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하니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 ||
달려라 하니 (1988) | 천방지축 하니 (1989) | 달려라 하니: 나쁜계집애 (2025) |
달려라 하니 (1988) | |||
{{{#373a3c,#dddddd {{{#!wiki style="margin: 0px -11px" {{{#!folding 작품 정보 ▼ | 장르 | 순정, 스포츠 | |
원작 | 이진주 | ||
기획 | 조봉남 | ||
감독 | 홍상만 | ||
녹음 연출 | 최수형 민영문 | ||
타이틀 디자인 | 이석인 | ||
인물 설정 | 이학빈 | ||
미술 설정 | 임종우 | ||
작화 감독 | 박설형 | ||
음향 효과 | 최경상 | ||
음악 | 이남홍[1] | ||
텔레시네 | 최용균 정현수 | ||
애니메이션 제작 | 대원미디어 토에이 애니메이션[2] | ||
제작 | KBS 대원미디어 | ||
방영 기간 | 1988. 08. 15. ~ 1988. 11. 20. | ||
방송국 | KBS 2TV / (일) 17:15 | ||
스트리밍 | 유튜브 옛날티비 : KBS Archive TVING ▶ | ||
한국 정식발매 | 한국비디오선교센터 (VHS) KBS 미디어 (VCD) | ||
편당 러닝타임 | 25분 | ||
화수 | 13화 | ||
시청 등급 | 모든 연령 시청가 | ||
관련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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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진주의 만화 달려라 하니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2. 특징
1988년 8월 15일부터 11월 20일까지 KBS2에서 방영되었다. 분량은 총 13화로 딱 1쿨 분량. 한국에서 최초로 정규 편성되어 방송된 국산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제작은 대원동화 및 한국방송공사, 무려 당시 하청으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참여하기도 하였다.[3]감독은 홍상만, 해설은 성우 최수민.제작 시기가 1980년대 중후반이라서 그런지 애니메이션 에피소드 중에 하니의 아버지가 중동에서 일해서 하니와 떨어져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리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등 중동으로 파견근로 나가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4]
하니라는 캐릭터는 이진주가 데뷔작인 '하니를 백작 품에'때부터 스타 시스템의 주인공 캐릭터[5]로 사용했던 캐릭터인데, 그 많은 하니 중 가장 인기를 끈 버전이 바로 달려라 하니의 하니다. 원작에서부터 주인공의 조랑말같이 당돌하고 엉뚱, 쾌활한 성격을 반영해 주인공 이름을 '포니'로 쓸 예정이었으나 당시의 국민차라고 할 수 있던 현대 포니가 연상된다고 하여 간접광고 의심 탓에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에서 통과가 되지 않자 기존에 쓰고 있었던 하니를 다시 등장시켰다는 비화가 있다. 이 사례는 KBS2 <스펀지> 2004년 4월 3일자에서 처음 소개됐으며, 아쉽게도 '지식의 별'은 4개 반으로 5개에 도달하지 못했다.
주인공 하니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 드라마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하니보다는 주변 인물들, 특히 장정진이 맡은 대표적인 캐릭터인 하니의 코치 홍두깨 선생이나 악역 겸 라이벌 나애리(성우는 최수민) 등이 더 빛을 발했으며 남자 메가데레 캐릭터 창수(성우는 김순원), 개그 캐릭터 양기리(성우는 이진화), 고은애(성우는 김성희)등의 조연도 맹활약했다. 하니의 원수이자 새엄마 뻘이 되는 탤런트 유지애[6](성우는 권희덕[7])도 아주 멋진 캐릭터 중 하나다.
참고로 우연히 방영 중반에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어 대회와 본 작품의 시기가 완전히 겹치기도 하였다.[8]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자체적인 국산 TV만화영화는 뽀뽀뽀에서 방영하던 단편 만화영화를 제외하면 돈이 많이 든다며 제작되지 않던 시절로,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온 애니메이션들이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그래도 국산의 비중이 높기는 했지만 하청을 받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제작한 데다가 저작권 인식도 미비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캐릭터, 메카닉 디자인이나 줄거리 면에서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을 베껴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등 표절시비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그나마도 1980년대 중후반에는 잠깐 명맥이 끊겼다는 점에서 달려라 하니의 의의가 상당하다. 비록 달려라 하니가 첫 국산 TV 만화영화의 스타트를 끊은 작품은 아니지만, 첫 시리즈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로 달려라 하니 시리즈의 총 제작비는 5억 5000만 원 정도로, KBS 입장에서 꽤 큰 투자를 한 작품이었다.[9] 게다가 1982년과 1983년에 프로야구, K리그, 민속씨름이 출범하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스포츠 열풍으로 인한 플러스 인기까지 얻은 것은 덤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비인기 종목이었던 육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인기였다는 것도 주목할 점, 하지만 당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자 육상 3관왕을 달성한 임춘애 씨가 주목받고 있었던 시점이라 당시 육상은 그나마 지금보다 사정은 좀 나았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하니 역시 임춘애 씨의 인생역경과 비슷해서 겹쳐보이기도 한다.[10][11]
3. 주제가
애니메이션판 주제가는 거장들이 투입된 작품으로, 원작자 이진주 화백이 작사를, '헐리웃매너' 설립자 방용석이 작곡, 노래는 당대 인기 가수 이선희가 각각 맡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애니메이션 주제가 중 손꼽히는 명곡으로 손꼽히기도 하다. 다만 대원방송 재방영판에선 정여진이 불렀다.난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늘 땅만큼
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두 손 꼭 잡고!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난 있잖아~! 슬픈 모습 보이는 게 정말 싫어, 약해지니까
외로워[12] 눈물 나면 달릴 거야, 바람처럼~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난 있잖아~! 내 별명 악바리가 맘에 들어, 그래야 이기지
모두모두 제치고 달릴 거야, 엄마 품으로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두 손 꼭 잡고!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난 있잖아~! 슬픈 모습 보이는 게 정말 싫어, 약해지니까
외로워[12] 눈물 나면 달릴 거야, 바람처럼~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난 있잖아~! 내 별명 악바리가 맘에 들어, 그래야 이기지
모두모두 제치고 달릴 거야, 엄마 품으로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2016년 6월 21일 1 대 100 김원희 방영분에서 3단계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김완선, 이선희, 강수지 중 누구인가 찾는 문제로 등장했으며 96명 중 20명이 떨어졌다.
2018년 5월 10일 해피투게더 가정의 달 특집 쟁반노래방에서 미션곡으로 나온 바 있다.[13] #
그 외의 삽입곡으로는 가칭 빛나리 육상부 주제가 '해가 떠도 달려라, 달이 떠도 달려라. 흐르는 땀방울 보석되어 빛나리...'가 잘 알려진 곡이지만 너무 짧고, 이나마도 교장(성우는 김정호) 대사가 들어가서 잘리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다(...). #,#
4. 미디어 믹스
4.1. 매체
종영 후 1989년에 한국비디오선교센터를 통해 VHS 비디오테이프로 나왔고, 1990년대 중후반까지 KBS 1TV에서 수 차례 재편성된 후 2002년부터 애니원 등 대원방송 계열 애니 채널, 2012년 KBS Kids 등지에서도 줄기차게 편성한 바 있다. 2006년 KBS 미디어를 통해 VCD까지 발매되었다.5. 기타
'나쁜계집애'란 말이 하니가 나애리를 상대로 부른 대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나애리...건방진 계집애"인데 나쁜계집애 라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사실 이 대사는 어찌보면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 방영 당시 김지혜가 2001.11.11 ~ 2002.9.8때 까지 연기한 하니 역에서 한 대사였다. 대다수 대중들의 기억에 혼선이 생긴 대표적인 만델라 효과인 것.다만 이 대사가 인상적으로 남았는지 후속 애니 제목으로도 쓰이게 되았다. 2023년 9월 14일 달려라 하니 35주년 기념으로 공식 후속 애니메이션 방영이 확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달려라 하니: 나쁜계집애 참조
6. 둘러보기
KBS 2TV 금요일 애니메이션 | ||||
시간대 신설 | → | 1988.8.15~11.20[14] 1989.3.10~6.9(재방영)[15] | → | 1989.7.7~9.29 |
→ | 달려라 하니 | → | 천방지축 하니[16] |
[1] KBS1 《역사스페셜》 등 프로그램 음악 감독이기도 했다.[2] 부분 하청.[3] 다만 크레딧에 게재되진 않아서 대다수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관련 게시글.[4] 심지어 이 당시에 이란-이라크 전쟁 도중의 전장에서도 공사를 중단없이 계속 진행해서 이란 당국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을 정도였다.[5]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스타 시스템이 대세였다. 이야기 전개와 세계관이 다르지만 등장하는 캐릭터의 외모, 이름, 성격 등은 정해두고 돌려가며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이현세 작가의 오혜성과 허영만의 이강토, 이상무의 독고탁, 박봉성의 최강타, 고행석의 구영탄, 김성모의 강건마 같은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6] 처음에는 하니의 냉대에 조마조마해하지만, 하니가 부상당한 후 재활하려 할 때 어그로를 끌면서 자전거에 탄 채로 '네가 날 이기면 너희 아빠에게서 떠나주마'라는 강수를 둬 하니를 부활시킨다. 부활에 성공해 유지애와의 내기에서 이긴 하니는 "자전거나 더 좋은 걸로 갖고 오시죠."라며 시대에 앞선 츤데레를...[7] 최진실 생전에 최진실이 출연한 CF 담당성우였다. 최진실을 CF 퀸의 자리에 올려놓은 멘트인 "남자는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가 이 분 목소리. #[8] 단, 서울 올림픽 기간 중에는 본 작품이 휴방되었다. 올림픽 직전까지 6화를 방송했고, 올림픽이 끝난 후 7화부터 방송을 재개했다.[9] 이 당시에 편파보도와 불공정성으로 시청료 거부운동이 한창이라 시청료 수입이 급감하고 6월 항쟁때 KBS 지방 지국들이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서 습격을 받았을 정도로 KBS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기 때문에 국산 TV 만화영화 제작을 해서라도 이런 투자를 할 필요가 있었다. 국산 TV 만화 제작도 그 동안 하지 않았다가 KBS와 MBC에 대한 지탄여론이 높아지자 이를 무마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측면이 있다. 물론 본방송 당시에 광고가 많이 안 팔리기는 했지만, 지속적인 재방송 및 비디오 판매와 해외수출로 이익을 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득이었다.[10] 임춘애 씨는 성보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여자 계주에 출전해 800 m, 1,500 m, 3,000 m 금메달을 기록했다. 2년 후에는 1988 서울 올림픽 성화 주자로 나섰다. 그때 당시 "학교 코치 사모님이 끓여주신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라는 인터뷰가 본의 아니게 와전되어서 한때 헝그리 정신을 대표했던 인물이기도 했다.[11] 여담으로 하니가 애니화되기 1년 전인 1987년에 KBS1에서 임춘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아리수변 꿈나무>라는 달려라 하니와 비슷한 소재의 1시간짜리 만화영화를 방영했으나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리고 작중 주인공인 임춘애를 그대로 쓰려고 했으나 '아마추어 선수의 상업적 이용은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육상연맹 측의 클레임으로 인해 '임신애'로 이름을 변경하였다.[12] '외로와' 로 들린다.[13] 당시 게스트는 평창을 빛낸 여성 선수 4명인 이상화, 최민정, 심석희, 정유라[14] 첫방영 당시에는 일요일 오후 시간대에 방송되었다.[15] 이때부터 KBS에서 금요일 저녁 시간대를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로 고정하였다.[16] 달려라 하니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