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김호
1. 초기
1972년부터 실업팀 상업은행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선수 겸 지도자 생활을 걷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모교인 동래고등학교 감독을 시작으로 1983년에는 한일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7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윤성효를 지도하기도 하였다.2. 현대 호랑이 감독
1988년에는 조중연 감독의 후임으로 현대 호랑이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당시 현대 호랑이는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사건으로 팀 해체를 선언하였다가 실행에는 옮기지 않으며 비난만을 받는 상태였고,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해야하는 상황이였으며, 부임 첫해에 리그 준우승을 거두었다. 울산으로 연고지를 정착한 첫해인 1990년, 6개 팀 중 5위를 기록하며 성적부진의 책임을 물고 사임하였다.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허정무 다음으로 월드컵에서 호성적을 거둔 국내 감독[1]
1992년 7월에 사상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전임감독으로 정식계약을 맺으며 연봉 3천만원 및 추가 승리수당 및 여러 보너스 관련 계약을 했다. 그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들은 대회마다 돌아가면서 무보수로 일하던 명예직이었다. 이 때문에 교통비, 식사비나 보너스가 나오긴 했지만 연봉이나 계약서는 없었다. 그만큼 축구협회가 동네 구멍가게마냥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이야기.[2]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도하의 기적 끝에 힘겹게 진출한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댈러스, 휴스턴의 무더위와 용병술로 스페인과 2:2 무승부, 독일과 3:2로 접전 끝에 패하는 등 명 승부를 보여줬다. 국내 감독으론 허정무 감독 이전에 월드컵 본선에서 가장 선전했다고 평가 받았으며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 이전에는 제일 잘했던 감독으로 축구 팬들이 떠올리는 인물.
다만 이 무렵에는 스페인과 독일전은 잘 했는데 1승을 충분히 거둘 상대인 볼리비아에게 무득점 무재배를 기록하면서 16강진출에 실패한 점으로 까였다.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16강에 오르지 못해 죄송하다며 국대 감독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이 당시 대표팀의 상황이나 여건 등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의 성적도 엄청 잘했다는게 축구팬들의 평.
그리고 장점이 있다면 고졸 출신 감독인지라 선수 선발에 있어서 흔히 고질적인 문제인 고려대, 연세대 라인을 타지 않았다는 거다.
4. 수원 삼성 감독
영원한 수원 삼성의 아버지.[3][4]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으로 신생 팀 수원 삼성을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키려 한 명장.
월드컵이 끝난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으며 1999년 K리그 전관왕, 아시안클럽컵(현 AFC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기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K리그,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 슈퍼컵 등 K리그 대회를 모두 우승한 1999년의 수원은 K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자신이 직접 키운 김호의 아이들은 스쿼드가 후덜덜했었다.
당시 리그 대다수 팀이 3백 시스템을 채택했으나 수원에서 4백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조련한 부천 SK[5]와 벌인 시합들은 지금도 K리그 팬들이 꼽는 명승부다.
조광래 감독이 수석코치로서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나 불화를 겪고 1998년 안양 LG[6]의 감독으로 옮겼다. 오늘날 전설로 전해지는 지지대 더비에는 이런 두 감독의 감정 다툼도 깔려 있었다.[7] 김호 감독이 물러난 뒤 차기 수원 감독은 조광래 수석코치가 물려받기로 했는데 김호 감독이 이를 반대해 사이가 틀어졌다 카더라. 그러나 현재는 조광래가 국가대표 감독이 될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등 사이가 좋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수원 시절 김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1977년~1982년 사이에 태어난 고졸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한국 축구의 세대교체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은 후임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병역문제, 부상 등으로 지금은 국가대표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양민학살을 통한 일등지향노선 대신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그 폭넓은 시야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5. 대전 시티즌 감독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김호의 본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
이 시기만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명장이라고 추앙받고 있을지도 모른다[8].
5.1. 2007년
단기간에 팀을 추스르고 6강 PO에 진출하다.2003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서 물러나며 은퇴했으나 2007년 7월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며 현역으로 복귀했으며, 여론은 국가대표 감독과 수원 삼성 감독 등을 맡으며 큰 족적을 남긴 역대 감독 중 가장 네임벨류 있는 김호의 부임을 환영하는 분위기와, 대전 구단과 사이가 썩 좋지 못했던 수원 삼성 감독 출신인 김호의 부임을 달갑지 않게 보는 분위기 두 분류로 갈라져있었다.
당시 대전은 전임 최윤겸 감독은 이영익 수석코치와의 불화 끝에 같이 잘렸으며 수비도 잡지 못하여 10위에 쳐져있었다. 결국 5경기가 남았을 당시 전승을 해야 PO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비 안정감을 찾고 최윤겸이 구상했던 데닐손-슈바-브라질리아 공격 라인이 드디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또한 대전은 기존의 최윤겸이 감독이 쓰리백에서 무리하게 포백으로 바꿔서 수비가 빵꾸난 상태였는데 김호 부임 후 포백이 상당히 안정화되었으며, 이러한 김호의 능력을 앞세워 전승을 기록하며 막판뒤집기로 서울을 제치고 6강 PO에 진출하였다.
이 결과로 김호 감독은 엄청난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1월에 최윤겸이 데려와 몸 상태를 끌어올리길 기다리던 고종수도 김호가 온 후에야 몸 상태를 회복해 사제 간의 조우에만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다.[9]
하지만 이러한 성적도 최윤겸이 해 논 밥상에 김호는 단지 숫가락만 언저 논것이라는 의견 역시 적지 않게 있다. 물론 김호의 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007년 플레이오프 진출은 김호의 공이라기보다는 데닐손-슈바-브라질리아로 이어지는 외국인 선수 및 대전에서 오래 뛰어오면서 다져온 국내 선수들의 조직력을 다져온 최윤겸 감독의 공이 더 크나는게 일부 팬들의 평이다.
뭐가 어찌됬든 이때까지만해도 대전 구단의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5.2. 2008년~2009년
본격적으로 김호의 실체가 드러나다.이때부터 대전 시티즌의 암흑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8년부터 김호가 이끌던 대전은 본격적으로 쇠락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김호는 2008년부터 정말로 옛 제자들을 불러모으는 등 명성에 맞게 번외지명으로 어린 선수들을 잔뜩 뽑기도 하였으나, 시민 구단의 재정에 안 맞게 끌어모은 선수들은 거의 어리기만 했고 팀에 적응하지도 못했으며, 지나치게 많이 선수단이 변한 탓에 대전 시티즌이라는 팀은 기존의 대전 시티즌과는 다른 팀이 되어버리며 팀 정체성 역시 크기 훼손되었다. 또한 이때 영입한 선수들 대부분이 훗날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특히 이렇게 선수를 끌어모으려 시즌 중 방출자 명단을 숙소 벽에 공지하는 만행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은 바로 일본 전지훈련 공금 횡령한 사건인 에이전트 비리 사건과 이다. 이 사건으로 대전 서포터즈와 구단 측이 직원 한명을 일본으로 파견하는 등의 법적 공방 끝에 가까스로 무혐의 판결로 종결되긴 했지만,[10] 김호가 감독 재임시절 에이전트 K씨와 손잡고 구단을 장악해 구단을 운영하고 싶어해려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못하면서 팬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을 비롯해 김호와 구단의 갈등은 2008년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김호가 2007년 7월 대전 지휘봉을 잡았을 때 구단 사장은 언론인 출신에 스포츠단 운영경험이 없던 사장이였으며, 김호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구단 운영을 펼쳤기에 아무런 트러블 앖이 구단 운영에 자신의 뜻을 반영하였었다. 한화 이글스에서 근무한 경력을 비롯해 프로스포츠 전문 경영인 출신인 송규수 사장이 취임하면서 부터 김호의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제 속에 김호는 감독 통산 200승을 달성했을 뿐 역대급으로 가장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놓고선 2008시즌 리그에서 단 3승을 거두면 13위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2009년에도 시즌 초반 부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2009년 6월 구단과의 갈등에 못이겨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으며, 김호는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금지어로 전락했다.
김호와 관련된 이러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주로 디씨인사이드 국내 축구갤러리와 파투 커뮤니티 같은 하드코어 팬층이 모인 곳에서는 비리가 있다는 쪽이고, 그 외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소리라는 주장이다. 대전 시티즌이 워낙 하위권에 비인기팀이다보니까 대전 시티즌 팬이 아니라면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 모른 채 그저 김호를 아직도 과거 국가대표 감독을 했던 명장으로 알고만 있다.
이 문서에다 모두 적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새롭게 문서가 분리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호/비판 문서 참고.
6. 통영축구클럽 총감독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고향 통영시로 내려가 모교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 축구부가 속한 통영축구클럽의 총감독으로 활동하였다.7. 예원예술대학교 기술고문
2013년부터는 예원예술대학교의 기술고문직을 겸임하기 시작했는데, 과거 김호의 제자였던 예원예대 조현 감독이 처음에 김호에게 기술고문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을 때는 기술 고문이라는 자리는 쉽지 않을 뿐더러 우리나라에서는 정착이 안된 문화라며 거절했지만, 조 감독은 물러서지 않고 삼고초려의 자세로 다가갔으며, 운전기사를 자처해 김호을 동계 훈련장까지 모시고, 술자리에서 아들 한 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등의 노력 끝게 가까스로 기술고문으로 합류했다고 한다.
이후 통영과 서울을 오가며 조현 감독에게 비법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므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2015년 성균관대와의 U리그에서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하프타임 때 잠시 예원예대 벤치에 들러 선수들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했었다.#
8. 용인시축구센터 총감독
2015년 6월부터 용인시 축구센터의 유소년 축구부 총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김호의 출장이 잦자 용인시의회 박남숙 의원은 김호에 대한 2개월간의 출장복명서 제출을 시 체육진흥과에 요구했고, 체육진흥과는 이를 축구센터에 알렸는데, 문제는 출장을 다녀온 뒤 직접 작성해야 하는 출장복명서가 대리 작성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면서 불성실한 근무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으며, 이외에도 고등부 이기범 감독의 아들을 비롯한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선수를 영입을 감행하며, 우수선수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정당성과 투명성을 훼손했으며, 그밖에도 상당히 미흡한 일처리 능력을 보이며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고, 2016년 용인시의회 박남숙 의원이 제211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김호가 총감독으로서 고3 선수들의 진학 상황을 점검하고 부족한 것은 고등학교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전반적 관리를 해야 함에도 지금껏 한 번도 학부모들과 진학상담도 해 본적이 없으며, 그로 인해 학부모들은 쌓이고 쌓인 불만이 상당한 상태이기에, 김호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신갈고등학교 감독인 이기범 감독과 함께 퇴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일었다.
박남숙 의원의 말에 대해서 한쪽에서는 축구 전문가가 아닌 자칫 축알못 정치인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한 말이기에 절대적으로 신뢰하긴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공직에 있는 사람이 공적인 자리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 하고 하는 얘기이고, 어찌됬든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돌아다니는 소문이나 루머, 댓글이 판치는 와중에 대중들이 그나마 신뢰할만한 발언이라는 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9. 기록
10. 수원 삼성
- K리그 우승 2회 : 1998, 1999
- K리그 준우승 1회 : 1996
- 리그컵 우승 4회 : 1999[11], 1999[12], 2000, 2001
- 슈퍼컵 우승 2회 : 1999, 2000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 2000-2001, 2001-2002
11. 주요 개인 수상
- K리그 감독상 : 1998, 1999
11.1. 표로 보기
올해의 감독상 | ||||
1997년 | → | 1998년, 1999년 | → | 2000년 |
이차만 (부산 대우 로얄즈) | → | 김 호 (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조광래 (안양 LG 치타스) |
[1] 거스 히딩크 이전까지 월드컵에서 가장 호성적을 거둔 감독이기도 하다.[2] 그리고 이런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한게 정몽준이다.[3] 실제로 수원 서포터즈중 사적으로 김호 감독을 알고지내는 사람들도 김호감독과 같이 얘기할때 아버지라고 부른다.[4] 하지만 최근들어 김호의 추악한 실체가 밝혀지면서 수원 삼성 팬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이러한 칭호를 이제는 버려야 할 때라는 여론 역시 조성되고 있다.[5]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제주 유나이티드.[6]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FC 서울.[7]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바로 1999년 서정원의 수원 삼성으로의 전격복귀였다.[8] 하지만 대전 시티즌이라는 팀 자체가 워낙에 하위권 팀이고 해서 김호의 대전 감독 시절의 만행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이며, 그로 인해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김호를 명장으로 추앙했다.[9] 김호가 부임한 후 몸상태를 회복한게 어디까지나 우연이지 김호의 능력 덕에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10] 이 사실이 팬들에게 제대로 알려진 것은 2017년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서다.[11] 아디다스컵[12] 대한화재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