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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43:24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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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역대 카펠마이스터4. 특징

1. 개요

독일 작센 주의 라이프치히를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줄여서 그냥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라고도 부른다. 멀지 않은 드레스덴에 있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 악단도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단체다.

2. 연혁

1781년에 창단되었는데, 당시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드문 연주회 전문 관현악단으로 출발했다. 사실 그 전에도 라이프치히에서는 이런저런 임시로 급조한 악단들이 맥주집 등을 빌려 음악회를 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 지라 종종 취객들의 꼬장으로 연주를 방해받는 등의 민폐가 잇따랐다.

라이프치히 시장과 시 의회는 결국 공연만을 전문으로 하는 악단과 공연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당시 시의 재정을 상당 부분 충당하던 직물업자들과 의논해 직물회관(게반트하우스)을 콘서트홀로 일부 개축해 공사 완료와 동시에 창단 연주회를 가졌다. 초대 카펠마이스터[1]로는 요한 아담 힐러가 취임했다.

1835년에는 작곡가로 유명한 펠릭스 멘델스존이 카펠마이스터로 부임했는데, 멘델스존은 그 당시 오로지 지휘만 하는 근대 지휘자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로도 유명했다. 동시에 그 동안 공연도 못해보고 악보로 썩고 있던 슈베르트교향곡 9번이나, 시대가 바뀌면서 구닥다리로 여겨져 아오안 상태였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같은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재공연했다.

칼 라이네케가 카펠마이스터로 재임 중이던 1885년에는 아예 콘서트 전용 공연장으로 새롭게 지은 두 번째 게반트하우스로 거점을 옮겼고, 1895년에는 아르투르 니키슈가 부임해 특유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발휘하며 악단의 명성을 독일에 국한하지 않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니키슈가 1922년에 타계하자 30대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후임으로 악단을 이어받아 전임자 못지 않은 지도력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같은 시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 지휘자까지 겸하면서 강행군 중이었고, 악단과도 연습 시간 배분 문제나 오페라 출연 비중에 대한 논쟁 등으로 사이가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에 집중하기 위해 1928년에 물러났고, 후임으로는 브루노 발터가 부임했다. 하지만 발터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쾰른에서 활동하던 헤르만 아벤트로트가 들어왔다. 아벤트로트는 2차대전 종전 직후까지도 계속 카펠마이스터로 활동했고, 악단은 나치 정부로부터 유서깊은 악단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칭호를 받고 병역 면제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되고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지면서 다른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공연 기회가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고, 1944년에는 게반트하우스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면서 시내 영화관에서 공연과 녹음을 진행하는 신세가 되었다. 패전 후 소련군이 진주한 뒤 군정 당국의 허가를 받아 활동을 재개했지만, 아벤트로트는 적극적인 나치 가담자로 분류되어 카펠마이스터 직책을 사임해야 했다.[2]

아벤트로트의 후임으로는 헤르만 알베르트와 프란츠 콘비츠니가 차례로 카펠마이스터직을 승계했고, 콘비츠니 재임 중에는 동독 국영 음반사인 도이체 샬플라텐에서 꽤 많은 녹음을 취입하기도 했다. 콘비츠니가 1962년 유고슬라비아 방문 중 급서하자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바츨라프 노이만이 1964년에 부임했는데, 노이만도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진압 후 망명한 선배 카렐 안체를의 후임으로 급히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이임하면서 또 2년 동안 카펠마이스터 공석 상태로 활동해야 했다.

1970년에 쿠르트 마주어가 17대 카펠마이스터로 부임했고, 이후 거의 26년 동안 장기 재임하면서 전후 콘비츠니 다음으로 악단의 리즈 시절을 구가했다. 마주어도 도이체 샬플라텐에서 주로 음반 작업을 했지만, 1980년대 들어 서방 음반사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필립스 등에서 제휴 형식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가 준공되어 상주 공연장을 되찾았다.

1989년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잇따르면서 마주어도 이에 지지를 표명했고, 그 때문인지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후에도 계속 카펠마이스터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임 말기에는 마주어가 뉴욕 필하모닉 활동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면서 악단 내부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의식했는지 결국 1996년에 카펠마이스터 직책을 내놓고 물러났다.

마주어 사임 후에도 약 2년 간의 공백이 있었고, 후임으로는 1970년대부터 이 악단을 자주 객원 지휘한 스웨덴미국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발탁되었다. 블롬슈테트는 통일 이후 혼란스러웠던 동독 지역의 분위기에 악단이 휩쓸리지 않도록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블롬슈테트가 퇴임한 후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리카르도 샤이가 19대 카펠마이스터로 부임했다. 샤이는 추가 계약 연장을 통해 2020년까지 재임할 예정이었지만,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의 예술 감독과 루체른 음악제 예술 감독을 겸임하게 되자 과중한 업무를 이유로 2016년에 조기 퇴임했다. 악단에서는 샤이의 퇴임 발표와 동시에 후임 카펠마이스터를 물색해 라트비아 출신의 안드리스 넬손스를 신임 카펠마이스터로 뽑았다고 발표했다. 넬손스는 2018년에 카펠마이스터에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

3. 역대 카펠마이스터

4. 특징

독일 관현악단들 중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18세기 후반에 유럽 전역을 통틀어 그리 많지 않았던 연주회 전문 관현악단이라는 개념을 선취했다는 사실에도 꽤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근에 있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독일, 특히 과거 동독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였는데, 두 오케스트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오케스트라의 성향은 다소 차이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콘서트 오케스트라라는 태생적인 차이가 오랜 역사를 거치며 누적되어온 결과로 보인다. 독일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출발한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였던 만큼 그 규모는 왕실 소속의 부유한 오페라 오케스트라(빈 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뮌헨 국립 오페라 등)들보다는 훨씬 작았다. 19세기말 니키쉬 시절에도 단원 규모는 50명 내외였는데, 이는 당시 100여명 동원이 가능한 빈 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뮌헨 궁정 오페라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오늘날 큰 편성으로 연주하더라도 수수하고 내성적인 음색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로는 먹고사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이래로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상연할 때 관현악 반주를 맡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오페라극장과 악단 카펠마이스터 간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한다. 오페라극장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들 공연 스케줄을 중시하고, 카펠마이스터 입장에서는 콘서트 연습해야 되는데 단원들이 오페라극장 활동에 얽매이는 듯하게 보이니 어쩌면 당연한 권력투쟁(???)이기도 하고. 푸르트벵글러가 이 알력으로 인해 사이가 벌어지면서 결국 베를린 필에 집중하려고 악단을 떠났고, 샤이도 취임 때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을 겸임했다가 2008년 5월에 극장 관계자들과의 갈등 때문에 총감독 직책을 사퇴했다.

오페라 반주 외에 장크트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과도 자주 공연하는데, 저 교회는 바흐가 수십 년 동안 칸토어[3]를 역임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의 음악 전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 탓인지 저 교회 합창단이 바흐의 수난곡 등 합창 작품을 연주할 때면 거의 늘 협연하고 있다. 토마스 교회 합창단 외에는 같은 게반트하우스 소속인 게반트하우스 합창단과도 상시 협연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카펠마이스터이기도 했던 멘델스존 작품도 꽤 자주 연주/녹음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이었던 탓에 나치 정권 치하에서는 강제로 연주가 금지되는 흑역사를 겪기도 했지만, 전후 동독 정부에서는 과거 청산 등의 문제도 있고 해서 다시 장려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 악단의 대표 연주곡들로 남아 있다. 다만 베를린 필처럼 자신들의 나치 시대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며 반성하는 등의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 듯 하다.

독일의 유서깊은 오케스트라 답게 사운드가 어두운 편이지만, 독일 메이저 오케스트라 치고 사운드가 무겁지는 않은 편이다. 이는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라는 악단의 전통과도 관련있는데, 창단 초기 시절 대형 오페라 하우스에 소속된 오케스트라에 비해 악단의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오랜 역사의 악단인 탓에 이웃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처럼 강한 보수색을 띌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마주어 재임기였던 1970년대에는 서방과 문화예술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적성국이었던 미국의 작곡가인 거슈인의 작품을 다루는 등, 동독 관현악단 치고는 꽤 다양한 레퍼토리에 맛을 들이고 있었다. 역시 마주어 지휘로 필립스에 취입한 베토벤교향곡 전집도 기존 악보와 달리 음악학자 페터 귤케가 새로이 편집한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의 신판 악보를 사용해 녹음하는 등, 시대 고증에 충실하려는 경향도 보여주고 있다.

후임자들인 블롬슈테트와 샤이도 악단이 전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기본적으로 중시하고 있으며,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해 초연하는 등 점차 현대 작품들에도 도전하고 있다. 유럽 악단들 중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매년 연말마다 공연하는 드문 전통을 갖고 있기도 하다.[4]

1981년 준공된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는 개관당시 '신 게반트하우스(Neues Gewandhaus)' 라고 불렸지만, 통독 후에는 그냥 게반트하우스라고만 부르고 있다.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을 사방에 둘러싸게 만든 포도밭 형식의 디자인인데, 베를린 필의 본거지인 필하모니를 참고한 듯 하다. 보통 쌔삥 공연장은 겉보기에만 간지고 음향은 개판이라고 까이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는 유럽 유수의 음향을 자랑하는 공연장으로도 유명하다.


[1] Kapellmeister. 독어로 악단장 혹은 악장이라는 뜻이다.[2] 실제로 나치 당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바이마르 국립 관현악단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등의 지휘자로 계속 활동했으며, 동독 정부로부터 국가상을 받기도 했다.[3] Kantor. 독일 개신교 교회에서 종교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를 지칭함[4] 일본에서 주로 연말 공연의 대표곡으로 엄청나게 자주 연주되고 있어서 본고장에서 차용된 관례가 아닌가 싶겠지만, 유럽에서도 게반트하우스처럼 매년 상시 공연하는 악단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