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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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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와의 전통 건물들
파일:마니사 터키 12.jpg
남쪽 스필 산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1. 개요2. 역사
2.1. 로마 제국령 (-13세기)2.2. 사루한 베이국2.3. 오스만 제국 : 왕자들의 도시2.4. 근대 : 카라오스만오을루2.5. 근현대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Manisa

튀르키예 서부의 도시. 이즈미르에서 동북쪽으로 20km, 데니즐리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30만으로, 튀르키예에서 24번째로 큰 도시이자 마니사 도의 주도이다. 옛 지명은 마그네시아로, 게디즈강을 따라 동쪽으로 늘어선 협곡 분지의 생산력 덕에 역사가 매우 깊다. 고대에는 헬레니즘 종말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마그네시아 전투의 장이었고, 중세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 베이국 중 하나인 사루한 왕조의 수도였다. 15-16세기 마니사는 오스만 제국의 황자들이 총독으로 파견되어 정치 경험을 쌓았는데, 그중에는 쉴레이만 1세무라트 3세 등이 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중 3년간 그리스 왕국령이 되었는데, 1922년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군의 탈환이 임박하자 그리스군이 방화하여 시가지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 재건된 마니사는 이즈미르의 이웃 도시로서 일대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가공과 가전제품 및 건설 자재 생산 등을 기반으로 한 산업 도시로 성장하였고, 유럽의 여러 기업들이 투자하고 있다. 스필 산의 북쪽 기슭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시가지는 서부의 산업 단지와 동부의 구도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볼거리로 시내의 술탄 모스크, 무라디예 모스크 & 고고학 박물관, 울루 자미와 산 중턱의 마니사 성채 등이 있다. 동쪽 데니즐리 방면에는 사르데스 유적과 옛 필라델피아(알라셰히르)가 있다. 서북쪽 5km 지점에는 1959년 튀르키예 최초의 체육 전문 대학으로 설립된 젤랄 바야르 대학교가 있다. 또한 마니사는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에 소속된 축구팀 마니사스포르의 연고지이다. 그외에 마니사 지역은 산악지대를 근거로 튀르크멘 유목민 출신의 알레비파 신자들이 집단거주하는 촌락들이 자리잡아 튀르키예 서부에서 몇안되는 알레비파 다수동네이기도 하다.

2. 역사

파일:마니사 터키 6.jpg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루위 양식의 부조

최소 기원전 2500년 전부터 요르탄 문화에 속한 마을이 있었고, 기원전 1300년 경에는 히타이트의 속국인 루위인들의 아르자와 왕국이 위치했다. 이후로 아나톨리아 문명의 프리기아 혹은 리디아에 속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현재 마니사 남쪽의 시필루스 산 일대의 군주 탄탈루스의 아들 펠롭스와 딸 니오베가 주민들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에트루리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500년 전후 무렵에 일대에는 테살리아 출신 그리스 부족인 마그네테스 인들이 정착하여 마그네시아 이 프로스 시필로스(Mαγνησία ἡ πρὸς Σιπύλῳ, 라틴어로는 마그네시아 앗 시필룸)라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190년, 소아시아에 개입한 로마는 페르가몬과 연합하여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셀레우코스 왕조를 격파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다.

2.1. 로마 제국령 (-13세기)

파일:마니사 성 터키.jpg
비잔틴 시기 시피루스 산 중턱에 세워진 성채

이후 로마 제국령이 된 마그네시아는 기원후 1세기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에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중소 도시로 이어졌다. 천년 이상 로마령이던 도시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여파로 1076년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1097년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1차 십자군룸 셀주크를 격파하며 튀르크 세력이 약해지자 동로마 제국알렉시오스 1세가 수복하였다. 13세기 니케아 제국 시기에는 제국의 국고와 조폐창이 위치하여 수도 님페온, 항구도시 스미르니와 함께 니케아 제국의 수도권으로 중요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1259년 가을에는 3년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는 미카일 8세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을 정도이다. 이후로도 마그네시아는 이웃한 필라델피아와 함께 재건된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2.2. 사루한 베이국

파일:터키 마니사 대사원.jpg
1366-1374년 사루한(Saruhan)의 손자 이스하크 베이(İshak bey)가 세운 울루 자미 (대사원)의 내부 뜰

13세기 말엽 마그네시아는 인근 튀르크 부족들에 의해 지속적인 습격을 당하였다. 이에 1302년 미카일 9세가 마그네시아로 향하여 튀르크 군을 몰아냈으나, 적지에 깊숙히 들어갔다가 역포위되며 철수하였다. 이로써 동로마 방어선은 붕괴하였고, 주민들은 해안으로 도주하였다. 1313년 튀르크 제후 사루한이 마그네시아를 정복하였고, 이후 도시는 터키식 명칭인 마니사로 불리게 되었다. 1336년 사루한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동맹하고 제노바 공화국의 해안 공격을 격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동로마의 취약함을 파악한 후 변심하여 1341년,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니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345년 사루한이 사망하자 아들 파흐렛틴 일야스 베이(Fahrettin İlyas bey)가 계승하였고, 다시 1362년 무자페렛틴 이스하크 베이(Muzafferettin İshak bey)가 이었다.

2.3. 오스만 제국 : 왕자들의 도시

파일:마니사 터키 궁.jpg
1403년 처음 세워져 15세기 중반에 확장되었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마니사 사라이 (궁전). 현재 복원이 추진 중이다.
파일:터키 마니사 1.jpg
쉴레이만 대제의 모친 하프사 술탄의 지시로 1522년 완공된 술탄 모스크

1388년 이스하크 베이가 사망하고 불과 2년 후에 오스만 제국바예지트 1세가 마니사를 정복하며 사루한 조는 멸망하였다.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다른 베이국들처럼 사루한 조 역시 복구되어 3대가 더 이어졌으나, 오스만 내전이 마무리 되기도 전인 1412년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정복되며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후 마니사는 오스만 제국령 사루한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 마니사는 아마시아와 함께 오스만 황실 도시가 되었는데, 1444년 무라트 2세가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하고 마니사로 은퇴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바르나 전투를 위해 잠깐 에디르네로 돌아왔던 무라트는 승전 후 마니사로 돌아왔지만, 예니체리 반란과 함께 복위하며 다시 떠났고 메흐메트가 대신 마니사 총독이 되었다가 1451년 부황이 사망한 후 계승하였다. 이후로도 마니사는 종종 황자들이 총독을 맡았고, 아마시아나 콘야보다 수도와 가까웠기에 제일 선호되었다.

메흐메트의 후계자 바예지트 2세의 치세부터 마니사에는 본격적으로 황자 (셰흐자데)들이 부임하였다. 메흐메트가 제일 아꼈던 손자 코르쿠트에 이어 미래의 셀림 1세가 마니사에 부임하였고, 후자는 1512년 술탄에 오른다. 셀림 역시 일찍이 후계자로 정할 만큼 아꼈던 아들 쉴레이만 1세를 마니사에 봉하였고, 후자는 그곳에서 미래의 재상이 될 이브라힘 파샤를 측근으로 삼는다. 쉴레이만과 함께 마니사로 온 모후 하프사 술탄은 현존하는 술탄 모스크를 세웠고, 마니사 생활 도중 쉴레이만의 장남 무스타파가 태어나기도 하였다. 1520년 술탄에 오른 쉴레이만은 후계자라 여긴 아들들을 차례대로 마니사에 봉하였다. (무스타파 : 1532-42년, 메흐메트 1542-43년, 셀림 1544-58년) 그중 미래의 셀림 2세가 되는 후자는 마니사 부임기인 1546년 미래의 술탄인 아들 무라트 3세를 얻었고, 무라트는 1560년 부친이 후계자로 결정된 황손으로써 쉴레이만의 생전인 1560년 마니사에 부임하였다.

무라트 이후로 연이어 4명의 술탄이 마니사 궁전에서 태어난다. 1566년 마니사 부임기의 무라트는 미래의 술탄이 되는 아들 메흐메트 3세를 얻었고[1], 1574년 술탄에 오른 후 메흐메트를 마니사에 봉하였다. 따라서 1595년 제위에 오를 때까지 줄곧 마니사 궁정에서 생활하고 8년의 제위 끝에 사망한 메흐메트는 인생의 대부분을 마니사에서 보낸 셈이다. 마니사 부임기 도중 메흐메트는 세 아들을 얻었는데, 그중 1590년 생인 차남 아흐메트 1세와 1591년 생인 무스타파 1세가 후일 술탄에 오르게 된다. 다만 메흐메트 3세가 요절한 후 불과 1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아흐메트 1세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은 이유로 지방 총독을 지내지 않은 채로 술탄이 되었고, 그는 아들들을 지방으로 파견해 각자 세력을 쌓게 하고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히게 하는 오스만 황위 계승 원칙을 폐기하였다.[2] 따라서 마니사를 거쳐간 오스만 왕족들은 무라트 2세부터 무스타파 1세까지 15명으로 끝났다.

2.4. 근대 : 카라오스만오을루

1595년 메흐메트 3세 일가가 코스탄티니예로 이주한 이래로 마니사는 평범한 지방 도시가 되었고, 쇠락을 상징하듯 같은해 큰 지진까지 일어났다. 17세기 들어 마니사는 사루한 산작의 치소인 인구 1만여의 중소 도시로 유지되었고, 목화와 가죽 판매를 위한 시장이 열렸다. 마니사는 아나톨리아를 관통하는 카라반 (대상) 행렬의 서쪽 종착점이었고, 유럽 상인들도 왕래하였다. 다만 1620년대 제대한 군인 등으로 구성된 젠네트오을루 산적단이 마니사 인근 농토를 장악하자 그리스/유대계 상인들은 이즈미르 등 안전한 해안 도시들로 떠났다. 17세기 후반 안정이 회복된 마니사는 수피 메블라나 종단의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1691년부터는 왕자들이 떠난 총독 (산작베이) 자리를 카라오스만오을루 가문(Karaosmanoğulları)이 세습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가문의 시조는 본래 소작농이었는데, 밭에서 6개의 보물 상자를 발견한 후 5개를 술탄께 바치고 나머지는 가져도 좋다는 현지 관리의 판결에도 6개를 모두 술탄께 진상했다 한다. 이로써 그는 산작베이로 임명되었고, 이후 일부 지역들처럼 세습되었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그는 유력한 산적 두목이었다고도 한다. 어쨋든 아얀(Âyan, 토호)으로써 세력을 키운 카라오스만오을루 가문은 18세기 후반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오스만 조정을 물심 양면으로 도왔고, 그 대가로 북쪽의 베르가마에서 이즈미르와 남쪽의 아이든에 이르는 방대한 영지를 하사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하여 19세기 초엽 마흐무트 2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따라 징세권과 각종 권리는 조정에 회수되었다. 다만 마니사 총독위 자체는 여전히 세습되었고, 이는 오스만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에도 카라오스만오을루 가문은 여러 정치인을 배출하는 명문가로 남아있다.

2.5.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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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마니사 전경
파일:1922 터키 마니사.jpg
1922년 대화재 이후의 시가지

아나돌루 에얄레트 휘하 사루한 산작으로 있던 마니사 지역은 1836년 신설된 아이든 에얄레트(Eyalet-i Aydın)로 편성되었고, 1845-47년에는 따로 사루한 에얄레트(Eyalet-i Saruhan)로 자립하기도 하였다. 1866년 마니사는 스미르나(이즈미르)와 철도로 이어졌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3번째 철도였고, 현재 터키 영토 내에서는 처음으로 완공된 철도였다. 이후로도 1872-75년 철도는 동쪽 알라셰히르로 연장되었고, 1888-90년에는 북쪽의 소마, 1896년에 아피욘카라히사르, 1912년 베르가마에 닿았다. 영국 회사가 관리하던 철도는 1934년 터키 공화국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하던 마니사는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집권과 함께 불어닥친 민족주의 열풍과 함께 현지 그리스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에 휩싸였다.

터키 독립 전쟁 중인 1919년 5월 26일, 그리스 군은 스미르나 점령 후 불과 11일만에 마니사를 점령하였다. 이후 국내외 정세를 살피던 그리스는 1920년 여름 더욱 내륙으로 진격했지만, 터키군의 강한 저항에 1921년 교착 상태에 놓였다. 그리고 1922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터키군은 9월 8일 마니사를 수복하였다. 떠나기 전 그리스 군은 시내의 기독교도들을 소개시킨 후 3일에 걸쳐 도시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고, 그 결과 도심의 90%가 전소하고[3] 4천여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터키군의 그리스인에 대한 적개감을 고취시켜 시내에 남아있던 키도니아 주교 그레고리오스가 처형되었고, 같은해 9월 터키군의 이즈미르 수복 당시 대화재로 기독교도 수만명이 희생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전후 마니사는 재건되어 사루한 도의 주도가 되었고, 사루한 도는 1927년 마니사 도로 개칭되었다. 20세기 중반 마니사는 터키의 첫 자연주의자 타르잔 (아흐메트 베데비)의 거주지였다.


[1] 죽기 직전이긴 했으나 메흐메트의 증조부 쉴레이만이 살아있을 때이다[2] 단손 우려와 1590년대 들어 아나톨리아 중부에 발생한 젤랄리 반란과 같은 위험 요소가 작용한 결과[3] 터키 주재 외교관은 1만 8천개의 건물 중 5백개만이 화마를 피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