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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영어: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1. 개요
독일의 관현악단. 2차대전 이후 독일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창단된 방송 교향악단들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며, 이후 전세계 방송 교향악단의 전형이 되었다. 홈페이지 현재 독일에서 최상위권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되며, 전세계적으로도 정상급의 오케스트라로 꼽히고 있다.2. 연혁
2.1.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1949-1961)
1948년 바이에른 방송국(Bayerischer Rundfunk)은 과거 1922년부터 방송국 산하에 있던 뮌헨 방송 관현악단의 주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단원들을 영입해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계획을 세웠고, 바이에른 출신의 명지휘자 오이겐 요훔과 접촉하여 협의했다. 오이겐 요훔은 이미 뮌헨 방송 관현악단의 주요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었다.바이에른 방송국의 제안을 받은 요훔은 이를 수락하여 악단 창단 작업에 참여하였다. 요훔은 뛰어난 음악가들을 단원으로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훔의 명성과 노력 덕분에 많은 훌륭한 연주자들이 악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9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초대 상임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요훔은 신생 악단의 창단과 발전을 위해 많은 권한을 위임받았고, 이러한 큰 권한으로 요훔은 단원 선발, 악단의 교육 및 훈련, 레퍼토리와 객원지휘자 선정 등 여러 분야에 공을 들였다. 또한 요훔은 악단이 비록 방송 교향악단이지만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개 음악회를 통해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지론을 관철시켰고, 덕분에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방송 교향악단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오케스트라와 다를 바 없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요훔의 노력 덕분에 악단은 단기간에 독일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성장해 나갔다. 뮌헨에는 이미 유서 깊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와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었지만 단기간에 이를 능가하는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킨 것은 요훔의 공이 컸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해외에서 실설되고 있던 여러 방송 교향악단들의 모델이 되었다.
요훔은 자신의 전속 음반사였던 도이체 그라모폰에 하이든과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의 교향곡들과 오르프의 3연작 '트리온피' 등을 위시한 많은 곡들의 녹음을 취입해 초기 악단의 명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작곡가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이 조직한 현대음악 전문 연속 연주회인 '무지카 비바(Musica Viva)' 의 정규 출연 악단이 되었다. 이처럼 현대음악도 짬짬히 다루었지만 요훔이 무엇보다 주력했던 것은 정통 독일-오스트리아 표준 레퍼토리였다. 요훔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생 악단이 발전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통 레퍼토리에서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1960년 오이겐 요훔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공동 상임지휘자로 영입되었고 이듬해 바이에른 방송향을 사임했다. 하지만 퇴임 이후에도 요훔은 객원 지휘자로서 지휘하거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비롯한 음반을 취입하면서 악단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2.2. 라파엘 쿠벨릭 (Rafael Kubelík, 1961-1979)
요훔의 후임으로 체코 출신의 라파엘 쿠벨릭이 임명되었다. 쿠벨릭은 젊은 나이에 유서깊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지만 1948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체코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체코가 공산화가 돠자 조국을 떠나 서방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엔 미국의 명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는 등 여러 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오케스트라를 전전하고 있는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1961년 조국 체코와 이웃하고 있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맡게 된 쿠벨릭은 사실상 본인의 남은 여생을 이 오케스트라에 다 쏟아부을 정도로 헌신했다. 쿠벨릭은 요훔이 마련해 놓은 탄탄한 기반을 더욱 발전시켜 서독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다음 가는 명문 오케스트라로써의 위상을 확립했다. 쿠벨릭은 요훔이 기반을 다져놓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통 고전, 낭만 연주곡들을 계속 주요 레퍼토리로 하면서 모국 작곡가들인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야나체크, 마르티누 등의 관현악 작품들을 악단의 연주곡 목록에 추가했다. 특히 60년대 후반에 체코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말러의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는데, 이는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중 하나[1]로 지금도 명연주로 회자되고 있다. 지역색이 강한 바이에른, 뮌헨 지역에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구 프로이센 지역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항하는 오케스트라로서 지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 지역에서 쿠벨릭의 인기는 대단했다.
쿠벨릭은 20년 가까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면서 뮌헨 지역에서의 큰 인기와 사랑을 받았지만, 만성 다발성 관절염으로 1979년 사임했다. 사임 이후 쿠벨릭은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가며 다른 오케스트라들의 제의들을 거절하였다.
2.3. 콜린 데이비스 (Sir Colin Davis, 1983-1992)
1979년 쿠벨릭이 만성 다발성 관절염으로 사임한 뒤에는 한동안 후임 지휘자를 영입하지 못하고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되었다.한편 7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가 된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 시절 주요 객원 지휘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상임지휘자가 공석이던 79년부터 83년까지 중요한 연주 여행이 번스타인의 인솔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3년 콜린 데이비스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이후에도 번스타인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밀접한 관계는 이어졌고, 번스타인과 여러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궤 기념 콘서트 때 번스타인이 지휘한 연합 오케스트라는 표면적으로는 뉴욕 필, 파리 오케스트라 등 세계 명문 교향악단의 연합 오케스트라였지만 실질적으로 단원의 70% 이상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때 1978년 서방으로 망명해온 소련 출신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을 제3대 상임지휘자로 초빙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콘드라신은 198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에 영국 출신 지휘자인 콜린 데이비스가 대신 그 자리를 맡아 1992년까지 재임했다. 콜린 데이비스는 영국 작곡가들의 곡을 일부 소개하는 것 이외에는 주로 독일-오스트리아 표준 레퍼토리를 공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데이비스는 취임 당시 장래가 기대되는 지휘자였지만, 그러나 이후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데이비스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심하게 말하면 데이비스의 재임기간은 악단에 있어서 일종의 암흑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데이비스 본인의 역량이 전후임자들에 미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뮌헨에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첼리비다케가 취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에도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객원지휘자로 자주 등장하면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흔들렸던 시기다.[2]
2.4. 로린 마젤 (Lorin Maazel, 1993-2002)
데이비스의 후임으로는 미국 출신의 로린 마젤이 영입되었다. 마젤은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고, 직후 마젤은 베를린 필과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와 음반 녹음을 모조리 취소시켰다. 그리고 1990년부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자주 지휘하였고, 1993년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마젤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맡은 후 예전보다 정통 독일, 오스트리아 레퍼토리에 훨씬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젤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취임을 기점으로 과거에 비해 템포가 많이 느려졌고 해석의 깊이 또한 원숙해졌다.
90년대 중반은 이웃의 첼리비다케의 존재로 다소 가려진 감이 있지만, 마젤의 역량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으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역시 세대 교체를 통해 예전의 다소 고루한 음색을 벗어버리고 독일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개방적 사운드로 변모하는데 성공했던 시기다. 80년대의 침체된 평가를 일신하고 다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서의 평판과 입지를 회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쟁하던 첼리비다케가 사망한 후 마젤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베를린 필 다음가는 독일의 명문 교향악단으로 확고한 위치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마젤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RCA 등에서 활발하게 음반 녹음을 했다. 당시 침체되고 세계 음반 시장의 동향을 고려하면 상당한 양의 녹음이었다. 재임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연주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바이에른에서 재임기 후반에는 아예 전곡 단위로 여러 대작곡가들의 작품 녹음을 추진하였는데, 베토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브루크너, 슈베르트, 말러 교향곡이나 관현악 작품들을 전곡 단위로 녹음으로 남겼다. 레퍼토리가 넓기로 유명한 마젤이지만 바이에른에서의 9년간 마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히 독일-오스트리아 레터토리에 천작했다. 그러나 종종 스트라빈스키 같은 현대음악도 다루어주었다.
다만 이 시절 하나의 문제라면 우수한 단원을 영입하는 족족 베를린 필이 다시 빼가서 베를린 필 수석 단원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며, 베를린 필 역시 세대 교체가 어느정도 마무리되면서 이런 현상은 뜸해지고 있다. 또 96년 첼리비다케 사후 뮌헨 필이 급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우수한 일부 단원들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2.5. 마리스 얀손스 (Mariss Jansons, 2003-2019)
로린 마젤의 후임으로 라트비아 출신의 마리스 얀손스가 취임했다. 얀손스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차기 수석지휘자 후보로 유력했었지만 90년대 말 심장발작으로 지휘대에서 쓰러진 이후 인공심장 이식 수술을 받아 한동안 지휘대를 떠나있어야만 했다. 얀손스는 악단의 장점인 정통 독일, 오스트리아 레퍼토리를 주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등의 레퍼토리에서 과거 거장 지휘자들처럼 적극적인 가필을 통해 관악기의 음색을 보강하는 것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해석은 지나친 거장 풍은 지양하였다.얀손스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한지 불과 1년 후인 2004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얀손스는 2015년 건강 문제로 콘서트헤보의 직책을 사임하였으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에서의 직책은 유지하며 연주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얀손스 재임기간 동안 자체 레이블인 BR-Klassik을 통해 다수의 음반들을 발매한 것도 눈여겨 볼 포인트이다. 그러다가 얀손스는 고질적인 심장병으로 투병하던 중 2019년 11월 30일 타계하였다. 사망 시까지 보유하고 있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지휘자직은 종신임기로 수행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2.6. 사이먼 래틀 (Sir Simon Rattle, 2023-2029)
2021년 1월, 느닷없이 사이먼 래틀이 2023년 9월부터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다는 기사가 오피셜로 떴다. 래틀은 틴에이저 시절 리버풀에서 라파엘 쿠벨릭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베토벤 교향곡 9번 실황을 듣고 지휘자로서 꿈을 꾸게 되었다고 밝히며, 이 교향악단이 본인에게 얼마나 각별한 의미가 있는지 취임 소감으로 밝혔다. 일단 계약 기간은 2028-29 시즌까지라고.3. 역대 상임 지휘자
-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재임 기간 1949-1960)
- 라파엘 쿠벨릭 (Rafael Kubelík, 재임 기간 1961-1979)
- 콜린 데이비스 (Sir Colin Davis, 재임 기간 1983-1992)
- 로린 마젤 (Lorin Maazel, 재임 기간 1993-2002)
- 마리스 얀손스 (Mariss Jansons, 재임 기간 2003-2019)
- 사이먼 래틀 (Sir Simon Rattle, 재임 기간 2023-2029[3])
4. 특징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지역에서 출범한 여러 방송 교향악단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오케스트라로 성장했으며, 이후 세계 각국에 생겨난 여러 방송 교향악단에 가장 모범적인 전형이 되고 있다.독일의 여타 방송 교향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소속 방송국인 바이에른 방송국에 의해 거의 모든 공연의 실황이 중계되고 녹음/녹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악단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음향과 영상 자료가 매우 방대하며, 상업용 녹음도 방송국 기술진들이 음반사와 공동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상업적인 음반들은 지휘자의 전속사에 따라 다양하게 출반되고 있고, 위에 쓴 것처럼 요훔과 쿠벨릭은 도이체 그라모폰에, 데이비스와 마젤은 RCA에, 얀손스는 EMI에서 주로 음반들을 발매하고 있다. 다만 악단과 같은 도시에 본거지를 갖고 있는 독일 음반사인 오르페오에서도 이 악단이 연주해 녹음한 음반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작품들은 바이에른 방송국이 제작해 소장하고 있는 음향 자료를 사용해 주로 이 방면에 특화된 음반사인 베르고에서 출반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음반사들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바이에른 방송국이 직접 만든 음반사인 BR-Klassik를 통해 방송국이 소장한 실황 음원들을 CD로 제작해 풀고 있는 중이다.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의 바이에른 주 소속 관현악단들 중에서는 방송국 소속이라 그나마 진보적인 측면이 있고 야외 음악회나 기타 대중적인 레퍼토리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대중 친화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공연도 진행하고 있다.
공연장은 창단 이래로 주로 레지덴츠 궁전의 헤르쿨레스잘(Herkulessaal)을 사용해오고 있다. 홀의 음향이 좋은 편으로 Orfeo에서 출시되는 방송용 음원들에 이 홀의 좋은 음향이 잘 나타나 있다. 다만 홀 규모가 그리 큰 편이 아니고 국보급 건축물이라 내부 공간의 확장이나 개보수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편성 작품의 연주 때는 독일 박물관의 회의장을 공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1985년에 뮌헨을 가로지르는 이자르 강의 남쪽 기슭에 새로 지은 가스타이크 필하모니(Philharmonie am Gasteig)가 완공된 뒤에는 여기서 공연하는 횟수도 많아지고 있다. 다만 가스타이크 필하모니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 공연장으로 쓰고 있어서, 다른 공연장이 새로 지어지거나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헤르쿨레스잘이 주 공연장으로 쓰일 듯.
합창 붙는 작품들의 공연 때는 1946년 창단된 같은 방송국 소속 합창단인 바이에른 방송 합창단(Chor des Bayerischen Rundfunks)과 거의 매번 무대에 선다.
한국인 단원으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가 2015년부터 제2바이올린 수석으로 활동하고 았다.
5. 관련 문서
[1] 번스타인과 뉴욕 필하모닉, 아브라바넬과 유타 심포니의 전집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번스타인과 뉴욕 필하모닉이 최초로 녹음을 시작했으나 천인교향곡의 녹음 지연으로 전곡은 가장 늦게 완성되었다.[2] 콜린 데이비스는 하이든 교향곡,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헨델 메시아 등의 레퍼토리에서 명반을 낸 나름 유명한 지휘자이긴 하지만 전임자들에 비해 덜 유명한 편이고 당시 뮌헨에서 활동했던 첼리비다케와 C.클라이버가 워낙 출중한 거장들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콜린 데이비스가 밀리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3] 계약기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