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야구인에 대한 내용은 래리 브라운(야구) 문서 참고하십시오.
래리 브라운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
2004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000,#e5e5e5 | 그렉 포포비치 (Gregg Popovich) | 닥 리버스 (Doc Rivers) | 돈 넬슨 (Don Nelson) |
래리 브라운 (Larry Brown) | 레니 윌킨스 (Lenny Wilkens) | 레드 아워백 (Red Auerbach) | |
레드 홀즈먼 (Red Holzman) | 스티브 커 (Steve Kerr) | 에릭 스폴스트라 (Erik Spoelstra) | |
잭 램지 (Jack Ramsay) | 제리 슬로언 (Jerry Sloan) | 척 데일리 (Chuck Daly) | |
K.C. 존스 (K.C. Jones) | 팻 라일리 (Pat Riley) | 필 잭슨 (Phil Jackson) |
NBA 올해의 감독상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시즌 | 수상자 | 소속팀 | 성적 |
1962-63 | 해리 갤러틴 |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 48승 32패 .600 | |
1963-64 | 알렉스 해넘 |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 48승 32패 .600 | |
1964-65 | 레드 아워백 | 보스턴 셀틱스 | 62승18패 .775 | |
1965-66 | 돌프 셰이스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55승 25패 .688 | |
1966-67 | 조니 커 | 시카고 불스 | 33승 48패 .407 | |
1967-68 | 리치 게린 |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 56승 26패 .683 | |
1968-69 | 진 슈 | 볼티모어 불리츠 | 57승 25패 .695 | |
1969-70 | 레드 홀즈먼 | 뉴욕 닉스 | 60승 22패 .732 | |
1970-71 | 딕 모타 | 시카고 불스 | 51승 31패 .622 | |
1971-72 | 빌 셔먼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69승 13패 .841 | |
1972-73 | 톰 하인슨 | 보스턴 셀틱스 | 68승 14패 .829 | |
1973-74 | 레이 스캇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 52승 30패 .634 | |
1974-75 | 필 존슨 | 캔자스시티-오마하 킹스 | 44승 38패 .537 | |
1975-76 | 빌 피치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 49승 33패 .598 | |
1976-77 | 톰 니살크 | 휴스턴 로키츠 | 49승 33패 .598 | |
1977-78 | 허비 브라운 | 애틀랜타 호크스 | 41승 41패 .500 | |
1978-79 | 코튼 피치먼스 | 캔자스시티 킹스 | 48승 34패 .585 | |
1979-80 | 빌 피치 | 보스턴 셀틱스 | 61승 21패 .744 | |
1980-81 | 잭 맥키니 | 인디애나 페이서스 | 44승 38패 .537 | |
1981-82 | 진 슈 | 워싱턴 불리츠 | 43승 39패 .524 | |
1982-83 | 돈 넬슨 | 밀워키 벅스 | 51승 31패 .622 | |
1983-84 | 프랭크 레이든 | 유타 재즈 | 45승 37패 .549 | |
1984-85 | 돈 넬슨 | 밀워키 벅스 | 59승 23패 .720 | |
1985-86 | 마이크 프라텔로 | 애틀랜타 호크스 | 50승 32패 .610 | |
1986-87 | 마이크 슐러 |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 49승 33패 .598 | |
1987-88 | 덕 모 | 덴버 너기츠 | 54승 28패 .659 | |
1988-89 | 코튼 피치먼스 | 피닉스 선즈 | 55승 27패 .671 | |
1989-90 | 팻 라일리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63승 19패 .768 | |
1990-91 | 돈 체니 | 휴스턴 로키츠 | 52승 30패 .634 | |
1991-92 | 돈 넬슨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55승 27패 .671 | |
1992-93 | 팻 라일리 | 뉴욕 닉스 | 60승 22패 .732 | |
1993-94 | 레니 윌킨스 | 애틀랜타 호크스 | 57승 25패 .695 | |
1994-95 | 델 해리스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48승 34패 .585 | |
1995-96 | 필 잭슨 | 시카고 불스 | 72승 10패 .878 | |
1996-97 | 팻 라일리 | 마이애미 히트 | 61승 21패 .744 | |
1997-98 | 래리 버드 | 인디애나 페이서스 | 58승 24패 .707 | |
1998-99 | 마이크 던리비 시니어 |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 35승 15패 .700 | |
1999-00 | 닥 리버스 | 올랜도 매직 | 41승 41패 .500 | |
2000-01 | 래리 브라운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56승 26패 .683 | |
2001-02 | 릭 칼라일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 50승 32패 .610 | |
2002-03 | 그렉 포포비치 | 샌안토니오 스퍼스 | 60승 22패 .732 | |
2003-04 | 허비 브라운 | 멤피스 그리즐리스 | 50승 32패 .610 | |
2004-05 | 마이크 댄토니 | 피닉스 선즈 | 62승 20패 .756 | |
2005-06 | 에이버리 존슨 | 댈러스 매버릭스 | 60승 22패 .732 | |
2006-07 | 샘 미첼 | 토론토 랩터스 | 47승 35패 .573 | |
2007-08 | 바이런 스캇 | 뉴올리언스 호네츠 | 56승 26패 .683 | |
2008-09 | 마이클 버튼 브라운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 66승 16패 .805 | |
2009-10 | 스캇 브룩스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 50승 32패 .610 | |
2010-11 | 탐 티보듀 | 시카고 불스 | 62승 20패 .756 | |
2011-12 | 그렉 포포비치 | 샌안토니오 스퍼스 | 50승 16패 .758 | |
2012-13 | 조지 칼 | 덴버 너기츠 | 57승 25패 .695 | |
2013-14 | 그렉 포포비치 | 샌안토니오 스퍼스 | 62승 20패 .756 | |
2014-15 | 마이크 부덴홀저 | 애틀랜타 호크스 | 60승 22패 .732 | |
2015-16 | 스티브 커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73승 9패 .890 | |
2016-17 | 마이크 댄토니 | 휴스턴 로키츠 | 55승 27패 .670 | |
2017-18 | 드웨인 케이시 | 토론토 랩터스 | 59승 23패 .720 | |
2018-19 | 마이크 부덴홀저 | 밀워키 벅스 | 60승 22패 .732 | |
2019-20 | 닉 널스 | 토론토 랩터스 | 53승 19패 .736 | |
2020-21 | 탐 티보듀 | 뉴욕 닉스 | 41승 31패 .569 | |
2021-22 | 몬티 윌리엄스 | 피닉스 선즈 | 64승 18패 .780 | |
2022-23 | 마이클 버튼 브라운 | 새크라멘토 킹스 | 48승 34패 .585 | |
2023-24 | 마크 데이그널트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 57승 25패 .695 |
}}} ||
로렌스 하비 "래리" 브라운 Lawrence Harvey "Larry" Brown | |
생년월일 | 1940년 10월 14일 ([age(1940-10-14)]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뉴욕주 브루클린 |
출신학교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신체 | 180cm, 72kg |
선수 시절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드래프트 | 1963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7순위 볼티모어 불리츠 지명 |
소속팀 | 애크런 굿이어 윙푸츠 (1964~1965)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 (1967~1968) 오클랜드 오크스 (1968~1969) 워싱턴 캡스 (1969~1970) 버지니아 스콰이어스 (1970~1971) 덴버 너기츠 (1971~1972) |
지도자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코치 (1965~1967) 데이비슨 칼리지 감독 (1969)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 (1972~1974) 덴버 너기츠 감독 (1974~1979) UCLA 감독 (1979~1981) 뉴저지 네츠 감독 (1981~1983) 캔자스 대학교 감독 (1983~1988)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1988∼1992)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감독 (1992∼1993)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1993~1997)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 (1997~2003)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감독 (2003~2005) 뉴욕 닉스 감독 (2005~2006) 샬럿 밥캣츠 감독 (2008~2010)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감독 (2012~2016) 옥실리움 토리노(이탈리아)[1] 감독 (2018) 멤피스 대학교 코치 (2021) |
국가대표 |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감독 (1999, 2003) 아테네 올림픽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2004) |
프런트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단장 (1997~1998)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부사장 (2007~2008) |
등번호 | 11번 - 덴버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ABA 및 NBA 통틀어 1327승 1011패(.568)의 감독 경력이 있으며, 현재까지 NBA 전, 현직 감독 중 유일하게 감독으로서 NCAA와 NBA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다.2. 일생
2.1. 선수 시절
1941년에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가구 세일즈맨인 아버지 밀튼 브라운과 어머니 앤 히틀먼[2]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인 1947년에 아버지가 뇌동맥류 파열로 숨지는 비극을 겪었고, 그 뒤 롱아일랜드의 롱비치로 이사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롱비치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바비 거스텐(1920~2019)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아 실력을 쌓은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로 진학하여 훗날 명장이 될 프랭크 맥과이어(1914~1994)와 딘 스미스(1931~2015) 감독 아래서 지도를 받았다. 비록 포스트시즌을 가지 못했지만 1962년에는 올 ACC 세컨드 팀, 1963년 퍼스트 팀에 각각 뽑혔다. 또한 1961년 마카비아 경기 대회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각각 미국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금메달을 안겨 주었다.
1963년 NBA 드래프트에서 볼티모어 불리츠에 2라운드 7순위에 지명되었지만 탈락되는 바람에 1964년에는 세미프로 팀 '애크런 굿이어 윙푸츠'에서 뛰었고, 이듬해부터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로 돌아가 2년 동안 은사 딘 스미스 감독 밑에서 코치를 했다. 본격적인 프로 데뷔는 1967년 ABA 리그에서부터다. 선수 시절 동안 ABA 우승도 경험했고, 올스타전 MVP, 3회 올스타, 올 ABA 세컨드 팀 선정 등 선수시절이 비교적 평범했던 필 잭슨, 팻 라일리, 마이크 슈셉스키, 아예 프로선수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그렉 포포비치, 프로로 데뷔 후에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에릭 스폴스트라와는 다르게 달리 선수 시절도 나름대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다. 1972년 덴버 로켓츠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감독 시절
ABA 시절 그가 선보인 기상천외한 옷차림들. 물론 1976년 NBA 합병 이후 이러한 것들을 선보이지 않았다.[3]
1969년 여름 오프시즌 동안 아주 잠시 데이비슨 대학교의 지휘봉을 잡았던 브라운은 선수 은퇴 후인 1972년에 ABA 팀인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으로 2년간 팀을 지휘해서 전 시즌에 약팀이었던 팀을 2번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이후 칼 시어(1936~2019) 단장과 함께 같은 ABA 소속이었던 덴버 너기츠로 이직해서 1975년부터 켄터키 콜로넬스에서 영입한 댄 이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출신이던 '스카이워커' 데이비드 톰슨을 축으로 한 공격농구를 선보여 임기 초반 두 시즌 동안 60승을 거두게 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ABA 마지막 시즌인 1975-76 시즌에 파이널까지 갔지만 줄리어스 어빙의 뉴욕 네츠에게 2승 4패로 졌다.
1976년 NBA에 합류한 후 1977-78 시즌에 팀을 입성 이래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이끌었으나 거스 존슨, 잭 시크마, 데니스 존슨 등이 포진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게 2승 4패로 져서 파이널을 못 갔다. 임기 동안 브라운은 ABA 올해의 감독상을 3번이나 수상해 스타 감독이 되었다.
캔자스 대학교 감독 시절.[4]
1979년 UCLA 농구부로 감독직을 옮겨 전임 게리 커닝엄이 키운 키키 반더웨이를 필두로 1980년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끌고 갔으나, 대럴 그리피스가 이끄는 루이빌 대학교에게 59-54로 졌다. 다만 퇴임 후인 1981년에 스카우트 관련 비리 등이 적발되어 농구부는 1981-82 시즌 출전 금지, 1979-80 시즌 기록 말소 등의 징계를 받았다.(뉴욕 타임즈 기사)
반면 브라운은 1981년에 뉴저지 네츠의 감독으로 옮겨 신인 벅 윌리엄스를 필두로 임기 2년간 전부 플레이오프에 올려놨고, 1983년부터 캔자스 대학교로 옮겨 이듬해에 같은 주의 로렌소 출신 대니 매닝(로렌스 고교)를 스카웃해서 1986년 NCAA 전국대회 때 4강까지 찍었으나 대니 페리[5], 조니 도킨스, 토미 아마커[6] 등이 포진한 듀크 대학교에게 71-67로 졌고, 1988년 전국대회 당시 결승까지 도달해 하비 그랜트[7], 무키 블레이락, 스테이시 킹 등이 포진한 오클라호마 대학교를 83-79로 이겨 36년만에 다시 트로피를 따게 했다. 이 공로로 그는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감독상을 받았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시절
1988년에는 NBA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4년간 감독생활을 하며 팀을 2번정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있는동안 저 유명한 데이비드 로빈슨을 지도했는데, 그가 있는 내내 성적은 양호했으나 팀 선수들에게 욕설을 하는 등 비신사적인 모습을 보여 비호감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8]
1992년 1월 스퍼스 감독에서 중도에 물러난 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감독으로 취임, 캔자스대 때 애제자인 대니 매닝과 론 하퍼, 찰스 스미스, 게리 그랜트, 켄 노먼, 닥 리버스, 로이 보트 등을 앞세워 5할승률을 못하던 팀을 단숨에 5할 승률로 끌어올려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1992-93 시즌을 앞두고 찰스 스미스, 닥 리버스, 보 킴블을 뉴욕 닉스의 마크 잭슨과 맞바꾸고, 1995년 드래프트 픽 1장을 워싱턴 불리츠의 스테인리 로버츠와 맞바꿔가며 또 한번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팀 투자에 인색한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 때문에 재계약도 못 하고 물러났다.
그 뒤에 허버트 사이먼 구단주의 부름을 받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데틀레프 슈렘프를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팔고, 데릭 맥키와 안토니오 데이비스 같은 베테랑과 신인을 각각 등용해 레지 밀러와 릭 스미츠, 데일 데이비스 등 기존 스쿼드를 받쳐주게 하여 최강 전력을 만들었다. 94-95시즌에는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려서 당시 동부 최강팀이었던 올랜도 매직을 7차전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아쉽게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96-97시즌 들어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브라운은 1997년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단장 겸 감독으로 취임한다.
앨런 아이버슨에게 지시를 내리는 브라운 감독.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 시절.
브라운 감독의 필라델피아행은 여러모로 뉴스거리가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앨런 아이버슨과의 만남이었다. 농구를 대하는 가치관이 완전히 달랐고, 자기 농구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이 둘의 만남은 여러모로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냈다.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의 플레이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첫 시즌을 앞두고 드래프트에서 유타대 출신 키스 밴혼을 전체 2번으로 뽑았다가 뉴저지 네츠가 7번으로 뽑은 팀 토마스를 에릭 몬트로스, 짐 잭슨과 묶어서 받아냈다.
정규시즌 들어서 성적이 부진해지자 1997년 12월, 브라운 감독은 제리 스택하우스 및 몬트로스를 2005년 드래프트 2라운드 픽과 묶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팔아치우는 한편, 아이버슨을 슈팅가드로 쓰겠다고 공표했다. 전문가들과 팬들은 그의 결정에 대해 포인트가드로서도 단신인 아이버슨이 슈팅가드로는 무리라며 만류하는 분위기였지만, 브라운은 "두고 봐라. 오히려 상대팀이 우리한테 쩔쩔맬거다." 라며 자신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옳았다. 아이버슨은 자신보다 10cm이상 큰 슈팅가드를 스피드와 드리블로 농락하며 엄청나게 활약했다. 아이버슨의 백코트 파트너로는 디트로이트에서 받아 온 키 크고 수비력이 좋은 선수 에릭 스노우와 애런 맥키를 1번에 배치하고 수비시에 아이버슨이 상대팀 포인트가드를 막고 스노와 맥키가 상대팀 슈팅가드를 막는 형식으로 나갔다.
부임 첫 시즌은 지난 시즌(22승 60패)보다 승점을 9점 올려 31승 51패까지 갔으나, 플레이오프는 못 갔다. 1998-99시즌을 앞두고 단장직을 빌리 킹 관리부사장에게 넘기면서 감독직에 집중을 기했고, 단축시즌임에도 불구하고 팀을 28승 22패로 8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며 아이버슨은 그해 득점왕에 올랐다. 1999-2000 시즌에는 시카고 불스로부터 토니 쿠코치를 영입해가며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 간에 불화가 생겼다. 아이버슨의 잦은 연습지각 심지어 불참까지 하게 되면서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한 인터뷰에서도 "당신이 한 회사의 상사인데 맨날 출근시간에 지각하고 때로는 나오지 않는 부하직원이 좋겠습니까?" 라며 아이버슨에게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아이버슨도 지지 않고 맞섰다. 더 나아가 아이버슨이 'Jewelz' 명의로 낸 갱스터 랩 싱글음반 《40 Bars》를 내서 사회적 파장이 일자, 그를 신뢰해 온 팻 크로치 사장도 더 이상 그를 믿어줄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트레이드를 시도했다. 이 트레이드는 거의 성사단계까지 갔다가 양 팀의 입장차이로 인해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필라델피아를 떠날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아이버슨이 래리 브라운에게 찾아가 사과하면서 달라지겠다고 약속했고, 음반 발매도 무기한 연기했다. 브라운도 아이버슨을 믿고 다시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2000-01시즌, 아이버슨을 필두로 토니 쿠코치, 애런 맥키, 에릭 스노우, 테오 라틀리프 넷이 엄호토록 하여 '창 1개와 방패 4개'로 진용을 맞춰 개막 후 10연승을 달리는 등 상승세를 타면서 '필리 신드롬'을 일으켰고, 동부전체 1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아이버슨은 정규시즌 MVP, 브라운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을, 애런 맥키는 올해의 식스맨 상을, 디켐베 무톰보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는 등 그야말로 경사였다.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대접전을 벌이면서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파이널전까지 전승으로 올라온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였는데, 그 비책으로 부상에 신음하던 테오를 애틀랜타 호크스의 간판 센터 디켐베 무톰보와 맞바꿨다. 어느 누구도 필라델피아의 우승은커녕 승리도 못 거둘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1차전에서 예상을 깨고 먼저 1승을 따냈지만, PO 내내 주전이고 벤치고 간에 부상을 고루 입은 탓에 레이커스를 당해내지 못하고 내리 4연패하면서 트로피를 못 땄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감독 시절.
이후에도 아이버슨과 브라운 간의 갈등은 더해졌고, 2001-02 시즌부터 리그 사무국이 지역방어를 허용하면서 아이버슨을 중심으로 한 공격농구는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같은 해에 샬럿 호네츠로부터 데릭 콜먼을 사들여 '2옵션'을 만들었으나, 콜먼이 자기관리에 실패한 데다 부상을 너무 입어 호흡이 안 맞아 더 이상의 성적을 올리기엔 역부족이었고, 2003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옮겨버렸다.
브라운 감독은 전임 릭 칼라일 감독이 키운 벤 월러스, 테이션 프린스, 천시 빌럽스, 라시드 월러스 등 성깔 있는 선수들을 다잡아 2004 NBA 파이널에 팀을 올려놓고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시 전당포 라인업으로 구성된 레이커스를 4승1패로 떡실신 시키며, 처음으로 NBA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04-05시즌에도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았지만 아쉽게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근데 이 시즌 말미에 디트로이트 구단과 브라운 감독간에 마찰이 있었다. 바로 브라운의 건강문제였다. 방광이상으로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에도 병원을 계속 다녀야 할 정도였다.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의 건강에 의구심을 품었고, 브라운도 마이애미 히트와의 컨퍼런스 결승전부터 자신의 향후거취를 고민하는 등 마음은 편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브라운 감독은 디트로이트 구단과 결별했고, 그가 떠남으로 해서 배드 보이스 2기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향후거취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여론이 궁금해 하는 가운데 브라운은 얼마 후 뉴욕 닉스의 감독에 취임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뉴욕 닉스 감독 시절. 아이제아 토마스 단장과 함께뉴욕 닉스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도까지 동부의 강호였지만, 제프 반 건디의 사임이후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임 단장이었던 스캇 레이든의 병맛 넘치는 삽질에 팬들은 이미 지쳐버렸고, 당시 단장이었던 아이제아 토마스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실업자가 된 브라운을 보고 그에게 달려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브라운 감독은 이를 수락했다. 계약금액은 확실히 밝혀진 건 없었지만 약 5천만 달러에서 6천만 달러 선으로 알려졌다. 브라운 본인은 "뉴욕 닉스 감독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자리" 라며 기쁨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때당시의 뉴욕로스터는 워낙 막장이었고 이건 제아무리 명장인 브라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도저히 단시간 내에 팀을 정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팀이 포인트가드였던 스테판 마버리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 간의 불화가 겹쳤고, 여기서 성적도 좋지 않았고 결국 브라운은 한 시즌만에 해고되었다.
샬럿 밥캣츠 감독 시절.
2007년부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부사장으로 돌아왔으나 2008년 샬럿 밥캣츠의 구단주이자 자신의 대학후배인 마이클 조던의 요청으로 샬럿 밥캣츠의 감독이 되었다. 밥캣츠는 그의 NBA감독생활에서 9번째 팀이었다. 그릭 부임 2년째 되는 해 팀을 처음으로 5할 승률로 끌어올리고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다만 1라운드에서 너무 힘없이 4전 전패를 해 광속 탈락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28경기 동안 9승 19패로 부진했고, 또 팀 내 선수들인 제랄드 월라스와 스티븐 잭슨과의 불화가 겹치자, 조던 구단주는 성적부진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2012년, 텍사스 주 댈러스에 있는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농구부의 감독으로 2년 만에 복귀했다. 2013년에 프로비소 이스트 고등학교 출신의 스털링 브라운[9]을 스카우트해서 만년 약체이던 팀을 2013/14 시즌 때 NIT로 진출시켜 결승전까지 간 바 있고, 2014/15 시즌에는 22년만에 NCAA 전국 토너먼트로 올려놨다.
2015/16 시즌을 마지막으로 잠정 은퇴했다가, 2018년 이탈리아 LBA 팀 옥실리움 토리노 감독을 잠깐 맡았다. 2021년에는 멤피스 대학교 농구부의 코치로 선임되어 아들뻘인 앤퍼니 하더웨이 감독을 보좌하기 시작했으나 건강 문제로 중도 하차했고, 2022년에 잠깐 감독 자문역을 맡았다.
한편 그는 2004 아테네 올림픽 때 미국 국가대표팀(드림팀)을 이끌었던 감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드림팀은 대회 내내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며 역대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였고, 결국 4강에서 아르헨티나에게 발목을 잡히며 동메달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테네 올림픽은 그의 감독 인생 흑역사 중 하나로 새겨지게 되었다.
3. 일화(감독 스타일 포함)
감독 스타일은 전형적은 올드스쿨형 감독. 자신의 농구철학을 자신이 맡은 농구팀에 그대로 주입시키는 타입이며 패배에만 젖은 팀을 다시 일으키는 재주를 지닌다. 그리고 늘 단기간에 성적을 뽑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팀에 있는 로스터를 굴려보고 필요한 선수는 그대로 두고, 자신의 농구철학에 맞지 않는 선수는 트레이드시켜서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데려온다. 물론 단기간에 하위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 재주도 있다. 91-92시즌만 하더라도 시즌 중에 샌안토니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가 같은 시즌에 클리퍼스 감독을 맡아서 선수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 걸 보면 보통 비범한 사람은 아닌 듯. 단 뉴욕 닉스 감독 시절은 본인에게는 흑역사일지도. 애초에 브라운 감독은 단기간에 팀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보다는 단계를 밟아가면서 팀 성적은 천천히 끌어올리는 타입이다 보니, 단기간의 성적향상을 기대하는 뉴욕 닉스에게는 어쩌면 안 맞는 감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 뉴욕 닉스의 로스터 상태가 워낙 막장이라 브라운 감독이라도 무리였을지 모른다. 스퍼스 때 행보에서 보듯 본인의 성격이 감정적이라 일이 안 풀리면 선수들에게 온갖 욕설을 하는 등 비신사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팀에 오래 있는 때가 많지 않았다. 이를 통해 그는 NBA에서 대표적인 저니맨 감독으로 평가받는다.마이클 조던의 등장과 3점슛 제도를 통해 득세한 스윙맨 중심시대에도 전통적인 팀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스윙 오펜스를 구사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로스터에는 항상 앨런 아이버슨, 레지 밀러, 리차드 해밀턴같은 뛰어난 득점원과 그를 보좌하는 가드진 시스템이 확립되어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끝없이 볼을 돌리며 오픈 찬스를 만들고 돌리는 협력플레이로 한번의 찬스를 만들어 공격하고 수비하는데 능한 감독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1번의 활용인데, 래리 브라운 시스템에서 1번은 항상 리그 평균 1번들보다 크고 힘이 센 선수를 중용하며, 언제든지 탑에서 포스트업으로 상대 1번을 등짝으로 밀고 들어가 공간을 잡아먹고 다른 슈터의 이동 경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의 1번에게 지시하는 볼핸들러, 컨트롤 타워, 패서, 심지어 현시대 픽앤롤 중심 오펜스에선 주득점원까지 맡는 역할이 아니라 하프코트 가장 깊은 곳에서 탱킹하면서 공을 뿌려주는 팀 공격의 윤활유나 미끼 등 팀플레이어로서의 활용을 강조하는 편.
이를 비유하자면, 풍차 돌리기라고 할 수 있다. 스윙 오펜스의 기본 세팅은 포인트가드가 최대한 상대 코트 가운데까지 밀고 들어가 상대 밀집 수비를 버티면서 수비를 끌어들여 공간을 확보하고,[10] 주 득점원인 슈터들은 포인트가드를 중심으로 몰리게 되는 수비진의 빈틈이 생기는 베이스라인과 골밑 주변을 빙빙 돌면서 오프 더 볼 무브로 찬스를 잡아서 슛을 날리고, 빅맨은 슈터가 오픈찬스를 잡길 지원하도록 오프볼 스크린을 걸어주는 기본적인 움직임에서 오펜스를 확장해나간다.
선수시절 포인트가드를 해서인지 포인트가드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엄하고, 또한 혹독하게 조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시스템상 보통의 농구스타일과 확연하게 다른 포인트가드 운영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적응하기도 어렵다. 인디애나 감독 시절에 마크 잭슨은 스타일에 잘 맞는 등빨과 포스트업을 가진 어느정도 숙성되어있었고, 래리 브라운의 스타일에 원래도 잘 들어맞는 가드였던지 딱히 크게 터치는 하지 않았던듯. 그래도 필라델피아 시절에 에릭 스노나 애런 맥키를 성장시키고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단지 득점력만 준수했던 듀얼가드에 불과했던 천시 빌럽스를 리그에 수준급 포인트가드로 성장시켰다. 빌럽스도 브라운을 만나면서 사이즈와 볼키핑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 자기 가치를 끌어올렸고 그 결과 천시 빌럽스는 04년 파이널 MVP를 거머쥐었다.
샬럿 밥캣츠의 레이몬드 펠튼이나 D.J. 어거스틴은 애초부터 마크 잭슨, 천시 빌럽스 급의 떡대나 밀집수비를 버텨낼 스킬을 갖추지 못한데다 그들의 보조를 받아 득점해줄 해결사 부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보통의 롤플레이어로 끝나고 만다.
앨런 아이버슨과는 애증의 관계. 또는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과 반항기 넘치는 그렇지만 재능은 출중한 불량학생 관계정도. 브라운은 아이버슨을 처음부터 안 좋게 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굉장한 흥미를 느꼈던 모양. 아이버슨의 공식 다큐멘터리인 The Answer에서도 브라운은 아이버슨을 "재능은 있는데 플레이할 줄은 모르는군." 이라고 평했다. 그로서는 아이버슨을 꼭 제대로 된 선수로 키우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듯 하다. 이 둘의 관계과 가장 좋았던 건 00-01시즌. 아이버슨이 2001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후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했던 말은 "우리 감독님 어디 있어요?(Where is My Coach?)"였다.동영상 링크[11]
그 후 두 사람은 한 프로그램에 동반출연했는데, 이때 브라운이 아이버슨에 대해 좋은 말을 건네자 아이버슨이 눈물을 흘리는 짠한 장면도 있었다.동영상 링크[12] 후에 브라운 감독과 결별한 후 아이버슨은 그를 훌륭한 감독이라고 말했고, 그때 브라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브라운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가끔은 의자에 앉아서 아이버슨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야 할 때도 있다." 라고 한 바 있다. 아이버슨이 무적상태로 갈 곳이 없을 때 앨런을 다시 데려와서 가르치고 싶다고 발언한 것을 보면 브라운도 아이버슨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반면 스테판 마버리와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 이미 아테네 올림픽에서 같이 있는 동안에 둘은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브라운이 뉴욕 닉스에 감독으로 왔을 때 가장 우려되었던 부분이 바로 스테판 마버리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버리는 브라운 감독에게 "나도 아이버슨처럼 공격하고 싶으니 시켜줘요!" 라고 요청했을 때 브라운 감독은 "이 세상에 아이버슨처럼 플레이할 수 있는 건 아이버슨밖에 없어. 넌 안 돼."라고 그의 의견을 묵살했고,[13] 이 때문에 마버리는 삐쳤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후부터 커리어에 내리막을 탔다. 비슷한 테크를 탄 선수가 뉴욕 닉스의 자말 크로포드. 크로포드도 마버리와 비슷한 유형의 듀얼가드라 브라운이 쓰길 꺼리던 선수였다.
레지 밀러와는 비교적 잘 지냈다. 사실 위에 두 사람과 달리 코트 위에서의 성격은 불 같았지만, 래리 브라운의 지시에는 고분고분 따라주었다. [14] 물론 가끔씩 충돌도 있었지만 그건 어느 직장에 상사나 부하직원이 가질 수 있는 흔한 의견충돌 수준이었고 결코 그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레지 밀러의 마지막 경기인 2005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6차전 때 경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작전타임을 불러서 밀러의 마지막 경기를 아쉬워하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사람은 바로 브라운 감독이었고, 경기가 끝난 후 밀러가 가장 먼저 찾아가 포옹한 사람도 브라운 감독이었다. 사실 밀러는 불같은 성격과 별개로 감독의 권위를 잘 인정하는 보수적인 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아이제아 토마스처럼 잠깐이라도 본인을 감독한 사람과 같이 패널로 출연하면, 본인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음에도 (4살) "감독님 (Coach)"라고 부를때가 많다. 미국에선 어느 정도 친분이 있거나 비슷한 위치면 그냥 말을 놓는데도 저렇게 하는 것. 밀러는 조던과도 주먹다짐을 하고, 스파이크 리나 존 스탁스한테도 공격적으로 트래쉬토킹을 하는 만만찮은 성깔의 소유자였지만, 결코 감독한테 도 넘게 대드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아이버슨의 경우 싸운 적이 커리어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이고 올스타전 때는 나서서 친목질할 정도로 다정한 편인데, 자기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권위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기질의 선수라 충돌이 있었던 것. 이는 마버리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 보수적인 밀러가 본인이 능력도, 경력도 인정하는데다 까마득한 업계 선배인 브라운 감독에게 대드는 이유가 없는 것.
참고로 래리 브라운의 형인 허브 브라운도 농구인인데, 래리가 '04년 우승을 해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감독일 당시, 허브 브라운은 수석코치였기에 형제가 함께 팀 운영을 이끌었다.
그의 코칭 트리에 속한 인물로는 그렉 포포비치와 존 칼리파리(현 아칸소 대학교 감독), 태드 보일(현 콜로라도 대학교 감독), 마크 터전(전 메릴랜드 대학교 감독), 빌 셀프(현 캔자스 대학교 감독) 등이 있으며, 200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4. 관련 문서
[1] 2019년 파산으로 해체됨.[2] 벨라루스에서 이민 온 유대계 이민자 출신으로,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빵집을 운영해왔다.[3] 신생리그였던 ABA와 달리 NBA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젊은 시절 자유분방했던 필 잭슨은 80년대 초에 시카고 불스에 어시스턴트 코치로 취직할 기회가 있었는데, 면접 때 북실북실한 수염을 달고 갔다가 당장 탈락했다. 이후 잭슨은 CBA에서 감독생활 후 농구를 접을까하는 고민을 하던 차에(잭슨의 CBA생활은 우승도 하는 등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미국 하위리그에서 대접은 처참하다) 불스가 다시 부르자, 이번에는 깔끔하게 콧수염만 남기고 면접보러 가 취업에 성공했다. 이후 팬들에게 잘 알다시피 잭슨은 콧수염에 정장차림을 계속 유지하는데, 젊었을때 히피였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4] 같이 있는 선수는 1988년 캔자스 대학교 우승 주역이자, 동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위로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입단해 15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여 올스타 2회 및 식스맨 어워드 1회를 차지하고, 은퇴한 뒤 2008년 모교 캔자스 대학교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일하면서 우승을 경험한 뒤, 2014년부터 6년 간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감독을 지낸 포워드 대니 매닝(현 루이빌 대학교 수석코치)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브라운 휘하 코칭스태프 중 아버지 에드 매닝(1944~2011)도 있었다.[5] 전 워싱턴 불리츠 단장 밥 페리의 아들. 훗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애틀랜타 호크스 등지에서 단장을 지냄.[6] 훗날 하버드 대학교의 감독으로서 제레미 린을 가르치게 된다.[7] 호레이스 그랜트의 동생.[8] 같이 있는 선수는 마크 잭슨 前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다. 잭슨의 선수시절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조.[9] 2017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6픽으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선발되었으나,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된 후 데뷔하여 2023년까지 NBA에서 총 4팀을 거쳤으며 NBA와 G리그를 오가기도 했다. 2023년 독일 알바 베를린으로 이적.[10] 사실 이 역할은 가드 뿐 아니라 포인트 포워드로도 할 수 있다.[11] 이를 두고 전 필라델피아의 사장이었고 직접 앨런 아이버슨을 지명했던 팻 크로스는 '"마치 영화 록키에서 록키가 에이드리안을 부른 것과 같다." 라고 말했다.[12] 해당 프로그램은 ESPN의 Quite Frankly라는 토크쇼인데 두 사람이 동반 출연한건 아니고 브라운 감독이 아이버슨보다 먼저 출연했다. 아이버슨의 인터뷰 도중에 아이버슨이 래리 브라운은 훌륭한 감독님이라고 말하자 사회자가 브라운이 한 얘기를 들어보자며 자료화면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서 브라운은 "아이버슨은 매일 밤 열정적으로 뛴다. 그리고 늘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론 가끔 실수도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아이버슨은 눈물을 흘렸다.[13] 맞는 말이다. 마버리는 온볼스킬은 뛰어났지만 아이버슨처럼 오프볼 상태에서의 엄청난 스피드를 가진 선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버리는 제법 탐욕이 강한 선수고, 애증의 제자 아이버슨에게 제대로 데인 래리 브라운은 더 이상 그런 유형의 포인트 가드를 용납하지 않았다.[14] 이 점은 마버리나 아이버슨과는 달리 밀러가 올드스쿨 타입의 슈팅가드였던 점이 크다. 마이클 조던 이후 득점과 리딩, 리바운드 가담까지 골고루 하는 올라운드형 슈팅가드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는 외곽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비교적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조던 이전까지 MVP를 탄 슈팅가드는 단 한명도 없었다. 65년생인 밀러는 화려한 개인기를 자제하고 볼소유를 최소화하면서 부지런히 오프볼 무브를 통해 스크린을 타고 나와 캐치 앤 슈팅을 하는 올드스쿨 스타일의 플레이에 익숙한 선수였다. 립 해밀턴과 함께 래리 브라운식 스윙 오펜스에 가장 최적화된 2번중 하나였던 셈.
분류
- 미국의 남자 농구 선수
- 미국의 남자 농구 감독
- 브루클린 출신 인물
- 유대계 미국인
- 러시아계 미국인
- 벨라루스계 미국인
- 1940년 출생
- 1967년 데뷔
- 1972년 은퇴
- 포인트 가드
- 덴버 너기츠/은퇴, 이적
- 덴버 너기츠/역대 감독
- 브루클린 네츠/역대 감독
- 샌안토니오 스퍼스/역대 감독
-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역대 감독
- 인디애나 페이서스/역대 감독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역대 감독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역대 감독
- 뉴욕 닉스/역대 감독
- 샬럿 호네츠/역대 감독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출신
- NBA 올해의 감독상 수상자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