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1:14:09

명동백작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1970년 개봉한 한국 액션 영화에 대한 내용은 명동 시리즈 문서
번 문단을
명동 백작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EBS 문화사 시리즈
명동백작 100인의 증언-60년대 문화를 말한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100인의 증언-7,80년대 문화를 말한다.
EBS 문화사 시리즈 제 1편 : 명동백작
파일:external/67a236b325b64de534bff5fb6e9de19712fcf2404b711bcdf16cfa2886db130d.jpg
방송 시간 월요일, 화요일 오후 11:00~
방송 기간 2004년 9월 11일 ~ 2004년 11월 28일
방송 횟수 24부작
채널 EBS
장르 현대사 드라마
연출 박호경, 이창용, 남내원
극본 정하연, 김미숙, 최대복
출연자 박철호, 이진우, 김성령, 차광수, 정보석, 이재은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회차3. 등장인물
3.1. 해설가3.2. 주인공3.3. 문인들3.4. 주인공/문인의 가족들3.5. 기타 인물들
4. 주요 무대5. 기타

[clearfix]

1. 개요

2004년 EBS 문화사 시리즈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명동의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EBS 사상 최초로 시청률 1% 돌파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방영 당시인 2004년에도 언론의 극찬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문학 애호가의 사랑을 받아 블로그를 검색하면 바로 최근인 2016년에도 명동백작에 대해 남긴 감상평을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명동이 좋아 2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명동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이 붙은 기자 겸 소설가 이봉구와 그의 절친 시인 김수영, 박인환 등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진행된다. 그 밖에도 그들의 지인이자 문인인 오상순, 김관식, 전혜린 뿐만 아니라 연극 연출가 이해랑, 무용가 김백봉, 화가 이중섭 등 그 당시 명동에 있던 예술인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면서도 동시에 이화룡, 신상사, 이정재등 주먹들의 이야기까지 다뤘다.[1]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일반적인 번화가로 바뀐 현대에는 상상하기 힘들 수 있지만, 본래 명동은 미술, 음악 등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당대의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바로 그러한 명동의 모습을 담은 것.

사극처럼 해설이 등장하지만 성우의 내레이션이 아닌 해설가 역으로 배우 정보석이 극에 틈틈이 나와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인물간의 갈등 등을 설명한다. 보다 전문적인 이야기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2]의 해설까지 덧붙여져서 교육방송에서 만든 드라마 답다 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드라마는 1951년 6.25 전쟁의 중간 부분부터 시작하며 1961년 5.16까지 약 10년간의 시대를 다룬다. 특이점으로는 6.25 전쟁이 끝나 폐허가 되고 어려운 상황인데도 전체적인 연출과 분위기는 상당히 희망차게 그려지는데, 후속작이자 명동백작의 뒷 세대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상당히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연출로 그려진다.

2. 회차

# 영상 대본
1부 #
2부 #
3부 #
4부 #
5부 #
6부 #
7부 #
8부 #
9부 #
10부 #
11부 #
12부 #
13부 #
14부 #
15부 #
16부 #
17부 #
18부 #
19부 #
20부 #
21부 #
22부 #
23부 #
24부 #

EBS 사이트에서는 계정을 갖고 있으면 전 회차를 관람할 수 있으며, 대본도 볼 수 있다. 한편 EBS 유튜브 채널은 2부에서 23부까지를 전체 영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3. 등장인물

3.1. 해설가

드라마의 시대분위기나 문단의 다양한 풍경, 명동이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극적으로 진행하는 독자적인 캐릭터를 가진 인물로 매회 등장하여 현대 명동, 그 시기 명동 또는 각종 자료화면을 보여주며 해설을 덧붙인다. 간혹 언뜻 봐도 A4용지 1장 이상의 분량을 끊지 않고 원테이크로 대사를 읊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혜린, 이봉구와 함께 후속작 <지금도 마로니에는>에도 등장한다.

3.2. 주인공

명동백작의 주인공 3인 중 한명. 명동을 사랑해 '명동백작'으로 불리며 많은 일화와 소문을 만들어냈던 소설가 및 평화신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명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6.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왔을 당시 중간에 서울을 가기 위해 부친의 유품을 팔아서 까지 명동에 입성한다.[3] 어머니의 금비녀와 금반지를 몰래 가져나와 친구들과 술을 마실정도로 경제관념이 없다. 나중에 신문사에서 일을 할 때도 월급을 죄다 술값으로 탕진한 것도 모자라 외상까지 지면서, 극 중 묘사에 따르면 집안 식구들에게는 한 푼도 가져다 주지 않은 것 같다(...). 주인공 3인 중 한 명이지만 김수영, 박인환이 나름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비해 이봉구는 이야기의 중심보다 두루두루 다른 주변 인물들[4]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끌어오는 역할이기 때문에 비중은 작게 느껴지는 편. 후속작 <지금도 마로니에는>에도 단역으로 잠깐 출연한다.
명동백작의 주인공 3인 중 한명이자 극에서 비중이 큰 인물. 모더니즘 시인이었으나 6.25 전쟁서울특별시에서 조선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참전하였으나 포로로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그 때문에 아내를 뺏기기도 한다. 끔찍한 전쟁의 경험과 아내 김현경과의 관계 때문에 세상을 불신하게 되며, 두려움에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전쟁의 상처를 온 몸으로 겪은 시대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후에 참여시인으로 시대를 표현하고 저항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진정한 시인. 극중 묘사에 따르면 전쟁 도중 포로로 잡히기 전에도 주관있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나오지만 프로 생활을 거치고 난 뒤에는 더욱 냉소적이도 틀혀박히는 성격으로 묘사된다. 특히 극 중반에 가서는 절친 박인환과 문학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사이가 틀어지고[5] 집에 홀로 앉아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다시피 하는 편. 그래도 주위의 신망은 있었는지 이봉구, 오상순 등은 항상 김수영을 찾는 장면이 있다. 그러던 도중 1960년 4.19가 일어나고 난 뒤에는 희망에 젖어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려 하지만 얼마 안 가 5.16이 일어나자 절망하고 다시 칩거한다.
명동백작의 주인공 3인 중 한명이자 유일하게 극 중 하차하는 인물.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으로 유명한 시인. 31세에 요절하며 옷 잘입고, 쿨한 댄디보이로 유명하며 나이 20살에 작은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하기도 한다. 잘생긴 외모덕에 여성 팬이 많고 그 때문에 많은 스캔들에 휘말리지만 사실은 애처가이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김수영과는 절친한 친구이자 시에 대한 철학이 달랐던 일종의 라이벌. 1회부터 등장하는데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 가 종군기자로 복무하는데 친구 버리고 혼자 도망갔다고 김수영에게 까이기도 한다(...). 그 후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김수영을 찾기도 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를 애타게 그리워 했으나 결국 성향의 차이로 인해 관계가 끊어지고 만다. 극중에선 김수영은 철저한 현실주의이었기 때문에 이상주의였던 박인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걸로 묘사했다. 다만 이건 겉으로 그랬다는것이고 속으로는 김수영은 박인환과 화해를 하고 싶어했으나 그걸 표현하지 못한 것. 박인환은 창작의 고통과 현실에 절망하여 미친 듯이 폭음을 하고 결국 31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극중 내내 애처가라고 표현되며 아내에 대한 애정이 그려지지만, 사실 해운회사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몽땅 자기 옷사고 술먹는데 써서 아내에게 한푼도 안가져다 줘 옆집에서 쌀을 얻어먹게 하고 그 밖에 고생을 시키는 걸 보면 ‘박인환은 애처가였습니다’라는 해설(정보석)의 말이 어째...

3.3. 문인들

순간순간을 불꽃같이 살다 간 번역가 겸 수필가. 50년대 당시 경기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라는 엘리트 코스[6]를 밟은 천재로 극 중에선 6.25 전쟁으로 모든게 바뀌어버렸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은 바뀌지 않아 절망하며 술을 마시고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분위기의 한국을 못견뎌 하고 중간에 독일 유학 가는 모습이 그려지며 후반에 돌아오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명동백작이나 후속작(<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비중은 크진 않은 편이다. 그러나 방영 당시에는 “전혜린은 극중 여성운동가나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라며 극중 전혜린에 대한 묘사에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봉구가 얘기하듯 "전혜린은 더 큰 차원의 다른 무언가에 정면으로 싸우다 짧고 뜨겁게 살았다"고 하는 것처럼 좀 더 그 말을 입체적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여성운동가라는 것과 여류 문인이란 것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는것이다
평생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었던 명동 시절의 정신적인 지주. 호는 공초로 청동다방을 근거지로 담배를 매우 즐겨 피우는데 등장하는 씬의 열에 아홉은 항상 담배를 피고 있다. 극에서는 가장 큰어른 역할을 하며, 하는 말이나 주위사람들에게 해주는 조언 등을 들어보면 마치 도인의 느낌을 받는다. 문학인이지만 뭔가 집필하는 장면은 극 중 거의 등장하지 않은데 극에서는 “내 평생의 소원이 조선의 독립이었는데 그걸 이뤘으니 쓸 게 없다” 라며 문학활동을 하지 않는다. 극 중 오상순에 대해 “무소유의 일생”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항상 술과 담배는 얻어먹거나 외상(...)으로 때우는 모습이..천재시인이며, 서정주와 동서지간. 그의 지식과 해박함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20대 초반에 교사로 활동할 정도 였으나 술버릇이 나빠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박목월 같은 당대의 거물을 김군, 서군, 조군, 박군 등으로 부르고 다니고 다녔다. 극 중에선 그 사실을 서정주도 알고 있으며 살짝 놀리는 씬도 나온다. 극 중 김관식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 김관식의 부인이었던 방옥례여사의 증언도 나왔는데 말로는 도저히 당해낼수 없고 술을 마실때는 아무리 취해도 자신을 지켜주는 주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극중에서 코믹함을 담당하다시피하며 귀염둥이(...)롤을 맡고 있다... 공초선생은 극중 아예 김관식을 아이구 우리 관식이 왔나?라며 반기고 다른 문인들이나 예술가들도 귀엽게 대한다. 그 까다롭고 거친 김수영도 김관식의 주사에 지긋이 웃더니 같이 어울려 술로 밤을 지새울 정도.[7] 특히나 부인과의 로맨스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그나미 숨통이 트이는 순간들인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로워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한국의 천재화가. 일제강점기창씨개명 강요받으며 차별받던 그 시기에 일본 여성과 결혼을 하며 살았지만 6.25 전쟁 당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헤어지게 되어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다. 극 중에선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슬픔과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에 절망하며 극 중 사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쳐버린 이중섭의 아픔어린 광기와 훗날엔 전기고문에 실성한듯한 모습까지 나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당시 기성문단의 거두로 나오며 동서지간이자 한참 연하인 김관식이 술에 취하면 자신에게 "서군, 서군" 하는 주정을 관대하게 넘어가는 받아준다. 김관식의 시 초야의 기도를 받아보고는 다른 시에서 보이던 기벽이 없어져서 좋다는 평을 한다. 실제로 이 둘은 단순한 동서지간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서정주의 처제가 언니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서정주는 거의 딸처럼 처제를 챙겼고 자연히 김관식도 사위같은 동서가 되었다.
연극연출가. 신파극을 싫어하며 연극의 순수성을 강조해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정통 연극을 올리지만 매번 흥행에 실패한다. 결국 극단과 소속 배우들의 생계를 위해 “자유부인” 등 대중 소설을 연극에 올리고 대중의 입맛에 맞게 연극을 연출하게 된다.
무용가 부부. 안제승은 최승희의 시동생이자 안막의 동생이며, 김백봉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최승희의 동서다. 김백봉은 스승 최승희를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안제승은 그런 김백봉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3.4. 주인공/문인의 가족들

김수영의 부인.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나온 재원으로 김수영과는 연애결혼 했으나 6.25 전쟁 중에 김수영을 찾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김수영이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김수영의 친구 이종구와 동거 생활을 하기도 한다. 나중에 김수영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고 또 이종구와의 동거생활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우여곡절 끝에 김수영과 재결합하며 김수영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박인환의 부인. 박인환이 아끼는 부인이며 이정숙 역시 박인환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경제적으로는 힘든 모습이 나온다. 박인환 사후에는 술집을 운영해 생계를 꾸려간다.
김관식의 부인. 서정주의 처제로 김관식의 자살소동으로 결혼했는데 김관식이 월급을 받는 족족 술을 사먹는 덕분에 생계가 꾸려지지 않아 고생하는 모습이 나온다. 김관식도 아내의 이런 고생을 모르진 않아서 밤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으나 끝내 주벽을 고치진 못했다.

3.5. 기타 인물들

6.25 전쟁이 끝나고 김수영이 좋아했던 여자. 극 중에선 그 전부터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김수영이 짝사랑했으나 노봉식이 유부녀였기 때문에 이뤄지지 못한다.
야인시대 등으로 익숙한 인물. 명동백작에서는 주먹을 쓰는 건달이라는 느낌보다도 문인들을 위해 명동을 지킨다는 인상이 강하다.[8] 보호세 등 따위는 받지 않고 항상 돈 잘버는 누이에게 필요한 자금을 얻어 쓰며 정치권의 러브콜[9]을 매번 거절한다. 나중에는 문화사업을 위해 영화도 제작하고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예측해 주먹계에서도 미리 물러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선하게 그려지며 너무 띄워준다는 인상이 강하는데 그걸 작가 본인도 느꼈는지 극 중 해설(정보석)이 “너무 띄워준걸까요?”라는 늬앙스의 대사를 하기도 한다.
청운각이라는 대형 요정을 운영하며 남동생 이화룡의 자금지원을 해준다. 실제 대본에도 이름이 따로 안나오고 '이화룡의 누이'로 나온다. 그도 당연한 것이, 청운각은 실존하는 요정인데, 문제는 너무 유명하다는 것. 이곳의 주인은 조차임이라는 여자로,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고, 자기가 죽으면서 문을 닫고 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성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화룡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이화룡의 누이는 일제강점기 유명 요정 명월관의 이름을 똑같이 딴 (신) 명월관을 운영했고 이 명월관도 매우 유명한 요정이었다.
문인들이 아닌 일반 시민. 만물상, 구두닦이, 달러 환전상, 잡화상 등을 하며 매회 등장하며 그 시기의 일반인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모습을 그리는 역할이다. 극 중 초반에는 변변한 가게도 없이 길바닥에서 장사를 했지만 8,9년간 돈을 착실하게 모았는지 후반부엔 다들 버젓한 가게에서 사업을 운영한다.
어떻게 보면 명동백작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들. 다방 모나리자와 술집 포엠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으나 돈을 제 때 지불하는 문인들은 열에 하나로 죄다 외상을 했기 때문에 4년도 못가서 둘 다 망해버렸다. 모나리자 상황을 보여주는 극 중 대사.
마담 : 아이구 내 팔자야. 손님 열 중에 아홉은 엽차만 마시다 가는 금붕어족이구, 커피 마시는 열명 중 아홉은 외상이고, 또 열에 아홉은 제정신이 아니니....
극에서 모나리자가 망한 이후로 남대문으로 가 수입 양품점을 하는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론 양품점이 훨씬 나을것이다.

4. 주요 무대

1951년 6.25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서울에 개업한 다방. 이봉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1955년 동방싸롱이 생긴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방쌀롱으로 이동해서 경영난을 겪게 된다. 결국 1955년 폐업.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명동에 세운 동방문화회관 1층에 만들었던 다방. 문인들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연극, 미술 쪽의 문화예술인들도 많이 출입을 해 항상 활기찼다. 이봉구, 박인환, 김수영, 김관식, 이해랑, 김승호, 주선태, 강창원, 윤용하 등 많은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동방쌀롱이 개업하고 나서 다른 다방에 있던 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고 하는데 그 전처럼 다방 마담 눈치를 보며 하루종일 앉아있고 외상하는 걸 안 해도 되었기 때문. 그러나 김동근이 사고로 사망하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연극연출가 이해랑이 사비를 털어 인수 했으나 1년도 채 못가 58년경에 문을 닫는다.
공초 오상순이 항상 나와 있었던 다방. 오상순을 찾아서 많은 문인들과 문학 청년들이 모여들자 ‘청동문학’이라는 책을 묶어내기도 한다. 오상순을 따르던 사람들을 청동문학파라고 하는데 시인 구상, 이근배 등이 있다.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등 주로 문인들이 드나들던 다방으로 분위기가 동방싸롱과 대조를 이루었다. 문단의 거물들이 활동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나이대가 어린 문인들은 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동리, 조연현 등은 극중에서 비중이 없기 때문에 문예쌀롱은 극중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위스키 시음장. 문인들이 술을먹기 위해 드나들었던 곳으로 지나친 외상으로 인해 몇 년 안가 문을 닫는다. 극 중에서 전혜린과 이봉구의 대화에서 포엠의 흥망성쇠를 알수가 있는데 이봉구가 전혜린에게 “포엠은 망했어. 참 혜린이 있었을 때 포엠이 있었던가?”라는 대사를 한다. 전혜린이 독일 유학을 간 것이 1955년, 귀국한 게 1959년이니 그 4년 안에 포엠이 만들어졌다가 경영난으로 폐업한 것. 채 4년을 못 버텼다.
1953년에 생긴 술집.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씨가 운영했다. 모나리자, 포엠, 동방쌀롱 등이 망하면서 극중 후반에 비중이 높아진다. 은성은 1973년까지 운영되었기 때문에 후속작 '지금도 마로니에는' 에서도 등장한다.[10][11][12][13]
문인들이 많이 모였던 다방으로 오후 3시가 되면 원고를 청탁하는 사람, 일감을 찾는 문인들로 만원을 이뤘다. 집에는 전화가 거의 없었던 시절, 문인들의 인력시장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다만 극 중에선 지나가는 말로 언급될 뿐이다.
주로 클래식만 틀던 다방. 클래식을 듣고 싶어 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들렀는데 전혜린과 김수영 등이 단골이었다. 갈채다방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말로 언급될 뿐이다.

5. 기타

홈페이지는 아직도 운영 중이며, 다시보기는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촬영은 부천시에 있었던 '부천 판타스틱스튜디오' 일명 야인시대 세트장에서 촬영을 했다. 그러나 관리상의 문제로 2012년 폐장을 해서 아쉽게도 가볼 수는 없고 사진 자료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박인환 문학관에 1950년 당시 명동의 거리를 재현하긴 했으나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세트장에 비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축소된 규모로 제작됐다.
이 드라마에서 절친으로 나오는 김수영과 박인환의 역을 맡은 이진우와 차광수는 이듬해 MBC에서 방영한 제5공화국에서도 각각 절친 사이인 허화평과 허삼수 역으로 나온다...

제작비의 한계가 있어선지 배우들 돌려막기가 있었는데 짧은 씬이기는 하나 신상사역의 배우가 젊은 이중섭을 연기하기도 했고, 김관식의 부인이었던 방옥례 역의 배우 또한 다른 역으로 나왔다

극중에서 중립이나 상식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인 배우 정보석이 현대적인 시각의 의견을 전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고 직접 해설을 얻는 장면도 넣어 역시 교육방송이다 할만한 깊이를 보여주었지만 각 등장인물들의 흑역사를 미처 보여주지 못한것은 옥의 티라고 할만 하다. 특히나 서정주의 친일 행적이라든지 정권에 굴복한 모습 등을 굳이 설명치 않고 넘어간 것이 그러하다.[14] 게다가 대놓고 기회주의자였던 노천명의 경우엔 마치 노천명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처럼 나오기 까지 한다. 그 외에 친일 행적이 명확히 밝혀진 최승희, 노천명 등 친일파들에 대해선 "예술가들은 예술로 평가해야 한다"며 그들의 예술적 성과를 그런 행적 때문에 훼손하는 것이 정당하냐는 발언까지 등장한다.

그 외에 소설가, 문학가 등이 다방, 술집에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외상으로 얻어먹어 다방과 술집을 망하게 한 것을 예술가적 낭만(...)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1] 야인시대 등에도 나왔지만 1950년대 당시 명동은 이화룡, 신상사 등의 본거지 중 하나였고, 이화룡도 나름 문화계에 남긴 업적이 있기 때문에 명동백작에 거론될 만한 자격은 있다.[2] 대학 교수, 문학평론가, 생존한 인물 등[3] 정확히 말하면 부산에서 대구까지 가는 차표를 구하는데 아버지의 유품을 팔아먹은것. 그 후로 대구에서 서울까지는 어찌어찌해서 온것 같다.[4] 이봉구, 전혜린, 오상순, 김관식 등[5] 정확히 말하면 김수영 혼자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다.[6] 이 코스를 일명 KS라고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7] 의외의 케미인 부분인데 상극이라고 할수 있는 둘이 서로의 시 한수씩을 읊더니 절친이나 다름없게 된것이다... 심지어 김관식은 다른 문인들이 아무리 훌륭한 선배들이라 할지라도 할말은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김수영만큼은 굳건히 인정하거 남다른게 있다며 높이 사주기까지 했다. 이에 김수영이 김관식의 시를 읊으며 화답하자 그 장난끼 많던 김관식이 눈물흘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8] 술취한 김관식이 길가던 이화룡을 다짜고짜 붙들고 주정을 늘어놓는 장면이 있는데 관대하게 넘어가준다.[9] 이정재가 했던 정치깡패일[10] 명동 유네스코 빌딩 앞에 은성주점터라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11] 이봉구 작가가 워낙 좋아하고 자주가서 별명이 봉구주점이었을 정도였다고 하며, 변영로 시인 역시 항상 지정석이 있다고 할만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봉구는 그의 저서인 <명동 20년>에서 ‘은성주점에서 거의 밤새워 매일 밤 술을 마셨지만 술값을 지불한 일이 없고 달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 <명동 엘레지>에서도 은성주점에서의 자신의 사생활적 체험과 서정취향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로 은성주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달랐다.[12] 이러한 사연때문에 최불암씨는 시인 김지하 등 많은 문인, 예술인과의 교분이 있다[13] 여담으로 최불암 씨는 어머니가 타계하신 뒤 은성의 외상장부를 손에 넣고 (그동안 밀린 엄청난) 외상값으로 부자가 될 거란 생각을 했었지만, 막상 장부를 펼쳐보니 장부의 내역은 모두 암호로 되어 있었다고. 그것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14] 이후의 모습은 이후의 이야기니 그렇다 할 순 있지만 친일 행적은 비중 때문이더라도 그냥 넘어간 게 이상할 정도다. 이화룡의 경우엔 비슷하게 미화가 되긴 했지만 깡패는 깡패다라는 정보석의 해설이 있었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