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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3:44:16

뉴욕 징병거부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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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Fuck the Draft · 뉴욕 징병거부 폭동 · 혈세잇키 · 병역문제대책위원회 사건 ·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 · 2016년 대한민국 대체복무 폐지 논란 · 2022년 뇌전증 병역비리 적발 사건 }}}}}}}}}


1. 개요2. 발생 과정
2.1. 면제비와 대리복무 가능의 징병법2.2. 뉴욕시에서의 징병대상자 발표
3. 폭동의 시작에서 끝4. 관련 문서

1. 개요

New York City draft riots
▲ 뉴욕 징병거부 폭동 관련 삽화와 사진이 나오는 설명 영상
▲ 뉴욕 징병거부 폭동을 재현한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장면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이 한창이던 1863년 7월, 뉴욕에서는 불공평한 징병에 화가 난 군중들이 나흘 동안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징병사무소와 우체국 등이 불에 타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19세기에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은 상공업 중심의 북부 지역과 농업 중심의 남부 지역 사이에 4년 동안 피를 흘리며 싸웠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1863년 여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새 징병법을 내놓았다. 20살에서 45살까지의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징병을 하고, 군대에 머무는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린다는 내용이었다. 링컨은 이 새 징병법으로 30만 명의 군인을 새로 모집하려 했다.

문제는 링컨 대통령의 새 징병법이 부자들에게 합법적인 병역 기피의 길을 터 주었다는 점이다. 300달러를 정부에 내면 군대에 안 가도 됐고, 사람을 돈으로 사서 대신 보낼 수도 있었다. 부자들은 돈으로 입대를 피했다. 철강업으로 떼돈을 번 앤드루 카네기, 금융재벌인 존 피어폰트 모건 같은 이들에게 300달러는 큰돈이 아니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아버지도 돈으로 군대를 피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을 지낸 체스터 앨런 아서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군대로 보냈다.

뉴욕 징병 거부 폭동은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는 새 징병법이 당연히 불공평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들이 중심을 이루어 5만 명쯤이 폭동을 일으켰다. 뉴욕 맨해튼의 징병사무소를 공격해 징병 대상자 명단을 불태웠다. 우체국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에 타고 혼란이 번졌다.

뉴욕 경찰로는 힘들다는 보고를 받은 링컨 대통령은 군대를 보내도록 명령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여했던 2개 연대 병력이 뉴욕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폭동은 곧 진압됐다.

불공평한 징병이 낳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망자는 100여 명, 부상자는 3,000명을 넘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갱스 오브 뉴욕(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2002년)에서 뉴욕 징병 거부 폭동의 처절했던 모습이 보인다.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22~23.

1863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미국 뉴욕시의 빈민들이 징병법에 반발하여 일으킨 폭동.

뉴욕 징병거부 폭동과 관련된 기사

2. 발생 과정

2.1. 면제비와 대리복무 가능의 징병법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당시의 새로운 징병법을 서명해 통과했는데 사상자도 많았고 2년의 의무복무기간이 끝나자 제대하려는 자가 많아 새로운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징병법은 20세에서 45세까지 북부의 백인 남성을 대상을 징집 대상으로 규정했으며 군복무시 의무복무기간은 3년으로 규정되었다. 이 법으로 링컨은 30여 만명을 충원하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징병법에서 부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병역을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군복무를 원하지 않으면 300달러의 면제비를 내거나 대리복무자를 입대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법이 시행되자 많은 부자들이 이 법에 따라서 면제비를 내서 병역을 피했는데 이 중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아버지, 앤드루 카네기, 존 피어폰트 모건 등이 있었으며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체스터 A. 아서그로버 클리블랜드 등은 대리자를 입대시켰다.

당시의 300달러[1]가 큰 액수의 돈이기 때문에 이런 징병법에 빈민들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었다. 여기에 아일랜드계 빈민들도 이 불만 집단 중 하나였으며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새디어스 스티븐스도 이 징병법을 비난하기도 했다.

2.2. 뉴욕시에서의 징병대상자 발표

1863년 7월 11일 뉴욕시에서 처음으로 같은 해에 시행된 징병법에 의한 징병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다음날인 12일에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그 다음날인 7월 13일에 추가 징병 대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뉴욕의 빈민들을 자극했다. 특히 아일랜드계 빈민들을 중심으로 자극을 받았는데[2] 뉴욕의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해 폭도로 변했다.

3. 폭동의 시작에서 끝

뉴욕시의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폭도로 변하자 이들은 징병사무소와 우체국 등을 공격해 징병 대상자의 명단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한 뒤 뉴욕시 시가지로 몰려다녔다. 이후 이들이 맨해튼 동쪽 지역을 장악했는데 뉴욕 경찰과 민병대가 진압을 시도했지만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고 이 폭동을 일으킨 빈민들의 불만은 흑인에게까지 번져 흑인 거주 지역도 큰 피해를 입었다. 폭동의 원인에는 징병법뿐만 아니라 흑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흑인 때문에 전쟁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있었다.

결국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알게 된 미국 정부미합중국 해군 함대미합중국 육군 뉴욕 연대에 소속 병력을 동원했고 이들은 7월 16일에 함포소총사격을 동반해 폭동을 유혈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약 120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861년 개발되어 당시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던 최신무기였던 개틀링 기관총은 남북전쟁 중에는 제식화되지 않아 전장에서 공식적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3] 이 폭동 당시 뉴욕 타임즈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진압에 사용되었다.

4. 관련 문서



[1] 1863년 당시의 300달러는 2024년 기준으로 12000달러다.[2] 정작 폭도들을 진압한 군경도 상당수가 아일랜드계였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기피직이지만 수입과 시민권이 보장된 군대·경찰·소방으로 많이 흘러갔다.[3] 비공식적으로 북군의 벤저민 버틀러가 사비로 개틀링 기관총을 구매해 피터스버그 포위전 때 투입되었다는 추측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