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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39:24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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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Radio-Sinfonieorchester Stuttgart des SWR
영어: Stuttgart Radio Symphony Orchestra
프랑스어: Orchestre symphonique de la radio de Stutt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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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역대 수석 지휘자4. 특징5. 합병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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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남서부의 슈투트가르트를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약칭해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으로도 불리며, 독일 각지의 방송국에 소속된 방송 교향악단들 중 네임드급으로 손꼽힌다.

2. 연혁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에 창단되었는데, 독일 남서부를 점령한 미군나치 치하의 슈투트가르트 제국방송을 접수하고 '라디오 슈투트가르트' 라는 군정 방송국으로 만든 뒤 방송국 소속 관현악단을 재건하는 식으로 결성되었다. 창단 명칭은 방송국 이름을 따 '라디오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으로 정해졌다.

초기에는 객원 지휘만 받았지만, 1948년에 군정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한스-뮬러 크라이가 초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크라이는 1969년 사망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악단의 연주력 향상과 나치 시절 금지되었던 음악들의 부활 공연, 현대음악의 적극적인 소개 등을 시도했다. 크라이가 부임한 이듬해에는 새로이 수립된 서독 정부가 방송국을 넘겨받아 남독일 방송국(Süddeutscher Rundfunk)으로 개칭하자 악단 명칭도 '남독일 방송 교향악단' 으로 바꾸었다.

크라이 사후에는 약 두 시즌 가량 수석 지휘자 공석 상태였다가, 1971년에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인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제2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할 때처럼 집요한 리허설과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악단으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독일어권 표준 관현악곡들의 연주력을 효과적으로 상승시켜 놓았다. 1975년에는 악단 명칭에 상주 도시 이름을 추가해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으로 재차 개명했다.

첼리비다케 퇴임 후에도 약 여섯 시즌 동안 수석 지휘자가 공석인 상태였고, 1983년에 영국 출신의 네빌 마리너가 제3대 수석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마리너는 상업적인 녹음을 한사코 거부했던 첼리비다케와 달리 악단과 여러 종류의 음반을 발매하는 등 음반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마리너가 1989년에 퇴임한 뒤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잔루이지 젤메티가 1995년까지, 이어 프랑스 출신의 조르주 프레트르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1998년에는 소속 방송국인 남독일 방송국이 남서독일 방송국(Südwestrundfunk. 약칭 SWR)으로 개명하면서 악단 공식 명칭도 현재의 것으로 바뀌었다. 1998년에는 영국 출신의 로저 노링턴이 제6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고,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에 이르는 작품 연주 때 일반 교향악단에서는 흔치 않았던 시대연주[1] 개념을 도입해 화제가 되었다.

노링턴은 2010/11년 시즌을 끝으로 퇴임했고, 2011/12년 시즌부터는 프랑스 출신의 스테판 드네브가 차기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다.

3. 역대 수석 지휘자


이외에 안드레이 보레이코가 제1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4. 특징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를 대표하는 관현악단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방송 교향악단의 특성상 비단 독일 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곡들을 잡식성으로 소화하고 있다.[2][3] 독일의 방송 교향악단 가운데서도 현대음악을 레퍼토리를 많이 다루는 편이다.

다만 음반 시장에서는 약간 밀리는 편이었는데, 창단 후 얼마 안되어 녹음을 소나기같이 쏟아냈던 이웃 바이에른 주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같은 라이벌 악단들에 비해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조금 지못미이기도 했다. 특히 악단의 음향을 정교하게 다듬어 놓았던 첼리비다케 재임기에 지휘자의 고집 때문에 상업용 음반을 단 한 장도 내지 못한 것이 컸다.

그 대신 첼리비다케 사후에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남서독일 방송국이 방송용으로 녹음해 소장한 테이프들을 가지고 CD 세트를 발매해 화제가 되었다.[4] 본격적으로 음반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때는 마리너 재임기였고, 자신의 소속사였던 필립스와 독일 음반사인 헨슬러에서 주로 취입했다. 특히 헨슬러와는 21세기가 된 현 시점에서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초기 시절의 녹음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은 계속 해당 음반사에서 음반화되어 팔리고 있다.

노링턴 역시 헨슬러에서 주로 음반 작업을 하고 있으며, 하이든교향곡집 같은 고전 레퍼토리에서는 시대연주적 사고관이 반영되어 있다. 동시에 자국 작곡가들인 엘가본 윌리엄스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신선한 연주를 끌어낸 음반들을 계속 내놓고 있다. 2011년 가을에 부임한 드네브는 프랑스 음악을 중시할 것으로 보인다.

상주 공연장은 콘서트 전문 홀인 리더할레의 대강당인 베토벤잘을 사용하고 있고, 이외에 테아터하우스 등에서도 공연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 외에도 만하임이나 칼스루에, 프랑크푸르트, 뮌헨 같은 국내 도시들에서도 정기적으로 순회 공연을 개최하고 있고, 국외 공연도 인접 국가들을 중심으로 개최하고 있다. 합창 붙는 작품을 공연할 때는 같은 방송국 소속인 남서독일 방송 성악 앙상블(SWR Vokalensemble)과 자주 협연하고 있다.

5. 합병 시도

2012년 6월에 SWR 방송 위원회에서 이 악단과 자매 악단인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을 합병한다는 안건이 통과되었고, 남서독일방송 측에서는 순차적으로 절차를 진행해 빠르면 2016년에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SWR Sinfonieorchester)이라는 하나의 악단으로 통합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SWR은 수 년 전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많은 예산이 소모되는 관현악단 세 팀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있었다. 이 시도의 일환으로 2007년 9월에 두 교향악단 보다는 소규모였던 카이저슬라우테른 남서독일 방송 관현악단을 이웃 방송국인 자르브뤼켄 방송국(약칭 SR) 소속의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과 합병시켜 자르브뤼켄 카이저슬라우테른 도이치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출범시킨 바 있었다.

다만 이번 합병은 소규모+대규모 관현악단의 합병이 아닌 대규모 관현악단 두 단체의 합병이라 이 과정에서 기존 단원들의 정리해고 등 인원 감축이 불가피한 실정이고, 또 현대음악계 쪽에서는 이 통합으로 현대음악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관현악단이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1] 곡이 작곡된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 악단 배치 등을 역사적으로 충실히 고증해 연주하는 방식이다.[2] 프랑스와 가깝고 이탈리아스위스의 영향도 많이 받은 도시 분위기 탓인지[3] 물론 이런 악단 성격에는 나치 잔재의 청산이라는 정치적인 문제 또한 작용했고, 그 때문에 현대음악을 중시하는 풍토도 고정되어 있다.[4] 사실 첼리비다케도 퇴임 후인 1979년에 자작곡 '주머니 정원'을 가지고 이 악단과 딱 한 번 스튜디오 녹음을 만든 적이 있었다. 해당 녹음 유니세프의 자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여서 악단 측에서 간신히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세트 내는 김에 다시 CD화시켜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