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21 22:45:48

자유민주당(독일)

독일 자유민주당에서 넘어옴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if 넘어옴1 != null
'''독일 자유민주당'''{{{#!if 넘어옴2 != null
, ''''''}}}{{{#!if 넘어옴3 != null
, ''''''}}}{{{#!if 넘어옴4 != null
, ''''''}}}{{{#!if 넘어옴5 != null
, ''''''}}}{{{#!if 넘어옴6 != null
, ''''''}}}{{{#!if 넘어옴7 != null
, ''''''}}}{{{#!if 넘어옴8 != null
, ''''''}}}{{{#!if 넘어옴9 != null
, ''''''}}}{{{#!if 넘어옴10 != null
,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if 설명 == null && 리스트 == null
{{{#!if 설명1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if 설명1 != null
{{{#!html 과거에 존재했던 독일의 자유민주당들}}}에 대한 내용은 [[자유민주당]] 문서{{{#!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를}}}{{{#!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자유민주당#s-|]]번 문단을}}}{{{#!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자유민주당#독일의 정당|독일의 정당]] 부분을}}}}}}{{{#!if 설명2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를}}}{{{#!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3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를}}}{{{#!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4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를}}}{{{#!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5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를}}}{{{#!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6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를}}}{{{#!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7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를}}}{{{#!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8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를}}}{{{#!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9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를}}}{{{#!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10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를}}}{{{#!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 부분을}}}}}}
#!if 설명 == null
{{{#!if 리스트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if 리스트 != null
{{{#!if 문서명1 != null
 * {{{#!if 설명1 != null
과거에 존재했던 독일의 자유민주당들: }}}[[자유민주당]]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자유민주당#s-|]]번 문단}}}{{{#!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자유민주당#독일의 정당|독일의 정당]] 부분}}}}}}{{{#!if 문서명2 != null
 * {{{#!if 설명2 != null
: }}}[[]]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3 != null
 * {{{#!if 설명3 != null
: }}}[[]]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4 != null
 * {{{#!if 설명4 != null
: }}}[[]]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5 != null
 * {{{#!if 설명5 != null
: }}}[[]]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6 != null
 * {{{#!if 설명6 != null
: }}}[[]]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7 != null
 * {{{#!if 설명7 != null
: }}}[[]]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8 != null
 * {{{#!if 설명8 != null
: }}}[[]]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9 != null
 * {{{#!if 설명9 != null
: }}}[[]]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10 != null
 * {{{#!if 설명10 != null
: }}}[[]]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 부분}}}}}}

파일:자유민주당(독일) 로고.svg
Freie Demokratische Partei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b1eb> 약칭 FDP (에프데페)
영어 명칭 Free Democratic Party (of Germany)
한국어 명칭 (독일) 자유민주당[1]
창당일 1948년 12월 12일 ([age(1948-12-12)]주년)
주소 독일 베를린 10117,
토마스 댈러 하우스, 라인하르츠가 14
연방 당대표 공석
이념 자유주의 (독일)[2]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3][4]
연방의회
0석 / 630석 (0%)
연방상원[5]
2석 / 69석 (2.9%)
유럽의회[6]
5석 / 96석 (5.21%)
유럽 정당 유럽 자유민주연합(ALDE)
청년 정당 젊은 자유주의자들(Junge Liberale)
유럽의회 정당
국제 조직

정책 연구소 프리드리히 나우만 자유재단
상징 색 [[노란색|
노란색 (#FFED00)
]](주색)
[[분홍색|
분홍색 (#E5007D)
]](보조색)
[[하늘색|
하늘색 (#009EE3)
]](보조색)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LinkedIn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성향4. 역사
4.1. ~2010년대
4.1.1. 연정에서 몰락까지4.1.2. 2017년의 부활
4.2. 2020년대
4.2.1. 신호등 연정 참여4.2.2. 연정 탈퇴4.2.3. 다시 몰락
5. 역대 당수6. 지지층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독일자유주의 정당. 특정 시기[7]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중도 우파 정당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거대 양당 세력인 CDU/CSU사회민주당 사이의 제3세력으로 기능하며 이들과 함께 현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 반열에 올라 있다. 국가적 사고방식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자유주의 성향을 드러내듯 당명에 '독일(Deutschland)'이 들어있지 않으며, 영국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이 당명의 '자유'를 'Liberal'로 쓰는 것과 달리 'Frei(영어의 Free)'를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2. 상세

독일이 서독동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시절부터 기독교민주연합(CDU),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서독 정당정치를 구성한 주요 정당이었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 직전인 1990년 3~8월에 걸쳐 동독에서 구색정당으로 활동해온 동독 자유민주당을 흡수하였고, 통일 이후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오랫동안 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 양당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 연립정부에 여러 번 참여하며 독일 정국의 중도화와 협치 전통 구축에 기여하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대표되는 독일식 선거제도의 가장 큰 수혜를 받는 정당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라는 당의 노선과 정책에 대한 지지층이 있기에 정당 지지율은 어느 정도 꾸준히 나오지만, 개별 지역 기반이 미약하여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될 만한 인물은 별로 없기 때문. 그래서 선거 때마다 지역구 당선자 없이 전원이 정당득표율에 의한 비례대표로 당선되는 진기록(?)을 쓰고 있다. 물론 이는 정당 경쟁력 면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8] 중 하나로, 만약 정당 지지율이 봉쇄조항 5% 미만으로 떨어지면 순식간에 0석 원외정당이 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위험성은 2013년 연방 총선에서 실제로 발현되어 한순간에 당을 0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바 있다. 물론 그 다음 총선에서 곧바로 지지율을 회복해 만회하긴 했지만.

3. 성향

비슷한 성향의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련/기사련과 차이점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먼저 내세운다는 점이다.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을 지지하며, 개인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강조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감세, 정부 지출 축소, 균형 예산과 재정 적자 축소,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정책을 강조해 왔고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자주 분류되어 왔다. 이념적으로는 기민당보다 우파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정당이다. 기본적으로 중도 우파지만 공정한 경쟁을 위한 정부의 개입을 선호하고, 사회적 보수주의에 기반하는 기민련과는 사안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자민당은 경제적으로는 CDU/CSU의 우측에 위치하고, 문화적으로는 기민당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모습을 보인다.[9] 자민당과 기민당/기사당은 특히 경제 이념과 정책에서 원론적으로 거의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오랜동안 기민당/기사당은 자민당을 연정의 파트너로 삼아왔다.

다만 사회, 문화 정책에서는 간섭받지 않는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자민당과 보수주의를 무시하지 못하는 기민/기사 연합 간에 다소 이견이 생기는 편이다. 특히 기민/기사당의 전통적 지지자층 중에서 보수적인 지방 가톨릭 유권자들이 자민당의 사회, 교육 정책에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이로 인해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원론적으로 기민/기사당과 자민당은 같은 이념을 공유하고 있지만, 정책화 과정에서 기민당은 필요에 따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거나 재정 적자를 감수하는 것을 어느정도 용인하는 반면, 자민당은 기민당보다 정부의 개입, 규제 등에 부정적이며, 재정 적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자민당의 성향은 계속해서 조금씩 변해간다. 좌파든 우파든 현실 정치에서 순수한 이념을 추구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때문에 자민당 역시 이러한 순수한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일 때도 많다. 특히 1970년대에는 기민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중도 좌파적 요소를 혼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비슷한 성향의 중도 우파 정당인 기민당과 차별화를 해 내서 살아 남아야 했기 때문에 자민당은 시대별로 성향의 변화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상술된 바와 같이 독일 정치계에서는 사민당과도 연정하는 등 중도 기믹을 맡기도 한다. 보수주의기독교 민주주의적인 성향은 적고, 자유주의적인 정강과 정책을 기반으로 한다. 대표적으로 경제 운용에 있어서 규제 철폐를 통한 성장 달성과 같은 정책에서 자민당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반대로 다른 보수정당과 달리 기본권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급진적으로 보일 정도로 역시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도청 허용 범위를 넓히는 것에 대한 반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우파 정당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대목이 있고, 반대로 좌파 정당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대목이 있다.[10]

그렇기 때문에 1949년 창당한 이래 단독으로 집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역시 거의 대부분의 시절을 어떤 형태로든 연정을 통해 정부에 참여해 왔다. 1961년 이래 1966년~1969년대연정을 제외하고는 1998년까지 내각에 참여. 물론 연정에 참여한 대부분의 기간은 기민련/기사련과의 연정. 아무래도 자유주의적인 태도는 세금과 정부 지원을 통한 복지 강화를 추구하는 좌파/진보 계열과는 맞지 않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11]

하지만 1969년 2당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과도 연정을 한 것을 보면, 기본권 중시와 같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보일 때 역시 연정을 만들 수 있는 행보를 취한다. 자유민주당이 복지의 완전한 축소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보육이나 이민자 정책에서는 진보적으로 보일 정도로 4세 이하 의무 보육 확대나, 이민자 자녀에게도 보육 혜택을 주는 것을 찬성하고 있기도 하다.[12]

앙겔라 메르켈 집권 이후 기민련이 중도화된 반면 자민당은 기업 규제, 난민 문제 등에서 기민련보다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린트너 대표가 2017년에 자메이카 연정 협상을 결렬시킨 이후 더욱 그런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2021년 초 있었던 기민련 당수 선거에서도 메르켈과 마찬가지로 중도우파인 아르민 라셰트보다 강경 우파 성향인 프리드리히 메르츠를 자민당에서는 더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올 지경.

당의 색깔은 노란색이다. 이 때문에 사민당(빨강)+녹색당(초록)+자민당(노랑)으로는 속칭 "신호등 정부(Ampelregierung)"가 될 수 있다고 한다.[13] 실제로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2021년 총선 이후 최초로 신호등 내각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는 어떤 형태로든 정책을 취할 수 있고, 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한 스펙트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대신 색깔이 모호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약점이 녹색당의 약진과 맞물리고, 사민당과의 "신호등" 연대를 거부. 2000년대 초반에는 그 어떤 정당과도 함께 하지 못하며 완전한 야당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자신의 정체성은 있지만, 독자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지는 아니라는 점이 약점.

4. 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민당 창당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공화국체제를 지지했던 독일 민주당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끌었던 독일 인민당 출신의 자유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출범 초기 자민당은 특히 기민련과의 차별화를 내세우며 ‘제3정당’을 표방하며 존재감을 키웠으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이 집권 후 다양한 보수 및 우파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라인강의 기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서독 경제를 단기간에 재건하자, 중도·보수 성향의 표심은 기민련으로 더욱 쏠리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민당 내부에서도 당원 및 심지어 의원들이 기민련으로 이탈하는 사례가 계속 발생했다.

이에 따라 자민당은 1950년대 후반부터 기민련과의 차별화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좌클릭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이 무렵 독일 좌파 진영은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식량난으로 인해 1953년 봉기를 겪는 등 실패를 거듭하면서, 서독 내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서독 좌파의 중심이었던 사민당(SPD)의 지지율도 점차 하락했다. 사민당 내부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보다 현실적인 노선으로 전환하자는 우클릭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고 내분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민당에 실망한 중도 좌파 유권자들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고, 당시 기민련과의 차별화와 대립 기조를 강화하고 있던 자민당은 이들의 새로운 정치적 선택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고수하던 사민당에 들어가기를 꺼렸던 중도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자민당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자민당 역시 대중정당으로 성장하기 위해 창당 당시 고수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 순수성을 점차 내려놓고 중도 좌파적 노선을 수용하기 시작했다.[14]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민당의 성격은 점점 창당 초기의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멀어졌고,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 자민당은 전통적인 경제적 자유주의, 즉 우파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력과, 사회적 자유주의를 중시하는 중도 좌파 성향의 세력이 공존하는 정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CDU/CSU와의 갈등[15]이 계속되는 사이 그 반대급부로 1960년대 이후 사회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당내에서 급속히 커졌고, 60년대 후반 당내 사회적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발터 셸이 당권을 장악하고 결국 1969년 총선 이후 사민당과 연정을 이루는 당시로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선거에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가 이끄는 CDU/CSU가 승리했지만 과반은 차지하지 못한 상황인데 당시 키징어 총리는 당연히 자민당이 연정에 참여할 것이라 생각하고 고자세로 임했는데, 이에 반발해 자민당은 사민당과 연정을 이루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때문에 서독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제1당이 야당이 되고, 제2당과 3당이 연정으로 정권을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자민당 내부의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 세력은 사민당과의 연정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적이었고, 다소 불쾌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실제로 브란트 내각 출범 이후 사민당이 추진한 여러 급진적 정책들에 자민당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연정이 파탄 위기를 맞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자민당 내 일부 의원들과 당원들이 집단 탈당하여 기민련으로 당적을 옮기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자민당 내에서는 우파적 색채가 더욱 희석되고,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유주의 성향의 구성원이 중심을 이루게 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유지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그리고 1972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압승을 거두면서 자민당은 마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정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러던 중, 1974년 브란트 총리가 스캔들로 사임하고 보다 중도적이고 경제통 성향의 헬무트 슈미트가 후임 총리에 오르면서, 언제 깨질지 모른다던 연정은 예상 외로 안정적인 연장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서독 역시 장기적인 경제 불황에 접어들며 연정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하락했고, 동시에 자민당 내 사회적 자유주의 세력의 입지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처럼 당내 세력 균형이 변화하고, 외부 정치 환경도 바뀌어감에 따라 자민당은 결국 1980년대 초 사민당과의 연정을 청산하고 기민련과 다시 손을 잡으며, 창당 초기의 고전적 자유주의 노선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자민당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춰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독일 통일 이후 새롭게 편입된 동독 지역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에는 이러한 노선이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통일의 후유증으로 독일 경제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장기 침체에 빠지게 되면서, 시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내세우던 자민당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민당 내 사회적 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 자민당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적 노선’으로 방향을 조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민당은 경제 규제 철폐와 감세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기본소득제 도입과 같은 복지적 요소를 지지하는 등, 다른 어떤 나라의 정당과도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정치적 색깔을 지닌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1. ~2010년대

4.1.1. 연정에서 몰락까지

2000년대 초반 적녹연정 이후 자민당은 오랜 기간 야당 생활을 이어갔다. 2005년 총선 이후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CDU/CSU가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택하면서 자민당은 연정에서 다시 한번 배제됐다.[16] 그러나 2009년 총선에서 당시 47세였던 기도 베스터벨레 당수의 인기에 힘입어 14%의 득표율로 93석을 확보하며, 다시 CDU/CSU의 연정 파트너로 복귀하게 되었다. 베스터벨레는 이후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았다. 1998년 실권 이후 11년만.

이러한 자민당의 부상은 직전 대연정 기간 동안 기민련의 보수성이 희석되며 일부 지지층이 이탈한 영향도 있었고, 자민당이 11년간 야당으로 머문 데 대한 동정표가 결합된 결과였다. 베스터벨레는 2001년, 39세의 나이로 당수에 선출된 이후 세 차례 선거를 이끌었으며, 일관된 자유주의 보수 노선을 고수한 점이 유권자들에게 명확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자민당의 상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1년, 자민당은 독일 정당사 최초로 아시아계 정치인인 필리프 뢰슬러를 새 당수로 선출했다. 그는 남베트남 출신 입양아로, 독일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내각 각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뢰슬러 체제 하에서 자민당은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2012년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자민당은 5% 진입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기민련 지지층의 전략적 투표 덕분에 10%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생존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기민련의 득표율은 5% 가까이 빠졌고, 그 결과 1석 차이로 흑황 연정이 과반 확보에 실패, 사민당·녹색당 연정으로 주정부가 교체되었다. 이에 대해 뢰슬러는 선거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뒤를 이은 신임 당수 브뤼더레는 가관이었는데 성희롱성 발언(이른바 ‘가슴 발언’)으로 거센 비판을 받으며 자민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2013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5%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하고, 의석을 한 석도 확보하지 못해고 원외로 추방당하는 충격적인 몰락을 겪었다. 같은 날 실시된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5%를 넘지 못했다. 다만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는 간신히 5%를 넘겨 의석 확보에는 성공했다.

이처럼 자민당의 급격한 몰락으로 인해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세 번째 임기에서 다시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4.1.2. 2017년의 부활

2017년 9월 예정 총선 여론조사에서 안정적으로 7~10% 지지율을 찍고 있어서 연방의회 재진입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다시 기민당과의 연정이 성립될 확률이 높다. #

왜냐하면 사회민주당은 색깔이 다른 기민련/기사련과의 연정에 회의적이며, 기민련/기사련은 4기 정부에서 자민당과의 연정을 바라고 있고, 실제로 2017년 6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선거 결과 사민당-녹색당 연립정권을 탈환하며 기민당-자민당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2017년 9월 24일 제19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무려 80석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거기다 사회민주당의 거부로 대연정이 일찍이 무산된 상황이라 기민당/기사련 중심 자메이카 연정이든, 사민당 중심의 선인장 아이스크림 연정이든 연립여당으로서 정권 창출에 함께하게 됐다. 지난 선거의 대부진을 딛고 완벽하게 부활한 셈.

그러나 같은 해 11월 20일 자메이카 연정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린트너 대표 왈 "나쁜 정부를 구성하는 것보다는 정부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녹색당과 기민당은 아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난민 문제나 기후변화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번에 연정에 참여했을 때 역대 최악의 결과를 얻은 것도 비타협적인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메르켈이 정권 구성에 실패해 재선거가 시행된다면 연정 성립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자민당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슈피겔 등 일부 언론들은 벌써부터 린트너가 진지하게 연정 협상에 임할 생각이긴 했는지를 의심하고 있다. 기성정치를 대표하는 메르켈 정부에 대항하는 야당으로서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강한 조건을 내세우고 협상을 질질 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야당하겠다던 사민당만 새됐다 린트너가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를 지적하지 않은 것 또한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기민련 의원들 사이에서는 자민당이 고의로 독일 민주주의를 사보타주나르시시스트들이라는 과격한 비판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

2018년 3월, 결국 사민당이 당원들의 반발에도 기존 당론을 바꾸면서까지 대연정을 유지하기로 하면서 자민당은 야당으로 남았다. 대표인 린트너가 2019년 4월 26일 재신임 투표 역시 단독 입후보해 86.6%의 지지를 받으면서 현재의 자민당 당론을 크게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민련-사민당 연정이 지지율을 빠르게 까먹는데도 수혜를 못 누리고 녹색당이 약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총선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긴 어렵지 않냐는 분석도 있다.

4.2. 2020년대

2020년 들어서 코로나19 위기로 여론이 결집하면서 기민기사련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반대 급부로 다른 야당들은 지지율이 정체 상태로 자유민주당은 5%선이 다시 간당간당한 상황이다. 2월 치러진 함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봉쇄조항 5%를 넘지 못해 지역구에서 한 석만 건진 채 비례대표 의석을 모두 잃었다.#

그나마 2021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총선에서 녹색당과 함께 선전한 당이 되었다. 지지율도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최고 10%를 넘기는 등 봉쇄조항을 무난히 넘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4.2.1. 신호등 연정 참여

2021년 9월 26일 실시된 총선 결과 11.5%를 득표해 지역구 의석 없이 비례대표 의석으로만 92석을 확보, 직전 총선 결과보다 12석을 늘리며 독일을 위한 대안을 제치고 원내 제4당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연정 파트너로 염두에 두고 있던 CDU/CSU가 196석에 그치면서 범보수 연정 구성은 무산되었다. 대신 사회민주당과 동맹 90/녹색당과 신호등 내각에 대한 공식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11월 24일, 연정 협상안에 최종 합의하고 12월 5일에는 전당대회를 통해 이를 승인함에 따라 12월 8일부터는 사민당, 녹색당과 함께 새로운 연정을 구성하게 되었다. 연정 합의에 따라 연방 재무부, 법무부, 교육연구부, 교통디지털인프라부 4개 부처의 장관직을 할당받았으며, 크리스티안 린트너 대표는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여담이지만 사민당과 자민당이 연방정부 단위에서 연정을 하게 된 것은 무려 39년 만으로, 1982년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내각불신임결의를 당하고 사퇴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2024년 9월 1일 작센 주의회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 봉쇄조항 5% 이상을 득표하지 못해 원외 정당으로 전락하고, 9월 22일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도 원내 진입에 실패하는 것은 물론 1% 미만의 소수점에 그치는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해 참패라고밖에 볼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신호등 연립정부에 속한 집권당 3곳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셈.

크리스티안 린트너 대표가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선거 결과를 확인한 직후 당 지도부를 소집해 긴급 회의를 연 가운데,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신호등 연정에서 탈퇴해 야당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당원들의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연방의회 공동 부의장 중 한 명인 볼프강 쿠비키(Wolfgang Kubicki) 수석부대표는 벨트(Welt)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올 가을에 결정을 내릴 것이고, 현재의 성과로는 이 연립정부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하며 당의 연정 탈퇴를 암시했다. # 전반적으로 연정에서 나오라는 당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이 될 경우 신호등 연정은 과반 의석에 미달해 붕괴되고 올라프 숄츠 총리와 사회민주당은 조기 총선을 치러야 할 수도 있다.

4.2.2. 연정 탈퇴

2024년 11월 6일 올라프 숄츠 총리가 생중계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방침에 따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에게 자당 소속 연립정부 장관 3인에 대한 해임 안건이 제청되었고, 다음날인 11월 7일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서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당대표), 마르코 부쉬만 법무장관, 베티나 슈타르크-바칭어 교육연구장관 3명이 내각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다만 이들과 함께 자당 몫으로 연정 내각에 입각했던 폴커 비싱 교통디지털장관은 당의 연정 탈퇴에 반대 입장을 밝힌 끝에 탈당했고 무소속으로 유임되어 법무장관도 겸임하기 시작했다. # 이로써 공식적으로 신호등 3당 연정을 탈퇴해 야당이 되었으며, 린트너 대표는 총리 신임투표와 조기 총선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신호등 연정이 공식적으로 붕괴된 뒤 임시로 성립된 사민당녹색당의 소수연정은 도합 324석으로 원내 과반에 못 미치기 때문에, 2024년 12월 중으로 총리 신임투표를 실시하면 올라프 숄츠 총리는 불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론이다. 볼신임될 경우 2025년 2월 조기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

2024년 12월 16일 진행된 신임투표에서 야당 측의 일원으로 불신임에 동참했으며, 예상대로 신임(찬성) 207표, 불신임(반대) 394표, 기권 116표로 숄츠 내각은 불신임되었다. # 이에 따라 내년 9월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제21대 연방의회 선거는 7개월여 앞당겨져 2월 23일에 치러지게 되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내각불신임투표 결과를 전달받고 정식으로 의회 해산 및 조기총선 실시를 발표하면서 2025년 2월 총선 일정은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4.2.3. 다시 몰락

정치권이 조기총선 정국으로 전환되면서 본격적으로 선거 준비 체제에 돌입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율이 5% 안팎을 간당간당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4%대 지지율로 집계된 결과도 여럿이다. 좌파당보다는 평균 지지율이 높았지만 이조차도 2월 들어서는 좌파당이 5%를 돌파하는 여론조사들이 나오는 것과 대비되어 평균 지지율이 3~4%대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게다가 지역구 3석을 노리고 있는 좌파당에 비해 지역구 전략이 전무한 자민당의 리스크가 훨씬 크다.

지지율 반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조기총선에서 정당득표율 5%를 넘기지 못해 원외정당으로 전락하여, 순식간에 모든 의석을 잃고 나가떨어진 2013년 제17대 총선 당시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 지역구 당선자 없이 매번 전원 비례대표로 의석을 확보해온 취약점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분위기.

결국 2025년 2월 23일 실시된 총선에서 봉쇄조항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 4.33%를 기록했으며, 지역구와 비례대표 당선자 모두 배출하지 못하면서 원외정당으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자민당은 2013년 총선 이후 약 12년 만의 악몽이 재현되어 버렸고, 선거 결과의 책임을 지고 린드너 지도부가 총사퇴하였으며 린트너 대표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선거 이후 발표된 Infratest dimap 주관 ARD 출구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58%가 자민당(FDP)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신호등 연정 탈퇴’를 지목했으며, 57%는 크리스티안 린트너 전 재무장관이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린트너의 모험주의적 연정 붕괴 시도와 D-day 스캔들이 자민당의 급격한 지지율 하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드러났다.

한편, 린트너의 연정 탈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숄츠 내각에 잔류한 폴커 비싱 장관은 린트너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당의 노선에 문제를 제기했다. 애초에 유권자들이 중도좌파 계열 연정 참여 자체에 불만이었다면, 사민당-녹색당과 연정 중인 라인란트팔츠 자민당의 지지율이 보수 정당인 CDU와 연정 중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자민당보다 높게 나올 이유가 없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전반적으로 린트너가 자민당 당권을 장악한 이후 보여온 우경화 노선 — 예컨대 메르켈 시절 자메이카 연정 협상의 일방적 결렬, 숄츠 시절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연정 파트너들과의 지속적인 갈등 등 — 은 오히려 AfD 부상과 함께 자민당의 입지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2025년 총선에서 자민당(FDP)의 득표율은 2013년 총선 당시 봉쇄조항(5%)에 근접했던 기록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현재 자민당의 상황은 2013년과 비교해도 더 악화되었으며, 당시에는 대부분의 주의회에서 원내 정당으로 활동하거나 연립정부의 일원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16개 연방주 중 무려 7곳에서 주의회 원외 정당으로 전락한 상태다.

3월에 선거가 치러질 함부르크 주의회 선거의 경우, 2월 말 기준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은 5% 봉쇄조항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측되어 또 하나의 원외 정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실제로 주의회 진입에 실패하며 또 한번 참패했다.

현재 자민당이 주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곳은 사민당 주도의 신호등 연정이 운영 중인 라인란트팔츠, 그리고 기민련 주도 연정이 구성된 작센안할트 두 곳뿐이다. 하지만 작센안할트의 경우, 기민련과 사민당만으로도 과반 의석을 간신히 넘기고 있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자민당이 연정에서 배제되고 야당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크리스티안 린트너 대표의 사퇴 이후에는 볼프강 쿠비키 부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내 경제적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적 자유주의 진영의 마리 슈트라크지머만 등이 차기 당대표 후보군으로 꼽히고 있다. # 그러나 이들은 각각 73세와 67세로 이미 은퇴를 선언한 린트너 전 대표보다도 한 세대는 더 위다. 린트너마저 쿠비키의 출마 가능성을 전하는 소식에 당황했을 정도.

크리스티안 뒤르 원내대표가 2025년 3월 17일 당대표직 도전을 선언했다. 사실상 단독 후보로 출마하는 상황이다. 경쟁 후보가 나설 가능성은 낮으며, 내부 저항도 크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린트너 전 재무장관과 정책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인물이라 과연 자민당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호등 연정 당시 린트너의 측근이자 자민당의 정책 담당으로 자민당이 몰락하는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5. 역대 당수

파일:독일 자유민주당 심볼.svg 자유민주당 당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테오도어 호이스
제2대
프란츠 블뤼허
제3대
토마스 델러
제4대
라인홀트 마이어
제5대
에리히 멘데
제6대
발터 셸
제7대
한스디트리히 겐셔
제8대
마르틴 방게만
제9대
오토 그라프 람프스도르프
제10대
클라우스 킹켈
제11대
볼프강 게르하르트
제12대
기도 베스터벨레
제13대
필리프 뢰슬러
제14대
크리스티안 린트너
공석
}}}}}}}}} ||

6. 지지층

독일을 대표하는 공영 국제 방송인 도이체 벨레에 따르면, 치과의사변호사같은 전문직 종사자들, 자영업자들, 기업인들로부터 가장 높은 지지세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

7. 여담

8. 둘러보기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자유주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주요 이념 고전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 · 문화적 자유주의 · 중도주의 · 질서자유주의
연관 이념 공화주의 · 국민자유주의* · 녹색 자유주의(Grüne) · 사회자유주의 · 자유주의 페미니즘(개인주의 페미니즘) · 자유지상주의
과거 이념 급진주의 · 계몽주의 · 라이시테주의
연관 개념 시장경제 · 자유국제주의 · 자유보수주의 · 진보주의 · 흑적금 국기단
주요 정당 1차대전 이전 독일국민협회 · 독일 인민당(1868년) · 독일 자유사상당 · 독일 자유사상인민당 · 독일 진보당 · 자유사상가 연합 · 자유주의연합 · 진보인민당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국가당 · 독일 민주당 · 독일 인민당
전후 독일 동맹 90/녹색당 · 자유민주당
인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기도 베스터벨레 · 랄프 다렌도르프 · 루돌프 폰 베니히센 · 루돌프 피르호 · 막스 베버 · 발터 라테나우 · 발터 셸 · 발터 오이켄 · 빌헬름 뢰프케 · 아날레나 베어보크 · 알렉산더 뤼스토 · 에두아르드 라스커 · 칼헤르만 훌락 · 크리스티안 린트너 · 테오도르 몸젠 · 테오도어 호이스 · 프리드리히 나우만 · 한스디트리히 겐셔
언론 디 차이트 · 쥐트도이체 차이퉁 ·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단체 프리드리히 나우만 자유재단 · 하인리히 뵐 재단(Grüne)
기타 제하임 서클(SPD)
독일 정치 관련 문서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독일에서 보수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으며, 독일에서 우파자유주의(Rechtsliberalismus)는 국민자유주의(Nationalliberalismus)와 동의어이다.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분파
}}}}}}}}}

[1] 한국에서는 바로 옆 나라인 일본자유민주당(자민당)이 매우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자유민주당' 혹은 '자민당'이라 하면 이 일본 자민당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독일의 자민당은 일본의 자민당과는 당명도 'Free'와 'Liberal'로 구별되고 정치 성향과 노선도 다르지만, 당명에 '독일'을 포함하지 않기에 헷갈릴 수 있다.[2]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중도~중도우파를 아우르고 있어 내부 구성원들의 성향은 다양한 자유주의 노선으로 나타난다.[3] 포괄적 자유주의 정당이지만 독일에서는 중도보다 범우파로 여겨질 때가 많다.[4]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중도 ~ 중도우파'가 아닌 단순 '중도우파'로 정의하는 반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독일 중도주의 정당'(centrist German political party)으로 정의하고 있다.#[5] 주 정부에서 연방 상원의원을 지명하며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각 주 의회의 선거 이후 자민당이 가진 의석 수가 변동 가능성이 있다. 보통은 주 총리를 비롯한 주 정부의 각료들이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데, 독일은 주 정부까지 의원내각제이므로 이들은 모두 주 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의 연방 상원은 의원들이 소속 정당보다는 소속 주가 더 중요하다.[6] 96석은 유럽의회에서 제공되는 독일 의석에 한정된다. 유럽의회 총 의석은 총 720석.[7] 1970년대[8] 자민당보다 늦게 창당한 동맹 90/녹색당좌파당, 독일을 위한 대안 모두 연방의회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지역구 당선자를 하나둘 늘려가고 있다. 지역구 당선자의 대부분을 쓸어가는 거대 양당 기민련+기사련과 사민당을 제외한 제3세력 정당 중 지역구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하는 정당은 자민당밖에 없다. 제3지대에서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는데도 이렇다는 것은 정당으로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9] 독일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문화적 자유주의 성향을 동시에 띄는 원내 유일의 정당이다.[10] 자유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좌우파 양쪽과 모두 공통점이 있다. 작은 정부, 규제완화,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 최소화, 친기업 위주의 경제관은 우파와 동일하고, 절대적인 기본권 옹호, 인권 최우선, 사회문화적 자유주의는 좌파와 유사하다.[11] 자유주의 우파는 사회주의와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민주의 또한 자유주의 우파 입장에서는 멀게 느껴지는 사상이다.[12] 당시 당수였던 발터 셸이 자민당 당수로서는 예외적으로 복지 확대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개방적이었던 영향도 있다.[13] 소연정(독일) 문서 참고.[14] 사민당 역시 결국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노동자계급 정당에서 사회적 개혁주의에 기반한 국민정당으로 변화했다. 이후 양당의 이념적 격차가 좁혀졌고 그 결과, 1969년의 '대전환'이 가능해졌다.[15] 1966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증세를 결정하자 자민당이 연정을 파기해 내각에서 탈퇴했고, 그로 인해 무너진 에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키징어는 아예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해버리는 등 양당간 갈등이 파국으로 치닿고 있었다.[16] 사실 메르켈로서는 CDU/CSU-자민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간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했던 녹색당을 설득해 자민당에 녹색당까지 더한 자메이카 연정을 구성하거나,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17] 참고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경우 사회관에 있어서는 자민당보다 보수적이지만 경제정책 노선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독일식 보수자유주의질서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개념이다.[18] Zimmer, Matthias (1997) (英語). Germany: Phoenix in trouble?. University of Alberta Press. p. 114. "The FDP program emphasizes the traditional pillars of classical liberalism: civil rights, a free market econom, and anti-cleric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