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5f5f5,#2d2f34>4대 자이바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스미토모 · 미쓰이 · 미쓰비시 · 야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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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바츠(財閥, 재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게이레츠(系列, 계열)는 대전 이후 일본의 기업 집단을 각각 가리킨다. ※전후 미군정에 의해 해체 당하고 이후 1950년대부터 재결집을 했고 그것이 게이레츠가 됐다. * 스즈키 자이바츠는 스즈키가 아닌 현재의 소지츠(Sojitz)다. |
일본 5대 종합상사 | ||||
미쓰비시상사 | 미쓰이물산 | 스미토모상사 | 이토추 | 마루베니 |
미쓰이 [ruby(三井, ruby=みつい)] MITSUI | |
<colbgcolor=#009ce5><colcolor=#ffffff>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창업일 | 1673년 |
창업자 | 미쓰이 타카토시(三井 高利) |
유형 | 기업 집단 |
소재지 | 도쿄도 치요다구 오테마치1쵸메 2-1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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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쓰이 본관(三井本館), 현재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의 니혼바시 지점 |
사람의 미쓰이(인화의 미쓰이)[1]
미쓰비시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최대 기업 집단 중 하나. 태평양 전쟁 전 3대 재벌의 1위였던 미쓰이 재벌을 이은 기업 집단이다. 미쓰이 이름만으로는 외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기업이 적으나, 산하에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 1위인 토요타를 포함[2]하여, 도시바, 도레이, 후지필름 등의 유명 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미쓰비시나 스미토모 등 타 기업 집단에 비해 그룹 내 유대관계는 매우 느슨한 편인데, 이는 전전부터 독립적인 방계 기업이 많이 들어 있었을뿐더러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해체되었다가 다시 재편하는데 미쓰비시, 스미토모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쓰이 내의 회원사와 그 하부그룹들은 서로 자본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그룹 자체가 재벌그룹의 특징을 띠기보다는, 재계 총수들 간의 경영 협력체 내지는 조합 비슷한 포지션이라 지분관계는 그룹 외 회사들의 관계와 별 차이가 없다. 일본 기업사 연구가에 의하면 미쓰비시의 이와사키가가 아예 각 계열사 경영을 주도하고[3] 스미토모는 아예 19세기 말부터 대가 거의 끊길 뻔한 스미토모 일가가 경영일선에 손을 대지 않고 '가장'으로만 남은 반면, 미쓰이는 메이지 유신 전후에 망할 뻔한 것을 월급쟁이들이 살려놓았더니 미쓰이 일가가 위에서 간섭하면서 계열사와 갈등이 생긴 탓이 큰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있다.[4]
이 때문에 그룹 구조도 각개격파식이어서 심지어 은행계 기업집단[5]에 비해서도 범위가 모호하다. 가령 미쓰비시는 홍보위원회에서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홍보위원회 기준 전체 회원사는 2018년 5월 현재 620개사이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미쓰이는 홍보위원회와 사장회(二木会), 임원회(月曜会), 기업연구기관(三井文庫)이 다 따로따로이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유명기업인 토요타,[6][7] 도시바, 후지필름이 모두 홍보위원회에서 빠져 있으며, 대외적으로 미쓰이 그룹으로 내세워지는 일도 그다지 없다. 반면 2009년 TBS가 미쓰이물산과의 업무 제휴 목적으로 가입한 것과 같이 은행계 그룹 못지 않게 미쓰이 재벌과 별 연관이 없는 독립계 계열사가 많으며, 타 그룹 (주로 스미토모, 다이이치칸교) 계열사와 합병하면서 중복 가입되어 있는 계열사도 많다.
더욱이 회원사인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과 미쓰이스미토모트러스트홀딩스는 그룹사끼리 일본 거대금융계의 라이벌로 평가되기도 한다.
2. 역사
미쓰이 그룹은 에도 시대의 거상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의 미에현 마츠사카시 출신인 그는 1673년 교토와 에도에 에치고야[8]라는 포목점을 열고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 거래를 내세웠다. 이걸 가리켜 일본어로 겐킨카케네나시라 하는데 오로지 현금으로만 거래를 하는 대신, 다른 상점보다 가격을 싸게 하여 팔았다.[9][10] 또 비가 오면 고객에게 회사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빌려주는 등 현대식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미쓰이 다카토시 사후 그의 자식들은 각자 자신의 분가(分家)를 세웠고[11] 가문의 재산관리와 사업의 통할을 위해 미쓰이대원방(三井大元方)을 설치하였다. 또한 일종의 전문경영인인 지배인(番頭=반토)[12]을 기용하여 세부경영을 맡겼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은행, 무역, 광업 등에 진출하며 세력을 넓혀나가며 그룹의 면모를 갖추었고, 미쓰이 가문은 그룹의 경영권을 쥐고 일본 최대의 재벌로 성장했다. 대체적으로 미쓰이 재벌의 사세는 미쓰비시의 1.5배, 스미토모의 2배에 달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항의도 어느정도 무시하면서 조선, 한국 정부에게 소총을 판매하기도 했다. 유명한 양무호도 이들이 팔았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에도 진출하여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미쓰이의 원류 미쓰코시는 지금의 신세계 본점인 경성지점을 열었다. 그리고 미쓰이물산은 조선에 지점을 열었고[13], 부산부 범일정에 조선방직을 세웠다. 현재는 사라졌지만 조선방직이 있던 범일동 지역은 2021년 지금도 조선방직 앞, 즉 조방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재벌해체 정책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미쓰이 가문을 포함해 패전 이전의 경영진[14]들은 추방되었다. 계열사들은 1960년 임원 친목회 '목요회'가 결성되며 재결합했다. 1957년부터 컴퓨터를 도입해 수집된 해외 정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했다. 1960~80년 고도경제성장기 때 중화학공업에 상당히 늦게 진출해서 미쓰비시, 스미토모 두 그룹보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하락했다.
3. 회원사[15]
미쓰이 그룹의 조직은 크게 홍보위원회와 친목단체인 이목회(二木会, 니모쿠카이), 월요회(月曜会), 츠나마치미쓰이구락부(綱町三井倶楽部), 공동연구조직인 미쓰이문고(三井文庫), 미쓰이업제연구소(三井業際研究所)로 구성된다. 이 중 사장회인 니모쿠카이와 홍보위원회가 가장 공식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회원사 중 미쓰이물산,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미쓰이부동산을 고산케(御三家)[16]로 지칭한다.3.1. 사장회 회원사
- 직계[17]
3.2. 기타 주요 회원사
사장회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으나 그룹 내 다른 조직에 가입된 기업.- 토요 엔지니어링
- 다이셀[36]
- 도요엔지니어링
- 미쓰이생명보험[37]
-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스&리스[38]
- 미쓰이정기공업[39]
- 미쓰이제당
- 삿포로 맥주[40]
- 카네카
- 스미토모미쓰이오토리스[41]
- 신일본공조
- 에임서비스
- 이비덴
- 일본 유니시스
- 후지쿠라
- GS유아사[42]
- JA미쓰이리스[43]
3.3. 과거 회원사
- 미쓰이광산(現 일본코크스공업) - 구 고산케. 2003년 자본잠식에 빠지면서 그룹에서 이탈했다. 실질적으로는 현재 계열사인 미쓰이금속광업이 사업을 잇고 있다.
- 산토리 - 과거 독립 기업으로서 홍보위원회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미도리회에 더 가까운 것으로 친다.
- 홋카이도탄광기선[44]
4. 관련 문서
[1] 이와 비교되는 슬로건으로 미쓰비시 그룹의 "조직의 미쓰비시"가 있다. 고도성장기 일본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1960~70년대 재벌들도 이런 특징이 있어서 "인화의 LG", "조직관리의 삼성", "뚝심의 현대"라고 불린다. 정작 일본색이 짙은 롯데는 이런 말이 없다. 이쪽은 그룹경영을 둘러싼 내홍에 대해 일본 경제신문들이 붙인 제목인 "시게미츠 일족의 난"(...)이란 표제가 더 유명하다.[2] 정확히는 미쓰이 가문의 사위가문이었다. 그리고 미쓰이 은행을 주거래로 하는 핵심 고객이었다.[3] 전후 일본정부는 이와사키가에서 11명을 재벌가족으로 지정해 축출했는데, 이들은 각각 계열사 8~12개에 임원직을 맡았다.[4] AERA 기사.[5] 후요, 산와, 다이이치 칸교 그룹. 고도성장기에 은행들이 대출 관계 기업을 규합한 형태여서 그다지 결집력이 없고, 그나마도 21세기 들어와 은행이 M&A로 사라졌음에도 일단 주축 조직은 굴러가고 있다.[6] 토요타 그룹의 창업자 도요다 사키치는 미쓰이물산 계열사 출신으로, 사업 초기부터 미쓰이와 사업협조가 많았다. 결정적으로는 1949년 경영위기 때 미쓰이 계열 제국은행 (미쓰이은행, 사쿠라은행을 거쳐 현재의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게 구제 융자를 받은 것으로 인해 미쓰이 사장회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도요다 일가의 3대 쇼이치로가 미쓰이가의 여성과 1952년 혼인관계를 맺었으며, 4대 아키오(현 사장)도 배우자가 미쓰이물산 경영자의 딸이다. 거꾸로 토요타는 1997년 사쿠라은행이 경영위기에 빠졌을 때 지원을 했다.[7] 다만 토요타 그룹과 가장 친밀한 은행은 지역 특성상 현재 미쓰비시UFJ은행으로 합병된 구 도카이은행이었다. 역설적으로 1949년 때 토요타에 융자를 거부해 거래가 끊겼던 구 미쓰비시은행에 흡수되었고, 사쿠라은행 또한 아예 그룹단위로 토요타와 원수를 졌던 스미토모은행과 합병했다.[8] 이게 지금의 미츠코시로 성장했다.[9] 이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편에서도 언급된다. 여기에서는 오늘날에야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술이나 3백 년 전에 나온 점에 주목했다.[10] 게다가 서비스도 다른 곳과 달리 파격적으로 진보적이었는데, 전단지와 구매목록표의 일상화도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통상적인 가게에선 직원이 손님에게 직접 물건을 가져와 보여주지만 에치고야에서는 모든 물건을 진열해 놓아서 손님들이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있었고 손님이 원한다면 완제품으로 만들어서 살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11] 이를 미쓰이 11가(三井 11家)라고 한다.[12] 이런 이유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미쓰이 재벌 산하 계열사의 사장을 지배인이라고 부르고 특히 총수 역할을 하던 미쓰이합명(三井合名)의 필두이사, 이사장 등은 대지배인이라고 일컬어졌다.[13] 현재 경성(서울)지점과 인천지점 건물이 남아 있다. 경성지점의 경우 미국문화원을 거쳐 현재는 그레뱅뮤지엄이 되었고 인천지점은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로 사용 중이다.[14] 미쓰이는 미쓰비시, 스미토모와 달리 전전에도 지주회사 수장을 전문경영인이 맡아 왔다.[15] 목록의 번잡화를 막기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 운영 중인 기업군은 지주회사만 기록한다. 그 산하 기업은 주요한 것에 한해 주석으로 추가.[16] 원래 의미는 에도 막부에서 유사시 쇼군 계승이 가능한 도쿠가와씨 3개 친번 다이묘 가문을 말한다. 빅3와 비슷한 의미. 다만 규모보다는 역사상 서열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회원사 중 직계와 방계 회사 중 다수는 이 고산케에서 분리되어 나간 기업들이다. 재벌 해체 후에는 다른 회원사에 특출난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17] 직계의 정의는 1944년 미쓰이 본사가 지정한 직계, 준직계 회사 22개의 후신 또는 파생기업이다. 이 때문에 그룹의 원류인 미쓰코시이세탄(구 미쓰코시)과 고산케에 해당하는 미쓰이스미토모은행(구 미쓰이은행. 1944년 '제국은행'으로 통폐합)이 직계에 포함되지 않는다.[18] 이타이이타이병을 일으킨 가해 기업이다![19] 치바 롯데의 다나카 에이스케 선수가 본 회사에 취직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롯데에 드래프트되면서 내정을 거부하였다.[20] 엑스포시티 등의 쇼핑몰을 보유하고 있고 도쿄 디즈니랜드를 운영하는 오리엔탈랜드의 케이세이 전철의 뒤를 이은 2대 주주다. 그리고, 도쿄 돔을 운영하는 주식회사 도쿄 돔(株式会社東京ドーム)을 자회사(지분 80%)로 두고 있다.[21] 스미토모그룹과 중복.[22] MS&AD 인슈어런스그룹 산하. 스미토모그룹 중복.[23] 약칭은 영문명칭 Mitsui OSK (Osaka Shosen Kabushikikaisha) Lines에서 따온 MOL. 미쓰비시그룹 계열의 일본우선(NYK Lines)와 쌍벽을 이루는 해운회사이다. 산와그룹과 중복.[24] 다이이치칸교, 후요그룹 중복.[25] 스미토모그룹과 중복.[26] 자회사로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외. 스미토모그룹 중복.[27] 미쓰비시그룹 중복.[28] 후요그룹과 중복.[29] 자회사 오지제지 외. 다이이치칸교그룹 중복.[30] 다이이치칸교그룹 중복.[31] 미쓰이와 협력관계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별도의 가족경영 그룹으로 분류된다. 규모로 보면 '미쓰이 그룹' 전체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룹사인 도요타통상은 과거 미쓰이 직계였던 도멘을 흡수했다. 현재 총수인 토요다 아키오 사장의 어머니가 미쓰이 가문 사람이다.[32] 미쓰이물산 관계회사였던 다이셀에서 1934년에 분리 창업한 경우지만 다이셀 자체가 다른 동종업계와 합병한 기업이어서 사실상 남이었다.[33] 구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 다이이치칸교그룹 중복.[34] 도쿄방송의 지주사로 한국의 SBS를 소유한 태영건설격이다. 이쪽은 거대 기업인데도 언론 기능을 하는 방송사를 가지고 있다.[35] 주얼리 그룹으로 진주관련으로는 세계 최정점인 곳[36] 후지필름이 여기서 분사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역전.[37] 과거 직계계열사였다. 2015년 일본생명보험에 인수되었으나 아직 미쓰이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38] SMFG와 스미토모상사 등의 합작사로 스미토모그룹과 중복.[39] 전전 직계계열사.[40] 에비스 브랜드를 만들었던 일본맥주양조는 원래 미쓰이물산 자회사였다. 1906년에 삿포로맥주-일본맥주(에비스)-오사카맥주(아사히)의 합병으로 대일본맥주가 되었다가 1949년 아사히맥주와 분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다이이치칸교그룹과 중복.[41] SMFG와 스미토모상사 등의 합작사로 스미토모그룹과 중복.[42] 전지 메이커이다. 과거 워크맨류에 들어가는 이른바 껌전지 제품으로 유명했다.[43] 미쓰이물산의 리스부문이 독립하면서, JA그룹의 농림중앙금고와 미쓰이물산이 각각 1/3씩 출자하여 설립한 기업이다.[44] 1889~1906년 사이 무로란 본선을 비롯한 홋카이도 내 철도를 건설 운영했던 회사이다. 현재는 석탄수입업으로, 1995년 도산을 맞아 이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