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4153e><colcolor=#ffd700,#ffd700> 박기종 朴琪淙 | |
출생 | <colbgcolor=#fff,#1f2023>1839년 11월(헌종 11년) |
조선 경상도 동래부 (現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
사망 | 1907년(향년 69세) |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 (現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
본관 | 밀양 박씨 |
직업 | 문신, 역관, 상인, 기업인 |
묘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
부모 | 부친 - 박영순(朴英珣) 모친 - 오씨 |
자녀 | 슬하 2남 4녀 장남 - 박정규(朴晶奎) 차남 - 박창규(朴昌奎) 3녀 - 변한경의 부인 4녀 - 박영자(朴英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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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개항기 때 조선 최초의 민간 철도 회사인 부하철도회사를 설립한 기업인. 오늘날에는 철도왕이라고도 불리운다.
2. 생애
2.1. 초기
1839년 11월 동래부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대마도와의 무역을 전담하던 8명의 상인 집단인 팔상고(八商賈)에 드나들며 상업에 종사하였다. 사위 윤상은의 회고에 따르면 박기종은 동래상고도중(東萊商賈都中)에 출입하면서 일본어와 장사를 배워 조선 상인과 일본 상인을 연결시켜 주는 거간을 했다고 한다.2.2. 관직에 출세하다
1869년 동래부 소통사(小通事)[1]에 임명되어 거제도 옥포의 업무를 담당하는 옥포 통사로 근무했다.일본어를 잘한 덕분에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김기수를 단장으로 한 제1차 수신사 파견 때 동행한 4명의 통사 중 한 명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4년 후인 1880년 6월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할 때 그도 통사로써 동행했다. 두 번의 일본 방문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 현장을 목격한 박기종은 자연스럽게 조선이 잘살려면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생각은 후에 학교 설립과 근대적인 기업 설립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기종은 부산 지역의 치안과 무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근대적 기업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886년 부산판찰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중 기선 회사 설립에 착수하여 1889년 4월 통리기무아문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회사 설립에는 부산항 감리서 관원과 일본인들도 참여하였다.
1890년 기선 운항을 시작하여, 주로 낙동강 연안의 포구들을 왕래하였다.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기선이 낙동강 하구에서 강풍에 침몰하여 경영 위기를 맞게 되자 박기종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연안 항구들을 경유하는 새 항로를 개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선 회사는 1893년 무렵 일본 대판상선주식회사, 조선기선주식회사 등과 협동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이에 박기종은 기선 운항권을 내주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1895년 정부의 명으로 부산항의 영업세 징수 기관인 상무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징수 특권이 사라지자 상무소는 차츰 조선 상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회 조직으로 변하였고, 이름도 동래상업회의소로 바뀌었다.
박기종은 학교 설립에도 눈을 돌려, 셋째 사위인 변한경과 함께 부산 최초의 신식 학교이자 조선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일본어 전문학교인 개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성학교는 1897년 공립 학교로 인가 받아 학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일본 외무성의 보조금도 받는 등 설립 동기에서 벗어나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2.3. 철도왕
1898년 박기종은 외부 참서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해 윤기영과 함께 ‘국가를 부강케 함은 상무가 제일이요, 상무를 흥왕케 함은 철도가 제일이다’라는 취지 아래 조선 최초의 민간 철조 회사인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였다. 부하철도회사의 첫 번째 목표는 부산항에서 하단포까지 화물 수송을 주로 하는 6km 길이의 경편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하단포는 구포와 함께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물산이 집결하는 장소로, 여기에 모인 물산은 다시 육로 또는 연안 항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운반되었다. 당시 하단포와 부산항 사이에는 대티 고개라는 높은 고개가 있어 육로 운송이 어려웠다. 연안 항로도 만만치 않아 바다와 강이 만나는 몰운대 인근 앞바다는 풍랑이 심해 선박의 난파 사고가 잦았다. 박기종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부산항과 하단포 사이에 경편 철도를 부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철도로 옮긴 물품은 부산항을 통해 일본 등으로 수출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박기종 등은 이런 계획 아래 철도 회사를 설립하고, 농상공부에 건설 인가를 요청하였으나 철도 부설은 무산되었다. 1차 원인은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 것이고, 일본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 철도는 하단포 상류의 구포와 부산항까지 연결될 계획이었다. 부하 철도는 비록 건설되지 못했으나 부산을 기반으로 한 조선인에 의해 기획된 최초의 철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1899년 박기종은 주요 철도를 직접 건설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경원선과 함경선 부설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사장은 당시 대신이었던 흥선대원군, 이재순, 민영철 등이 차례로 맡았으나 실무자는 박기종이었다. 또한 대한철도회사라는 이름으로 만료된 프랑스의 경의선 부설권도 따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대한 자금 조달이 걸림돌이 되었다. 고종이 자신의 사재인 내탕금을 내겠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료들의 봉급 중 일부를 주식 형태로 출자하도록 하였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경원 철도 부설도 주식 출자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이에 박기종은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다. 일본 측은 철도 부설권 획득을 목적으로 접근하여, 계획대로 철도 부설권들을 손아귀에 넣었다.
박기종은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철도에 대한 짐념을 지니고 새로운 철도를 개척하기로 마음 먹고 자신의 재산을 대거 투입해 영남지선철도회사도 설립하였다. 이후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의 부설권을 얻어 공사 진행을 시도했으나 이 회사는 처음부터 일본 자본을 끌어들여 일본 측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열차 운행도 회사 부채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일본이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집요한 농간으로 자금 조달이 여의치 못해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이처럼 박기종은 평생 동안 철도 부설에 뜻을 두었고, 국내 철도는 민족계 회사에 의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와 같은 박기종의 적극적인 철도 부설에 대한 뜻을 기려 오늘날에 그를 철도왕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침략이 날로 극심해가는 당시에는 박기종의 이러한 뜻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박기종은 1907년 숨을 거두게 된다.
3. 여담
박기종은 국가 중흥은 산업개발에 있다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큰아들은 일본의 광산학교, 둘째 아들은 철도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1908년 구포저축주식회사(경남은행의 전신)를 설립한 윤상은(尹相殷)은 박기종의 넷째 사위였다. 윤상은이 지방은행 설립에 큰 업적을 보인 것도 장인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하급 통역관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