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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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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와 사상
2.1. 초년기2.2. 대학생 시절2.3. 조교 생활2.4. 천재 철학자라는 명성2.5. 『존재와 시간』의 탄생2.6. 전회2.7. 나치 참여2.8. 총장직 사퇴 이후2.9. 강의 금지 처분2.10. 대학 복귀 후부터 말년까지
3.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4. 실존주의와의 관계5.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1. 개요

마르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문서.

2. 생애와 사상

2.1. 초년기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 9월 26일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 메스키르히에서 성당지기[1] 프리드리히 하이데거와 그 아내 요한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메스키르히는 독일 최남단에 자리한 시골로, 거의 전 주민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골이었는데, 하이데거가 살았던 곳마저 교회 관사였기 때문에 그의 유년 시절은 기독교의 영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동생 프리츠(Fritz Heidegger)와 함께 교회 일을 종종 도왔으며, 둘은 교회를 장식할 꽃을 꺾어 오기도 하고, 신부님의 심부름도 하고, 교회 종도 쳤었다. 특히, 교회 종을 치는 일은 어린 하이데거에게 유독 특별한 경험이었다. 유년 시절의 이런 기억들은 이후 하이데거의 사상과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에서 시민학교[2]를 졸업한 후 진로를 걱정하게 되었는데, 하이데거의 집은 당시 수준으로 볼 때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비로 상급 학교에 보낼 만큼 넉넉한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하이데거의 재능을 높이 산 메스키르히 주임 신부 콘라트 그뢰버의 주선으로 가톨릭 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된다.[3] 장차 성직자가 된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하이데거가 성직자가 되는 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하이데거의 부모들이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이데거는 1903년 콘스탄츠의 가톨릭 신학생 기숙학교에 들어가 그 도시의 성 콘라트 김나지움을 다니게 되었다. 신학생 기숙학교는 비록 엄격했지만 하이데거는 훗날 그런 생활이 즐거웠다고 회상할 것이다. 1906년에는 프라이부르크의 주교 직할 학교인 성 게오르크 신학생 기숙사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유명한 베어톨트 김나지움을 다녔다. 그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리란 포부를 품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대학 입학자격시험을 마치면 바로 예수회에 입회할 생각을 가졌었다. 그리하여 1909년 마침내 그는 티지스[4]에 위치한 예수회에 수련 수사로 입회했다. 하지만 2주일 간의 수련 기간이 끝나자마자, 하이데거는 그곳을 갑작스레 떠난다. 후고 오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심장 문제를 호소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귀가 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2.2. 대학생 시절

그렇다고 성직자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데거는 190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과에 입학해서 겨울학기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경제적 이유에서였을 수도 있다. 그의 장학금은 신학 공부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5] 어쨌든 하이데거는 이곳에서 평생 "스승"이라 부를 카를 브라이크(Carl Braig)를 만난다. 브라이크는 반모더니즘 신학자 중 한 사람이으로서 『존재에 관하여. 존재론 개요』를 저술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이 책을 통해 전통적 존재론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을 숙달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젊은 하이데거는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며, 당대의 급속한 변화와 순간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경향을 데카당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흔했던 보수적 문화 비판이었다.

사실 하이데거는 이보다 앞서 1907년에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박사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봤었고 이때부터 존재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브랜타노에 따르면 표상이란 순수하게 내적인 무엇이 아니며 언제나 '어떤 것'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 사물 ㅡ 낱낱의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 자체는 없으며, 사랑의 수많은 개별 사건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브렌타노는 개념적 사물들에 그 어떤 실체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이데거의 연구는 브렌타노를 거쳐 후설에 이른다. 후설의 『논리 연구』는 하이데거의 개인적 숭배서가 되었다. 그는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을 2년 동안 자기 방에 놓아두었는데, 그 사이 이 책의 대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하이데거에게 만큼은 범상치 않은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자연과학의 발달은 철학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그들은 철학적 논리라는 것도 '주관 심리 내의 자연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기에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후설의 반박은 논리의 심리적 과정은 심리적 행위에 속하지만 그 논리의 결과는 심리적 행위와 무관하게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논리학이 심리적 행위에서 출발했음에도 논리는 그 유효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는 자신의 최초 논문 「논리학에 관한 최근 연구들(1912)」에서 심리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의 "운용을 위한 토대"라고 말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지 3학기가 지났을 때 그의 심장에 다시 이상이 나타났다. 하이데거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몇 주간 완전한 휴식을 취하려고 1911년 여름, 메스키르히로 돌아왔다. 아마도 과로한 탓이겠지만, 어쩌면 그릇된 공부에 대한 신체의 저항일지도 몰랐다.[6] 그는 신학보다는 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지만 장학금 때문에 한동안 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하이데거는 힘든 고민 끝에 신학을 포기하고 철학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성직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가톨릭 철학자로서 경력을 착실히 쌓아나간다면 철학을 공부해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심지어 교사가 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며 곧 있을 겨울학기에 수학과 물리학 및 화학 과목을 등록했다. 물론 그러면서 철학과에서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3년 하이데거는 지도교수 아르투어 슈나이더(Arthur Schneider) 밑에서 논문 「심리학주의에서 판단의 이론」을 쓴다. 그는 이 논문으로 철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교수자격 논문을 준비하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하이데거는 10월에 소집됐지만 심장병으로 인해 '제한적 복무'로 판정 받고 징집 유예 처분이 됐다. 그는 다시 논문 작업에 열중한다. 원래 하이데거는 '수 개념의 본질'을 연구하려고 했으나, 그 과정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텍스트[7]를 만났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개개 사물이란 시간과 공간의 특정 지점에서 일회적인 무엇이다. 이런 개별자를 "하이케이타스(haecceitas)"라 부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물들의 '이haec ㅡ 지금ce ㅡ 여기 있음itas', 즉 '지금 여기 이것'을 뜻한다. 그것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바뀜에 따라 무한한 개별성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자체 소진될 수 없는 풍요로움이다. 단일 의미로만 사용되는 개념으로는 이러한 현실의 풍요로움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독특한 의미 역동성을 지닌 '생동적 언술'만이 그러한 근본 구조를 나타낼 수 있다. 이 같은 생각을 적은 교수자격 논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지도교수 하인리히 리케르트에게 제출했고, 하이데거는 1915년 교수자격 심사에 통과했다.

교수자격 논문을 마친 하이데거는 다시 한번 군에 소집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심장 질환의 징후가 나타난다. 1915년 가을, 그는 바덴 주 뮐하임 군병원에 4주간 입원하며, 그 후 예비 전력인 국민군의 일원으로 프라이부르크 우편물 검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적국이나 중립국을 왕래하는 수상한 우편물을 검열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는데, 보통 징용된 여자들이나 전투 능력이 없는 남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하이데거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이곳에서 1918년 초까지 복무하며 남는 시간은 학문에 쏟아붓는다.

2.3. 조교 생활

1916년 에드문트 후설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왔을 때, 하이데거는 후설의 눈에 단순한 가톨릭 철학자로 비쳤고, 그렇기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1년 만에 후설은 하이데거를 재발견했고,[8]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가 될 수 있었다.[9] 그 무렵 1차 대전에서 독일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1918년 하이데거는 결국 국민군 병사로 호출당해 호이베르크 군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후설은 이즈음 해서 하이데거를 마치 아들과 같이 여겼기 때문에 지극히 사적인 마음을 담은 편지를 통해 함께 철학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그해 8월 말, 서부 전선 기상 관측대[10]에 소속되어 전투 중 독가스 투입을 대비해 기상 관측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11월, 연합군에 의해 독일이 패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 다시 철학에 몰두했다.

전후 하이데거의 최초 강의는 1919년 초 임시 학기에 개설됐다. 이 젊은 조교는 첫 강의에서부터 후설을 넘어서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우선 후설의 말을 거론한다. "'직관'에서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 모든 것은, '~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 말에 동의하나, 후설이 주변 세계를 너무 이론 요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실제 체험'에서 이론 요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예외적 경우에 속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탁을 바라볼 때, 갈색 평면이나 네모 모양이나 높은 위치 등으로 요소를 분석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탁을 볼 때 자신의 키에 비해 너무 높은 교탁을 보거나, 그래서 그 위에 놓인 책을 보려는 순간 성가심을 느낀다. 즉,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적인 것(das Bedeutsame)'을 사태 파악이라는 사유상의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서 직접적으로 얻는다. 직관으로 요소를 받아들이고 반성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주변 세계의 총체적 의미가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체험이란 그렇게 주변 세계로부터 직관적으로 주어진 의미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weltet)'한다.

'교탁 체험'이라고 불리는 이 인상 깊은 예시에서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찾아볼 수 없다. 세계는 분명한 요소들로 나누어져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체험의 근원적 태도'에서 '주변 세계'를 통해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세상을 주체의 인식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의 인식론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중 온갖 것을 경험했을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마저 숨을 죽일 만큼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웅장한 옛말과 비대해진 체계, 공허할 뿐인 학문적 난문들이 거친 손길로 치워지고, 그 대신 아주 기본적인 물음이 다시 제기된다. 우리의 주변 세계, 즉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주변 세계로 이해하기'의 철학은 논쟁적이면서 도발적이다. 몇 년 후 하이데거는 좀 더 장중한 어조로 이것을 표현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서둘러 달려가는 가장 가까운 것, 바라볼 때마다 새로이 낯설어지는 가장 가까운 것으로의 귀환."[11]

이 시기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 부딪치는 가톨릭 체계와 마침내 결별을 선언했다. 그것은 가톨릭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이데거는 강사 생활에서 얻는 돈으로 부족하나마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재단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을 더 이상 옹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 철학은 인간의 불변성을 고려하지는 않지만 궁극적 의미 연관의 불변성은 요청한다. 그러나 딜타이가 "의미와 의의는 인간 내에서야 그리고 그 역사에서야 비로소 생성된다"고 말했듯이, 철저하게 파악된 역사성의 이념은 일체의 보편주의적 유효성 요구를 파괴하고 만다. 이러한 통찰에 근거할 때, 그에게 있어서 기존 중세 가톨릭 철학의 방법은 문제적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12] 이제 그는 그 자신만의 철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개별자의 체험, 바로 "현사실적 삶(das faktische Leben)"으로부터의 철학하기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런 '현사실적 삶'의 대부분은 '염려(Sorge, 마음씀)'다. 따라서 그것은 삶의 불안으로부터의 철학이며, 방법적으로 고조된 자신의 불안정한 삶에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추락(absturz)하면서 추락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제부터 이러한 철학에 온 정신을 기울여 열중한다.

1920년 봄에는 후설의 생일 파티에서 야스퍼스를 만났다. 둘은 갈수록 직업 학원처럼 되어 가고 있던 당시의 대학 현실에 함께 분노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합쳤다. 하이데거가 마음에 든 야스퍼스는 급기야 그에게 자신의 집에 며칠간 머물면서 함께 철학적 대화를 마음껏 나누어보자고 권했다. 하이데거는 이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2년 9월의 이 며칠간의 대화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집중적인 철학적 사유, 우호적이고 느긋한 분위기, 함께 출발하고 시작해보자는 돌연한 감정. 야스퍼스가 회고록에서 밝히듯 이 모든 대화는 그에게 "강렬"했고, 둘은 금세 절친이 되었다.

2.4. 천재 철학자라는 명성

한편, 하이데거는 1920년부터 마르부르크 대학 교수직에 지원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출간된 저작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하이데거는 19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학적 해석』의 원고를 보냈다. 60쪽 짜리 이 원고는 마르부르크 대학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신칸트학파의 좌장인 파울 나트로프마저 거기서 "천재적 기획"을 보았고, 가다머는 그 원고에 "강력한 충격"을 받아 다음 학기에 당장 프라이부르크로 가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었다. 후일 철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강사(조교)에 불과했던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었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철학의 비밀스런 왕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가다머를 비롯하여, 막스 호르크하이머, 오스카 베커, 프리츠 카우프만,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한스 요나스가 있었다.

이런 평가에 힘입어 결국 1923년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원외 교수 자리를 얻어낸다. 그리고 마르부르크로 이사하기 직전, 하이데거는 토트나우베르크(Totdnauberg)에 자그마한 땅을 구입해 아주 소박한 오두막을 짓는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도 하이데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에 싸인 스타가 된다. 그는 매우 이른 아침에 강의를 시작했는데, 겨우 두 학기만에 1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가다머에 의하면 당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대부분의 제자들이 하이데거의 강의로 옮겨 갔다고 한다. 하이데거의 강의실은 학생들의 열정과 진지함으로 가득찼다. 그 한 가운데서 하이데거는 노트 같은 것은 보지도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해 갔다. 그의 말에는 비범한 지성이 넘쳤으나, 그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의 방향을 규정하려는 의지의 힘이다. 존재론적 주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모습은 교수의 이미지보다는 선장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학생들은 열렬한 몸짓과 함께 진행되는 이 철학자의 강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떤 학생에게는 그 모습이 "화려한 날갯짓으로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보였고, 또 어떤 학생에게는 "격분한 사람"처럼 보였다.[13]

하이데거는 외양으로도 마르부르크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겨울이면 그가 어깨에 스키를 메고 도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키 복장으로 강의를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여름이면 하이데거는 유명한 로덴 재킷과 무릎 아래서 여미는 반바지를 입었다. 이 복장은 "일요일 예배에 참석한 농부의 소박한 정장"을 연상시켰는데, 학생들은 이를 '실존적 복장'이라 불렀다.[14]

그는 학생들을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기타를 챙기고 하이킹을 가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모두 함께 모여 노래를 연달아 불렀고, 이 중 몇명의 학생은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 초대받아 같이 캠프파이어를 했다. 별이 빛나는 밤 아래, 모닥불 불꽃을 보며 하이데거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말을 읊었다. 이 학생들 중 한 명이 바로 열여덟 살의 유대인 여학생 한나 아렌트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유를 배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이데거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짧은 머리 모양과 최신 유행 복장으로 모두의 주목을 끄는 여학생이었다. 종종 그녀는 우아한 녹색 원피스를 입었고, 이 때문에 학생들은 그녀를 '녹색녀'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눈에 띄었던 이 여학생을 자신의 연구실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렌트는 평소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이 남자에게 즉각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이후 둘은 비밀스럽게 사귀게 된다. 하지만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는 만남의 소중한 순간만을 중요시할 뿐, 아렌트가 언제나 자기 주변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렌트는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2.5. 『존재와 시간』의 탄생

1925년 학생수가 적어진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쫓겨나가듯 쾰른대학으로 떠나자,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과는 원외 교수 하이데거를 정교수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문화부장관은 인정받을 만한 저작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제 대학의 인사위원회는 하이데거에게 슬며시 압력을 넣어 새로운 저작의 출판을 독려한다. 그렇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서로 기록될 그 책 『존재와 시간』을 쓰도록 만들었다. 작업에 몰두한지 불과 1년만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탈고했다. 승리감에 가득찬 그는 야스퍼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 기쁨을 표했다. "이미 한밤중입니다. 산 위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오두막의 대들보가 삐거덕거립니다. 생은 영혼 앞에 순수하고 단순하고 위대하게 있습니다."[15]

1927년 『존재와 시간』의 간행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다. 이 저작은 미완성의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뿐 아니라 신학과 문학 및 심리학 등 지성계 전체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일약 철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지금까지 존재는 망각되어왔다. 존재, 즉 '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불완전하겠지만 인간의 '이해'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존재(있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존재자(있는 것)는 인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 의미를 질문하는 존재자,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 속에 개별자로서 '거기 있는' 기분(Stimmung)에 사로잡히는 존재자다. 이를 '현존재(Dasein)'이라고 한다.

현존재의 특징은 '이러이러하게 친숙한 세계에 몰입해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세계-내-존재) 그러한 현존재는 세계를 나에게 친숙한 '~로서'의 의미로 파악한다. 일상생활에서 물은 H2O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목 마를 때 마시는 물'로서', 샤워할 때 씻는 물'로서'의 의미로 파악된다는 것이다.(사용사태) 그런데 각각의 의미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 세계의 맥락에서 헤아릴 때야 비로소 그 의미가 이해된다. 마치 해초 군락과 같아서,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 그것을 잡아당기든 그것은 언제나 한 뭉텅이로 딸려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용사태 전체성) 그리고 현존재인 인간은 이런 세계를 통해 세상을 체험한다. 이런 세계에서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자신의 다가올 미래를 지금 미리 염려(Sorge)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existence)"이라 부른다. 즉, 실존은 '스스로를 미래에 대한 가능성으로 지금 미리 던져 놓는 것'[16]을 말한다.(기투, Entwurf) 그런데 그러한 가능성 중에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 '죽음'이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간다. 우리는 주변의 보통 사람들(세인, das man)처럼 호기심, 잡담, 애매함으로 그러한 '불안'을 잊으며 살아간다. 여기선 모두가 타인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이 아니다.(비본래성)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 문득 불안의 기분에 휩싸이고 불현듯 시간이 흘렀음을 느끼며 각자 자기만의 죽음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의미'를 묻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왜 살지?", "나는 왜 존재하지?" 같은 물음을 말이다. 불안은 우리를 이러한 전환점으로 인도한다. 이 물음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다. 다른 누구에게 결정과 책임을 빼앗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본래성)[17]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찾아나서는 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18]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실존으로부터 이해된) 존재 의미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밝혀냈는가?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신은 존재 의미로 가는 수많은 길 중에 단 하나의 길[19]만을 이제 사유했을 뿐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에서 행동은 곧 철학이 된다. 자신의 삶 자체에 집중하여 자신의 내부에 어떤 의미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실존적 행동 철학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페체트는 이렇게 말했다. "어둡게 걸린 하늘을 거대한 번개가 두 조각으로 가르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움마저 느끼게 하는 그 광휘가 세상의 사물들을 밝음에 드러내 주었다. 문제는 어떤 '체계'가 아니라 실존이었다... 강의실을 나설 때 나는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마치 한순간 세계의 근거를 엿본 것만 같았다."[20]

2.6. 전회

1927년 10월 하이데거는 마침내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과 정교수로 승격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28년 후설이 은퇴하자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로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하이데거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2번의 임용 제안이 있었고,[21] 몇몇 대학의 세미나에서 '하이데거'가 읽히고 논의되었으며, 하이데거의 강의에는 철학에 그다지 일가견이 없어 보이는 대중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저자로만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 미완의 작품 『존재와 시간』은 문제점이 있었다.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서 발견했지만, 이러한 설명은 모든 것의 답이 '시간'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데거가 강조했던 '실존으로부터의 철학'은 멈추어 버린다는 문제였다.

하이데거는 연이은 강의와 저술[22]에서 이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그 답변은 이렇다. "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이데거 학파가 훗날 신비화하는 "전회(Kehre)"라는 것도 이런 기획의 틀 내에서 등장한다. 전회, 그것은 더 이상 '시간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존재의 '순간'에 집중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림의 순간'이다. 자신의 현존재를 실제로 경악에 몰아넣고 불안에 빠뜨리고 권태에 밀어 넣을 때, 그런 무(Nichts)의 기분에 내 자신을 내맡겼을 때, 결단으로 '열리는' 창조와 자유의 순간이다. 이 '순간'에서야 현존재의 비밀이 열린다. '열림'이라 무엇인가? 자연이 인간 안에서 눈을 뜨고 자신이 거기 있음을 깨닫는 것을 셸링은 '빛살(Lichtblick)'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연적으로는 닫혀 있는 자연 존재자가 인간을 통해 인간 내에 (마치 빛살처럼) 나타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에게 무대를 제공한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진리(aletheia, 알레테이아)란, 숨겨져 있던 자연 존재자가 인간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모습에서 울림, 몰입, 경이를 느낀다. 진리가 발견되는 이 사건의 '순간'을 하이데거는 '생생한 고유화(Ereignis, 존재사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하이데거는 '생생한 고유화'의 철학을 평생동안 펼쳐나갈 것이다.

2.7. 나치 참여

1930년대 초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1차 대전 패배로 엄청난 배상금을 갚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공황까지 덮쳤으며 32개에 달하는 정당이 난립하면서 극도의 혼란 상태를 겪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바이마르 정권이 이러한 난국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연합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자유보다는 독일에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 혼란한 사회 질서를 확실하게 잡아주길 원했다. 하이데거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역사'를 통해 '민족'을 하나로 합칠 정치적 행동이 필요함을 느꼈다.[23] 개별 현존재는 그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 안, 즉 "민족의 사건"에 내던져져 있다. 이 '역운(Geschick, 역사적 운명)' 속에서 현존재는 민족의 일을 기꺼이 자기 자신의 일로 삼아 사회에 공헌해야 된다. 하이데거는 국가사회주의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하이데거에게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의 권력 장악은 하나의 혁명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히틀러에 의해 다시금 독일이 안으로는 통일되고 밖으로는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대인을 제거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자신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더 나아가 히틀러와 나치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기술문명과 도시문명을 배격하고 농촌과 농민들의 정신을 이상화했다. 히틀러와 나치운동에 대한 이러한 환상은 하이데거뿐 아니라 대다수 독일국민들이 가졌던 환상이기도 했다. 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 없는 자'라고 비난했을 때,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양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히틀러의 저 우아한 손을 보세요."[24]

하이데거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서 강한 감동을 받았고, 자신도 행동하려 한다. 당연히 그가 주목하는 대상은 대학이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직을 맡으라는 대학 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박을 받아들였다. 원래 총장직에 묄렌도르프가 내정되어 있었지만, 당 내 집단에서는 총장 선출 한달 전부터 하이데거를 밀자고 이미 합의를 한 상태였다. 하이데거는 이 제안에 고민했다고 한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그럼에도 자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으며 후보를 사퇴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3년 5월 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직에 선출되자마자 하이데거는 바로 국가사회주의당에 입당[25](당원번호 3125894번)하는 등 이후 굉장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월 27일 총장 취임 연설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이데거는 대학 관계자들에게 취임식 순서를 통보했는데, 모두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26]를 불러야 했고, '승리 만세'도 외쳐야 했다. 취임식 전체가 국경일처럼 화려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노래의 마지막에 오른손을 드는 나치식 경례를 해야 했는데, 하이데거는 공문에서 "오른손을 쳐드는 것"은 당에 대한 결속보다는 민족적 고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해명을 덧붙였다.

취임식에서 하이데거는 그 유명한 취임사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을 연설했다. 하이데거는 철학계 전체가 그 순간 자신을 주목할 것임을 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동 봉사, 국방 봉사, 지식 봉사"를 통해 민족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했다. 하이데거 발아래서 경청하는 학생들과 당 고위 간부들, 교수들과 여러 명사들, 문화부 관료 및 각 부처 장들, 그리고 이들이 동반한 부인들은 이 연설을 듣는 동안 마치 자신들이 형이상학적 돌격대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독일 내 반응도 열광적이었다. 지역 언론과 전국구 신문은 이 연설을 위대하고 선구적인 사건으로 소개했다. 베를린의 한 신문은 하이데거의 연설을 한편의 고전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총장 취임 연설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국외 평론가들은 대체로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의욕적인 시작과 달리, 하이데거는 총장에 취임한 지 불과 1년도 안 되어 사퇴한다. 훗날 하이데거는 주 정부가 학장을 해직시키려고 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빅토르 파리아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다. 사퇴의 원인은 "전체 독일적 현존재의 변혁"[27]이라는 '하이데거식 국가사회주의'가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이데거는 경제에 기여하는 기술교육보다는 정신교육에 도움(?)되는 국방 스포츠 연습과 노동 봉사 출동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런 '하이데거식 국가사회주의'는 권력 중심부가 보기에 우스꽝스러웠고, 하이데거는 곧 "국가사회주의 놀이"를 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28] 그래서 1934년 4월 12일 문화부의 권고를 받고는, 4월 23일 총장직에서 물러났던 것이다.[29]

2.8. 총장직 사퇴 이후

정치활동을 접은 하이데거는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금 고독한 철학의 세계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이해하기 위해서 똑같은 실패를 겪었던 횔덜린의 작품을 파고든다. 1934/35년 겨울학기에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후기 찬가인 「게르마니엔」과 「라인 강」을 논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한 민족과 그 문화의 역사가 포함하는 개개 시대에서 "우리가 일상 언어로 지껄이고 행하는 모든 것이 비로소 열린 터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시인의 말을 통해서이다. 시인은 한 민족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호메로스헤시오도스가 그렇듯, 시인은 민족에게 신들을 데려오며 그렇게 해서 "풍습과 관습"을 세운다. 시인은 한 민족 문화의 본래적 창시자인 것이다. 시인에 의해 이렇게 건립된 '근본기분'은, 사상가에 의해 비로소 존재로서 파악된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전체 현존재의 변혁"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30] 그러나 횔덜린이 홀로 고통과 압도적 행복을 견뎌내고 있을 때 독일 민족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시인은 민족의 근본기분을 전환시키지만 너무 앞서 나가기 때문에 자신의 시대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내심 하이데거는 자신의 처지가 횔덜린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치 참여의 실패에서 한 가지 사실은 처절하게 깨달았다. '참된 것'은 하룻밤 사이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인과 사상가들이 건립한 '근본기분(역운)'이 전체 사회로 발산되어 사회를 근본부터 변형시키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횔덜린이 말했듯 "궁핍한 시대"가 지속될 것이다.

이제 하이데거의 관점은 달라졌다. 하이데거는 정치에 대한 자신의 환멸감을 근대 기술 문명의 압도적 힘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국가사회주의는 그에게 더 이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사회주의 자체가 바로 그 문제에 해당한다. 국가사회주의 내에서도 기술의 광란과 지배와 조직화가 날뛰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늘 그래왔던 것이 아닌가? 『세계상의 시대』에서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달랐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고대 그리스였다. 그 시대의 존재자란, 인간이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표상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자가 인간에게 나타나 스스로를 인간 속에 드러낸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열린 터일 뿐이며, 그곳에서 존재자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뛰어논다. 다음으로 기독교 시대에는 존재가 신 안에서 보호받았으며, 사람들은 경외감을 품고 이 신과 만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에 호기심을 가지며, 결국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을 따라 만드려는 야심에 사로잡혀 기술을 발전시킨다. 마지막으로 근대는 기술이 완전히 공세로 전환한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기술이 총동원된 기술 제국주의 아래에서 인간은 조직화된 획일성의 수준으로 하락하여 거기에 머물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근대는 미국주의와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지극히 격렬한 대결이다. 미국주의는 "계산"을 대표하고, 공산주의는 "계획화"를 대표하며, 국가사회주의는 "사육"을 대표한다. 이들의 '근본태도'는 확연히 구분되지만, 사실 모두가 기술의 광란과 지배에 미쳐있는 근대라는 공동 토대 위에 놓여있다. 이러한 모든 근대의 문제는 '주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었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오직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예술에서 그 답을 찾는다. 예술은 고대 그리스의 사유와 유사하다. 예술은 하나의 세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경탄과 경악, 환호와 무관심을 형상화한다. 예술은 그 자신에 속하는 것을 어떤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킨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제작된 것이 아닌가? 근대의 기술적 제작과 무엇이 다른가? 하이데거는 이 구분을 위해 "대지"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대지"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자기 충족적 자연이다. "대지는 본질적으로 자기 폐쇄적인 것이다." 기술 과학은 자연을 뚫고 들어가 자연에서 그 작동의 비밀을 빼앗으려 하지만 이런 방도에 의해서는 자연이 무엇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돌의 무게를 잴 수 있고, 빛을 진동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서는 돌의 묵직한 느낌이나 빛깔의 영롱함이 해명되지 않는다. "대지는 자기 안으로의 모든 침입[31]을 그 자체에서 분쇄해 버린다." 이것이 자연의 매혹적인 폐쇄성, 즉 '대지성(Erdigkeit)'이다. 예술은 이런 '대지성'이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열어 놓는다. 예술은 비밀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서 비밀을 열어젖힌다.

그런가 하면 『철학에의 기여』[32]에서는 또다른 중요 개념인 '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앞서 하이데거는 횔덜린에 대한 강의에서 '신적인 것'을 인간 안의, 인간들 사이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현실을 뜻한다고 말했다. 즉, 그것은 "존재와의 연관"을 말한다. 이때부터 하이데거는 이런 의미로 현존재를 신성화하는 본래적 연관을 뜻할 때면 언제나 "존재(Sein)" 대신 'y'을 포함한 "존재(Seyn)"라고 표기했다. 『철학에의 기여』에서의 '신'도 마찬가지 의미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신을 말하고 있지 않다. 침묵과 같은 텅 빈 사유에서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신이 되는(Göttern)" 근본기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사건은 우리를 전율케한다. 존재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존재 관계, 즉 독실하고 명상적이며 감사하고 경외하며 평정한 존재 관계의 기분을 갖게 한다. 그것은 침묵을 아는 자의 생생한 고유화(Ereignis, 존재사건)와 같다. 어두운 숲으로 빛이 스며드는 것과 같은 빛남의 과정으로, 신의 현현 같은 사건이다. 이 빛트임은 우리가 그것을 고유하게 경험하고 감사히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가시성의 가능화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결국 여기서는 셸링의 저 멋진 생각, '인간 안의 자연이 눈을 뜨고서 자신이 있음을 알아차린다'는 생각이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자기 가시화를 실행하는 장소라는 생각 말이다. 코제브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없다면 존재는 침묵할 것이다. 존재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참된 것'은 아닐 것이다."

총장 사퇴 이후, 하이데거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강연 초정을 받았다. 1936년 초에는 취리히에서 강연을 했고, 같은 해 로마에서도 강연을 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그는 몇 차례의 니체 강연에서 인종주의를 공공연히 비판했기 때문에, 이무렵 자신이 나치 비밀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사실과 견해」에서 하이데거가 진술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1937년 여름학기에 베를린 출신의 항케(Hanke) 박사라는 인물이 세미나에 들어와 "뛰어난 재능과 관심을 보이며" 연구 활동에 참여했으며, 얼마 후에는 개인 면담을 요청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비밀정보기관 남서부 지부장인 쿠르트 셸 박사의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33]

또한 하이데거는 1944년 2차대전 말기에 500의 학자와 예술가가 모든 군복무를 면제받았지만 자신은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당시 55세의 나이로 참호공사를 명령받았다는 것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은 당과의 협의하에 교수들을 '전혀 불필요한 교수', '반쯤 불필요한 교수', '불가결한 교수'로 분류했는데, 하이데거는 '전혀 불필요한 교수' 분류의 맨 앞에 기록되었다. 급기야 1944년 11월에 하이데거는 국민돌격대에 소집된다. 소집된 대학교수 중 하이데거가 최연장자였다. 한 부대에 소속된 하이데거는 엘자스 지방으로 이동하여 프랑스군이 라인 강을 건너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2차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2.9. 강의 금지 처분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군정 당국은 나치 정화작업에 착수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정화위원회에 출두하여 심의를 받아야 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변호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가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은 변화된 민족 공동체 감정을 토대로 해서 사회적 대립들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어야만 했다. 총장직 또한 "정말이지 마지못해" 맡은 것이었고 "더 좋지 못한 상황"을 막겠다는 목적으로 한 해만 직책을 유지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1930년대 중반 이후로 공개적으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력 사유를 비판했다. 당은 이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 자신의 강의에 밀정을 보내는가 하면 저술 출판을 방해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정화위원회는 하이데거에게 상당히 관대한 판정을 내린다. 판정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처음에 국가사회주의 혁명에 봉사하여 교양 있는 독일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 혁명을 정당화했으며, 그 결과 정치적 변혁의 와중에서 독일 학문의 자주성을 위태롭게 했지만,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나치가 아니었다." 정화위원회는 이런 권고안을 제시했다. "하이데거는 조기 퇴직해야 할 뿐 해직될 필요는 없다. 하이데거는 명예교수로서의 자격은 유지하되, 대학 내 일체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34]

그러나 이러한 판결에 대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일부 교수들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이들은 하이데거가 독일대학을 나치화하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하이데거는 12월에 다시 정화위원회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고 조사과정에서 탈진 상태로 쓰러져 요양소[35]에 옮겨졌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한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에게서 평가서를 받아 보자는 제안을 한다. 야스퍼스의 평가서가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야스퍼스는 부인이 유대인이었던 관계로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 독일 패전 후에는 나치에 저항한 대표적인 철학자로 국민적인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작성한 평가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야스퍼스는 마침 그해 겨울학기에 죄의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에 관해 강의를 한 참이었다. 만약 하이데거가 이 강의에 관해 알았더라면, 야스퍼스에게 평가서를 요청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가서에서 야스퍼스는 일부 교수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발행각을 폭로했다. 그리고 1920년대에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거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강압적이고 의사소통을 거부하며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거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후 독일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치 치하에서 무너진 책임 윤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방해가 되며, 아직 독자적인 판단력을 결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유해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군정 당국은 야스퍼스의 평가서에 근거해 1946년 말 하이데거의 강의를 심사 결과가 확실히 나올 때까지 금지시키고 그 동안 교수직을 박탈한다.[36]

아이러니한 점은, 강의가 금지되었음에도 프랑스 철학계에서 하이데거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장폴 사르트르실존주의가 프랑스를 강타하고 있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했고, 하이데거도 만남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의 글을 읽고 난 뒤 사르트르의 사상이 현재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초기 사상만 이해하고 있었을 뿐, 전회 이후에 바뀌어 버린 자신의 사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37]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휴머니즘에 관하여(1946)」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강조했던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현존재'라는 실존(Existenz)의 개념에 집중하기보다는, 『존재와 시간』 이후 그 책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행했던 철학적 개념에 '탈-존(Ek-sistenz)'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실존은 기껏해야 결단성으로 이끄는 것이었던 반면, 탈-존은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에 대해서 열려 있음을 뜻한다. 즉, 전회 이전에 하이데거는 실존을 실현하려는 현존재 내부에 머물러 있었다면, 전회된 접근 방식에서 그는 현존재에게 말을 건네고 요구를 하는 존재를 향해서 말 그대로 '나가려(hinaus)'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존재의 빛트임(Lichtung) 안에 서 있음"을 탈-존이라 한다.[38] 이러한 사유에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난다. 실존적 사유에서는 개별적 현존재의 내부로부터 기투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능동적 행동이 요구되었다면, 탈-존적 사유에서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온 현존재가 존재의 말을 듣기 위해서 방임하고 감내하는 행동의 수동적 양식이 강조된다. 현존재의 "내던져짐" 대신 현존재의 "역운"이 부각되며, 자신의 사안들에 대한 현존재의 "배려" 대신 그에게 부과되고 맡겨지는 "지켜냄"이 강조된다. 세계로 "빠져 있음" 대신 세계의 "쇄도함"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투"에서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현존재가 아니라 바로 존재 자체의 일이 된다.

즉, 전회 이전에는 행동을 촉구하는 철학이었다면, 전회 이후에는 '행동 없는 사유'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이다. 사실관계나 논리만 따지는 어떤 현실적인 사람이 교향곡을 듣고 나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힌 옆 사람에게 "저게 우리에게 뭘 증명하는 거죠?" 라고 물었을 때, 이런 물음을 어리석어 보이게 만드는 그런 사유가 있는가?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유가 그런 종류의 사유라고 확신한다. 사유란, 존재가 그 폐쇄 상태에서 빼내어져 언어의 열린 공간에서 '주어져 있음(Es gibt)'을 말한다. 즉 그것은 존재를 '언어로-데려가기(Zur-Sprache-Bringen)'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규정되지 않는 무엇이므로, 열린 공간에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유는 과학처럼 어떤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유용한 삶의 지혜를 가져다주지도 못하며,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직접적으로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런 사유를 통해 세계와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달라진다. '처해 있음'이 달라지고, 세계로 기투되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것을 고유하게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에 그 존엄을 되돌려 줌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을 언어로 드러내어 존재를 존재케 하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그런 사유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가 사르트르의 실천적 휴머니즘에 대해 반발하는 것도 그 휴머니즘이 이러한 "인간의 인간다움[39]을 충분히 높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이데거는 이 사유를 음미하는 일로 남아 있는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의 사유는 누군가를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을 존재케 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1949년 3월, 하이데거의 탈나치화 심의는 우여곡절 끝에 "부역자이지만 재판은 면함"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판정[40]으로 종결되었다. 2달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는 그가 다시 강의를 시작할 수 있게끔 처분을 논의하는 협의가 시작되었다. 투표 결과 찬성표가 간신히 과반을 넘기자 대학 평의회는 하이데거를 명예교수직에 복권시키고 주 정부에 강의 금지 명령도 취소해 줄 것을 제안했다. 정부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다소 긴 시간이 걸렸다. 1951/52년 겨울이 되어서야 하이데거는 종전 후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41]

2.10. 대학 복귀 후부터 말년까지

좌절과 시련의 시기를 지나온 하이데거는 브레멘에서의 강연[42]을 계기로 다시 원기를 회복하면서 저술과 강연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 철학은 다시 한 번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어지는 몇 번의 강연과 세미나에서 이전부터 계속 해오고 있었던 현대 기술 문명 비판을 지속한다. 기술 문명의 시대를 지칭하는 말은 "몰아세움(Gestell)"이다. 기술은 인간들에게 자연의 에너지를 최대한 뽑아 써야 한다고 닦달한다. 이런 '몰아세움'의 분위기(역운) 속에서 '존재를 느끼는 사유와 경험'이 쉽게 거부될 수도 있다는 데에 인류의 위기가 있다. 이 시대에는 꽃을 꽃이라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사유, 나무를 나무라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사유가 필요하다. 존재를 존재케 하는 사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를 느끼고 존재에 감사를 할 수 있는 사유가 요구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사물들로 (사유를) "내맡김"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들어서 아도르노의 비판[43]이 거세어지자, 하이데거는 다시금 자신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이데거는 1966년 『데어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치참여에 대해서 해명하고 기술시대에 철학이 갖는 의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이 인터뷰는 하이데거의 요구에 따라 그가 죽은 뒤인 1976년에야 발표되었다. 생전의 침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정한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그가 과거를 참회했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하지만 사후에 발표된 그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참여에 대해서 반성하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변호로 일관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평가가 갈렸다. 하이데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도 갈 수 있었던 국가사회주의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나쁜 방향으로 갔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나치의 엄청난 범죄에 그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에 반해 하이데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판단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 나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하이데거 사상의 의도도 과연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비판을 했다.

노년에 들어 하이데거는 오전에 연구를 하고 점심 휴식 후 다시 오후 늦게까지 연구를 하는 생활패턴을 반복한다. 산책을 나가면 지인들과 만나 한 잔씩 걸치곤 했다. 하이데거는 이제 공경할 만한 노신사가 되었고, 무뚝뚝하고 엄격하기만 했던 태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는 이웃집으로 놀러 가 유로파 컵 축구 경기를 시청하기도 했다. 함부르크 대 바르셀로나의 전설적 경기가 있던 날, 그는 너무 흥분해서 찻잔까지 엎었다고 한다. 그즈음 해서 지역의 극장 감독이 하이데거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하이데거는 예술이나 연극 이야기 대신에 베켄바우어 얘기만 쉼 없이 말했다고 전해진다.[44]

만년의 하이데거는 "사방(Gevierte) 세계"에 대해 사유했다. '사방'이란, 하늘과 대지, 신적인 것[45]들과 죽을 자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이 네 가지가 서로 조응하면서 사물(Ding)에 모인다. 예를 들어 단지는 포도주를 선사한다. 포도주의 물에는 그 물이 솟아나온 샘이 깃들어 있다. 샘에는 그것이 솟아나는 암석이 깃들어 있고 암석에는 하늘의 비와 이슬을 받아들이는 대지의 어두운 잠이 깃들어 있다. 샘물에는 하늘과 대지의 결혼식이 깃든다. 샘물은 포도나무가 선사하는 포도주에 깃든다. 포도에는 대지의 자양분과 하늘의 태양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단지가 선사하는 포도주는 언젠가 죽는 유한한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인간들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여가와 대화를 즐긴다. 가끔은 축성을 위해서 바쳐진다. 단지가 포도주를 헌주로서 선사하는 것에는 신적인 것들이 깃든다. 이렇게 단지가 선사하는 포도주에는 대지와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 자로서의 유한한 인간이 동시에 머문다. 이 네 가지는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고유성을 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방을 모으는 것으로서의 사물'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한 시인은 감사의 마음으로 시를 지어 그 존재를 존재케 한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하이데거는 무엇보다 자신의 전집 발간 준비에 전념했다. 그는 어떤 고정된 이론체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사유의 사태에 비추어 언제든지 사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 위에 서 있는 사유'를 강조해 왔기 때문에 이 전집의 이름을 "길들(Wege)"로 정하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은 "저작집(Werke)"이라는 제목으로 결정되었다. 작업에 열중하던 어느 하루, ㅡ 그날은 1976년 5월 26일 아침이었다 ㅡ 하이데거는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또 다시 어느 철학의 길이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46]

3.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

하이데거가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20세기 초중반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되는 그의 전기 철학은 20세기 중후반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양한 관점의 철학적 비판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하이데거의 사상[47]은 죽음을 실존의 근거로 만듦으로써, 삶에서 죽음을 강제로 마주하게끔 만들고 이를 통해 영웅적 삶을 위한 개인의 결단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타협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는, 반민주주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48]

물론,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찾아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는 것이 실존론적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즉, '있다는 것'(존재)은 '없다는 것'이 인지될 때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의 유한성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죽음을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그 비판을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하이데거는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역사성'을 강조하므로써, 마치 '독일 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하라'는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설명 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데서 그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으로 이어지는 역사성'에서, 나치의 영웅적 결단에 편승하라는 메시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은 그의 사상을 단순히 철학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49]

또한 철학적으로 '죽음이 반성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과연 옳으냐', '죽음이 과연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학자들의 비판도 유효하다. 죽음을 염두에 둔 반성이란 그렇지 않은 반성보다 더 극단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으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그 어떤 희망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선 오히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선택이 실존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죽음'을 실존의 근거로 두지 말고, '탄생'을 실존의 근거로 두자고 제안한다.

대략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전기, 나치 참여,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논란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그저 일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전기나 후기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실제로 하이데거가 총장직에 있었을 때 유대인 동료들을 내쫓거나 하지는 않았다.[50] 하지만 나치당원들이 유대인을 내쫓고 있었을 때 방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51] 그래서 철학적인 측면에서 반유대주의가 있었느냐는 논쟁은 그동안 정말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하이데거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이데거 일기장인 「블랙 노트」에 나오는 반유대주의적 단어도, ㅡ 『세계상의 시대』에서 미국주의는 "계산"을 대표하고, 공산주의는 "계획화"를 대표하며, 국가사회주의는 "사육"을 대표한다고 말했듯이 ㅡ 기술 문명 비판의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뿐,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였다면 유대인 동료들을 가차없이 쫓아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하이데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 자체가 반유대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 상태인데 하이데거가 직접 나치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철학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라고 주장한다.[52]

4. 실존주의와의 관계

후설의 사상이 프랑스에서 발전해나간 과정을 추적하기 전에, 우리는 실존주의에 미친 아주 중요한 다른 영향, 즉 하이데거의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실은 이 경우에는 영향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이데거를 최초의 진정한 실존주의자, 그러므로 실존주의 철학을 알려면 맨 처음 만나야 하는 첫 번째 실존주의 철학자로 취급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이데거 자신은 이 명칭을 거부하였다. 이 거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생각이 일생 동안 자주 바뀌면서 발전한다는 사실과 하이데거를 한 권의 실존주의 저작을 펴낸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정당하다 할지라도 나중에 출판된 성숙한 저작은 실존주의자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 하나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저작들 중에서 가장 '실존주의적 저작'인 『존재와 시간』이 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이 미완성으로 그친 이유는 틀림없이 하이데거가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조직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이 저술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런 단서를 붙일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초기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메리 워낙 『실존주의』[53]
인간은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가진 가능성의 존재이며 그것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이라는 실존주의의 주장을 근현대에 처음으로 주요하게 주장한 사람이 하이데거이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런 주장들이 분명하게 확인되며, 이러한 점에서 초기 하이데거가 실존주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후기로 갈수록 실존주의보다는 존재론에 초점을 더 두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서는 기존의 실존주의자들과 구분되긴 한다.

하지만 카뮈도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했고 사르트르도 후기로 가면 실존주의보다 공산주의 이론에 경도되지만, 그들 모두 실존주의라는 테두리 안에 포함되듯이,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후기에 달라지지만 실존주의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원하는 식으로 일일이 철학자마다 원하는 명칭을 붙여준다면 현대철학에 분과가 너무 많아져서 철학책은 백과사전급 두께가 되어버릴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초기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하이데거에게 하나의 분과를 주기에는 이후에 나오는 다른 실존주의자들과 관련성이 너무 많기도 하기 때문에, 보통은 각론에 들어가서야 그 차이점을 확인하는게 대부분이다.[54]

2000년대 들어서부터 하이데거를 전공한 국내외의 몇몇 교수들이 '하이데거가 당시의 실존주의자들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실존주의가 아니라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영미권에서 권위를 가지는 철학책인 '루틀리지' 철학책에서는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의 시초로 명시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같은 책에서 하이데거를 실존주의 항목에 배치하고 있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도, 윤리와 사상 과정에서 쇠렌 키르케고르, 장폴 사르트르와 더불어 하이데거를 가장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로 다룬다.[55] 즉,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5.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1] 성 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였으며 술통을 만드는 일을 겸했다.[2] 한국으로 따지면 초등학교에 해당.[3] 하이데거는 1903년부터 1916년까지 13년 동안 가톨릭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4] 펠트키르히(現 오스트리아 포라를베르크 지방) 근처에 티지스가 있다.[5]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5[6] 하이데거 전기 작가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신체화 장애(psychosomaticism), 즉 불안과 같은 심리적 증상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신체적, 생리적 기능이 손상된 것이 아닌데도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슬픔 등의 부정적 정서로 인해 근육통, 두통, 과민성 대장 증상, 비궤양성 소화불량, 만성피로, 호흡곤란, 건강염려증 등의 신체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7] 하이데거 시대에 둔스 스코투스의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의미의 양태에 관하여」라는 이름을 가진 이 텍스트는 최근 들어서 둔스 스코투스 학파의 철학자인 토마스 폰 에어푸르트의 저작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113)[8] 후설의 조교는 원래 에디트 슈타인이었으나 그녀가 그만두자 새로운 조교가 필요했고 하이데거가 눈에 띄었던 것.[9] 1917년에서 191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학기에 후설의 조교가 됨.[10] 아르덴 주의 스당(Sedan)에 위치.[11] 『언어로의 도상에서』 中...[12]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253~254.[13]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227~232[1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228[15]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247[16] 쉽게 말하면,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나'를 가르킨다.[17] 다만 이런 자유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삶에 있어서 지극히 드문 순간뿐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다.[18] 하이데거의 '양심'은, 윤리적인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결단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윤리도덕적 당위를 따르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19] '실존으로부터 이해된 존재 의미'를 말한다.[20]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305[21] 1930년 3월에 당시 독일의 철학교수직으로서는 가장 손꼽히는 자리인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초빙 의뢰를 받는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을 아직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며 이를 거절한다. 1933년 9월에 하이데거는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2번째 초빙 의뢰를 받는다. 하이데거는 또 다시 그 제안을 거절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떠나면 그 동안 프라이부르크에서 해온 대학 개혁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22] 1927년 여름학기 강의인 「현상학의 근본 문제」, 1929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는 『존재와 시간』을 보충하는 내용이고, 1929/30년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비로소 '생생한 고유화의 철학' 즉 전회가 나온다.[23] 하이데거와 대화하던 뢰비트는 자신이 바르트의 정치적 공격과 슈타이거의 변론 중 어느 것에도 찬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동조가 하이데거 철학의 본질" 속에 있다는 의견이었다. 하이데거는 뢰비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역사성'에 관한 자신의 개념이 바로 자신의 정치적 '관여'의 토대라고" 말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36~537)[2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394[25] 이후 총장직을 수행하며 나치 정권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당원직은 유지한다.[26] 나치돌격대 대원이었던 호르스트 베셀이란 인물이 19세기에서 유래한 곡에 가사를 붙인 노래로 1929년경부터 나치돌격대의 투쟁가로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국가사회주의당 찬가로 불렸다.[27]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55[28]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52[29] 하이데거는 총장직에서 물러나기 한 달 전인 1934년 3월에 라디오 방송 강연에 나와 정부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강연 제목은 『창조적 풍경 : 우리는 왜 시골에 사는가?』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68 참조)[30]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78[31] 자연을 단순히 과학 기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말한다.[32] 1936~38년에 집필했으나 출판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서 사후에 출간되었다.[33]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40[3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63[35] 바덴바일러 근교 하우스바덴 요양소.[36] 이때 연금 수령까지 받지 못하도록 했으나 이 결정은 1947년 5월 다시 취소된다.[37]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는 1952년에야 프라이부르크에서 개인적으로 만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81)[38] 이는 '생생한 고유화'를 말하는 것이다.[39] 앞서 말한 '행동 없는 사유'를 가리킨다.[40] 5단계 중, 뒤에서 2번째 판정. '수동적 동조자'에 해당한다.[41]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619[42] 1949년 12월에 있었던 강연이다. 공식적으로 하이데거는 아직 강의 금지 처분 상태였는데, 하이데거를 초대한 브레멘 시민들은 반나치정화위원회의 불의와 적대에 맞서(?) 하이데거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주최된 강연이었다.[43] 1964년 아도르노는 『본래성의 은어』라는 소책자를 내서 하이데거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1945년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하이데거는 아도르노와 관련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이데거는 자신이 죽은 뒤 발표할 것이라는 조건을 걸고 해명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한다. (즉, 하이데거는 사후에 발표될 인터뷰를 제외한다면 생전에 침묵을 지킨 셈이고,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나치 참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침묵만 고수한다고 많은 비판을 했었었다)[4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708[45] 여기서 '신적인 것'은 기독교의 신이 아닐 뿐더러, 범신론적 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적인 것'에 대한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지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존재 앞에서의 '경건함'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46] 하이데거가 했던 말. 하이데거 전기 작가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1928년 막스 셸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하이데거가 했던 말 "또 다시 어느 철학의 길이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로 하이데거 전기를 마무리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715 참조)[47]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보이는 초기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철학적 변신을 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8] 하이데거는 '우리는 매순간을 선택해 나가는 자유로운 존재(실존)'임을 말하고 있지만,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철학자들은 그 실존의 근거가 '죽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있어서 결국은 선택을 해야하는 존재임을 하이데거의 '죽음'은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생각하게 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질문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결코 증진시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결단'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동조하거나 방조하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극단주의적 선택'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사상의 배경으로 이용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의 협력에 동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 사상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49] 물론 후기에 들어서는 하이데거가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죽음을 통한 결단'이나 '역사성'을 언급하는 것을 꺼리긴 한다. 후기로 가면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공허'나 '무(無)'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전기에서 현존재의 민족의식을 형성했던 '역사성'도 후기에 들어 그 시대의 근본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역운'으로 바뀐다. 여기서 '역운'은 '현존재의 사유를 이끄는 그 사회의 시대적 역사적 분위기'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50] 하이데거는 인정할 만한 업적을 보인 동료라면 그가 유대인일지라도 도우려는 태도를 보였다. 고전문헌학 정교수 에두아르트 프랭켈과 생리화학 교수 게오르크 폰 헤베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했을 때, 하이데거는 문화부에 편지를 써서 이를 막으려 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전술적 논증을 펼친다. 학문적 명성이 지극히 높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 두 명의 유대인 교수를 해직시킨다면, 외국의 비판자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이 "국경 지역의 대학"에 누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 두 "고결한 유대인"은 성품조차 모범적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판단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두 사람의 태도에는 나무랄 구석이 없다는 점을 보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랭켈은 하이데거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해직되었고, 헤베시는 한동안 대학에 남을 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조교 베르너 브로크를 위해서도 애를 썼다. 그를 대학에 남게 할 수는 없었지만 캠브리지대학의 연구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28)[51] 어쨌거나 하이데거 방식의 반유대주의는 그가 국가사회주의 혁명에 관여하게 되는 동기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국가사회주의는 잔혹한 반유대주의를 아주 일찌감치 드러냈음에도 하이데거는 이 운동에서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행동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를 불용인한 것도 아니었다. 1933년 여름, 일단의 국가사회주의자 학생들이 유대인 학생 동맹의 건물을 습격해 폭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 검찰 조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검찰은 총장인 하이데거에게 해당 정보를 요청했으나, 그는 난동에 학생들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는 구실을 들어 일체 조사를 거부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31)[52] 이 논쟁에 대한 수많은 주장들이 있다. 리처드 로티, 한나 아렌트 등은 철학과 정치적 판단은 별개의 것이라서 전후기 상관없이 사상적 측면에서는 나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필립 라쿠, 자크 데리다 등은 전기 사상이 나치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주체 철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후기 사상에 들어서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디터 토메, 톰 로크모어, 뤽 페리 등은 하이데거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이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도르노, 빅토르 파리아스, 앙리 레비 등은 아예 하이데거의 모든 사상 자체가 본질적으로 나치 국가사회주의와 아주 가깝다고 주장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764~765)[53] 메리 워낙 『실존주의』 이명숙, 곽강제 옮김. 서광사 2016. p.95[54] 물론 하이데거에 따로 파트를 배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칸트같은 철학자도 별개로 다루지 않고 독일관념론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등 철학사 기술은 저자의 의도나 편의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를 보인다. 하이데거와 실존주의의 문제는 실존주의만으로는 하이데거의 전체 면모를 포착할 수 없을 뿐더러, 사상이 더 완숙해간다고 볼 수 있는 후기 하이데거로 갈수록 실존주의와 거리가 더 벌어진다는 데 있다.[55] 해마다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지만, 실존주의 관련 파트는 여기에 카를 야스퍼스를 넣나 안넣냐 정도의 차이. 카뮈는 문학인에 가깝기에 포함되지 않으며 모리스 메를로퐁티, 조르주 바타유, 카를 바르트 등 실존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여타 학자들도 나오지 않는다.[56] 1966년 2월 7일 알렉산더 슈반의 책 『하이데거 사유 속의 정치철학』의 서평이 「데어 슈피겔」에 실렸는데, '하이데거, 세계의 밤의 한밤중'이라는 제목의 이 서평에는 몇 가지 잘못된 주장이 담겨 있었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대학 출입을 금지했고, 야스퍼스의 아내가 유대인이기에 그 집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그런 예였다. 야스퍼스는 이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썼다. "「데어 슈피겔」은 이런 순간이면 좋지 못한 구습으로 돌아가는군."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691)[57] 파리 지성인들 사이에서 하이데거가 은밀한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러시아 망명객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1934~1938년 개설한 헤겔 강의 덕분이었다. (중략) 사르트르는 코제브의 강의를 듣지 않았으나 수강생 필기록은 구할 수 있었다. 1933/34년 겨울에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71, 574)[58] The discussion seems to have been a dialogue of the deaf; Sartre later compared Heidegger to a ʻretired colonelʼ. But on leaving, Sartre found his railway compartment full of bunches of roses. Sartre, who hated flowers, threw them out of the window (Jean Cau, Croquis de mémoire, Julliard, Paris, 1985, p. 253) #[59] 라캉은 실존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간이 모든 형태의 본질과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라캉은 존재가 존재자에 대해 지니는 거리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그가 하이데거를 인용할 때마다, 그 이유는 실존이라는 개념과 죽음을 위한 존재를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실제적 삶이 실제적 삶이 아니라 상징적 삶이라는 라캉의 사상은 "우리가 하이데거의 작품 도처에서 만나는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본질 자체이다." 이와 같은 영향은 바로 라캉의 패러다임들 속에서 쉽게 간파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비관론, 인간의 탈중심화, 자기 자신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이 균열된 상황에 처한 주체의 해체, 거울 구조의 단계로부터 존재의 망각, 즉 상실의 긴 여정과 다시 만날 뿐 아니라 하이데거의 어휘에서 빌린 것들도 식별해 낼 수 있다. 진리 및 진실성과의 관계, 충만 및 공허의 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은 정신분석학의 영역 속에 옮겨 놓은 하이데거의 방법에 속한다. 그리스 철학과 진리에 관한 모든 설명은 그들에게 공통적이다.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에서 구조주의적 모델로 귀결되는 편지의 순환성은 편지의 장소 자체, 즉 편지가 제자리에 없는 장소인 진실이 드러나는 장소에 관한 하이데거의 주제에 의해 동시에 뒷받침된다. 따라서 50년대 초기에 라캉은 하이데거에게 실질적으로 매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매혹은 일방적이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줄곧 라캉의 작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캉이 하이데거 철학의 지지자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그가 빌린 것들을 어휘의 문제로 축소할 수 없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 Ⅱ』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2, p.251)[60]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 Ⅱ』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2, p.2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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