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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2:58:08

십팔자위왕

목자득국에서 넘어옴
파일:십팔자위왕.jpg


1. 개요2. 유사 사례3. 매체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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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시대에 떠돌던 도참설에 기반한 소문. 십팔자득국(), 목자득국(木子得國)도 같은 의미로 이자겸의 난과 관련되어 처음 언급된다. 그 내용은 '십팔자'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삼한이 된다는 뜻으로, 十八子(십팔자)를 합치면 李(이)라는 한자가 되니 결국 이씨 가문에서 왕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이자겸은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유례없는 외척인데다가 조정의 주요 관직도 다 차지하고 강력한 무신인 척준경까지 수하로 두면서 왕권을 훨씬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신으로 군림했다.[1] 당시의 사람들은 이자겸의 권세를 보고 그가 곧 왕위찬탈까지 할거라 의심해서 만든 소문이거나 또는 이자겸 본인이 찬탈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란 설도 있다. 혹은 이자겸은 찬탈 의사가 없었으며, 당시에 그런 소문도 없었음에도 친위쿠데타에 성공한 인종이 "이자겸이 이씨가 왕이 될거라는 도참을 믿고 찬탈을 시도하자 내가 그를 몰아낸 것이다"라고 명분을 위해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등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이자겸의 권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소문이라는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려 중기 무신정변 주동자였던 이의방[2]에게 이린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이린의 후손인 이성계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예언이 생긴 지 수백년 이후에 십팔자위왕이 실현되었다.

목자득국은 李를 木+子로 좀 덜 쪼갠 것인데, 이건 오행설과도 관련이 있다. 본래 동양에선 모든 왕조는 그 왕조에 부여된 오행의 순환관계에 따라 건국되고 망함을 반복한다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었다. 즉 오행의 상성 관계에 따라 나무(木) → (火) → (土) → (金) → (水) → 나무 순서. 옆나라 중국에서도 오행은 왕조 교체의 명분으로 흔히 언급되고 있었고[3][4] 신라는 김(金)씨 왕조였고 수도가 금성인 것처럼 금덕(金德)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통일신라를 교체하고 들어선 왕조 고려는 수덕의 왕조를 스스로 표방했다.[5] 즉 고려 다음 왕조는 당연히 목(木)덕이어야 했으므로 나무 목 자가 나오도록 끼워맞춘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이성계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자겸, 이고, 이의방, 이의민 등 이씨 권신들이 등장했다. 이자겸과 이의민은 이 도참설에 기대어 왕위찬탈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당시 고려의 왕들은 이런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오얏나무(李)를 대량 벌채하는 등 기를 꺾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으로 소문은 맞아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왕건에게도 해당이 되는데 왕건의 집안이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사칭을 했었던게 만약 사실이라면 왕씨라는 성씨를 쓰기 이전에 이(李)씨 성을 썼을 수도 있다.[6]

2. 유사 사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이씨가 흔한 성씨이다보니 십팔자위왕 드립과 엮이는 사례가 있었다.[7] 베트남에서도 해당되는 데, 리 왕조의 창시자인 리 타이 또가 이태조(李太祖)로 불리게 되는 리꽁우언도 있다.

십팔자위왕 드립과 비슷한 것으로 조선 시대에 퍼진 정도령 전설이 있다. 조광조에 얽힌 주초위왕(走肖爲王) 일화도 이와 비슷한 형태. 주랑 초를 더하면 조(趙)가 되는데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며, 나뭇잎에 이것이 써진 것을 가지고 조광조를 모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당대 기록이 아닌 후대 선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조광조가 후대에 성현으로 추앙받게 되자 중종의 오점을 덮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게 정설이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정감록의 영향으로 정씨가 일어서 이씨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돌았고 이에 기반한 반역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몰락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도 모두 이씨 성을 가진 한사람이 되면서 십팔자위왕은 근현대사에서도 어느 정도 먹혔다고 볼 수 있겠다.[8]

유럽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 레오 10세 시절에 로마에 "다음 교황은 가난한 가문 태생이지만 학식이 뛰어난 '아드리안'이라는 사람이다." 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 소문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은 아드리안 사울리 추기경이 교황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페트루치 추기경과 합세하여 교황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페트루치 추기경은 사형당하고 아드리안 사울리 추기경은 자진 망명하였다. 그 후 레오 10세가 말라리아로 죽자 후임 교황이 뽑혔는데, 정말로 "가난한 가문 태생이지만 학식이 뛰어난" 아드리안 플로렌츠 네달[9]이라는 추기경이 하드리아노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했다.

다만 이 경우는 '왕' 다운 왕이 아니었기에 십팔자위왕과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지 애매한데, 우선 하드리아노 6세는 정말로 학식이 뛰어나 선출되었다기보다 유력한 후보들이 부딪친 끝에 몇 번이고 투표를 해도 승부가 나질 않자 '차라리 이러이러한 듣보가 있다던데, 얘를 뽑자' 라는 절충안이 나왔고. 그게 받아들여졌던 것.

또 선출 당시 스페인에 있던 하드리아노는 서둘러 로마로 가야 했지만, 프랑스나 스페인, 잉글랜드[10] 등이 신임 교황과 어떻게든 우호 관계를 쌓아두려는 생각에 '제 영토를 거쳐서 로마로 가셈. 알아들었음?' 하며 협박 아닌 협박을 넣었다. 결국 하드리아누스는 어느 영토도 거쳐가지 않음으로써 누구의 불만도 사지 않았는데,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1522년 1월에 선출된 교황이 로마에 입성한 날은 8월 29일.[11] 그런 데다 다음 해 1523년 9월 14일에 죽어버렸으니, 교황으로서의 실질적인 치세는 1년 2주 정도에 불과. 게다가 죽기 전에 로마 시민들과 정책적으로 대립하였고 외교 등의 활동에서 무능함을 드러내보였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3. 매체

4. 기타


[1] 한국사에서 이자겸과 비견될만한 권신은 국왕 이상의 실권을 가지고 권력을 자식에게 세습했던 연개소문, 최충헌밖에 없다. 그 아래 급으로는 조선 중종 때의 김안로나 세조에서 성종 시대까지의 한명회 정도.[2] 이자겸과 성씨는 같으나 본관이 달랐다.[3] 유명한 사례로 삼국지에서 화덕을 내세웠던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황건적의 슬로건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이다. 화생토의 원리로 화덕 다음은 토덕에 의한 나라가 들어선다는 원리이다. 비록 황건적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헌제의 선양을 받은 조위에도 이어졌는데, 조비가 위를 세운 뒤 개원한 '황초(黃初)도 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후한이 촉한으로 계속 이어짐을 내세운 촉한은 염흥(炎興) 같이 화덕에 기반한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4] 훗날 후금을 건국한 만주족도 화덕을 표방하는 명나라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로 국호를 수덕을 표방한 청나라로 바꾸자 정말로 명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5] 궁예는 신라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이후 왕건은 궁예가 세운 나라의 원래 이름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아 계속해서 수덕을 표방했으며, 훈요 10조에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 것도 평양이 수덕이 순조로운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6] 물론 왕건의 집안이 당나라 황실의 후손이란건 고려 건국하고도 한참 이후에 만들어진 정통성 강화 작업이라는 분석이 정설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씨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7] 당나라의 이연, 후당이존욱, 틈왕 이자성 등.[8]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자신의 먼 조상이 이성계이다보니 주변에 누누이 자신의 양녕대군의 적손 혈통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했던 그가 나름의 유리한 고지를 만들기 위해 떠벌린 속셈있는 행동이라는 평가도 있다. 전주 이씨는 약 260만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있다.[9] 특이하게도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비록 기간은 짧지만 이 나라 출신의 유일한 교황으로, 고향 위트레흐트은퇴 후에 살려던 집 이 존재한다.[10] 아직 국교회 성립 이전이다.[11] 그나마도, 이전까지는 로마를 본 일이 없었다. 주 활동 무대는 스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