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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4:37:22

박상관

박상관의 수상 및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1

서울 삼성 썬더스 등번호 15번
팀 창단 박상관
(1997~2002)
스테판 브래포드
(2002~2003)
대구 오리온스 등번호 33번
라이언 페리맨
(2001~2002)
박상관
(2002~2004)
피트 마이클
(2006~2007)
}}} ||
대한민국의 농구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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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11206 박상관.jpg|width=100%]]
<colbgcolor=#eee> 박상관
朴相寬
출생 1969년 11월 10일 ([age(1969-11-10)]세)
충청남도 천안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종교 불교
신체 200cm|체중 100kg[1]
직업 농구선수(센터, 파워 포워드/ 은퇴)
농구코치
학력 군자초등학교 (졸업)
동대문중학교 (졸업)
대경상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졸업)
실업 입단 1992년 삼성전자 농구단 입단
현역시절 등번호 15[2], 33[3]
소속 <colbgcolor=#eee,#191919> 선수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1997~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오리온스 (2002~2004)
감독 명지대학교 (2008~2014)
코치 명지대학교 (2004~2008)
분당경영고등학교 (2017~2019)
천안봉서초등학교 (2019~)
가족 관계 배우자 이수경, 아들 박준혁, 딸 박지수, 조카 선상혁

1. 개요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2.2. 실업 시절2.3. 프로 시절
3. 지도자 시절4. 여담
4.1. 서장훈과의 악연
4.1.1. 박상관의 입장
4.2. 가족관계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선수 시절 90년대 초반 간만에 등장한 2m의 장신센터였다. 박지수의 부친으로도 유명하다.

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동대문상고 고2 때 2m까지 자란 키 덕분에 전철에서 명지대 진성호 감독[4]의 눈에 띄어 뒤늦게 대경상고 농구부에 스카웃되었고, 농구 기본기 습득을 위해 1년 유급을 선택해 동기들보다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만 했다.[5] 당시 박상관의 부친이 명지재단 계열인 "명지건설(현 TEC건설)"에 재직 중이었던지라, 당시 장신 센터 유망주라면 응당 거쳤던 대학 간 스카웃 경쟁 없이 곧장 명지대로 진로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어이 박차장, 애가 농구한다며? 명지대로 보내.(-_-)

농구명문 경복고-고려대 출신 김일두의 발언에 따르면 스포츠에서는 B급으로 분류되는 명지대학교에 89학번으로 입학한 박상관은, 농구를 시작한지 1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습득이 빨라 기량이 빠르게 늘었고, 1학년 때부터 명지대의 주전센터를 차지했다. 타고난 하드웨어에다가 대학 졸업반 무렵에는 3점 슛을 성공시킬 정도로 빠른 기량 성장까지 더해지며 어느새 박상관은 당시 대학무대를 주름잡던 정재근(연세대), 이창수(경희대), 표필상(중앙대) 등 대학 Top 레벨 센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3학년 때는 만년 하위권에만 머물던 명지대를 MBC배 4위(패자 준결승 진출)와 춘계 연맹전 6강으로 이끄는 등 백마 군단의 전성기 1기[6]의 문을 열었다.[7] 기량이 만개한 박상관은 1991 셰필드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대표팀 센터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컨디션 난조로 대회 직전 엔트리에서 빠졌다.

졸업반이던 1992년에도 박상관과 명지대의 돌풍은 계속되었고, 명지대가 꾸준히 대학 6강권의 성적을 유지한 덕분에 박상관은 1992-93 농구대잔치에 처음 출전할 수 있었다. 비록 팀은 농구대잔치에서 14개 팀중 13위에 머물렀지만, 박상관은 명지대를 대표해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농구를 시작한지 4년만에 일약 대학 최고 센터의 반열에 오른 박상관은, 오성식을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대어가 적었던 89학번 중 그나마 주목받는 선수였고, 센터진의 노쇠화로 고민하던 지난 농구대잔치 준우승팀 삼성전자에 스카웃된다.

2.2. 실업 시절

삼성전자 입단 직후 박상관은 1회 대회로 열렸던 1993 상하이 동아시안 게임 대표팀[8]김유택, 한기범, 정경호 등 쟁쟁한 센터들과 함께 선발되며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대한민국은 결승에서 중국에 져 은메달을 딴다.)

삼성전자에서는 은퇴한 김윤호, 상무에 입대한 이창수의 공백을 메우며 곧바로 주전 센터를 차지, 1993-94 농구대잔치의 엄청났던 대학 돌풍 속에서도 서대성(195cm), 강을준(190cm,C) 등과 함께 노장 군단 삼성전자의 골밑을 지켜내며 삼성전자를 대회 4강까지 올려놓았다. 특히 전희철-박재헌이 있던 예선리그 4위 고려대와의 8강전에서, 박상관이 예상외로 골밑에서 대등한 싸움을 해주며[9] 2승 1패로 시리즈를 역전했던 장면이 중앙대의 기아자동차 격파와 함께 당시 8강전 최대 이변으로 꼽혔다.[10]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상무에서 제대한 이창수가 합류하면서, 당시 삼성전자 김인건 감독은 상대팀의 높이에 따라 이창수-박상관을 싱글 또는 더블포스트로 기용하였다. 특히 서장훈이 있는 연세대나 현주엽-전희철이 있는 고려대를 상대할때는 주로 더블포스트를 사용했는데, 이 공포의(?) 더블포스트, 특히 박상관은 1994-95 농구대잔치 8강 연세대전에서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국보급 센터 서장훈의 선수생명을 담보로 한국 농구역사상 가장 지저분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아래 "서장훈과의 악연 항목 참조") 경기가 더럽건 어쨋건 우승만 하면 다 용서된다는게 당시 삼성전자팀의 입장이었으나, 결승에서 만난 기아자동차허재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며 결국 또한번의 농대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94-95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노장듀오 김현준-김진이 은퇴하고, 김승기, 문경은이 모두 입대하면서, 삼성전자는 박상관-이창수를 제외한 팀의 주축 멤버를 모두 잃게 되었고,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4승 9패로 리그 11위에 그치는 대망신을 당하고 만다. 애초에 박상관, 이창수 트윈타워 자체가 김승기-김현준-문경은으로 이어지는 외곽슛군단을 지원하는 블루워커 역할만 해왔던 선수들이라 공격쪽에선 한계가 있었고, 백코트 멤버들이 지원사격이 부족했던 삼성전자는 골밑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연세대, 중앙대, 명지대 등 대학팀들은 물론 약체 산업은행에도 패하는 부진을 겪고 만다. 다음시즌엔 신인가드 김희선의 가세로 김희선-서동철-양경민-노기석의 괜찮은 백코트가 구성되면서 프로출범 전 마지막 농구대잔치를 대비했지만, 트윈타워의 한축이었던 이창수가 간염판정을 받고 갑작스럽게 이탈하며 박상관은 홀로 골밑을 지켜야했고, 삼성전자는 실업부 예선리그에서 4위에 그치며 3위팀까지 오르는 6강 플레이오프에 아깝게 탈락한다. 마지막 농구대잔치에서 박상관은 전희철, 김유택, 정재근 등 타 실업팀 센터들 을 상대로 어느정도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농구대잔치 직후 개막하는 KBL 원년시즌(1997)에서의 활약을 기대케 했다.

2.3. 프로 시절

KBL 원년시즌 수원 삼성 썬더스김희선-케빈 비어드-노기석-(강양택 or 박상관)-빈스 킹의 라인업을 주로 가동하였고, 박상관은 팀 선배인 단신 파워 포워드 강양택(190cm)과 번갈아가며 외인 센터 빈스 킹(196cm)의 파트너로 출전하며 평균 4.9득점-3.3리바-0.9스틸을 기록했다.[11] 하지만 원년시즌 수원 삼성의 두 외인은 당시 8팀 16명의 외인중에서도 가장 기량이 떨어졌고,[12] 왕년의 명문팀 수원 삼성은 원년시즌 꼴찌로 추락한다. 농구대잔치까지만 해도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수비 쪽에선 그나마 경쟁력 있던 박상관은, 키는 작지만 고무공 같은 탄력에 몸싸움 능력이 월등한 클리프 리드(190cm), 제이슨 윌리포드(194cm) 등 외인들에게 속절없이 골밑을 내주며, 프로농구 출범 후 달라진 분위기를 표현하는 "토종 센터 몰락" 같은 신문기사의 단골 사례로 등장하기 시작한다.[13]

KBL 두번째 시즌(97-98) 상무에서 제대한 문경은, 김승기에, 1순위 외국인 선수 존 스트릭랜드(200cm,C)까지 가세하며 우승후보까지 거론되던 수원 삼성은 그러나 새로 합류한 선수들간의 호흡이 맞지 않으며 9위로 추락했고, 팀내 유일한 토종센터였던 박상관은 단신 포워드 숀 이스트윅(189cm)[14]에 밀리며 출장시간이 반토막(19분 → 12분)나고 만다.

98-99 시즌 새로 부임한 김동광 감독은 외국인 선수로 LSU에서 샤킬 오닐과 함께 뛰었던 만능센터 버넬 싱글턴(200cm)과 3점슈터 이슈아 벤자민(190cm)을 뽑았고, 덕분에 박상관은 싱글턴의 골밑 파트너로서 간염에서 돌아온 동갑내기 빅맨 이창수와 번갈아가며 파워포워드로 출장하게 된다. 시즌 중반 센터 싱글턴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위기를 맞은 수원 삼성은, 오랜만에 추억의 이창수-박상관 트윈타워를 소환하였고, 이들 콤비는 삼성전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벤자민-문경은 쌍포를 보좌하는 블루워커 역할을 충실히 하며 외국인 선수 한명으로 뛴 8게임에서 4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의 위기를 막는다.[15][16] 이들 콤비의 활약에, 부상에서 회복한 루키 김택훈의 활약까지 더해지며, 수원 삼성은 98-99 시즌을 6위로 마감하며 KBL 출범이후 최초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고, 플옵 6강에서 정규리그 3위팀 인천 대우 제우스를 3승 1패로 업셋하고 4강에 오른다. 4강에서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악연의 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만난 수원 삼성은 부산 기아가 자랑하던 제이슨 윌리포드-클리프 리드-김유택의 골밑을 상대하기 위해 박상관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고, 박상관은 평균 23분을 뛰면서 아낌없는 파울과 거친 수비로 부산 기아 센터진을 상대했지만, 수원 삼성은 홈에서 열린 3, 4차전을 내리 내주며 1승 3패로 패퇴하고 만다.

99-00 시즌에는 재계약한 버넬 싱글턴이 시즌 내내 건강했던 탓(?)에 박상관의 출장시간은 다소 줄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비용 빅맨으로 존재감을 보여주었고, 새 외국인 슈터 G.J. 헌터(188cm,G)의 활약까지 더해지며[17] 수원 삼성은 대전 현대, 청주 SK에 이어 리그 3위에 오른다. 수원 삼성은 6강 플레이오프에서 지난 시즌 플옵 4강 탈락의 아픔을 주었던 부산 기아를 다시 만나 3승 1패로 복수극을 펼치며 4강에 오른다. 특히 수원에서 열린 2차전 1쿼터에 싱글턴이 상대팀 센터 토시로 저머니(203cm)와 싸우다 동반 퇴장당했는데, 싱글턴을 대신해 출장한 박상관은 파울 4개의 와중에도 경기 종료까지 수원삼성의 골밑을 지키며 12득점 9리바를 기록하는 대활약으로 홈경기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어진 플옵 4강에선 그야말로 대악연 서장훈의 청주 SK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언론들은 어이없게도 5년전의 추억을 끄집어내며 벤치멤버인 박상관을 플옵의 키플레이어로 꼽기도 했지만, 결국 졸업 후 더 업그레이드 된 서장훈과 조력자 재키 존스(201cm) 콤비에 골밑을 탈탈 털리며 3:0으로 광탈하고 만다.

00-01 시즌 연고지를 서울로 옮긴 서울 삼성 썬더스는 신입 외국인 아티머스 맥클래리(191cm,F)와 주희정의 대활약 속에 마침내 KBL 우승을 달성하게 되지만, 31살의 노장이 된 박상관은 신인왕 이규섭의 맹활약에 완전한 벤치멤버로 밀려났고, 동갑내기 이창수와 함께 세대교체 대상이 되어버린다. 2002년 FA가 된 박상관은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연봉 5500만원에 계약하지만, 여기서도 출장기회는 없었고 03-04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2004년부터 모교 명지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강을준 감독-박상관 코치 시절인 2000년대 중반, 명지대이원수(개명 후 이시준), 김봉수, 송창무, 윤여권 등의 멤버를 주축으로 농구부 창단 이래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90년대 초 반짝 전성기[18] 이후 대학무대에서 중하위권으로 떨어졌던 명지대는 2005년 종별선수권에서 명지대 농구부 창단 이후 38년만에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2006년 같은 대회서도 우승하며 대회 2연패를 달성했고, 2005, 2006 농구대잔치에서도 2년 연속 4강에 오르며 대학 강호의 반열에 복귀했다. 특히 강을준 감독과 박상관 코치 모두 센터 출신이라는 점을 제대로 살리면서, 고교졸업때만 해도 하드웨어말곤 별볼일 없었던 두 03학번 센터 김봉수, 송창무를 일약 대학 최고 수준의 센터로 키워냈던 지도력은 다른 대학팀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살 정도였다. 강을준 감독도 미안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

2008년 강을준 감독이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명지대 지휘봉을 잡게된 박상관은 변현수, 정민수, 박규섭, 박지훈 등 쏠쏠한 선수들을 연이어 키워내 KBL에 진출시켰고, 2011 농구대잔치에서는 슈퍼스타 김시래의 활약 속에 명지대 농구부 사상 최고 성적인 농구대잔치 준우승이란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시래, 박지훈이 졸업한 이후 대학팀간 스카웃 경쟁에서 밀린 명지대는 대학농구리그에서 조선대, 성균관대 등과 함께 대표적인 약팀으로 전락했고,[20] 2013년 대학농구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명지대는 박상관 감독을 경질하고, 연세대학교 감독과 국가대표팀 감독 출신인 김남기 감독을 임명하였다.

명지대 감독 시절 접전 상황에서의 작전 구사 능력에 대해선 의문이 있는 편이었으나, 무명 선수들이 주축이 된 명지대를 지도하면서 매년 변현수(구설수 퇴출), 정민수(KCC/은퇴), 김시래(LG), 박지훈(KCC), 김수찬(kt) 등 히트상품들을 계속해서 배출했다는 점에서 꽤 좋은 지도자로 인정받는 편이었고, 금방 새 직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2017년 의 모교인 분당경영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였다.

4. 여담

4.1. 서장훈과의 악연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한국 농구계에서 길이남을 최악의 흑역사로 회자될 일이 벌어진다. 연세대학교의 조별리그 최종전이자 라이벌전인 고려대학교의 경기에서 연세대학교의 양대 기둥이었던 이상민이 수비하다가 무릎을 다쳐 실려나가고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으로 판정되어 플레이오프에 출전이 불가능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가세해서 서장훈에게 그냥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다.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삼성의 센터 박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팔꿈치로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만다.

결국,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간 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하다 살아나고, 삼성은 서장훈을 해치운 덕에 결승에 올라간다. 그러나 코트를 깡패들 놀이터로 만들며 결승에 올라간 삼성은 트리오에게 번갈아 두들겨맞으면서 기아자동차에 떡실신 KO당하고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뭐 서장훈을 평생 괴롭히고 있는 목부상을 안긴 상관타를 날리긴 했지만 더블 포스트로서 서장훈에게 계속 주먹과 니킥 섞어가며 구타를 하다시피 수비한 팀 동료 이창수가 서장훈에게 가한 폭력성 수비의 강도가 더하긴 했다.

이후 먼 훗날 서장훈삼성으로 이적하자 삼성은 서장훈과 악연이 있던 박상관, 이창수를 방출했다.

4.1.1. 박상관의 입장

서장훈과는 일절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었다. 단지 팀 선배인 김현준의 은퇴 대회이니 만큼 딴 대회에서 부진할지언정 그 대회만큼은 반드시 우승을 해야만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그런 정신적 압박감 속에서 경기를 뛰었는데 하필이면 서장훈의 실력이 너무 넘사벽이었다.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는데 패하면 안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박상관이 총대를 메고 스포츠 경기에서 죽일듯이 사람을 패서 전신마비로 만들 뻔하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박상관은 수많은 농구팬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ufc, 복싱, 무예타이에서도 후두부를 치는건 반칙이고 경우에 따라 반칙패로 시합종료가 되는 수준 이런 장난같은 멘트가 있지만 살인미수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렇게 영혼까지 팔아가며 임했던 1994-95 농구대잔치 에서는 결승에는 올랐으나 허재라는 철옹성이 버티는 기아자동차에 맥없이 무너져서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 부질없게 되었다.

박상관, 더불어 같은 팀이었던 이창수까지 서장훈에게 린치를 가하는 바람에 선수생명을 위태롭게 한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서장훈 본인은 박지수와 이창수의 아들 이원석을 방송에서 만나 웃으며 대하면서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한 바 있다.# 특히 이원석을 만난 자리에서 "워낙 내가 크기도 컸고, 힘도 좋다 보니 창수 형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경계 대상 1호였다. 하지만 경기 때만 그랬고, 경기가 끝나고면 잊어버렸다. 아빠와는 감정이 없다. 나를 막으려고 엄청 나왔던 건 사실" 이라고 했고, 이창수는 이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실제로 당시 경기에서는 서장훈이 대학 선배였던 문경은하고도 욕설이 오갈 정도로 상식 밖으로 거칠었는데, 서장훈 입장에서도 (경기 끝나고 잊어버렸다고 한 것은 아무리봐도 그냥 쉴드 쳐준 것이겠지만)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던 선배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죽을 뻔 했는데도 저렇게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대인배 인증이다.

4.2. 가족관계

파일:박준혁 박지수 남매.jpg
왼쪽이 아들 박준혁, 오른쪽이 딸 박지수 선수다. 부인 이수경은 현대건설에서 뛰었던 배구선수 출신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 박준혁은 농구선수에서 배구선수로 전향했다. 명지고-명지대 출신으로 2017~18시즌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해서 2라운드 1순위로 현대캐피탈에 지명되었다. 센터 포지션으로 키가 205cm라고 한다.

박상관의 딸 박지수 역시 농구선수로 분당경영고 재학시절 국가대표에도 선발되었다. 2016년 WKBL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청주 KB 스타즈에 입단하였고, 데뷔 시즌부터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다가 2024년 튀르키예 슈퍼리그 갈라타사라이 SK 이적했다 .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지수는 WKBL에서 과거의 서장훈이 떠오를 정도로 파울을 빙자한 가해와 지나친 견제를 받고 있는데, 하필이면 아버지가 그 박상관인지라 인터넷 상에선 아버지가 쌓은 악업을 딸이 받고 있다는 소리도 나올 정도이다.

서장훈이 출연하던 KBS1 '우리들의 공교시' 19회에서 당시 분당경영고에 재학중이던 박지수와 서장훈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서장훈은 박지수를 만나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저기 누구야... 상관이 형 아들!"(...)이라는 개그를 쳤고, 박상관과의 그 동안의 앙금이 상당부분 사라졌음을 은연 중에 보여주었다. 정말 대인배라고 칭해줄 만 하다. 사실 서장훈은 당시 박상관이 시달리던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상관의 딸인 박지수에게 이리도 다정하게 대해준 것이다.

훗날 자신을 구타한 이창수의 아들과 예능에서 만났을 때도 "경기 중에 있었던 일이고 경기가 끝나면 잊었다"라고 했다. 사실 그가 당한 일은 단순히 경기 중 단순 몸싸움 수준이 아니라 선수 생명이 위험한 폭력이었음에도 이렇게 넘어간 것.

서울 SK 나이츠에서 뛰고 있는 선상혁은 외삼촌-외조카지간이다. 선상혁의 어머니가 박상관의 여동생이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은퇴 직전 체중. 프로 원년에는 94kg의 비교적 슬림한 몸매였다참고자료.[2] 삼성 썬더스 시절[3] 오리온스 시절[4] 1996년 퇴임 후 1998년 1월에 잠깐 MBC 농구 해설위원을 맡다가 동년 7월 현대산업개발 레드폭스(現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이 되었으나, 2000년에 선수 구타 파문을 일으켜 WKBL로부터 영구제명되었다. 2001년 재정위원회에서 영구제명이 철회된 후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 수도강철 농구단 감독을 맡다가 2007년부터 5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공동 부회장을 맡았다.[5] 대학 후배이자 명지대 코치 시절 제자이던 송창무와 같은 케이스인데, 송창무는 무려 2년을 유급했었다;;[6] 박상관-조성원/고상준-조성훈/정재헌-윤제한-표명일/박재일로 이어지는 1991년~1996년 진성호 감독 시절.[7] 당시 명지대의 에이스는 홍대부고 출신 2학년 슈터 조성원이었다.[8] 당시 5월 MBC배 일정으로 인해 실업팀 선수들만으로 구성되었다.[9] 2차전에서 25득점-10리바로 더블더블을 기록했다.[10] 물론 노장듀오 김현준-김진 쌍포의 어마무시했던 외곽슛이 가장 큰 원동력이긴 했다.[11] 이게 커리어 하이 기록이다;;[12] 센터 빈스 킹은 NCAA 디비전 II 대학 출신이었고 거기다 원래 포지션도 2-3번이었다. 스윙맨 케빈 비어드는 무려 디비전 III 대학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이 둘이 팀내 득점-리바운드 1, 2위였다는 게 함정;;;[13] KBL 초창기에 그나마 적응에 성공했던 빅맨들(전희철, 정재근)은 모두 정통센터가 아닌 파워포워드였다. 2000년대에 들어 외국인선수들의 수준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이들마저도 골밑에서 완전히 밀려나 3점슛이 좀 덜들어가는 스몰 포워드가 되었고 명성에 비해 다소 이른 은퇴를 맞이하게 된다. 서장훈, 김주성의 위엄[14] 이때도 수원 삼성의 외국인선수 농사는 실패에 가까웠다. 1순위로 뽑은 장신센터 스트릭랜드는 공만 투입되면 밖으로 뺄 줄 모르는 "골밑의 블랙홀"같은 선수였고, 스윙맨인 줄 알고 뽑은 이스트윅은 3점이 없어서 골밑에 박아놓고 상대팀 4번 조니 맥도웰, 클리프 리드를 상대하게 해야 했다.(그래도 팀내 리바운드 2위(8.5개))[15] 사실 이때 운이 정말 좋았던게, 8경기 중 두 경기가 32연패의 역사를 달리던 대구 동양과의 시합이었다. 나머지 2승은 IMF로 부도직전이던 9위 광주 나산과, 외국인 센터가 없어 천적관계였던 인천 대우에게서 건졌다.[16] 이후 KBL 출범이후 최초의 일시 대체 외국인선수 브라이언 힐(198cm,C)이 합류하는데, 힐이 합류한 뒤 수원 삼성은 7경기에서 2승 5패를 기록하는 바람에 하나마나한 교체란 소리를 들었다.;;;[17] 라고 하기엔 난사기질에 기복왕이었다(.....)[18] 박상관-조성원-고상준-정재헌-조성훈-윤제한 시절[19]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건국대 백천웅(203cm), 동국대 차동욱(206cm), 연세대 손진우(211cm), 중앙대 김광원(205cm) 등이 모두 은퇴하거나 그저그런 선수로 남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다.[20] 2011년 대학농구리그 출범이후 3년간 성적이 8위-10위-9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