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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6:18:59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

미국개입유도설에서 넘어옴
1. 개요
1.1. 브루스 커밍스 교수1.2. 안드레이 그로미코 회고록1.3.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한1.4. 스탈린의 휴전 반대1.5. 북한측 자료1.6. 리처드 쏜턴 교수1.7. 이세기 국토통일원 장관1.8. 헨리 키신저1.9. 소련 공군의 조기 참전1.10. 소련의 미온적인 대북 군사 원조1.11. 맥아더의 중공군 확전 유도
2. 학계에서

1. 개요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련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유엔군이 개입한 것과 이후 유엔군과 중공군의 충돌이 스탈린이 의도한 이이제이 전략이었다는 가설이다. 소련은 유엔군을 주도한 미국을 아시아에서 발이 묶이도록 만들어 놓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약화시키며, 유럽에서 세력확장을 노리려 했다고 본다.

일찍이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 출간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제시했었고, 조지워싱턴 대학 리처드 쏜턴(Richard C. Thronton) 교수가 2000년에 출간한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주장하였다. 이후에 러시아 학자 안드레이 리돕스키가 2005년에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신을 공개하면서 증거를 제시하였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까지 한국전쟁의 휴전 협상을 방해하고 계속 전쟁을 지속하면서 미국과 중공군을 끝없는 소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 역사적 사실 등으로 뒷받침된다.

1.1. 브루스 커밍스 교수

남한과 관련된 결정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데 있어 이해하기 어렵고 이례적인 일이 아직도 많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6월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많이 이용하고 남용했던 거부권이라는 수단을 포기한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신 롱아일랜드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불참한 표면적 이유는 유엔이 중국 공산 정부의 승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협의를 위해 7월 6일 모스크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6월 24일 토요일 저녁 국무부 정책 입안자들은 소련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말리크가 출석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 가운데 일부는 일요일 오후까지는 그에게 전달될 지시가 바뀔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확신했다"고 애치슨은 회고했다. 그러나 그동안 말리크가 충분히 경고한 것을 감안하면, 소련은 침공을 후원할 경우 미국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할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에게는 이후의 결의를 위해 행동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불참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소련의 또 다른 "어리석은 행동"이며 애치슨이 스탈린을 다시 한번 이긴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한 대담에서 딘 러스크는 1960년대에 안드레이 그로미코에게 이 문제를 물어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로미코의 말에 따르면 유엔 주재 소련 대표는 즉시 모스크바로 전보를 쳐 지시를 요청했는데, "출석하지 말라"는 명령을 스탈린 대원수에게서 직접 받았다며 경험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화를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논리적으로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첫째, 스탈린은 주변부인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여 궁극적으로는 중국이 미군과 싸우도록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유엔의 지원은 개입 정책에 큰 힘을 불어넣을 것이었다. 둘째,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유엔의 깃발 아래 숨겨 유엔이라는 기구를 파멸시키려 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유엔이 미국의 도구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1950년 5월에는 공산 세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허버트 후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소련이 유엔을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있었다. 이것 또한 유엔을 이용해 소련의 목적을 더 이상 달성할 수 없다고 스탈린이 생각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2 (폭포의 굉음 1947~1950), 363~364p

1.2. 안드레이 그로미코 회고록

소련의 외무상이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의 회고록에서, 중화민국 문제로 유엔 안보리를 보이콧하던 중에, 한국전쟁에 유엔군 파견 가능성이 있으므로 안보리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하였으나, 스탈린은 야코프 말리크에게 안보리 불참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 결정은 당연히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그의 결정은 소련 지도부 내부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진영에서조차 의문을 가질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소련의 외교 수장인 외무상 그로미코는 스탈린에게 만일 안보리가 북한이나 또는 북한과 소련 모두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제출할 경우 소련 대표는 비토권을 행사해야 하며, 안보리가 유엔군의 남한 파견을 포함하여 일체의 결정을 채택할 수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반응은 회의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안보리 불출석 결정은 사실상 한국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꾼 사건으로 인지되었다.
Громыко А. А. Памятное(회고록). Т. 1. М., 1988, с. 206-207/안드레이 그로미코/박형규 옮김
한국전쟁기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출석과‘드러나지 않은’ 개입
정작 그로미코 회고록을 인용한 해당 논문은, 소련의 미국 개입유도설대로 미군과 중공군을 소모전의 수렁에 빠트린 것에 대해서,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보면서, 1차계획인 적화통일이 실패하자 가동한 2차계획 즉 플랜 B였다고 평가한다.

1.3.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한

김일성의 남침 의욕과 스탈린의 승인에 따라 6.25 전쟁이 터진 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군의 침략 문제를 내놓는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UN은 북한군을 침략군으로 규정한 뒤 침략군을 막기 위해 유엔군을 조직한다.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해 이를 막았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소련이 불참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후에 공산 정권 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첫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는 이것에 대해 스탈린한테 항의를 했다. 스탈린은 이 항의를 받고 편지로 답변한다. 이 편지 내용은 당연히 기밀이었으며 몇 년 후에 밝혀졌는데 거기에 충격스런 내용이 담겼다.

그건 바로 스탈린이 미군이 개입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기고, 그 사이에 유럽을 안정적으로 공산화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목적이라는 내용이다. 박태균 교수가 말하길 해당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6.25전쟁에 대해 미국에 의한 남침유도설이 아니라 소련에 의한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되어야 한다"고 했다.[1] 리처드 쏜턴 교수는 미국이 북한군의 침략전쟁을 알고있으면서 방조해서 남침을 유도했고, 이를 알고 있던 소련 역시도 미국과 중공군의 개입을 유도했다고 한다.

해당 원문이다.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1950. 8. 27)
-최고비밀문서

프라하, 소련 대사.
고트발트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달하시오. 만약 그가 글로 쓴 문서를 원한다면 그에게 복사본을 하나 주어도 됩니다. '6월 27일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표를 철수한 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고트발트 동지의 의견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소련과 새로운 중국의 연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 그들이 국민당 정부의 허수아비를 안전보장이사회의 대표로 인정한 반면 중국의 진정한 대표가 이사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정책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 거대한 두 나라의 대표가 부재함으로써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이 합법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넷째, 미국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미친 짓을 하도록 놔두고, 이를 통해서 세계 여론으로 하여금 미국 정부의 진정한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든 목적이 이미 달성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철수한 이래로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수렁에 빠져버렸고, 군사적,도덕적으로 그 위신을 깎아 먹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한국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적이자 침략자라는 점과 함께, 그들의 군사적 힘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점과 동시에 미국이 그들의 관심을 유럽에서 극동으로 옮겼음이 분명합니다. 전 지구적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리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가 계속해서 극동에 묶여 있고, 한국의 해방을 위한 투쟁과 독립을 위한 싸움에 중국이 끼어 들어간다면, 이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미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같이 거대한 갖고 있는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스스로 힘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둘째 단기적으로 볼 때 미국이 여기에 묶여 있다면 제3차 세계 대전은 무기한 연기될 테고, 유럽은 사회주의를 공고화하는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아시아와 극동 전체에서 혁명을 불러올 것 이라는 점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적 차원의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까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자연스럽게 예상되지 않으며, 또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 진영이 안전보장이사회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느냐, 남느냐의 문제는 특별한 상황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시 떠날 수도 있고, 또는 다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국제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왜 다시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 했는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자신의 침략 행위를 숨기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의 빛나는 깃발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6.25전쟁에 이미 개입한 이상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그들의 목적을 더 용이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필로프 1950. 8. 27.[2]
- 사회정치사를 위한 러시아 국가 자료원, fond. 558, opis, 11, delo, 62, lifty. 71~72[3]

이 자료가 알려진 초기에는, 이것들은 스탈린의 정신승리 성격의 허풍으로 보는 시각들도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권 전체에서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숭배를 받던 인물인데, 6.25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이 이를 저지하러 나서는 상황에서 '미국의 개입을 예상 못한 오판을 했다'고 인정하면 스탈린 자신의 권위를 크게 훼손 시키기 때문이다. [4] 다만 이 논리로는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서 고의적으로 불참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추측 이외에 별다른 증거도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점차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서 교차검증이 되면서, 스탈린의 대전략이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1.4. 스탈린의 휴전 반대

또 다른 의견으로, 스탈린은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 그거대로 좋고, 미군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하면, 중국군이 순망치한으로 개입할테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소모시키면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게 되니까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으리라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스탈린 생전에는 계속 딴죽걸면서 휴전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탈린이 죽고나서 매우 빠르게 휴전협상이 진행되어서 전쟁이 끝났다.
유럽 대륙에서 곧 미-소 간 전쟁이 곧 임박 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역량을 한반도에 묶어 두는 것이 유럽 대륙에서 곧 발발할 전쟁에서 소련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은 스탈린은 중공 지도자들과 북한 지도자들이 한국전쟁을 지속하는 작전에 대해 우려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다. 1953년 5월에 이르면 소련 내부의 공산당 지도자들 모두가 한국에서 지속되는 전쟁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의 고위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련의 정치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소련의 외교 정책의 전면적인 선회와 그로 인한 중대한 국제 체제의 변화는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가능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특히 소련의 지도자들은 이제 한반도에서 스탈린이 고집한 ‘잘못된 정책’을 중단할 수 있었고 동시에 신속한 사태 종결을 추구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소련의 정책은 얼마전 스탈린 지배 하에 견지되었던 정책 기조와 비교해 급격히 변화했다. 따라서 휴전 협정은 7월 26일 체결될 수 있었다.
Stalin’s Death and the Implications for Ending the Korean War(스탈린의 사망이 한국전쟁 휴전에 미친 영향) #
한국전쟁을 통한 스탈린의 세계전략목표는, 1950년 8월 27일 체코대통령 고트발트(K. Gottwald)에게 보낸 전보에서 밝혔듯이, 미국과 중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여 장기간 전쟁을 지속하게 하여 미국의 손발을 한반도에 묶어두고, 미국의 자원을 소모시키면서, 소련이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의 협상을 통한 한국전쟁 종결은, 그 어떠한 경우든지 간에 스탈린의 전략목표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에 1950년 12월 31일, 모택동은 소련학자 유딘(P. Yudin)에게 “우리는 이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미군이 하루 더 한반도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들을 더욱 약하게 만들 수 있고, 미 제국주의 내부의 불화를 조장하며, 그들을 반대하는 사회적 여론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스탈린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의 협상을 통한 한국전쟁 해결 반대 의지가 분명한 이상, 모택동은 자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1월 13일자 유엔 휴전안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초기, 모택동과 스탈린의 전략 충돌 연구#

1.5. 북한측 자료

북한측 자료인 조선노동당 역사 문헌 자료실에서도, 소련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한다.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한 탈북자 장진성이 당 역사문헌자료에서 확인한 김일성 발언에 의하면, 소련이 고의로 북한군의 작전을 방해했다고 한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이나 지체했는데, 이는 소련의 방해때문이었고, 결국 미군 개입전에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김일성이 간부들 앞에서 스탈린에 대한 증오를 역설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문건은 1976년 경 외무성에서 기록 정리한 것 이었는데 그 교시 내용이란 것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국전쟁 이후 국방 공업을 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농업과 경공업을 다 같이 발전시키자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남긴 제일 나쁜 사람이다. 내가 늘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을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 점령 3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쭉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주겠다던 무기를 주지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만 밑까지 쭉 내려가기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 당할지 몰랐다고 후에 변명을 했지만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당초 스탈린은 미국이 무서워 무기를 줄 생각을 안 했다. 그 무기를 기다리며 3일 동안 서울에서 엎어져 있는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스탈린은 장사꾼이다. 전쟁 이전에 준 무기들도 그냥 지원한 것이 아니다.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발전소, 제철소, 주요 설비들과 설계도면을 대신 다 가져갔다. 심지어는 철도 레루(레일)까지 뽑아가겠다는 것을 내가 안 주었다. 조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 3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자주 국방 공업만이 조국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제일 정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황장엽 선생도 작고 하시기 전 한국의 보수 대표 논객인 조갑제 씨에게 비슷한 비화를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남침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뒤 바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쉬워하더란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 탓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도하 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갑제 씨는 얼마 전 제가 쓴 글과 6.25전쟁 관련 해외 자료들을 근거로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먼저 2000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C. 소른턴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이란 책을 소개했는데요, 소른턴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6•25 남침전쟁이 김일성의 공산 통일 야욕으로 일어난 듯이 보이지만 스탈린의 더 큰 전략 구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국을 미국과 중국의 대결장으로 만들려는 의도 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적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스탈린의 악몽 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고 타산한 것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씨 일가의 실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동안 축제를 한 이유#

북한은 미국의 폭격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황폐화되고 인구 수가 격감하면서, 제발 좀 휴전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스탈린은 휴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계속 전쟁을 지속하도록 밀어붙였다. 중국측 사료가 공개되면서 선즈화 교수의 <마오, 스탈린과 6·25전쟁 : 1950년대 공산권 국가 삼각관계> 라는 저서를 국방일보에서 소개한다.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과 북한을 이용해 먹었다고 한다.#

1.6. 리처드 쏜턴 교수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번역본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 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중국과 미국이 서로 싸워서 이이제이를 하려면,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는 적화통일에 실패해야만 했고, 소련이 만들어준 전쟁계획, 전쟁의 수행, 제공된 무기와, 주지 않은 무기, 무기의 제공 시점에 대한 자료를 분석해보면, 스탈린은 북한군의 승리를 막으려 했다고 분석한다. 스탈린은 전쟁에서 한강 등을 건너는 도하 장비를 북한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약속을 받아와야지만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용해준다고 말했었고, 실제로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구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패배를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로도 스탈린은 북한군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마오쩌둥에게만 파병을 요구했다. 쏜턴 교수는 또한 미국도 미국 나름대로 NSC-68의 목적을 위한 군비증강이 필요해서 북한의 침략 전쟁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조해서, 남침을 유도했다고 한다.

1.7. 이세기 국토통일원 장관

전두환 정부 시절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이세기는 2015년 <6·25 전쟁과 중국 : 스탈린과 마오쩌둥 제압전략>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여기서도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군 개입을 유도하려고 북한군의 군사작전을 훼방했다고 주장한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도 약속한 무기와 장비를 제때 보내지 않아서 북한군은 3일이나 시간을 지체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군이 한반도를 적화통일하지 못하게 해서, 미군이 개입할 시간을 주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

1.8. 헨리 키신저

중국과 핑퐁외교를 이뤄낸 헨리 키신저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언급한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 측의 동기는 복잡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1950년 4월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그를 독려했다. 스탈린은 2년 전 티토의 배신을 통해 1세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러시아의 국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련 위성 체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탈린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선언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9년 말에 마오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부터 위압적인 특징을 지닌 마오라는 사람이 이끄는 중국의 기분 나쁜 잠재력을 불안해했다. 남한 침략은 중국의 주의를 자국 국경선에 대한 위기상황으로 돌리고 미국의 관심 또한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면서 미국의 일부 자원을 소모시킬 수 있을 듯했다. 소련의 지지로 침략이 성공한다면, 소련은 평양의 통일 사업으로 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의심을 생각해 보면 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일종의 평형추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마오는 김일성이 아주 과장된 표현으로 자신에게 전달했을 게 분명한 스탈린의 주도적 계획을 정반대의 이유로 따랐다. 그는 소련에 의해 고립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한국을 차지하려는 소련의 관심은 여러 세기를 통해 이미 입증 되었고 스탈린이 중소 동맹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이념적 종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찍이 한 탁월한 중국 인사는 결국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대만에 전념하게 되면서 중국의 통일이 100년이나 연기되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마오가 스탈린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은 마오의 유일한 전략적 실수였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의 기원은 미국을 상대로 한 중국과 소련의 음모라기보다는 공산주의 국제 질서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삼자 간의 작전이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 324~325p

1.9. 소련 공군의 조기 참전

2022년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중국이 참전할때 소련에 공군의 엄호를 요청했을 때, 소련은 파병에 두 달은 걸린다면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나 막상 중국군이 참전하자, 13일만에 소련 공군을 출격시켰고, 닷새 뒤에는 미 공군과 교전까지 하였다. 소련 공군은 소련 공군 표식도 숨기고 중국에서 출격하여서, 미군은 중국군의 참전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미군이 중국군의 참전을 인지하자, 소련 공군은 활동영역을 소극적으로 줄여 버렸다.

베이징대학 한반도 연구센터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것은 소련이 중국을 지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전 참전을 비밀로 하고 있던 중국군의 참전을 드러내어서 미국과 중국사이에 싸움을 붙여서 중국군이 철수하지 못하게 만든 후, 소련의 참전은 숨겨서 뒤로 물러서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6·25 때 소련이 조기 참전한 건 중국 발목 잡기"

1.10. 소련의 미온적인 대북 군사 원조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하고는 군사 원조를 하였는데, 김일성의 침공 야욕을 부추기에는 충분하지만, 북한군의 승리를 이루기에는 부족하고 애매한 군사원조를 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이 침공하도록 부추기면서, 사실은 북한군의 패배와 중공군의 대리 투입을 획책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한국전쟁 시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을 역임한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을 둘러싼 스탈린의 태도와 방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스탈린의 미온적인 군사원조를 탓하면서 그것을 북한이 승리하지 못한 원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유엔군의 북진으로 북한이 파멸적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직접 개입 불가 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현재 미국이 극동으로 우리 이웃을 거쳐 올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로 올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 그들과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어요
미국이 직접 개입할 경우 애초부터 중국의 참전을 전제해야 하지만 중 · 소간의 그 같은 약속이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었다. 전쟁 전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미군이 참전한다면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의 절박한 지원 요청이 있자 스탈린은 중국의 파병을 종용하였다. 소련지상군 파병은 애초부터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참전 결정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중국은 참전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갔고, 이에 스탈린은 북한을 ‘포기’하고 북한지도부에 망명정부를 준비할 것을 일렀다. 이 위급한 국면에서 중국지도부는 파병 결정을 내렸고, 북한은 패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련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소련의 태도와 입장은 북한 지도부의 적지 않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미공군의 위세에 눌린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소련에 ‘국제항공력’으로 명기된 소련 공군의 지원을 기대하였고,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는 소련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직접 개입 의사가 전혀 없는 소련은 무기 및 군수기재 제공이나 중국 군대의 파병으로 대처하는 방식을 취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북한 내부의 반발은 상당히 축척되어 갔다. 특히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 출신인 민족보위성 문화부상 김일(金一)이 소련고문과의 대담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고문들이나 그들의 조언이 아닌 실질적 지원이다”라고 거칠게 표현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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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전쟁 승리를 위해 북한과 중국측에 비교적 아낌없이 무기와 군사장비를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전쟁 초 소련의 제한적인 지원 및 직접 개입 부재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를 좌절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북한의 피폐는 조속한 종전을 원한 북한과, 장기전 속에서 미국에 대한 견제 수단을 찾은 소련 사이에 보이지 않은 갈등의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한국전쟁기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출석과‘드러나지 않은’ 개입

1.11. 맥아더의 중공군 확전 유도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서 맥아더 파벌이 소련의 계략에 완벽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로, 중국에 대한 롤백(rollback) 정책을 시행하여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고 자유주의 정권을 수립하길 원했다. 그래서 장제스를 한국전쟁에 끌어들이길 원했으며,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바로 다음날 대만에 가서 장제스를 만났으며, 1950년 7월 말 대만을 방문하여 장제스에게 한국전쟁을 기회로 중국을 수복해내겠다고 약속했다.

미 극동군 총사령부 특수정보관으로 은성 무공훈장을 3번이나 수훈한 KLO 첩보부대 장교 '연정'의 회고록 <캐논기관에서 드러난 증언> 국내 번역명 신간<6.25 전쟁 비화> 구판< 6.25동란 비화>에서 맥아더가 만주를 공략하고 싶어해서 중공군 개입 첩보를 일부러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연정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신의주에 잠입해 이들의 참전을 확인하고 연합군에 보고한 신의주 작전을 완수했다. 맥아더 사령부 산하에서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의 지휘를 받는, 캐논 소령의 첩보부대는 한국인 첩보원들을 다이롄, 뤼순, 신의주로 침투시켜서 정보를 받았는데, 중공군이 대규모로 집결하여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반도와 만주의 접경지역은 한국군이 점령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맥아더는 미8군과 10군단에게 국경까지 진격하라는 도발적인 명령을 내렸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의하면,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부대인 스미스 부대의 패전도 맥아더가 사단병력의 북한군에게 대대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북한에게 알려서, 북한군이 재정비를 하여 진격속도를 늦추도록 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는데,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국군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장군, 그는 중국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심모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중국 개입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통은 맥아더의 답장이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관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편지의 날짜는 10월 13일이었다
정일권회고록, 고려서적, 1996, 305~306쪽

정일권의 회고록에 의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고 있었다. 사실 오히려 중공군의 개입을 바라던 바였다. 맥아더는 일부러 중공군의 개입할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거짓말하면서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허가받았고, 중공군과의 전투가 벌어짐으로 인하여 확전을 통해 중국을 수복하여 롤백을 이루길 원했다. 정일권 회고록 뿐만이 아니라, NSC-68을 작성한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폴 니체의 맥아더 감청기록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1 #2 #3 #4 당시 조지 케넌은 38선 이북 진격을 반대하였는데, 만약 38선 이북 진격이 이뤄진다면 롤백이 되어버려서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군 참전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미 당국자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건은 웨이크 섬 회담(Wake Island Conference)이었다.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이루어진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사이의 회담은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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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과 그 참모진들은 맥아더가 이 회담에서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고 후에 평가했다. 즉 중국군 개입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 시 발생할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왜곡하여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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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이 회담을 둘러싸고 색다른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축소·보고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강조한 인물은 바로 정일권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0월 13일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전문을 들어 관련 사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일권의 회고록을 가지고 문제를 증폭시킨 것은 ≪월간조선≫이었다. 조갑제는 니츠(Paul Nitze)의 회고록[5]을 동원하여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이승만-맥아더 사이에 중국군 개입을 통한 확전을 도모했다는 일종의 묵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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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본인이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그의 정보참모인 윌로우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의 저서에서도 엿보인다. 즉 맥아더사령부에서는 중국군의 이동 상황에 대해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워싱턴 당국에도 지속적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우비의 주장에 따르면 한 나라의 전쟁 참전 가능성에 대한 최종 판단은 정치가의 몫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실패를 변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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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 오후 5시 30분, 제40군의 도하를 시초로 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의 주력 부대는 당일 밤에 3개소의 도강 지점에서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로써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는 거의 정확히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8월 말, G-2의 윌로우비는 약 9개 군(25만 명)의 중국 병력이 만주에 이동했다고 보고했다. 인천상륙 이후에는 만주에 집결한 중국군의 수가 45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추가적으로 보고했다. 윌로우비에 의하면 8월 27일, 9월 8일 등 여러 번에 걸쳐 중국의 참전에 관한 보고서를 워싱턴 당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10월 5일 북한에 중국군이 개입하였다는 믿을만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극동군사령부 정보장교들은 만약에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공공연히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윌로우비는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에서 최소한 38개 중국군 사단 중에서 9개 내지 18개 사단이 한만국경에 집결하여 월경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상호, 웨이크 섬(Wake Island) 회담과 중국군 참전에 대한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2008 # [6]

브루스 커밍스는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전쟁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녹취록, Tape 20: 브루스 커밍스>.

2012년 미 해군성이 발행한 '미 제7함대 역사'에 따르면, 맥아더는 1951년 4월7일 동해에 있던 7함대 소속 77기동대(Task Force 77) 의 두 항공모함을 대만 해협 중국 측 해안 근처로 파견하며 무력시위를 지시하였고, 4월11일 오전 11시경 구축함 존 보울호(USS John A. Bole)가 중국 해안에서 3마일 거리까지 접근하여 영해를 침범하였으며, 함재기들이 중국 항구 근처에서 위협비행까지 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4월 12일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경질했다.맥아더, 한국전쟁기간 중국연안 침공 확전위기 문서발굴 #

2. 학계에서

보다시피 2005년부터 나타난 최근 가설이기에 대중 교양서에는 잘 나오지 않은 가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서로 다른 출처의 자료들이 교차검증이 되면서, 스탈린이 북한의 김일성을 소모품으로 이용해서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했다는 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헨리 키신저도 이를 언급하였다. 2020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도 사설에서 언급할 정도로 상당히 알려졌다.# 적어도 국제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 알려진 상태로 보인다.

국방일보에서 조지워싱턴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이 2000년대 저술한 『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소개하였는데,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이를 번역하여 출간한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에서도 나온다.

2008년 6월 베이징대 한국인 교수 김동길의 논문에서 처음 소개했다. 김동길 교수의 2014년 논문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의 동상이몽에 대해서 지적한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미 공군의 폭격이 시작된 직후부터 자력으로 승리가 어렵다고 보고, 소련공군과 중국군의 참전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군 조기파병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여,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조기파병 요청에 동의하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스탈린이 한국전쟁이 야기한 새로운 국제정세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전쟁에 대한 목표를 속전속결에서 전쟁 장기화로 수정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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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역시 북한의 조기승리를 원했지만, 미군이 38선을 넘기 전 중국군의 파병은 미국의 조기개입으로 얻은 사회주의 진영의 도덕적 우위를 훼손할 수 있었고, 소련이 한국전쟁의 배후임을 자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우려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 초기 북한군이 미군에 승리하면서 서유럽이 공황상태에 빠지자 스탈린이 이에 크게 만족한 것이다. 즉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고, 미국의 손발을 아시아에 계속 묶어둘 수있다면, 소련은 동유럽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미국이 아시아에서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되면, 당분간 3차대전을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의 세계전략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РГАСПИ, ф.558, оп.11, д.62, лл.71-72;Kim, 2011).
김동길, 한국전쟁 초기 중국군 조기파병을 둘러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동상이몽#

국내 대중 교양서 중에서는 박태균 교수가 2013년 쓴 책에서 최초로 소개했다.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의 그때 오늘, 역사비평사, 2013 참고 바란다.

국내에서 이런 해석을 내놓는 연구자 중 대표할 만한 사람은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가 있다.[7]

중국의 션즈화 교수는 스탈린의 미국개입유도설과 중공군과의 이이제이 전략이었다는 주장에 반론을 펼치면서, 스탈린이 중소동맹조약으로 창춘철도와 뤼순항과 다롄항을 상실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한반도의 부동항에 관심을 가져서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해준 것이고, 한국전쟁의 적화통일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전쟁발발 그 자체가 스탈린에게 중요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이용당했다고 인정할 수 없는 중국측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낚여서 이용당한 총알받이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이로부터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추론했다. 즉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의 체결로 소련은 태평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와 부동항(不凍港)을 상실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소련에게 있어 전략이익의 중대한 손실이었고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전략적 거점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발발에 동의했던 것은 이러한 군사행동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전통적인 전략 거점을 다시 건립하고 보장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뤼순항, 다롄항, 창춘철도는 소련의 내륙지방에서 태평양으로 향하는 항구와 부동항을 연결해 주는 것으로서 소련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장악하고 통제하면 이러한 손실을 보상받을 수 있었을까? 왜 스탈린은 돌연 한반도를 통해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대체하려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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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전쟁에 실패한다 해도, 소련은 여전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즉 동북아에 긴장상태가 조성되면 중국은 뤼순과 다롄에 소련군이 계속 주둔하도록 요청할 것이고, 또한 전쟁이나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군은 중소협정에 근거하여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소련은 자연스럽게 태평양으로 향하는 철도노선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발생할 무장충돌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소련이 아시아에서 설정한 전략목표인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와 부동항의 획득을 보장할 것으로 스탈린은 이미 분명히 예견했다.
과연 이후의 상황 전개는 스탈린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소련에 창춘철도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소련군의 뤼순기지 주둔을 요청했다. 1950년 7월 11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소련정부의 요구에 따라 군사물자를 운송할 수 있도록 창춘철도와 동북지역 항공로 전면 개방을 결정했다(中共中央文獻硏究室 中央 案館, 2008: 31-32).
션즈화, 극동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보장: 한국전쟁의 기원과 스탈린의 정책결정 동기#

션즈화의 주장에 대해서, 부동항 그거 쇄빙선 쓰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반론하기도 한다.
스탈린은 1949년 말까지 전쟁에 반대하다가 1950년 1월 말 전쟁에 대한 동의로 입장을 전환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갑자기 전쟁에 동의하였을까?
이에 대하여는 중소조약 체결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상실한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과 중국혁명으로 인한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혁명 전략의 전환의 결과였다는 주장 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부동항설은 소련이 쇄빙선이 있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톡항을 이용할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이미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동항의 필요성이 없었다는 주장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혁명전략 변화설은 장기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는 유효하지만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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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미국의 대중국정책과 중미관계에 대한 스탈린의 직접적인 대응이 중소조약의 체결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드러난 중소관계와 중미관계의 불확실성의 제거하기 위한 것이 한국전쟁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중소관계와 한국전쟁의 결정#


[1]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90쪽[2] 필로프는 스탈린의 필명[3]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87쪽~189쪽[4]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91쪽)[5] Paul H. Nitze with Ann M. Smith and Steven L. Rearden, From Hiroshima to Glasnost: At the Center of Decision, A Memoir(New York: Grove Weidenfeld, 1989), pp.109~110.[6] 해당 논문은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예측했다는 증거가 관련자 증언밖에 없고 물증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애초에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 머리를 열어보지 않는 이상 물리적 증거를 찾기가 원래 어렵다. 예측만 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물증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련자 증언이 교차검증이 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 정도면 법정에서도 증거로 채택된다.[7]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