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오언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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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97-98 · 1998-99 | |||
| | 1998 FIFA 월드컵 신인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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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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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98 | ||
수상 지네딘 지단 | 2위 마이클 오언 | 3위 호나우두 |
2001 Onze d'Or | ||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지네딘 지단 | 마이클 오언 | 로베르 피레스 |
마이클 오언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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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앰버서더 | ||
Liverpool Football Cl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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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 이름 | 마이클 오언 Michael Owen | |
본명 | 마이클 제임스 오언[1] Michael James Owen | |
출생 | 1979년 12월 14일 ([age(1979-12-14)]세) | |
잉글랜드 체스터 | ||
국적 |
(
) | |
신체 | 키 173cm[2] / 체중 67kg | |
직업 |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윙어 / 은퇴) 축구 해설자 | |
주발 | 오른발 | |
소속 | <colbgcolor=#d00027> 선수 | 리버풀 FC (1991~1996 / 유스) 리버풀 FC (1996~2004) 레알 마드리드 CF (2004~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9~2012) 스토크 시티 FC (2012~2013) |
국가대표 | 89경기 40골[3] (잉글랜드 / 1998~2008) | |
SNS |
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현재까지 리버풀 소속 선수 최초이자 마지막, 그리고 잉글랜드 국적 선수의 마지막 발롱도르 수상자로 남아있으며[4] 지금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역대 발롱도르 수상자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말년을 보낸 축에 속한다.[5][6]
2.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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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국가대표 경력
오언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난 수준이었다. 이미 U-17, U-19 등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기에 스티븐 제라드보다도 이른 나이에 성인 무대에 데뷔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오언은 글렌 호들이 이끄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튀니지와의 1차전에 교체로 출전해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되었다.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오언은 또다시 교체로 출장했으며 동점골을 넣어 18세 190일로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7] 하지만 팀은 2:1로 패해 빛이 바랬다. 루마니아전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오언은 잉글랜드가 콜롬비아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을 치를 때 선발로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경기에서 승리했고, 오언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도 선발로 나섰다.
아르헨티나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6분 선제골로 앞서나간 와중에 오언은 페널티 구역에서 로베르토 아얄라에 걸려넘어졌고,[8] 앨런 시어러가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서 동점골을 기록했다. 16분, 오언은 개인기로 전진 쇄도해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며[9] 잉글랜드를 하드 캐리했다. 물론 잉글랜드는 연장 접전 끝에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패해 대회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언은 역전골의 임팩트로 원더 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세상은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뒤를 이은 축구천재의 등장이라고 들썩였다. 또한 이 골로 오언은 축구팬들에게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오언은 UEFA 유로 2000 예선전 초반에 잉글랜드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잉글랜드는 예선전 기간 동안 부진했고, 호들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케빈 키건이 감독이 되었다. 1999년 9월 4일, 오언은 6-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웸블리 첫 골을 기록했다.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 세 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골을 넣는데 그쳤으며[10]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일찍 떨어졌다.[11]
앨런 시어러가 은퇴하고, 스벤예란 에릭손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오언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그는 뮌헨의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독일과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6골을 넣었고, 잉글랜드는 예선전에서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2002년 4월, 그는 파라과이와의 친선전에서 부상으로 빠진 주장 데이비드 베컴을 대신해 잉글랜드의 주장 완장을 찼다. 오언은 1963년의 바비 무어 이래 최연소 주장이었고, 이후에는 베컴이 부재할 경우 주장을 찰 부주장으로 정식 활약했다. 제주도 에서 열린 대한민국 경기서 선제골로 앞서 갔으나 박지성의 헤더 동점골로 1:1로 무승부에 만족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무득점으로 침묵했다. 스웨덴과 첫경기 캠벨 헤더 선제골로 앞서가더니 알렉산드르손의 동점골로 비겼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걸려 넘어지는 할리우드 액션을 보여서 페널티 킥을 유도했고 베컴의 페널티 킥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12] 나이지리아 마지막 경기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스웨덴 잉글랜드 사이좋게 1승2무로 기록했으나 다득점으로 스웨덴 1위 잉글랜드가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오언은 덴마크와의 16강전에서 기어이 첫 골을 넣었으며,[13]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잉글랜드의 선제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했지만 [14] 본인의 실력을 다시금 입증했다.
이후 UEFA 유로 2004 예선전에서 5골을 기록했지만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또다시 골을 신고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3분만에 골을 기록해 잉글랜드 최초로 4번의 주요 대회 본선에서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했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5골을 넣었다. 2005년 5월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콜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팀 경기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2005년 11월, 오언은 숙적 아르헨티나와 치른 친선경기에서 막판에 2골을 추가해 잉글랜드에게 3-2 승리를 선사했다. 2006년 5월 25일, 오언은 벨라루스와의 친선경기에서 경기를 치러 2006년 독일 월드컵과 현장 복귀를 앞두고 몸상태 점검을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주장을 맡아 61분을 뛴 후 교체되어 나갔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파라과이와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1, 2차전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선발로 출전했지만,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개인 80번째 출전 경기이자 스웨덴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 출전한 오언은 전반 1분경 오른쪽 무릎이 틀어지는 중상으로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나갔다. 6월 21일에 진행한 부상 진단을 통해 오언 무릎의 전방 십자 인대가 파열된 것으로 밝혀졌고, 조기 귀가 조치가 내려져 대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경기가 오언이 뛴 메이저 대회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후 오언은 알바니아와의 경기에 복귀한 후, 신축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와 에스토니아와의 UEFA 유로 2008 예선전을 앞두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저는 예리해진 것 같고, 기회를 잡았을 때 문전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라고 감정을 드러냈다. 오언은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해 에스토니아전에서 득점을 올렸고, 게리 리네커가 종전에 세웠던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공식대회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 9월 12일, 오언은 3-0으로 이긴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2골을 추가해 구 웸블리 경기장과 신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올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유로 2008 본선진출에 실패하면서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경질되었고 파비오 카펠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오언은 파비오 카펠로 부임 후 2008년 3월의 프랑스와 치른 친선경기에 한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는데 그쳤고 더이상 삼사자 군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2009년 3월, 오언은 자신이 자주 부상을 당하는 이유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부상 때문이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상에서 재활하는 와중에 조급히 현장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인정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플레이 스타일은 스피드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주력부터가 최고 수준이며 볼을 가지고 움직일 때 쓸데없는 움직임이나 리스크 없이 효율적으로 볼을 운반하기 때문에 현란한 발동작 없이도 수비수 한둘쯤은 무리없이 제치고[15],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슈팅해 강한 킥력 없이도 최고의 골 결정력을 보여줬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서 작은 키로도 헤더골을 많이 넣었다. 오언 하면 치달을 많이 떠올리지만 짧고 간결한 터치, 그리고 이어지는 후속동작의 테크닉도 좋았고 순간적인 센스도 뛰어난 그냥 기본기 자체가 탄탄한 타입이었다.그러나 오언은 잦은 부상으로 악명이 높았고[16] 그 때문에 2006년 월드컵에서 당한 십자인대 부상 이후 본인의 장기이던 속도를 잃어버렸고 잦은 부상의 여파로 30대를 넘어서자 급격한 기량 저하를 보이고 만다.[17]
은퇴하기 전 마지막 약 6년 동안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머리에서는 '지금 스프린트를 해서 공간 침투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동시에 본인의 몸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머리의 다른 한쪽에서는 뛰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고... 결국 이처럼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부상 위험 때문에 그러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여[18] 점점 폼이 떨어졌고 나중에는 뛰어들어가면 되는 포지션 자체를 안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 UEFA 인터토토컵: 2006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9~2012)
- 프리미어 리그: 2010-11
- 풋볼 리그컵: 2009-10
- FA 커뮤니티 실드: 2010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001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1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98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8 (리저브)
- UEFA 슈퍼컵 MOTM: 2001
-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7-98
- PFA 올해의 팀: 1997-98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1997-98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8년 8월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1997-98, 1998-99
- 프리미어 리그 10시즌 어워즈 (1992-93–2001-02)
- 내국인팀: 2002
- FA컵 결승전 MOTM: 2001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1998
- FIFA 100: 2004
- ESM 올해의 팀: 2000-01
- RSSSF 올해의 선수: 2001
- 옹즈 드 옹즈: 1998, 2001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골든풋: 2017
5.3. 개인 기록
- 리버풀 FC 최연소 프리미어 리그 선발 출전: 17세 148일
- 프리미어 리그 최연소 해트트릭: 18세 62일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득점: 18세 190일
5.4. 출전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6/97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2 | 1 | 0 | 0 | 0 | 0 | 0 | 0 |
1997/98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36 | 18 | 0 | 0 | 4 | 4 | 4 | 1 |
1998/99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30 | 18 | 2 | 2 | 2 | 1 | 6 | 2 |
1999/00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27 | 11 | 1 | 0 | 2 | 1 | 0 | 0 |
2000/01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28 | 16 | 5 | 3 | 2 | 1 | 11 | 4 |
2001/02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29 | 19 | 2 | 2 | 0 | 0 | 10 | 5 |
2002/03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35 | 19 | 2 | 0 | 4 | 2 | 12 | 7 |
2003/04 |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29 | 16 | 3 | 1 | 0 | 0 | 6 | 2 |
2004/05 | 레알 마드리드 | 라리가 | 36 | 13 | 4 | 2 | - | - | 5 | 1 |
2005/06 | 뉴캐슬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1 | 7 | 0 | 0 | 0 | 0 | 0 | 0 |
2006/07 | 뉴캐슬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3 | 0 | 0 | 0 | 0 | 0 | 0 | 0 |
2007/08 | 뉴캐슬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29 | 11 | 3 | 1 | 1 | 1 | 0 | 0 |
2008/09 | 뉴캐슬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28 | 8 | 2 | 0 | 2 | 2 | 0 | 0 |
2009/10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9 | 3 | 1 | 0 | 4 | 2 | 6 | 4 |
2010/1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1 | 2 | 2 | 1 | 1 | 2 | 2 | 0 |
2011/1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 | 0 | 0 | 0 | 2 | 3 | 1 | 0 |
2012/13 | 스토크 시티 | 프리미어 리그 | 8 | 1 | 1 | 0 | 0 | 0 | - | - |
[A] 진한 부분은 리그 최고 득점 기록이다.
6. 논란
6.1. 할리우드 액션
1998년과 2002년에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상대로 시뮬레이션 액션을 해서 페널티킥을 얻어내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는 아르헨티나에 패배를 안겨주며 아르헨티나의 조별 리그 탈락에 크게 일조했다. 1998년에는 로베르토 아얄라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부당하게 페널티 킥을 얻는 바람에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비난 받았다. 2002년의 행동은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꼽혀서 KFA 홈페이지의 경기규칙강좌에서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 사례로 사진이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후 오언은 1998년과 2002년의 시뮬레이션 액션을 모두 스스로 인정했다.사실, 마이클 오언의 페널티 킥이 잘못 되었다면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가 따지려다가 말았고,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오언의 연기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당시의 심판이 명심판으로 유명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였기 때문에 콜리나 심판이라면 제대로 봤겠지? 하고 믿은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또 이 당시 VAR만 있었어도 시뮬레이션 액션이 잡힐 수도 있겠지? 라는 이야기도 나왔을 수도 있었다.
6.2.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 반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오언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소속팀 리버풀의 동료인 에밀 헤스키, 제이미 레드냅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고, 이어서 프랑스 대표팀이자 첼시 FC 소속의 에마뉘엘 프티도 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기사[20]6.3. 방송인 성희롱
영국 축구선수중에 사생활이 막장인 선수가 많지만, 오언은 결혼 후 별다른 스캔들이나 추문이 없이 조강지처와 4자녀를 두는 등,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왔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21년 6월, 방송 출연중 알게 된 리얼리티쇼 여성 진행자 레베카 제인에게 계속 누드사진을 요구하는 문자를 보냈다고 보도되어 # 망신을 당했다.7. 여담
- 리버풀에서 축구를 시작했지만, 정작 오언 본인은 리버풀 최대의 라이벌인 에버튼의 팬이다. 같은 리버풀 유스 출신의 제이미 캐러거도 에버튼 팬이다. 에버튼 역시 리버풀에 위치한 축구 클럽이다.
- 11-12 시즌에는 리버풀 자선경기와 개리 네빌의 은퇴 경기를 모두 뛰었다. 또한 제이미 캐러거의 은퇴 경기도 뛰었다. 제라드도 집에 트로피와 유니폼 장식장에 오언의 레알 마드리드 CF 셔츠가 가운데에 장식되어있는 것 등을 보아[22]후에 제라드의 은퇴 경기에도 출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원래 같은 시기 유스생활을 보냈고 서로 친해서 오언의 이적 후에도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23]
- 축구 외에도 경마, 사업, 부동산, 주식 등의 재테크를 하고 있고, 스타성이 굉장하기 때문에[24] 이로 인해 데이비드 베컴에 이어 영국 출신 현역 축구 선수 중 재산 2위를 자랑 중이다. 특히 손꼽히는 경마 매니아이며, 부인 또한 경마 관련 직종에 종사한다고 한다. 모 인터뷰에서 그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무엇인지 묻자 "경마 소식지"라고 답했던 적도 있다. 퍼거슨 감독도 경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둘이서 경마 이야기를 하는 때도 있다. 말 타는 걸 심하게 좋아하는데 돈까지 많다보니 마을의 일정 구역을 사들여서 말타고논다.
- 2013년 트위터에서 자신의 긴 부상경력을 조롱하며 퇴물이라고 야유하는 것에 분개해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너는 뭐였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받아쳤으나 상대편에서 니가 6년 동안 부상에서 신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나는 니 나라를 지켰다고 응수하자 조용히 잠수를 탔다. 본인 말론 19살 이후 몸이 100%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25]
- 은퇴 이후로는 경기 중계, 해설을 맡고 있는데 워낙 안티팬이 많아 쉴 새 없이 까이고 있는 중이다.[26]
- 2002 월드컵 때 한국에서의 우스갯소리로는 차두리와의 비교가 있었다. 당시 월드컵 참가 선수 중에 가장 스피드가 빨랐던 게 오언과 차두리였는데 둘의 차이점은 '오언은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지만, 차두리는 공보다 빠른 나머지 공 없이 혼자 뛴다'는 점이라고 한다.
- 2015년, 피파 온라인 3에 06년 월드컵 버전으로 재등장하였다. 높은 골 결정력, 빠른 발 등 리버풀에서의 전성기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런데 깨알같이 특성이 유리몸이다. 피파 온라인 4에도 국가대표 버전으로 등장하였다. 전작보다 실제 축구 구현률이 높아져 스트라이커중에서도 돋보이는 속력과 스트라이커 치고는 낮은 슛 파워, 높은 골 결정력 등이 있다. 다만 유리몸 특성은 사라졌다.[27]
- 초창기 대표팀 시절, 베컴의 롱패스+오언의 스피드 조합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고질적인 왼발 트래핑 문제로 수비수들에게 롱패스 받는 패턴을 읽히면서 철저히 마크당해 큰 재미를 보지못했다. 마치 지단+앙리의 프랑스처럼 말이다.
- 2016년에는 리버풀 국제 앰버서더로 선정되었는데, 데뷔 초기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걸 제외하면 그 뒤로는 끝없는 나락만을 보여주고 구단도 저버린 선수한테 앰버서더를 줬다고 까이고 있다. 한편 리버풀 앰버서더 임에도 불구하고 레알 마드리드 행사에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등과 참여 하기도 했다.
- 맨유에서 뛰었고 은퇴 후에도 맨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에게는 그다지 평가나 대우가 좋지 못한편이다.
- 2017년에는 이런 헛소리를 했다. 뭔 말이냐면... "카림 벤제마가 맨유로 안 가고 레알로 간 덕에 내가 맨유 갈 수 있었다. 벤제마 고마워^^"라는 사실상의 불꽃 패드립. 사실 본인이 벤제마의 대체품이었다는 발언이기 때문에 셀프 디스에 가깝다. 게다가 당시 친정팀 리버풀에서도 안받아줬기 때문에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려져 있으니. 물론 아무리 셀프 디스여도, 리버풀 앰버서더가 된 상태에서 할 말은 아니다.
- 펠레가 좋아했던 선수였다. 2000년대 초반 맨유를 방문했던 펠레가 가장 좋아하는 맨유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실수로 "넘버 10. 오언"이라고 답을 했을 정도였다.
펠레의 저주 ON2004년 펠레가 꼽은 세계 축구 스타 125인에 당당히 뽑혔고 리스트에 오른 선수 중에서는 4번째로 어렸다.
- 2019년 즈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팀을 떠난 이후, 최악의 행보를 보이고 있자, "지금의 맨유는 중위권 팀인 것 같다" 라고 독설을 날리면서, "이번 시즌에는 리그 6위도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사 원문[28]
- 더 마스크드 싱어 영국판 시즌3에 참가하였다.
- "6~7년 동안 축구를 싫어하게 됐다. 공이 내게 오지 않도록 숨었었다"라고 하였다.# 축구 선수로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
- 2024년 10월 20일 넥슨 아이콘 매치에 FC Spear 팀으로 출전하였다.
7.1. 가족
아버지 테리 오언은 1949년생 축구선수였고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1966년 에버튼 FC에서 축구를 시작해 19년동안 저니맨 생활을 했다. 형제사항으로는 4명의 형제자매가 있다.10대 시절부터 친구였던 루이스 본셜과 성인이 된 후 연인으로 발전해 오래 연애하고 2005년에 결혼했다. 자녀로는 2003년생인 젬마 , 2006년생 아들 제임스 , 2007년생 에밀리 , 2010년생 제시카가 있다.
이중 큰딸인 젬마는 18세에 자신의 수영복 브랜드를 런칭했고 직접 모델 역할을 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2022년 5월에는 누군가가 그녀를 다른 비키니모델과 헷갈려서 불륜이라는 가짜뉴스가 나기도 했다. 젬마는 러브 아일랜드에 출연하여 큰 화제가 되었는데,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와의 인터뷰에서 딸의 방송을 보기에 부끄럽긴 하다고 밝혔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9금 예능 프로그램이다. #
7.2. 외모
사진에서 보이듯 심각한 머리스타일을 고수하는데 그걸 청순함으로 커버해버리는 꽃미남 축구선수였으나, 시대를 지날수록 심각한 머리스타일이 발목을 잡아 아저씨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년미는 보여주는 중이다.8. 오언에 대한 헌사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축구선수가 누구였냐고요? 마이클 오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오언은 최고의 선수였거든요.”
케빈 더 브라위너
케빈 더 브라위너
“어렸을 때 오언 때문에 리버풀을 좋아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할 때도 오언처럼 하고자 했다.“
세르히오 아구에로
세르히오 아구에로
9. 같이 보기
1 제임스 · 2 G. 네빌 · 3 A. 콜 · 4 제라드 · 5 테리 · 6 캠벨 · 7 베컴 ⓒ · 8 스콜스 · 9 루니 10 오언 · 11 램파드 · 12 브리지 · 13 로빈슨 · 14 P. 네빌 · 15 킹 · 16 캐러거 · 17 버트 18 하그리브스 · 19 J. 콜 · 20 다이어 · 21 헤스키 · 22 워커 · 23 바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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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빈슨 · 2 G. 네빌 · 3 A. 콜 · 4 제라드 · 5 퍼디난드 · 6 테리 · 7 베컴 ⓒ · 8 램파드 · 9 루니 10 오언 · 11 J. 콜 · 12 캠벨 · 13 제임스 · 14 브리지 · 15 캐러거 · 16 하그리브스 · 17 제나스 18 캐릭 · 19 레넌 · 20 다우닝 · 21 피터 크라우치 · 22 카슨 · 23 월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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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maɪkᵊl dʒeɪmz ˈoʊᵻn/[2] 프리미어 리그 공식 프로필[3]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6위.[4] 리버풀 기준으로는 오언의 수상 이후 2005년 스티븐 제라드, 2008년 페르난도 토레스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3위에 그치고, 2019년 버질 반 다이크와 2022년 사디오 마네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2위에 그쳤다. 잉글랜드 국적 기준으로는 오언의 수상 이후 2005년 프랭크 램파드와 스티븐 제라드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각각 2위와 3위에 그쳤다.[5] 어린 시절 리버풀에서의 짦은 전성기를 끝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때부터 내리막이 시작되었고, 이후 뉴캐슬, 맨유, 스토크 시티 등을 떠돌고, 그 사이 잉글랜드 국대 커리어도 하향세를 겪게 되면서 그저 그런 커리어로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현역 때도 문제가 있었지만 은퇴 후에도 잇따른 실언으로 빈축을 사는 등 스스로의 행실 문제가 좀 있다.[6] 오언과 함께 발롱도르 수상자 중 가장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고 평가받는 인물로 파비오 칸나바로가 있다. 게다가 칸나바로는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말년을 보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벤투스 1기와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2006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를 수비수로서 모두 수상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에는 새로운 리그에서의 적응 실패와 30대 중반에 들어서며 신체 능력 저하로 인해 라리가에서 가장 쉽게 돌파당하는 수비수로 선정되어 버리면서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버렸다. 이후 유벤투스에 다시 복귀하지만 당시 나이가 만 36세로 이미 노쇠화 되어버린 상태라 수비진에서 구멍으로 전락해버리며 결국 소속팀의 암흑기를 불러와버렸고, 결국 2009-10 시즌 리그 7위를 차지해 버리며 칠벤투스화에 크게 일조하고 만다. 또한 이탈리아 국대 커리어도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주전 센터백으로 참가했지만 이탈리아의 광탈에 일조하고 만다.[7] 2022년 현재도 오언의 득점 기록은 역대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 부문 4위이다. 오언의 앞에는 펠레와 마누엘 로사스, 가비가 있다.[8] 사실 할리우드 액션이었다.[9] 2013년에 이 골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골 3위에 올랐다.[10] 전반 막판에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2:1을 만드는 추가골을 넣었다. 그리고 후반전에 두 골을 먹으며 팀은 2:3으로 패배했다.[11]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에게 2대 0으로 이기다가 2:3으로 역전패를 당한 것이 패착이었다. 독일을 1:0으로 이기긴했지만 조별리그를 2위로라도 통과하려면 루마니아에 최소한 비겨야했다.[12] 이 패배가 빌미가 되어 아르헨티나는 사기가 꺾였고, 결국 스웨덴을 밀어붙였음에도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3위로 처진다.[13] 전반에만 퍼디난드 오언 해스키 골폭죽으로 3:0 승리[14] 다만, 지금도 회자되는 히바우두의 동점골과 호나우지뉴의 프리킥 결승골에 팀은 1:2로 역전패.[15] 가끔은 페인트 동작도 잘 쓴다[16] 많은 사람들이 오언이 너무 어릴 때부터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유리몸이 되었다고 얘기하는데 오언 본인은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만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도 부상을 달고 산 것(축구선수였다고 함)을 보면 자신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부상이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또한 스피드를 주무기로 삼는 플레이 스타일 상 부상을 워낙 당하기 쉬웠던 면도 한몫했다. 그래서 스피드가 죽어 버리니 다른 능력도 죽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페르난도 토레스 등이 있다.[17] 비슷한 시기 1979년생 동년배 선수들인 디에고 밀리토와 디에고 포를란이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당시 오언의 급격한 기량 저하로 인한 몰락은 상대적으로 큰 아쉬움을 남겼다. 밀리토는 레알 사라고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9/10 시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여 세리에 A 클럽 사상 최초의 트레블에 크게 일조하고, 밀리토 개인으로서도 세리에 A 득점 2위를 포함해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 올해의 공격수상,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 2010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등 각종 개인상을 휩쓸었다. 마찬가지로 포를란도 2007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적 이후 2009-10 시즌 소속팀의 유로파 리그 우승과 조국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2010 남아공 월드컵 4위, 코파 아메리카 2011 우승에 크게 일조하고, 포를란 개인으로서도 2008-09 시즌 생애 두 번째 라리가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 2009-10 시즌 유로파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회 골든볼, 베스트팀, 토너먼트의 골 선정, 코파 아메리카 2011 대회 베스트팀 선정, 2009년, 2010년 우루과의 올해의 축구 선수 등을 수상하였다. 반면 오언은 급격한 몰락으로 2009년과 2010년 동시기 이 두 선수와 비교했을 때 활약상이 적은 편이었다.[18] 달리는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한다.[A] [20] 참고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은 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21] 참고로 이 때 리버풀 유스는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등을 포함해 우수한 선수를 한꺼번에 대거 배출해서 황금세대라고 불린다.[22] 맨유의 셔츠는 절대 걸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루니의 셔츠도 국가대표팀 셔츠로 장식되어있다.제라드 본인도 맨유와 관련된 것은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23] 이와 별개로 오언이 맨유로 간 것은 정말 맘에 들어하지 않는 듯 하다. 제라드의 아스톤 빌라 감독 부임 이후 첫 인터뷰 당시에 오언이 안필드의 분위기는 압도적이며 자기는 안필드 원정을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하자 제라드가 나도 맨유에서 뛰었으면 안필드 원정 가는게 싫었을거라고 받아쳤다.[24]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에도 유니폼 판매량 순위는 항상 상위에 랭크했었다.[25] 여담으로 퍼거슨 감독은 오언이 리버풀 유스일 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아직 어릴 때부터 계속 출장하는 것을 보고 성장이 완료되지 않은 선수를 혹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하게 되면 부상이 빈발하는 유리몸이 되기 쉽다.[26] "골을 넣는 선수가 필요해요. 그래야 이기죠" "골 포스트를 넘어갔다면 골이 됐을텐데요" 이런걸 말하니 까인다.[27] 다만 유리몸 부분은 피지컬이 절망적으로 낮게 책정되어서 없어도 부상을 잘 당한다.[28]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시즌 맨유는 후반기에 반등하면서 리그 3위로 챔스 진출권을 따냈다.
분류
- 1979년 출생
- 체스터 출신 인물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선수
- 1996년 데뷔
- 2013년 은퇴
- 공격수
- 축구 선수 자녀
- 축구 해설자
- 리버풀 FC/은퇴, 이적
- 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스토크 시티 FC/은퇴, 이적
-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잉글랜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4 참가 선수
- 잉글랜드의 FIFA U-20 월드컵 참가 선수
- 1997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말레이시아 참가 선수
- 발롱도르 수상자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수상자
-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수상자
- FIFA 월드컵 영플레이어상 수상자
- 리버풀 엠버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