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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10-10 11:07:00

박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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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박사우
朴思愚
시대 조선 중기 (명종 ~ 선조)
호 청절당(淸節堂)[1]
본관 태인(泰仁)
가족 관계 조부 박종원(朴宗元)
아버지 박수량(朴守良)
형제 박사로(朴思魯), 박평(朴平)
자녀 박성남(朴成男)
과거 급제 1546년(명종 1년) 진사시(進士試) 3등 58위
최종 관직 진안 현감(鎭安縣監)

1. 개요2. 생애 및 관직 이력
2.1. 선조실록2.2. 장성읍지
3. 가족 관계4.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태인(泰仁).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꼽히는 아곡(莪谷) 박수량의 아들로 태어나, 154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진안 현감으로 재직하던 1573년, 아버지의 청빈을 원망하며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훗날 그의 고향 향토 사료인 『장성읍지』에서는 그를 청렴하고 부지런한 관리로 묘사하고 있어, 실록의 탄핵 기록과 평가가 엇갈린다. 다만 이러한 차이만으로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2. 생애 및 관직 이력

아버지 박수량이 관직에 있던 1546년(명종 1년), 병오(丙午) 식년시 진사시(進士試)에 3등 58위로 합격하였다.[2]

이후 정식 문과에 급제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에 이르렀으며, 이후 진안 현감(鎭安縣監) 등 주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외직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관찬 사료인 《선조실록》과 후대의 향토 사료인 『장성읍지』를 비교하면 박사우에 대한 평가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2.1. 선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6년(1573년) 9월 19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진안 현감이었던 박사우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사헌부가 올린 탄핵 사유는 다음과 같다.
진안 현감 박사우(朴思愚)는 아비의 청빈(淸貧)을 원망하여 탐욕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사물(私物)을 많이 만들었으니, 파직시키소서.[3]

이 기록에서 사헌부는 청백리로 알려지고 사후 백비(白碑)를 하사받았다고 전하는 아버지 박수량과 달리, 박사우가 아버지의 청빈을 원망하며 사적인 재물을 모았다고 비판하였다. 선조는 이 파직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 기사에는 구체적인 재물 수취 방식이나 피해 규모, 파직 이후의 관직 이력은 적혀 있지 않다.

2.2. 장성읍지

반면, 그로부터 약 350여 년이 흐른 뒤인 1927년에 편찬된 고향의 지역 사료 『장성읍지(長城邑誌)』에서는 그의 행적과 성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朴思愚 號淸節堂 莪谷守良子 丙午進士 出宰鎭安 有治積 遭喪 廬墓三年 性廉勤無私 故名堂
박사우는 호가 청절당(淸節堂)이다. 아곡 박수량의 아들로 병오년 진사가 되었다. 진안 현감으로 나가 다스림에 업적이 있었다. 상을 당하자 여묘살이 3년을 하였고, 성품이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사로움이 없었으므로 당호(호)를 그렇게 지은 것이다.[4]

실록이 진안 현감 재직 중 탐욕을 이유로 한 파직을 기록한 데 비해, 읍지에서는 '다스림에 업적이 있었다(有治積)'고 평가한다. 또한 성품이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사로움이 없다(廉勤無私)'고 하며, 이를 '청절당(맑고 절개 있는 집)'이라는 호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향토 읍지의 인물 기록을 검토할 때에는 지역 가문이 제공한 자료나 후대 전승이 반영되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박사우 항목의 작성 자료와 편찬 경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태인 박씨 문중이 파직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작성한 기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3. 가족 관계

박사우의 가족 가운데에는 의과·음양과 등 잡과를 거쳐 기술관으로 활동한 인물들도 있다. 다만 아들 박성남의 음양과 급제는 박사우의 파직보다 앞선 1570년이므로, 가족의 잡과 진출을 1573년 파직의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4. 관련 문서


[1] 『장성읍지』에 기재된 호이다. 사용 시기와 명명 경위는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사우 진사시 방목 기록 당시 전력(前歷)은 별제(別提)로 기록되어 있다.[3]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9월 19일 병신 2번째기사[4] 장성읍지(長城邑誌) 권2 인물조.[5]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수량 문과 방목 기록[6]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평 의과 방목 기록[7]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박성남 음양과 방목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