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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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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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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노리히토 친왕비 히사코
憲仁親王妃久子
파일:Princess_Takamado_and_Lieutenant_Governor_Elizabeth_Dowdeswell_(cropped).jpg
이름 노리히토 친왕비 히사코
憲仁親王妃久子[1]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 1953년 7월 10일 ([age(1953-07-10)]세)
가족관계 남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장녀 쓰구코 여왕
차녀 센게 노리코
3녀 모리야 아야코
학력 세이신 여학원 초등과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인류학과, 고고학과)
오시루시(お印)[2] 부채

1. 개요2. 본가와 성장3. 결혼과 황실 입성
3.1. 황실 가계도
4. 자녀5. 대한민국 공식방문6. 남편의 급사7. 딸들의 결혼8. 일본 황실 내의 권력다툼에 관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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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황족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

노리히토 친왕은 다이쇼 천황의 4남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3남으로, 아키히토 천황에게는 사촌 동생, 나루히토 천황에게는 5촌 당숙, 히사히토 친왕과는 6촌이다. 따라서 히사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의 재종조할머니가 된다.

2. 본가와 성장

톳토리 시게지로(鳥取滋治郞)와 톳토리 후미코(鳥取二三子)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시게지로는 실업가였고, 외할아버지 토모다 지로(友田二郞)는 외교관이었으며 궁내청에서도 근무했다. 외할머니 토모다 모리코(友田盛子)의 아버지 소가 스게쿠니(曾我祐邦)는 화족으로, 일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히사코는 도쿄에 있는 가톨릭 미션스쿨세이신 여학원[3]에서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했고, 이후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나머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중국학, 인류학, 고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영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한 경험으로 인해 히사코는 영어에 능숙해졌고,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능숙해졌다. 아버지 시게지로가 미쓰이 물산 프랑스 사장을 맡은 경력이 있고, 외할아버지 지로가 외교관이던 시절 프랑스에서도 몇 년간 근무했던 덕분에 어머니 후미코도 프랑스와 프랑스어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후미코는 이후 남편 시게지로가 미쓰이 물산 프랑스 사장을 지낼 때, 어린 시절 배운 프랑스어를 활용해서 시게지로를 적극 도왔다.

1970년대 말 톳토리 일가가 일본으로 귀국한 후로 후미코는 프랑스어부인회에 가입하여 프랑스어 보급에 공헌했고, 이 업적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현재 후미코는 프랑스어부인회 명예고문이고, 히사코 비는 1997년부터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히사코 비는 2020 도쿄 올림픽 유치에도 참가, 외국어 실력을 발휘하여 상당히 공헌했다고 한다.

3. 결혼과 황실 입성

파일:attachment/노리히토/takamado3.jpg

파일:attachment/노리히토/takamado4.jpg

1984년 4월 23일, 캐나다 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가 쇼와 천황(히로히토)의 조카인 노리히토 친왕과 알게 되었다. 만난 지 1달 만에 노리히토 친왕은 "Will you marry me??"라고 청혼하였고, 그 해 12월 6일 결혼한다. 쇼와 천황은 결혼하여 가장이 된 노리히토 친왕에게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라는 미야고(궁호)를 하사하였고, 이로서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히사코는 다카마도노미야 궁저의 친왕비가 되었다.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쇼와 천황의 장남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미치코 황후와의 사이에서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두었고, 1991년에 장남인 나루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3.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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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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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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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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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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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 자녀

파일:external/www.yuko2ch.net/img20080131175347.jpg
1992년의 다카마도노미야 일가.

남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의 사이에서 딸 3명을 낳았다. 1947년 개정된 일본황실전범에 의하면 천황의 손주까지는 친왕/내친왕이라 하고, 증손부터는 왕/여왕이라 한다.[4] 따라서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의 딸들은 다이쇼 천황의 증손녀이므로 '여왕' 지위를 받았다. 3자매는 할머니 유리코 비가 총재를 맡고 있던 산부인과·소아과 전문병원인 아이쿠(愛育) 병원에서 태어났고, 전통적으로 일본 황족들이 다니는 학교재단인 가쿠슈인에서 초등과, 여자중등과, 여자고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차녀는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했지만, 장녀와 3녀는 다른 대학을 졸업한다.

1947년 5월 3일 신헌법 시행으로 신분 제도가 폐지되어 화족들은 지위를 잃었고, 동년 10월 14일에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이 황적이탈하여 구황족으로서 평민으로 전락했다. 또한 1965년[5]부터 2006년[6]까지 일본 황실에는 줄줄이 딸들만 태어나, 이전처럼 황족끼리 결혼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남자 황손은 평민 여자와 결혼해도 황족이지만, 여자 황손은 평민 남자와 결혼하면 평민이 되어야만 한다.[7] 따라서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딸들이 언젠가는 시집가서 평민 주부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교육했다고 한다.

5. 대한민국 공식방문

2002 한일 월드컵 때, 개막식이 한국에서 열렸다. 본래 일본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 직접 참석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과거사 문제 때문에 난색을 표했고, 대신 노리히토 친왕 내외가 참석했다. 노리히토 친왕 내외는 정치적으로 별로 민감하지 않은 방계 황족이고, 노리히토 친왕이 일본축구협회 명예회장이기도 해서, 만일 일본 황족의 방한으로 인해 논란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노리히토 친왕 내외는 방한하여 개막식에 참석했고, 19개의 경기를 관전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들러서 신라의 문화유산들을 감상하고, 서울특별시남대문시장부산광역시자갈치시장 등을 방문해서 다양한 한국인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또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인 이방자(마사코 여왕) 여사가 생전에 설립[8]장애인 복지시설도 방문했다.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한국을 둘러보며 사진도 많이 찍고 기행문도 남겼는데, 이를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도중에 노리히토 친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마무리는 히사코 비가 하였으며, 이를 《다카마도노미야 전하가 본 한국》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이는 일본 황족이 광복 후의 한국을 '공식' 방문한 유일한 사례다. 이외로 다이쇼 천황이 황태자였던 시절 대한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 비 내외 등 일본 황족/구 황족들이 영친왕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구황족 가문인 나시모토노미야의 장녀이자 고준 황후(나가코)의 사촌언니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연으로 노리히토 친왕 내외는 한일 간 청소년, 스포츠, 문화 교류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히사코 비는 남편 노리히토 친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2008년 창설된 '다카마도노미야 기념 일한교류기금'의 명예총재로 활동하면서 매년 연설을 하고 있다. 특히 2019년 11회 수여식 연설에서 히사코 비는 "(당시 '한일수교 이래로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와중에도) 작년보다 많은 응모가 있었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사소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에는 양국 관계가 좋아질 것이다'라는 남편의 생전 생각대로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을 밝힌다.

6. 남편의 급사

파일:attachment/쓰구코 공주/takamado2.jpg

2002년 11월, 남편 노리히토 친왕이 주일캐나다대사관에서 스쿼시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평소 건강하던 노리히토 친왕이었기에,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장녀 쓰구코 공주교복 차림에 염색한 머리를 하고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이 보도되면서 제법 물의를 빚었는데, 이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를 보내드리게 하고 싶다"는 히사코 비의 강한 뜻이었다고 한다.

2003년일본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남편을 잃은 히사코 비를 위문했다.[9]

노리히토 친왕이 사망함에 따라, 그가 맡고 있던 일본축구협회 명예회장은 아내 히사코 비가 물려받았다. 히사코 비는 스포츠나 봉사 분야에서 명예회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남편의 급사를 계기로 일본 AED 재단이나 일본심장재단 등의 단체에서도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이전에도 방계 황족의 분가인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에 주어지는 금액은 (다른 황족들에 비해) 많지 않았지만, 가장인 노리히토 친왕의 죽음 이후로는 절반 정도로 깎였고 시종들도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딸들이 하나둘 시집을 가면서,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의 재산과 시종들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히사코 비는 이런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딸들에게도 집안일을 시키거나, 정원에서 직접 을 가꾸어 저택 곳곳에 주기적으로 꽃꽂이를 하고, 재산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와중에도 절약하고 있다. 이는 늘 "돈이 부족하다"며 불평하는 후미히토 친왕 일가와 대비되는 행보로 칭송을 받고 있다.[10]

남편도 사망했고, 직계도 아닌 방계 황족이지만, 히사코 비는 황족으로서의 여러 공무들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딸들과 함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하고, 해외 왕실로부터 초대를 받아 해외순방을 하고,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11]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유럽의 왕실들에 비해 일본 황실은 많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는데, 그나마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 내외는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에서 몇 안 되게 '여성 천황'을 긍정한 인물이 히사코 비이기도 하다.

7. 딸들의 결혼

파일:attachment/센게 노리코/senge.jpg

2014년, 차녀 노리코 공주가 제일 먼저 결혼했다. 상대는 이즈모타이샤 신사신관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로, 노리코 공주보다 15살 연상이다. 센게 가문은 옛 화족(남작)이자 대대로 신관을 지내고 있는 가문으로, 노리코 공주는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중학생 시절에 어머니 히사코 비와 함께 이즈모타이샤 신사에 갔다가 구니마로를 처음 만났다. 결혼으로 인해 노리코 공주는 평민 센게 노리코가 되었고, 이즈모타이샤 신사가 있는 시마네현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파일:moriyaayako.jpg

2018년에는 3녀 아야코 공주가 모리야 케이(守谷慧)와 결혼했다. 케이의 아버지 모리야 오사무(守谷治)는 경제산업성 고위 관료를 지냈고, 케이 본인은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최대의 해운회사 중 하나인 닛폰유센(日本郵船)에서 근무하고 있다. 따라서 케이는 궁내청부마 후보 리스트에도 올라 있을 정도로 상류층 남성이었다. 하지만 아야코 공주가 케이와 결혼하게 된 것은 어머니 히사코 비의 소개 덕분이었다. 케이의 어머니 모리야 키미에(守谷季美枝)는 생전[12]개발도상국 아이들을 돕는 NPO 법인인 '국경 없는 아이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히사코 비도 복지와 구호활동 등에 관심이 많았기에 키미에를 알고 지내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키미에의 아들인 케이도 알게 되었다.

어머니 히사코 비의 주선으로 아야코 공주는 5살 연상의 케이와 맞선을 보게 되었다. 아야코 공주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특히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다. 케이도 어머니 키미에의 영향으로 아동복지와 구호에 관심이 많아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국경 없는 아이들'의 이사를 맡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비슷한 관심사와 성격으로 인해 케이와 아야코 공주는 처음 만나서부터 뜻이 잘 맞았고, 결혼 준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18년 초에 케이로부터 청혼을 받은 아야코 공주는 동년 4월에 수락했고, 8월 12일에 정식 약혼식인 노사이(納采) 의식[13]을 치렀다. 케이와 아야코 공주는 2018년 10월 29일에 메이지 신궁에서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고, 아야코 공주는 평민 모리야 아야코가 되었다. 이듬해인 2019년에 아야코는 아이쿠 병원에서 장남 모리야 죠(守谷穰)를 출산했다. 첫 손주가 태어남으로써 히사코 비는 할머니가 되었다.

장녀 쓰구코 공주도 마음에 둔 남성이 있어서, 2016년에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어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할머니 유리코 비와 어머니 히사코 비는 탐탁지 않은 반응이지만, 쓰구코 공주는 여전히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일본의 현행 황실전범대로라면, 딸들이 모두 시집가고 히사코 비가 세상을 떠나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8. 일본 황실 내의 권력다툼에 관여하다

아키히토 황태자의 장남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은 장래 황태자가 되고 천황이 될 인물이라, 자연스레 오래 전부터 그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천황으로 즉위할 때까지도 좀처럼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만 31세 때 미혼인 채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노총각이었다. 반면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대학 시절부터 사귀어오던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 1990년에 결혼하여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가문을 창설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장녀 마코 공주까지 낳았다.

노리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황태자의 5촌 당숙이지만 고작 6살차밖에 나지 않아[14] 형제처럼 친했고, 자연스레 히사코 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990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의 권력다툼에서도,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황태자를 지지했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를 사모하며 무려 7년간 애태울 때도, 노리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를 다카마도노미야 궁저로 초청하여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결국 1993년 6월, 나루히토 황태자는 마사코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무사히 결혼하여 안도한 것도 잠시, 당시로서는 노처녀[15]였던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루빨리 장래 황태자가 되고 천황이 될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시집온 지 이듬해인 1994년에,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차녀 카코 공주까지 낳았다. 그러자 히사코 비는 "큰며느리인 황태자비가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을 하다니, 황실의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노리히토 친왕 내외는 방계 황족이고, 다른 방계 황족들도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노리히토 친왕 내외의 행동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후미히토 친왕이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먼저 결혼한 것,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좋지 않은 행동들, 그리고 노리히토 친왕 내외의 적극적인 성격 등이, 노리히토 친왕 내외를 나서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미히토 친왕은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행실들로 유명했고, 키코 비는 야심가로 소문이 자자했다.[16] 차녀 카코 공주를 낳았을 때는, 둘째도 딸이라는 말에 "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나요?"라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었다고.

하지만 히사코 비가 한소리를 한 데 이어, 아키히토 천황도 "황태자 내외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차남 내외는 아이를 더 가지지 말라"고 하명했다.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어렵게 아이를 낳았지만, 아들이 아닌 딸 아이코 공주였다. 황태자 내외뿐 아니라 일본 황실 전체를 통틀어도 남자아이라고는 1명도 없었기에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두고) 여성 천황 허용론이 한창 대두되었으나, 논의가 한창이던 2006년 초에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히사히토가 태어난 후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칭송을 받으며 기세가 등등하여 오만하게 행동했고, 나루히토 황태자를 제치고 천황직을 넘보기까지 하는 듯했다. 반면 다카마도노미야 일가는 가장 노리히토 친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히사코 비는 홀로 공무를 하고 세 딸 쓰구코 공주, 노리코 공주, 아야코 공주를 교육시켜야 했다.

그러다 아키히토 천황이 이례적으로 생전에 퇴위하면서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천황직을 물려주며, 장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반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각종 오만하고 좋지 않은 행실들, 자녀들의 부정입학 문제, 특히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아야코 공주보다 1살 어린 마코 공주국제기독교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난 코무로 케이와 2017년에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의 온갖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기약없이 미루어졌다. 그런데도 마코 공주는 일본 황실과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결혼을 고집하고 있어서 비판을 받았고, 사윗감에 대해 제대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결혼을 허락했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내외도 비판을 받았다.

반면 마코 공주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준비한 아야코 공주는 어머니 히사코 비가 사려 깊게 골라준 신랑감과 순조롭게 결혼에 성공하여, 마코 공주 및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와 크게 대조되었다. 본래 코무로 케이와 마코 공주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던 2018년 가을에는, 모리야 케이와 아야코 공주의 결혼식만이 치러졌다. 히사코 비 역시 "한 사람의 '청년'으로 하여금 황실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면서 코무로 케이를 비판했는데, 이미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의 모습에서부터 코무로 케이를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막내딸 아야코 공주의 결혼식 때 발표한 히사코 비의 소감문을 보면, 히사코 비의 그러한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나는 사위 모리야 케이의 부모님이 어떠한 분들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안사돈 키미에 님은 생전에 국제교류와 해외봉사에 힘썼고, 특히 아동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바깥사돈 오사무 님은 해외에서 일본의 전후 부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했을 모리야 케이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청년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그가 내 딸 아야코와 결혼하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기쁩니다.

이쯤 되면 이름만 언급하지 않았지, 사실상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본 국민들뿐 아니라 궁내청에서도 이 소감문에 대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공격 목적이 강하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히사코 비가 막내딸 아야코 공주를 성공적으로 결혼시킴으로써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한 방 먹였다"고 평하고 있다.

어느덧 코무로 케이마코 공주가 결혼식을 미룬 2020년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진전된 것은 없다. 2020년 1월 즈음에 일본 황실에서는 미야케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히사코 비와 그녀의 손윗동서 노부코 비후미히토 친왕 내외에게 "현 상황을 해결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2021년 10월 26일,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결혼식지참금도 없이 혼인신고만 하여 정식 부부가 되었다. 평민이 된 코무로 마코는 남편 케이와 함께 11월 14일 미국으로 출국하여 뉴욕 맨해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 결혼 전 이름은 돗토리 히사코(鳥取久子)[2] 일본 황족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표식, 문장(紋章).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3] 고준 황후의 친정인 구니노미야(久邇宮) 궁저가 있던 터에 세워졌다. 사촌 형님 미치코 상황후와 형님 노부코 비세이신 여학원 출신이다.[4]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5] 아키히토 천황의 차남인 후미히토 친왕 탄생.[6] 후미히토 친왕의 장남인 히사히토 친왕 탄생.[7] 일본의 민간에서는 데릴사위도 가능하고, 데릴사위와 그 자녀들이 처가/외가를 잇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일본 황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8] 영친왕은 만년에 장애인 복지 사업에 관심을 두었으나 귀국하기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 혼수상태로 누워서 1963년에 귀국했다. 그래서 남편의 유지를 이방자 여사가 대신 받들어 자행회와 명휘원(명휘는 영친왕의 아호)을 세우고, 나중에는 특수학교 자혜학교와 명혜학교도 세웠다.[9] 접견 당시 사진 1, 접견 당시 사진 2, 접견 당시 사진 3, 접견 당시 사진 4[10] 반면 후미히토 친왕 일가를 옹호하는 극우들은, 이런 히사코 비를 두고 재일교포라느니 사이비종교를 믿는다느니 등등의 비방을 하고 있다.[11] 2020년 하계 올림픽 유치 국가를 최종 결정하는 발표 직전에 히사코 비가 영어프랑스어로 연설했는데, 이 연설이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평가가 있다.[12] 해외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다가, 태국에서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13] 일본 황실에서 정식으로 약혼이 성립되는 의식. 신랑 측에서 신부의 집으로 청주(淸酒), 도미 암수 1쌍, 옷감을 예물로 보낸다.[14] 노리히토 친왕의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다이쇼 천황이 나이 36세에 비교적 늦게 낳은 자식이었고 노리히토 본인도 늦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15] 결혼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는 33세, 마사코 황태자비는 29세.[16] 두 사람의 일화들에 대해서는 후미히토, 키코 비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