘날까지도 조선 청백리 문화의 상징적인 유물로 꼽힌다.

4. 가족 관계

박수량 본인은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로 칭송받았으나, 극단적인 청빈함은 가족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특히 후손들에게서 나타나는 잡과(雜科) 진출 경향은, 정통 문과 관료의 길에서 물러나 기술 전문직으로 생계를 모색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5. 사후 추증

사후 250여 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시호(諡號)를 받았다.

6. 유적 및 현창

7. 여담

8. 관련 문서



[1] 1805년(순조 5년)에 추증되었다. '청백하여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의 정(貞)과 '백성을 사랑하여 은혜를 베풀었다'는 의미의 혜(惠)를 합쳐 결정되었다. 승정원일기 1889책, 순조 5년 1월 7일[2] 당대의 공식 기록인 『국조문과방목』에는 본관이 태인(泰仁)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후대에 밀양 박씨 돈재공파(遯齋公派)로 편입되어 현재는 해당 문중의 파조로 모셔지고 있다.[3] 밀양 박씨 돈재공파 파시조.[4] 형 박수온(朴守溫)의 손자[5] 후에 아들 박수량이 귀해짐으로써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6]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수량 진사시 방목 기록[7]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수량 문과 방목 기록[8] 중종실록 89권, 중종 34년 1월 22일 (호조 참판 박수량이 귀양을 청하니 오가면서 뵙도록 전교하다)[9]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4월 6일 (의정부·이조·예조가 청한 청백리와 효자에 대해 가자를 명하다)[10]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1월 19일 (지중추부사 박수량의 졸기)[11]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1월 28일 (박수량의 집에 상사를 치르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전교하다)[12]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9월 19일[13]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평 의과 방목 기록[14]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성남 음양과 방목 기록[15] 승정원일기 2488책, 철종 즉위년 7월 13일[16] 승정원일기 1596책, 정조 10년 2월 29일[17] 승정원일기 1889책, 순조 5년 1월 7일[18] 승정원일기 1907책, 순조 6년 2월 8일[19] 박상의 역시 수산사에 배향되어 있다.[20] 형 박수온(朴守溫)의 손자[21] 신동아 인터뷰 -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