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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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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납치된 비행편 <colbgcolor=#ffffff,#1f2023>AA11 · UA175 · AA77 · UA93
납치 오인 비행편 KE085 · DL1989
충돌 구 세계무역센터(붕괴) · 펜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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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محمد محمد الأمير عوض السيد عطا
Mohamed Mohamed El-Amir Awad el-Sayed Atta
모하메드 모하메드 엘아미르 아와드 엘사예드 아타
출생 1968년 9월 1일
아랍 연합 공화국 카프르엘셰이크주
(현 이집트 카프르엘셰이크주)
국적
[[이집트|]][[틀:국기|]][[틀:국기|]]
학력 카이로 대학교(건축학 / 학사)
함부르크 공과 대학교 대학원(건축학 / 석사)
사망 2001년 9월 11일 (향년 33세)

1. 개요2. 생애3. 테러 감행
3.1. 테러 전에 남긴 유서
4. 기타

[clearfix]

1. 개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4건의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의 행동대장.

2. 생애

1968년 9월 1일 이집트 북부 카프르엘셰이크주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5년 카이로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공학에서 건축학으로 학과를 바꾼 뒤 학사학위를 수여받고 괴테 인스티튜트(독일 문화원)에서 어학공부를 마친 후 1990년에 함부르크 공과 대학에 들어갔다. 함부르크에서 그는 마르완 알 셰히[1]와 지아드 자라[2], 람지 빈 알시브 등을 만나 모임을 형성했는데 그들은 유학 생활을 하면서 걸프 전쟁오슬로 협정 같은 세계 정세를 접하며 이슬람 국가에 주둔하거나 내정간섭하는 주변국 및 강대국들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이때부터 이슬람 극단주의적인 신념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함부르크 모임원 등과 함께 반미 감정을 드러내는 무장단체 알카에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삐뚤어진 신념을 갖게 되고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자마자 알카에다에 가입하였다. 이후 아버지를 통해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나게 되고, 미국에서 시행할 테러 계획의 "비행기 작전 대원"으로 선발되었다. 2000년 6월, 함부르크 모임원인 알 셰흐히, 자야드 자라와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비행기 교습을 배웠으며 5개월 만에 상업 경비행기 조종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1년 5월에 이르러 그는 함께 테러를 진행하게 될 알카에다 단원들의 입국을 도왔으며, 7월에는 스페인으로 넘어가 모임원인 람지 빈 알시브를 만나 최종적인 테러 브리핑을 했다. 테러가 있기 직전, 다시 미국으로 재입국하여 사전에 구입해둔 GPS 장비와 함께 동료인 마르완 알 셰히[3], 지아드 자라[4]에게 모든 계획을 전달했다.

그가 평소 이슬람 사원에 자주 드나들었고 극단적인 무슬림으로 의심되는 말을 자주 해 왔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정말로 자신이 이집트이슬람 세계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변 지인들은 그가 평소에 사람들 사이에서 사교성이 있고 쾌활하며 친절했던 사람이라고 증언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테러리스트의 수장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크게 놀라서 믿기 어려웠다고 했다.

3. 테러 감행

2000년 그는 미국으로 비행기 조종법을 배우기 위해 출국했으며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고 2001년부터 시간차를 두고 출발한 알카에다 단원들이 미국으로 입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모인 테러리스트들과 종교의식을 갖고 구체적인 테러 계획을 지시했다.

테러의 계획은 이러했다.
"비행기 작전 대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우선 총 4편의 미국 비행기를 공중 납치하는 것이 첫번째 목표였다. 이후 해당 비행기들을 미국의 주요 핵심 시설들[5]에 각각 충돌 시켜, 미국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그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이들은 초강대국인 미국을 가장 임팩트 있고, 최대한 효과적인 유효타를 먹이기 위해 자살 테러라는 충격적인 작전을 계획하게 되고 이것은 그들 입장에선 비로소 성공이 되었다.[6] 이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예로 민항기 납치를 주요 작전으로 선정하였고, 수많은 설계[7] 끝에 국내선 4편의 비행기를 납치하기로 결정함으로서 비로소 오늘날의 9.11 테러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비행기 작전 대원"의 행동대장으로 손꼽혔으며, 19명의 집단 중 선두로 가장 첫번째 납치 대상인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납치하여 계획 실행에 나서기로 앞장선다.[8]
사건 당일 그는 함께하는 18명의 동료들에게 "천국에서 처녀들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쪽지를 남겨 테러를 독려했다.

2001년 9월 11일 그는 측근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와 포틀랜드 공항에서 경유지인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 향한 뒤 로스앤젤레스로 가기 위해 체크인을 하고 아메리칸 항공 11편에 탑승했으며 이어서 알 셰리 형제와 사탐 알 수콰미가 체크인을 하고 아메리칸 항공 11편에 들어섰다.

이륙한 지 10분 뒤인 오전 8시 13분 그는 다른 하이재커들과 함께 기장과 비즈니스석 승객 1명을 살해[9]하고 아메리칸 항공 11편의 조종간을 잡았다. 갑자기 비행 경로가 바뀌고 기장과 부기장이 연락을 받지 않자 항공사는 위험함을 느끼고 아메리칸 항공 11편에게 다시 연락했으나…
We have some plane"s". Just stay quiet and you'll be okay. We are returning to the airport.
우리는 비행기"들"을 확보했다.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지만 이 내용은 승객들에게 전달된 내용이 아니고 관제센터에 전파된 내용이다. 이유는 그가 기내방송용 버튼이 아니라 관제센터와 통신하는 버튼을 누르는 실수를 범하면서 관제센터에 이와 같은 내용이 전파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분주해진 관제센터는 빠르게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한 조치가 적용되기 전에 이미....

33분 후인 8시 46분 뉴욕 맨해튼 구가 평범한 다른 날처럼 출근 준비가 한창이던 사람들로 넘쳐나던 때 아메리카 항공 11편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정면 충돌했다. 기체는 충돌과 동시에 폭발하였고 당연히 그를 포함한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즉사하였다.

판독 결과 항공기는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의 93층 ~ 99층에 충돌하였고 충돌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가 이 여객기에 탑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내용은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9.11 테러 문서 참조.

3.1. 테러 전에 남긴 유서

그는 유서에서 자신의 시신메카를 향해 묻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독실한, 어쩌보면 광신적 무슬림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모하메드 알 아미르 아와드 알 사지드의 아들인 나 모하메드는 내가 죽은 후에 다음과 같이 행해지기를 바란다.
누구든지 내 시신을 거두는 사람은 독실한 무슬림이어야 한다.
그는 나의 눈을 감기고 내가 천국에 오르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나와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아야 하며 키스도 하지 말아야 하며 나와 작별인사를 해도 안된다.
임신여자와 부정한 사람들은 나와의 이별 의식에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들은 장례식에 오지 말아야 하며 나중이라도 나의 묘를 방문해서는 안 된다.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야 한다.
왜냐하면 신께서 다음의 3가지를 행할 경우 엄숙하고 은밀하게 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쿠란을 읽을 때, 기도할 때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다.
나의 장례식은 훌륭한 무슬림들에 의해 치러져야 하며 나의 시신은 머리가 메카를 향하게 묻어야 한다.
내 재산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신이 우리에게 위탁한 것처럼 내 재산의 3분의 1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내 책은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넘겨주어라.
내 유언을 집행하는 사람은 수니파 이슬람교의 지도자이어야 한다.
이 유언의 집행과 장례 의식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날 경우 당사자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유서의 내용은 집행될 수 없었다. 9.11 테러 순간 고열과 폭발로 인해 몸이 쉽게 말해 증발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시신이 남아서 수습되었다고 하더라도 묘소가 테러리스트의 성지가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9.11 테러 피해 당사국 미국에 의해 바다에 수장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10]

4. 기타

본래 그는 독일 유학생 시절부터 주변인들과의 대인 관계도 좋았고 넉살 좋은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인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인물이 9.11 테러를 주도한 테러범들의 중심이었으니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이 날 정말 다행히도 계획 실행에 실패를 겪을 뻔했다.[11] 그 이유는 테러를 일으키기로 한 9월 11일에 컴포트 모텔에서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AA11편 비행기 납치가 계획된 공항인 보스턴로건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포틀랜드 제트포트에서도 공항 검색대에 걸렸다.[12] 그러나 이것마저 운 좋게 통과했고 결국 계획했던 테러의 실행에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테러를 감행하기 전에 그가 주변인들에게 농약살포용 경비행기를 구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탄저균을 살포하여 살생을 감행하겠다는 뜻으로 분석되었지만 경비행기를 구입하지 못했고 이와 같은 테러를 실행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친모에 따르면 오사마 빈 라덴의 아들 함자 빈 라덴이 그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 동네가 동네여서 그런지 신뢰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1] 유나이티드 175편을 조종한 테러범[2] 유나이티드 93편을 조종한 테러범[3] 1978년 ~ 2001년 9월 11일. 같은 날짜에 두 번째 하이재킹 대상이었던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을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충돌 시킨 뒤 사망했다. 앞서 선두로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납치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 시켰던 아타와는 16~17분 가량 후의 시점이었다.[4] 1975년 ~ 2001년 9월 11일. 같은 날짜에 마지막 네 번째 하이재킹 대상이었던 유나이티드 93편을 납치하여 워싱턴 D.C로 향하고 있었으나, 승객들의 저항에 계획 실행에 실패하고, 펜실베이니아주의 외딴 광산에 고의적으로 추락시켜 자폭했다. 앞서 선두로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납치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 시켰던 아타와는 76~77분 가량 후의 시점이었다.[5] 뉴욕 세계무역센터, 국방부 펜타곤, 백악관 혹은 국회의사당(추정)[6]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맑은 날의 하루 아침에 급작스런 민항기 충돌 사건들이 번번이 발생하니, 미국 국방부는 물론이고 미 영공과 미국 시민들은 언제 또 다른 곳이 공격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살 테러라 가해자인 본인들도 충돌과 동시에 이미 사망해 버렸으니, 그들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피해와 난장판이 되어버린 미국은, 그들을 어찌할 도리 조차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철저히 계획된 테러였으니 이미 비행기가 충돌한 시점에서부턴 피해를 막아낼 방법 같은 건 아마 없었을 것이다.[7] 그들이 본래 계획했던 비행기들은 4대보다 훨씬 많은 수량이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한국도 타겟으로 지목됐었다! 하지만 조직 노출의 위험과,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국내선 4편[13]만 납치[14] 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8] 그렇게 그는 첫 번째 테러 계획을 완벽하게 완수하였고, 이것은 후발대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9] 비즈니스석 승객을 먼저 살해한 것은 남은 승객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10] 실제로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은 이러한 점을 감안해 바다에 수장되었다.[11] 총 4편의 비행기 중 가장 첫번째 항공기 탈취를 담당했던 인물이 바로 본인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차후의 있을 계획 실행에도 꽤나 영향이 끼쳤을 것이다. 테러범들은 운이 따라 주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시 피해자들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화나고 아까운 일이었을 것이다.[12] 현재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보안 검색대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아타는 늦잠을 잔 탓에 공항에 늦게 도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심사를 서둘러야 했을 것을 고려해 대충 그들을 좋게좋게 통과 시켜주었을 거란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