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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2:36:29

레오나르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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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FF>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16대 데스포티스
Λεονάρδος Γ΄ Τόκκος | 레오나르도 3세 토코
파일:레오나르도 3세.jpg
출생 1436년 (추정)
사망 1492년 ~ 1503년 (추정) (향년 55~67세)
재위기간 1448년 9월 30일 ~ 1479년 9월
레오나르도 3세 토코
(Leonardo III Tocco)
가문 토코 가문
아버지 카를로 2세 토코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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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16대이자 마지막 데스포티스. 조반니 2세와 마찬가지로 케팔로니아-자킨토스 궁정백국의 넘버링을 이었기에 레오나르도 1세가 아닌 3세가 되었다.

2. 생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15대 데스포티스카를로 2세 토코의 아들이다. 1448년 9월 30일 부친이 사망했을 때 뒤를 이었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야코브 로소, 안드레아스 데 귀도 데스트리오네, 게아티우스 데 산타 콤롬바, 그리고 마리누스 밀리아레스 등 4명의 섭정이 평의회를 구성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고자 나폴리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방 국가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어떤 지원도 오지 않았고, 오스만 술탄국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1449년 3월 24일 이피로스의 수도 아르타가 오스만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제 이피로스에 남은 지역은 보니차, 바르나자, 앙겔로가스토르 등 3개의 도시와 자칸토스 섬뿐이었다. 그 후 장성한 레오나르도는 이피로스를 쇠락하게 한 책임을 물어 네 섭정들을 모두 죽였다.

이후 멸망의 위기에 몰린 이피로스를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명예 시민을 자처하였고,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오스만 함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래도 오스만 술탄국이 계속 쳐들어갔다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테지만, 그들은 발칸 반도의 외딴 지역과 섬에 박혀 지내는 이피로스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동로마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알바니아로의 진출에 더 많은 관심을 뒀다. 레오나르도는 메흐메트 2세에게 연간 4,000 두카트의 공물을 바쳤고, 오스만의 지방 총독이 아르타를 방문할 때마다 500두카트를 별도로 지불해, 그들이 굳이 이피로스를 칠 마음을 먹지 않도록 노력했다.

1457년 알바니아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알불레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그는 이에 고무되어 1460년 알바니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투르크군이 재빨리 공세를 개시해 본토에 남아있던 이피로스의 세 도시 중 두 개를 공략했다. 1463년 베네치아가 모레아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베네치아에게 그리스 본토의 영토를 되찾는 걸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원정을 취소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 후 자칸토스 섬에 망명한 기독교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이전의 토코 가문 지도자들과는 달리 정교회를 진심으로 신봉하며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칸토스 제도의 각 섬들에 민사 행정과 사법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를 두었고, 재무관을 두어서 제도 전반의 재정을 책임지게 하였다.또한 케팔로니아의 정교회 주교국을 부활시켰고, 자칸토스의 관할권을 가진 새로운 정교회 주교를 선임했다.

1463년 5월 1일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손녀 밀리카 브란코비치와 결혼했다. 1464년 아내가 죽자 10여 년간 결혼을 미루며 재혼 상대를 찾다가 1477년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조카 프란체스카 마르자노와 결혼했다. 그는 이를 통해 나폴리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오히려 베네치아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베네치아는 나폴리의 영향력이 자칸토스 제도에 미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리 국왕의 조카와 결혼한 레오나르도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베네치아는 이후로 자칸토스 제도를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렇듯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26년간 자칸토스 제도에서 버텼지만, 1479년 종말이 다가왔다. 그 해 초 요안니나의 새로운 산카 베이가 아르타를 탈출해 자칸토스로 피신해왔다. 그는 16살이었고, 그의 삼촌인 카롤로 1세의 사생아였다. 그는 레오나르도에게 500두캇의 지원을 청했지만 이 사람이 최근에 메흐메트 2세의 미움을 받아 좌천되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그를 업신여겨 500두카트를 주는 대신 체리가 담긴 바구니를 선물했다. 베이는 이에 모욕을 느끼고, 코스탄티니예에 이피로스가 오스만 제국을 배반하고 베네치아와 연합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공격을 돕고 있다고 고변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이피로스를 끝장내기로 마음먹고, 그해 여름 29척의 함선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오나르도는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귀중품을 모아 케팔로니아의 성 굴리에모 요새로 도주했다. 그러나 성 굴리에모 요새마저 위험해지자, 그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두 형제들과 함께 이오니아 해를 건너 타란토로 달아났고, 다시 나폴리로 이주했다. 한편 오스만 함대는 자칸토스 제도에 도착한 뒤 레오나르도를 위해 일했던 관리들을 학살했고, 많은 섬 주민들을 코스탄티니예로 끌고가서 노예로 팔았다.

그는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칼라브리아의 브라이티코와 칼리메라를 영지로 부여받았다. 하지만 자칸토스 제도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80년 2월 말, 그는 가족을 데리고 교황 식스토 4세를 찾아가서 군자금을 받아내려 했다. 교황은 그에게 1,000개의 금화를 주었고, 1년간 2,000개의 금화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페르디난도 1세에게서 12,000 두카트의 돈을 빌렸다. 이렇게 군자금을 마련한 그는 1481년카탈루냐 용병들을 고용해 동생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삼아 케팔로니아와 자킨토스 제도를 되찾게 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베네치아는 이 섬이 나폴리의 종주권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 1482년 베네치아 함대가 자킨토스를 탈취했고, 1483년 안토니오가 베네치아의 공격을 두려워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베네치아에게 자신을 자킨토스의 통치자로 임명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1480년 시노폴리 시를 20,000 두카트에 구입하고 영주 노릇을 했지만, 나폴리 왕국의 관리가 실권을 가졌기에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었다. 1495년 나폴리 왕국을 공략한 프랑스 왕국샤를 8세로부터 모노폴리의 통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샤를 8세가 베네치아와 교황령, 아라곤 왕국 등 여러 세력의 반격에 밀려 철수하면서 입지를 잃었다. 그 후 로마로 이주하여 살다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재위 기간(1492~1503)에 집이 무너져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사후에 데스포티스 요구자로 아들인 카를로가 명목상 카를로 3세(1464 ~ 1518)가 되었지만 아들 대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살다가 6대손 대에 이르러 1642년에야 데스포티스 요구자 직위를 포기했다.

3. 대중매체에서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등장. 여기서는 자킨토스 원정까지는 원역사와 동일하나 베네치아가 원역사보다 규모가 커진 페라라 전쟁에 휘말린 덕에 순조롭게 정착에 성공했고 이후 베네치아가 멸망하고 그자리에 동로마 제국이 재건되자 즉각 자신을 이피로스 데스포티스로 인정해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이를 받아들임을 넘어 동로마 해군 총사령관의 직함을 내린다. 이후 제국 수복 전쟁에서는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어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