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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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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인이 되기 전2. 정계 입문3. 여당 시절4. 다시 야당으로5. 폐암 투병6. 정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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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인이 되기 전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당수를 지낸 혁신계[1] 정치인 김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부친의 옥바라지, 야당 탄압 등을 온몸으로 받아냈지만, 세 아들이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길 바랐지만, 바람처럼 되지는 않았다.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나 7세까지 일본에서 다녔다. 유치원 친구들이 '조센징'이라며 김한길을 심하게 구박하자 골목길에서 싸움이 붙었고, 더 이상 동네에서 살수 없게 되면서 한국으로 건너와 친척집에 살았다고 한다. 덕수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는 수업 시간에 사전을 펼치고 한글 단어를 찾으며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선친 김철은 원래 이범석 전 총리의 비서를 지냈고, 이승만 대통령 중심의 자유당 창당에 핵심적 역할을 한 족청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범석이 이승만 정권에서 숙청되자 김철도 한국을 떠나 다시 일본으로 갔고, 재일거류민단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교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했다. 이때 김철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민주사회주의또는 사회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되어 당시 일본의 여러 진보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진보정당 창당의 꿈을 꿨다. 김철은 1960년 5.16 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6년간 망명을 떠나 헤어져 살았다. 선친은 귀국 후에도 진보 정치인의 딱지가 붙여져 온갖 고초를 당했고, 대선 때마다 김대중을 전략적으로 공개 지지하는 바람에 가족들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한길은 정치적 험로를 걷는 아버지의 평화 통일, 인권,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같은 구호가 어린 마음에 별로 와닿지 않았고, 자주 반항했다고 고백했다.

바람잘날 없는 가정환경에서 입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겨우 턱걸이로 입학한 뒤 정치외교학과로 전과해 늦게 졸업했다. 서울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군생활 중 수필처럼 썼던 '병정일기'가 국군보안사령부의 문제작으로 취급되어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한국일보 기자로 일했고, 중앙일보 미주지사장까지 지낸다. 기자가 되기 전까지 막노동과 햄버거 쿡헬퍼, 주유소 아르바이트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미주한국일보 당시에는 사회부에 소속돼 사건 취재를 많이 했다.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문제를 직접 발굴해 보도하기도 했다. 어려웠던 이민 생활을 '미국일기'[2]라는 책으로 써내기도 했다.

1986년 미국에서 귀국해 소설가, 기자, 방송인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1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지 못 한 한풀이를 하듯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총 3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3] 해당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1993년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때 쯤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를 작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작곡 작사를 모두 조영남으로 협회에 등록하는 바람에 저작권료는 한 푼도 받지 못 했다. 그러나 조영남이 김한길 작사라고 본인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4]

2. 정계 입문

1991년 꼬마 민주당에서 서울 동작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 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 야당 민주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해당지역 현역 의원이었던 박실 의원에게 밀려 공천받지 못했고, 정주영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겨 출마를 강행했으나 21.81%의 득표율에 그치며 3위[5]로 낙선했다.

1993년 MBC <김한길과 사람들>이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를 맡으면서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6] 1995년 당대의 톱스타 최명길과 결혼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부터 비례대표를 제안받는다.[7][8] 김대중 총재는 1971년 대선 때 김철이 단일화를 선언하며 혁신, 진보계 표를 몰아줬던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모친과 아내가 손사래를 쳤다. 특히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처럼 야당 정치인이 된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결국은 두 사람을 설득해 김대중 총재와 손잡고 전국구 6번으로 공천을 받아 그대로 당선됐다.

3. 여당 시절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TV 방송과 홍보 분야를 담당해 승리에 기여했다.[9] 이후 1999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전국구 의원을 사퇴한다. 최명길과 사이에서 첫 득남을 하는 경사도 있었다.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다섯 달만에 사퇴하고, 9월 박지원의 뒤를 이어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다. 이어 둘째 득남을 하는 겹경사가 있었다. 다만 이 해에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 선거용 여론조사 비용으로 쓰인 것이 확인되어 합법적인 정치자금으로 인정받았다. 문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KBO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갈등을 중재했고, 2001년 3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문화상 강능수와 회담한 적이 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꼬마민주당 출신 한나라당 이승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당시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해 한나라당 이승철과 리턴매치에서 설욕해 당선되었다. 17대 국회 전반기 건설교통위원장직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후 당 내에서 주승용, 강봉균 등의 의원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김한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2006년 1월 정세균 원내대표의 산업자원부장관 입각으로 치러진 원내대표 선거에서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3선 중진인 배기선 의원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원내대표 취임시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와 동행한 산행에서 이재오로부터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한나라당과의 교착 상태에서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봉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여야 원내대표였던 김한길, 이재오를 청와대로 불러 관련 여당의 양보를 권유했으나, 김한길 원내대표는 당의 반발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노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의원과 당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 이해찬은 사학법을 양보해준 건 김한길이라는 등 사실과 정반대의 공세를 펼쳤다. 김한길은 이는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항변하였다.[10]

통일부 장관 직을 사임하고 돌아온 정동영 당 의장과 함께 참여정부의 2006년 지방선거를 주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김근태 최고위원이 비상대책위원장에 선출되자 호흡을 맞췄으나 둘의 성향이 많이 이질적이었기에 김한길계였던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김근태 비대위원장을 두고 친북좌파 운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4. 다시 야당으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매우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친노패권이 계속되는 한 민주진영의 재집권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다시 민주당과 합쳐 '중도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가 되었지만 모종의 문제가 생기자 중도개혁통합신당계를 이끌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시 민주당이 떨어져 나간 것이 여러모로 대선에서 발목을 잡히는 계기가 된다.

결국 17대 대선에서 정동영 대선후보가 압도적으로 패배하자 2008년 1월 6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54616|"이후 야인 생활을 4년간 했고, 지역구는 비례대표 의원이었던 박영선이 이어받는다.

4년 뒤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광진구 갑 지역으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그 직후 민주통합당 2대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지역별 대의원 선거에서는 이겼으나(17개 광역시도별 투표 중에서 15개 광역단위에서 승리) 모바일 투표 및 현장 투표에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이해찬 의원은 모바일 투표(1637표차)로 김한길에게 승리했다. 다만 집단지도체제였기에 수석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안철수 세력과의 단일화 등을 놓고 갈등이 생겼고 김한길은 수석최고위원직에 사퇴하면서 지도부 총 사퇴를 주장했다. 결국 2주가 지난 2012년 11월 18일에 이해찬 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고 문재인 대선후보가 비대위원장까지 겸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후 민주통합당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문희상 비대위원장 체제를 거쳐 2013년 5월 4일 당대표 경선에서 김한길 전 최고위원이 친노계 이용섭 의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당명을 민주당으로, 당의 상징 색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11]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새정치연합의 분열이 예견되던 상황에서 안철수와 '제3지대에서 통합 신당을 창당한다'는 의견에 합의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킨 뒤 안철수와 공동대표에 취임했다.[12]

이 사건이 김한길이 주도적으로 정개 개편에 뛰어든 여러 사건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후일의 20대 총선과 같은 3자 구도가 가시화 되던 상황에서 깜짝 합당을 선언한 셈이라 정국은 급변했다. 밖으로는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이, 안으로는 친노 주류의 주도권 확보가 흔들린 셈이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던 셈인데, 일단 선거가 급했던 만큼 문재인 전 후보 등의 추인을 받아 순조롭게 합당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합당의 명분이었던 기초공천 무공천에서 '회군'해야했고[13], 세월호 대참사 정국에서 열린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 전략공천 문제[14]로 호남의 상당한 비토를 받아야 했다. 결국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였는데도, 광역단체장에서만 가까스로 9:8로 이기고, 기초단체장에서는 새누리 117: 새정치 80으로 패배하여 사실상 무승부를 결과로 받아들었다.

그러나 잠시 안정된 입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보궐선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뜨거웠던 정국에서 치러진 이 선거는, 선거 전략의 부재와 잘못된 전략공천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누리당에 11:4로 완패하는 것으로 끝났다. 특히 비리로 구속된데다가 자기 지역 예산을 스스로 깎어서 평이 나빴던 서갑원을 원 지역구인 순천-곡성에 그대로 공천시켰다가, 새누리당 이정현을 당선시켰다.

결국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김한길 대표는 안철수 공동대표는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안철수 대표도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지방선거 및 7.30 재보선 항목이나 안철수/정치 경력 항목을 참조.

7.30 재보선 참패 이후 한동안 뉴스에 오르지 않다가, 성완종 리스트 사건 당시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가는 바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검찰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 다루었고, 여야 인사 모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았던 성 회장이 자살하기 전 날 제1야당 대표이기도 했던 김한길 의원을 냉면집에서 불러내 만날 만큼 서로 친한 사이었으니 당연히 검은 돈도 오갔을 거라 본 듯하다. 그러나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정권 실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야권의 대표적 인사에 대해서는 의혹 수준에 머무른 이야기를 통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려 한 것은 야권 탄압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립서비스 발언'에 대해 립서비스는 박 대통령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2015년 문재인 대표가 취임한 후 친문, 친노계와 갈등을 겪은 끝에 2016년 1월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기자회견문 질의응답


기자회견 전문 동영상. YTN.



1월 7일 안철수 의원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2월 2일 국민의당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3월 11일, 민주당의 새로운 수장이 된 김종인 대표가 새누리당에 맞서서 현 야권이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여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한 갈등을 겪고 급기야는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강수를 뒀다.[15]

3월 15일 안철수 상임대표가 더불어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을 경우 탈당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이어 3월 17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6년 8월 24일, 김한길 전 의원의 형인 김밝힘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철수 의원이 빈소를 방문해 김한길 전 의원과 오랜만에 대면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많이 어색했었다고 전해진다. 민감한 정치 이야기는 삼가고 그냥 짧게 근황 이야기와 건강 관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를 겨냥하며 패권주의를 비판하였다.

19대 대선 정국 막바지에 안철수 후보의 지원 유세에 합류했다. 대선 후 2017년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후보로 나설 것이 예상되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5. 폐암 투병

2018년 10월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동안 폐암[16] 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배를 하루에 서너갑씩 태우는 골초였다고. 다행히 항암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시점에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에 합류한 것처럼 보이나, 정작 본인은 폐암 투병으로 인해 당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2019년 11월 25일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에 부인 최명길과 함께 출연하였다.# 폐 한 쪽을 절제해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컸다는 사실과 수술 당시 2주 간 의식 불명 상태였음을 고백했다. 치료도 잘 되고 운신도 할 수 있게 된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입원 기간 동안 간병인 침대에서 간호했음은 물론, 퇴원 후에도 아내 덕분에 투병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6. 정계 복귀

2021년 3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총장직에서 사퇴하기 전 김한길, 정대철 등 옛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과 만나 조언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물밑에서 윤석열 전 총장의 정계 진출을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다.# 조수진은 아예 윤석열이 정동영, 김한길 등과 접촉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17]

2021. 11. 21. 윤석열 캠프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복귀하는 일성으로. # 중원을 향해 몽골 기병처럼 진격하겠다는 포부[18]를 밝히며 중도,합리적 진보가 함께할 플랫폼으로 정권교체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22년 3월 9일 열린 대선에서 승리하고 당선되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대광초등학교 졸업생인 윤석열 대통령이 대광중학교 졸업생인 김한길 위원장을 동문처럼 가깝게 여기며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인수위원장으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임명되면서 과거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끌었던 두 대표가 인수위에서 또 만나게 됐다.#

2022년 6월 16일,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민통합위원회는 과거 MB 정부 시절 사회통합위원회, 박근혜 정부 시절 국민대통합위원회보다 더 자주 회의를 개최했다.

특히, 2023년 10월 국민통합위 1주년 보고회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당4역과 중진들이 직접 참석하였다. 이런 행보로 보아, 2024년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 적도 있었다.



[1] 1970년대까지 진보는 지금의 발전의 뉘앙스로 통했고, 진보 세력은 보통 혁신계라고 불렀다.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의 공약에 보면 "반공계 혁신 야당 허용"이 들어있다.[2] 개정판의 제목인 '눈뜨면 없어라'가 더 유명하다.[3] 대통령의 외동딸 김은영과 방송국 구성 작가인 강찬우의 사랑 이야기인데,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자신을 이입해 쓴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4] 화개장터 노래비에는 조영남 측의 동의를 구하여 2022. 4월 김한길 작사, 조영남 작곡 노래로 위 노래비를 정정하였다.[5] 당시 당선자인 민주당 박실민주자유당 유용태 그리고 본인이 나와 총 후보가 3명이었는데 꼴찌(3위)로 낙선하였다.[6] 당시에 현직 검사 신분이였던 홍준표 대구광역시장이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출연했다.[7] 당시 신문에는 신한국당(지금의 국민의힘)에 성남시 분당구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다고 보도되기도 했으나, 본인은 부인하고 있다.[8] 여담으로 김한길 말고도 신한국당 소속으로 분당지역 공천신청했다가 취소한 사람은 한 때 본인이 더불어민주당 탈당하기 전까지 같은당에 몸담았던 최재성문재인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이다.[9] 김한길과 이종찬(전 국정원장), 김원길(전 국회의원)은 DJ의 대선승리 3인방으로 불린다.[10] 하지만 김한길도 '이해찬과의 연대는 나쁜 연대'이고 '김한길과의 연대는 착한 연대이다.' 식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11] 본인은 불과 3년 뒤 탈당해버렸지만, 정당색을 파란색으로 바꾼 이 결정은 2024년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민주당계 정당=파란색 의 이미지가 이미 고착화된 상황이라 다시 바뀔 가능성은 매우 낮다. 김한길이 남긴 꽤 큰 영향이다.[12] 당시 창당이 워낙 극비리에 진행 된지라 기자회견에 모인 기자들조차도 '단일화나 하겠거니...' 했었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당시 영상에는 현장의 탄성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13] 사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도 똑같은 소리를 하다가 민주당의 행보를 보고 얼씨구나를 외치면서 철회하고 만다.[14] 현직 시장인 강운태와 현역 국회의원인 이용섭도 아닌 시민사회 출신의 윤장현 박사가 공천을 받은 사건.[15] 당시 김한길 선대위장, 천정배 공동대표가 김종인과 친분이 두터운 무소속 최재천 의원과 회동이 포착되었다. 당시 최재천 의원은 호남계 의원들의 구애에도 불구 국민의당에 입당하지 않고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14년과 마찬가지로 야권 분열은 참패라는 시각에서 일종의 매개체 역을 자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삼당 구도에서도 양당 모두 선전하면서, 중도 야권통합파을 견지했던 김한길계는 2022년 대선 정국 전까지 활동이 급감했다.[16] 폐암 4기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고.[17] 그러나 정동영은 고발뉴스와 전화연결에서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다만 이후 이재명 지지를 선언하고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것을 봐선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위해 윤석열과 거리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정동영의 대선 출마를 지근거리에서 도왔던 이가 이재명이고, 정동영 본인 또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18] 공교롭게도 몽골기병은 2007년 17대 대선 당시 정동영의 전략 상징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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