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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6:31:38

김응용/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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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구 내적
1.1. 용장으로 보이는 지장1.2. 야구 지도 스타일1.3. 좋아하는 선수유형1.4. 노력하는 유망주, 무명 선수들을 향한 애정
2. 야구 외적
2.1. 세력 싸움 균형의 조율사
2.1.1. 나는 그룹 회장과 직접 이야기한다
2.2. 감독을 키우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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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구 내적

1.1. 용장으로 보이는 지장

특유의 카리스마와 선수장악 능력, 거구와 상당한 완력, 승부사적인 모습으로 인해 대중적으론 용장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잦았으나 함께 몸 담아 생활했던 선수와 프런트 직원들에겐 지장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괄괄해보이는 외관과 구타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소심하고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는 조심성이 많은 스타일에 가깝다. 구설수에 올랐던 발언들도 과거 기준으론 농담격이거나 그리 강하지 않은 발언인 경우들이 많고, 선수 기용의 공정성에 있어 오해받지 않기 위해 선수들은 물론 선수들과 관련된 지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 사생활을 하였다.

심판 상대로 많은 항의를 했던 감독으로 꼽히기에 용장으로 비춰지기도 했으나 이 역시 빠른 상황파악 후 '항의의 상황이 더 유리하기에 시행'한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는 관련자들의 발언이 많다.

1.2. 야구 지도 스타일

많은 훈련량을 자랑했던 당대의 훈련 방법, 특히 감독이 직접 미친듯한 훈련을 시키는 김성근과는 정반대의 지도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 자율 야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본 훈련 2~3시간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알아서 훈련하라고 선수들을 풀어놓고는 농땡이치는 놈이 있나 뒤에서 감시만 했다.[1] 단, 훈련 도중 군기가 빠지거나 해서 훈련의 강도가 적어지거나, 결과물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상당히 무섭게 갈궜다고 한다. 즉, 훈련은 선수가 알아서 하되, 감독은 '매니저'답게 관리 위주의 운영을 한다는 것이다.[2] 도루 사인 등도 일절 내지 않고 전적으로 이종범, 김일권 등 발 빠른 선수들에게 그린 라이트를 줘서 맘대로 뛰게 했으며, 번트와 강공의 선택 역시 선수한테 일임했다.

다만 선택권을 선수에게 주었을 뿐, 만약 번트나 도루에 실패하면 매서운 질책이 이어졌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건열이 술회하기를 대타로 출전한 이건열이 대구 원정에서 안타로 출루 후 3루 도루를 시도하여 아웃당하고[3] 하필 다음타자였던 이순철이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쳤으며 선동열을 내고도 아쉽게 졌다고 한다.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건열을 세워두고 '왜 뛰었어? 왜 뛰었냐? 오랜만에 대타 나가서 안타 치니까 흥분했냐?'하면서 질책했다고 한다.

포수 사인 역시 내지 않고 전적으로 포수한테 볼배합을 시켰으나, 배합이 조금이라도 엉성하다 싶으면 이닝 끝난 뒤 포수 타석에 말없이 대타를 내거나, 곧바로 포수에게 원산폭격을 시키거나 갈굼을 시전했다. 해태 시절엔 장채근이 초년시절에 포수 리드를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곧바로 장채근 타석 때 대타를 써서 빼버리기도 했고[4], 최해식을 계속 갈구던 것이 대표적.[5] 그외에 장성호를 대전 한복판에서 뛰어오라고 시켰던 일이나 삼성 시절에 현재윤의 머리박아 사건 또한 유명하다.[6]

선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게 '알아서 해라'라고 감독이 손 놓고 보고만 있다가 잘 안된다 싶으면 곧바로 무지막지한 갈굼과 동시에 자기 앞에서 시계를 집어던지고, 쓰레기통 걷어차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위협 공세를 하니 살아남으려면 죽기살기로 알아서 해야하는 상황이었다.[7]

선수 조련에 있어서도 2군은 2군 감독이 전담, 타격은 타격코치, 투수는 투수코치에게 전부 일임하고, 작전에 대한 전권은 수석코치에게 주었다. 해태 초기엔 김인식, 후기 - 삼성 시절엔 유남호, 한화 시절엔 김성한 - 김종모가 작전을 냈다. 직접적인 선수 지도는 하지 않고 부상 선수 관리나 1, 2군 콜업 등만 신경쓰는 매니저형 감독이다.[8] 팀 닥터고 뭐고 없었던 1980년대 초 프로야구에서는 직접 뼈가 빠진 선수들 뼈를 끼워 맞춰주고 쥐가 난 선수 다리를 풀어줬으며 찢어지거나 벌어진 상처가 난 선수들에게도 직접 약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했다고 승승장구에서 밝혔다.

해태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위에 서술한 머리박아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폭력성은 많이 사라졌다고 양준혁이 밝힌 바 있다. 그냥 못하는 선수는 쭉 감시하다가 부진이 지속될 경우 2군으로 가차 없이 보내버렸다고 한다.

1.3. 좋아하는 선수유형

김응용은 라이벌인 김성근과 달리 KBO 리그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빅볼 성향 감독이다.[9] 현역 시절에 슬러거였기 때문인지 젊고 체격 좋고 힘 좋은 타자를 굉장히 선호한다. 몸을 키우라고 선수들에게 육식권장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같은 집에서 살면서 밥을 해먹인 강영식인터뷰에서 '고급 [10]양상추 1통, 양파 1개, 우유 1L에 식빵계란이 아침 식사였다. 저녁에도 고기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김응용이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 이종범 편에 나와 자기처럼 덩치가 좋은 선수들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고 오히려 타율출루율이 높은 선수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11] 앞선 인터뷰에서 이종범이 '김응용 감독님은 항상 덩치가 큰 선수를 좋아하거든요'라고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같은 구단에서 함께 지낸 선수들도 김응용이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좋아한다고 느낀 듯 하다.

또한 왼손잡이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덩치 큰 왼손잡이라면 타자건 투수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며, 그 덕분에 장신의 좌완투수 강영식은 해태 시절부터 아예 직접 거둬서 손수 햄까지 구워줘가면서 밥을 해먹일 정도였다.[12] 참고로 해태 원년에는 좌타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김응용이 부임한 1983년에는 송일섭, 김일환 딱 두 명이었으니.[13][14] 김응용이 해태에 있을 적에 제대로 활약한 왼손 투수 역시 김정수신동수 정도 뿐이다. 한화에 온 계기도 류현진이 한화에 있어서라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였지만 정작 류현진은 포스팅으로 메이저리그로 건너가버리자 와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장성호를 보내고 송창현을 데려왔고, 직접 미국에 가서 좌완 대나 이브랜드를 데려왔다.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은퇴를 불사하겠다며 해태행을 거부한 양준혁을 팀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지중지 달래며 1년 후에는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지켰다.[15] 이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위에 써있듯이 해태 시절부터 본인이 애지중지해온 강영식을 신동주를 내주면서까지 삼성으로 데리고 왔으며, 구단 프런트를 설득해 양준혁을 도로 삼성에 돌아오게 했다. 전성기의 해태에서 왼손잡이 선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더 왼손에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해태 시절에도 기회만 되면 왼손 선수들을 데려왔으나 정작 제대로 활약한 선수가 적다. 또 좌타 거포 김기태를 데려오기 위해서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엄청난 제안'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기에 제안의 내용은 불명이다.

결국 해태 말기에 임창용이 팔려갈 때 양준혁을 얻어내며 한을 풀었다. 그 덕에 양준혁, 장성호, 용병이였던 트레이시 샌더스를 포함해서 라인업의 반 이상이 좌타자로 도배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재밌는건 삼성으로 와서 덩치 큰 좌완의 한을 완전히 풀고 오히려 도배했다. 기존의 이승엽, 강동우를 위시로 삼성 감독 부임 직후인 2001년 대졸 신인 박한이를 곧바로 1번타자 중견수로 파격 기용한 걸 시작해서, 선수협 관련으로 인해 모든 구단에게 찍혀 FA 미아가 될 뻔한 양준혁을 재영입, 그리고 사장 시절에 최형우 재영입 지시, 채태인 직접 영입, 고문 시절에 구자욱을 지켜보며 삼성 스카우트진에 구자욱을 뽑으라고 권유하는 등 지금의 삼성의 최강 좌타라인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편 원로답게 출루율보다 타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16] 그래서 높은 출루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타율의 타자에 대해선 평가가 짜다. 대표적인 타자가 박한이[17]장성호다.

1.4. 노력하는 유망주, 무명 선수들을 향한 애정

김응용 감독을 거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고마워 하는 부분. 해태 감독 시절부터 노력하는 무명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흑역사로 회자되는 한화 시절에도 비활동 기간에 훈련을 원하는 어린 선수들을 위해 사비로 수천만원을 써가며 지원을 했다. 고액 연봉자와 달리 무명 선수들은 비용 문제로 비활동 기간에 개인 훈련을 하기가 어려운데, 그런 선수들의 사정을 알고 아낌없이 사비를 털었다. 이때 지원을 받고 기량이 급성장한 선수가 바로 이태양이었다. 또한 이태양이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2015 시즌을 홀랑 날려버리게 되자 몇몇 악성 팬덤들이 킬끼리의 혹사라고 말하면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했는데 실제로 이태양은 철저하게 투구 수나 등판 일정을 관리 받았다는 것이 인증되자 금세 여론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유망주나 신인들을 확실하게 밀어주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화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삼성 시절에도 채태인, 조동찬 등에게 용돈을 주는 등 사비를 들여 키웠다. 또한 해태 시절에도 강영식유망주, 무명 선수들에게 고기를 사주며 영양을 보충시켜 주는 등 노력하는 선수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했고 이는 이종범의 무릎팍 도사편에서 잘 나타나있다.

또한 용인에 사비를 털어 사회인/리틀야구장을 건립, 유소년 야구를 지원하는 것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김응용 감독의 업적 중 하나로 한화 감독시절에 받은 연봉 및 계약금 중 일부는 앞서 말한 2군 선수들 육성에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전부 용인에 야구장을 짓는데 투자했다고 하며 현재는 양준혁이랑 같이 하고 있다.

2. 야구 외적

2.1. 세력 싸움 균형의 조율사

김응용의 가장 큰 장점은 대인관계 능력인데, 프런트와도 사이가 매우 원만한 편에 속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임하는 팀마다 뒤끝이 안 좋은 김성근이나 백인천과는 정 반대. 어떤 야구팬들은 이를 김응용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프런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프런트와 원수지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방향대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능력이다. 실제로 많은 감독들이 프런트와의 불화나 프런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팀을 말아먹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룹의 지원이 너무 없어서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해태 프런트와도 말년을 제외하면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응용 본인도 의리를 지켜 해태가 막장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 중반, 자신을 거액으로 스카웃 하려고 했던 다른 팀의 파격적 오퍼를 거절하여 사실상 손해를 보면서도 해태에 남았다. 저 '다른 팀'이 LG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박동희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롯데였다고 한다[18]. 해태의 구단주였던 박건배 그룹 회장과도 사이가 좋아서 박 회장이 매번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김응용에게 기념품을 사다 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삼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역대 감독을 쥐고 흔들기로 악명 높았던 삼성 프런트조차 '김 감독 같은 분이 오시면 프런트가 정말 편하죠.'라고 김응용의 프런트 친화성을 호평했다. 김응용 감독이 현명관 구단주 대행과 직접 담판을 지어 야구단에 삼성그룹 고위층들이 간섭을 못 하게 했다. 감독 임기 이후 삼성 사장으로 선임되는 데도 이런 높으신 분들과 친화적인 인품이 큰 작용을 했다. 해태 못지 않은 막장인 한화 프런트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김응용을 낙점한 것 같다.

이런 점은 KBSA 회장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내부 부회장을 포함한 임원들에게 끌려다닌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공약을 내세울 때는 몰랐는데 회장이 되어보니까 공약을 이행하기 힘들 정도로 협회가 막장이었으니 정상을 참작할 만하다는 게 중론이긴 하나, 어쨌든 회장으로서 공략을 이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임원들과의 사이만 좋은 철밥통'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2.1.1. 나는 그룹 회장과 직접 이야기한다

김응용이 야구 외적으로 프런트와 외적으로 조율을 한다고 했을때 또 한 가지 재미난 것이 있는 게, 김응용은 야구팀 단장, 사장과 이야기를 안 하고 그룹 내 수뇌부와 다이렉트로 이야기한다.라는 엄청난 권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 프로야구 구단 감독을 한 해태 타이거즈 감독을 하던 시절부터였는데, 김응용의 말로는 1982년 해태 원년 감독인 김동엽이 불미스러운 일[19]로 사임한 다음 해태그룹의 박건배 회장이 직접 전화해서 감독을 맡아달라.라는 이후로 김응용은 구단 단장이나 사장의 직접 체계를 무시하고 바로 구단주인 그룹 회장들에게 연락하는 방식을 즐겼다. 해태가 우승 이후로 프리미엄이 짜서[20], 이후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 겸 구단주와 독대를 하면서 삼성은 쓸데없는 보너스로 돈이 너무 많고, 감놔라 배놔라 하는 윗선이 많아서 우승을 못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해태 시절의 이야기를 삼성 수뇌부에게 말하면서 구단의 프런트나 임원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넣어라, 왜 이 선수 뺐냐? 등으로 간섭을 하는 걸 막아달라고 요청할 정도의 강심장이었다.[21] 이런 패기를 보인 모습에 이건희 회장은 매우 흡족해하며 구단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실패했지만 한화 이글스 시절에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인 김동관 당시 상무에게 독대하면서 외압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식으로 김응용은 프런트가 아예 간섭을 못하게 윗선의 수뇌부에게 요청해서 불필요한 외압을 막았다. 김성근이 외골수적인 성격으로 프런트와는 불화가 있지만, 그룹 회장하고는 친했다고 하는데[22], 정작 김응용은 그런 이야기를 안 하고 역으로 재벌 그룹 사람들이 김응용을 회상하면서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아예 구설수 없이 조용히 처리한 것 같다.

2.2. 감독을 키우는 감독?

해태 타이거즈 원년부터 활약해왔던 김성한은 1995년 은퇴 이후 해태에서 계속 김응용 감독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응용의 후임자로 성장. 해태 말년 김응용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 감독직을 이어받았고, KIA 타이거즈로 간판이 바뀐 후 뛰어난 성적을 냈다. 우승을 못 했을 뿐이지 초보감독이 승률 6할을 2년 연속으로 찍은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그 김응용도 2년 연속 6할 승률은 달성하지 못했다.[23] 또한 김종모는 감독만 못 했을 뿐이지 해태와 삼성과 KIA를 오가며 수석코치 역할로 우승 1번(2009년 KIA), 타격코치로 우승 3번(1993년, 1996년, 1997년 해태 2002년 삼성)을 했다.

선동열의 경우 은퇴 이후엔 KBO 홍보대사 등의 명예직을 전전하다 2003년 주니치 연수를 거쳐,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합류 이후 단 1년 만에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어 삼성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으며, 선동열의 후임 류중일 감독 역시 2000년 은퇴 이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에 오자마자 코치를 시작해 우승을 맛보고 2011년 감독으로 부임한 후 정규 시즌, 한국시리즈, 아시아 시리즈 3관왕을 일궈냈으며, 류중일의 후임 김한수 역시 김응용이 부임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3루수 골든글러브를 받고 이후 은퇴한 뒤에도 김응용이 사장으로 있던 시절 코치연수까지 다녀와 코치를 하게 되었다. 양일환 투수코치 역시 2001년 김응용 감독 부임 이후 삼성에 합류하자마자[24] 코치로서 우승을 맛봤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수시절 김응용 감독 밑에 있다가 말년에 쫓겨나듯 타 팀으로 이적해서 코치 수업을 받지 못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폭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순철한대화, 조계현 등이 그 예다.[25]

성공 사례의 공통점을 본다면 은퇴하고 갓 합류하거나 연수만 막 끝낸 풋내기 코치들이 첫 감독으로 김응용을 모시게 되면 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그 팀에서 떠나도 후계자들을 통해 강팀의 면모를 최소한 2~3년은 계속 이어가게 한다는 점은 구단에게도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런 성공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지도 스타일, 리더십과도 연관이 있는데 바로 코치진한테 적극적으로 권한을 위임한다는데 있다.
최해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밝힌 바에 따르면 김응용은 본인 역시도 홈런타자 출신이지만 본인이 절대 타자에게 손을 댄 적이 없으며 철저히 타격 코치에게 지도에 대한 권한을 위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야구 지도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배워야할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코치들이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코치 시절 류중일의 사례에서도 나오듯 류중일이 적극적으로 어필하자 류중일의 방식을 존중한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이는 기업의 리더십 등에서도 상당히 중시되는 내용인데 실제로도 많은 리더들이 실무자-리더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리더가 본인의 실무자 시절 패러다임을 리더 때 까지 끌고가면서 변화에 뒤쳐지는 것인데 한화 코치 시절 이상군처럼 제구력만을 중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응용 감독의 연배를 봤을 때 리더십 교육 등을 받았을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하며 야구 생활을 하며 터득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2012년 한화 이글스에서도 이제 막 은퇴하자마자 김응용의 부름을 받고 한화로 온 풋내기 코치들로 이종범, 이대진이 합류했다. 하지만 이종범과 이대진은 2년동안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고[26] 2014 시즌 후 김응용의 퇴진과 함께 모두 코치 자리를 떠났다. 미래의 감독감인 김종모[27], 김성한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28] 현장 복귀가 힘들어 보인다. 다만 이들은 프리미어 12의 감독이 될 가능성이 남아 있고 그래도 커리어에 비해 나이가 젊다는 점이 있으니 아직 기대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자신의 수제자KIA 타이거즈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3년간 기록하고도 재계약을 얻어냈으나 친정팀 팬들의 분노를 접하고 알아서 물러나면서 이런 평가도 금이 갔다.[29]

그래도 2020년에는 김응용 감독 밑에 있었던 이강철 감독이 kt wiz를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고, 급기야 다음 해인 2021년에는 KT의 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과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면서 성공 사례로 남게 되었다.

[1] 해태는 선후배 간에 군기가 강해서 저절로 훈련 분위기가 잡혔고, 삼성은 메이저리그식 훈련 시스템을 받아들여 체계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따로 간섭하지 않은 것.[2] 공부로 치자면 김성근은 계획까지 전부 다 엄청나게 빡세게 세워준 뒤 함께 앉아서 직접 공부를 시키고 매 순간마다 공부가 잘 되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스타일이라면, 김응용은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 뒤 계획을 학생이 세우도록 한 뒤 알아서 계획을 실행하게 하고, 그 계획에 하자가 있는지 혹은 그 계획을 잘 실행했는지, 그리고 결과물, 즉 시험을 잘 봤는 지에 대해 간간히 검사하며 하자가 있으면 무섭게 혼내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3] 여유있게 세이프였으나 아웃 판정을 받았다고 하며 비디오 판독이 있었으면 세이프 판정으로 번복됐을거라고 했다.[4] 그리고 장채근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감독의 호텔 방에 들어가는 사고를 치고 만다.[5] 최해식은 계속대는 갈굼에 열받아서 "씨! 그만해!"라고 대들었고, 이후 김응용 감독이 최해식을 갈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애꿎은 종이만 찢었다고(...)[6] 당시 그 2명은 주전 포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많이 험하게 굴렸다고 봐도 된다. 장채근이 초년기 당시에 해태의 주전포수는 포수 능력만 보면 그냥 당대 최강 소리도 듣던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이었고, 장채근 이전의 백업포수가 유승안이었다. 삼성에는 기본적으로 진갑용이 있고, 현재윤이 입단한 2002년 바로 전해에는 김동수까지 있었다. 유승안과 김동수 모두 주전 경력이 있는 포수들이었는데, 이 선수들 내보내고 장채근과 현재윤을 백업으로 키운 것이다. 이 2명은 모두 결국 주전포수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7] 그러나 김정수가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길 김응용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신인급 선수들은 2년간 무서워하다가 그 뒤로부터는 '(감독이)또 저러는구나'하면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8] 이런 형태와 정 반대의 케이스가 있는데 다름 아닌 김성근 감독. 이쪽은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관리하는 타입이다. 둘 다 상반된 타입이니 장단점이 갈려서 논쟁 거리가 되곤 한다.[9] 김성근은 가장 대표적인 스몰볼 성향 감독으로 여겨진다.[10] 해당 내용과 관련된 방송 갈무리를 보면 '고급 햄'은 다름 아닌 스팸을 가리키는 듯 하다.[11] 영상 8분 30초쯤부터.[12] 이 때 김응용의 부산상고 후배인 채태인도 강영식과 같이 김응용 집에서 살았다.[13] 정작 둘 다 시차를 두고 1988년에 빙그레 이글스에 팔아버렸다. 그럴만한 것이 덩치 큰 좌타자인 박철우가 1987년에 입단하고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지션이 겹치던 이 둘을 정리해버린 것이다.[14] 해태에서 나름 밥 값을 한 좌타자는 사실 몇 없다. 초기의 김일환, 송일섭 - 중기의 박철우 - 후기의 장성호와 최훈재 정도? 이광우를 OB에 넘겨주고 박노준을 데려왔지만 망했고, 한대화를 정리하고 LG에서 김상훈을 데려왔으나 폭망한 건 마찬가지. 이후 삼성에서 동봉철을 데려왔지만 재미도 못 보고 1년 만에 LG로 넘겼다.[15] 바꿔온 선수는 LG 선발투수였던 손혁. 이후 손혁도 해태 안 가겠다고 은퇴소동을 일으키게 된다.[16]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한 이후 출루율이 타율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게 정설이다. 정확히는 타율은 출루율을 구성하는 요인 중 일부로, 같은 출루율이면 타율이 높은 쪽이 더 좋다. 무조건 IsoD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인플레이 타구는 2루타 이상으로 장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었을 때 안타가 될 확률인 BABIP가 0.5도 되지 않는 반면 볼넷은 반드시 안전진루권을 보장받기에 컨택이 어마어마하고 장타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아닌 이상 배드볼 히터보다는 OPS 히터의 가치가 높다는 것.[17] 다만 위에서 설명했듯 박한이를 파격적으로 기용하고 중용한건 김응용이었다. 프로 초기에 본헤드 플레이가 많았던 걸 두고 인터뷰 중 농담처럼 한 말인 박한이는 정신병자다.가 신문 꼬다리에 실려서 이런 인식이 남아버린듯[18] 게다가 김응용은 부산상고 출신이어서 부산 지역에 연고가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19] 술집에서 여자 불러놓고 코치들을 불러 춤을 추게 했다는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 사건의 당사자다.[20] 과자 세트를 보너스로 줬다는 건 루머라고 하지만, 광주형 물가(서울에서 1억 받으면 광주 물가로는 7천만 원만 받아도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연봉 협상을 처리한 프런트) 등의 사건으로 열받은 선수단이 불고기 화형식을 했을 때, 김응용은 박건배 회장과 직접 면담하면서 그 사후 처리를 논의했다고 한다.[21] 이 일화는 김응용이 한 게 아니라 당시 구단주인 현명관이 한 말이었다. 김응용은 삼성 감독 시절부터 이런 외압에 대해 막아달라고 먼저 그룹 수뇌부에게 요청했다고 하고 이건희와 현명관이 바로 임원들에게 야구팀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22] 특히 LG 트윈스는 구본무 회장이 마음에 안들어해서 직접 경질에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23] 다만 포스트 시즌은 매우 약했다는 점이 흠.[24] 사실 양일환 코치는 원래 삼성에서 코치를 했었지만, 서정환이 감독이 되면서 잘렸고 잠시 일본 연수와 영남대 코치를 하다가 2001년 복귀했다.[25] 다만 이순철은 코치로서 유능한 사람이기는 했다. 감독으로서 보여준 역량이 심각해서 그렇지. 한대화는 수석코치를 오래해서 능력을 평가하기에 애매하나, 감독으로서 보여준 능력은 영 좋지 않다.[26] 다만 팀 내에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이대진은 현재 KIA 타이거즈 - SSG 랜더스를 거쳐 다시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일하고 있고, 이종범도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물러났으니 나도 떠난다는 투로 그만둔 쪽이다.[27] 이 쪽은 구설수는 없었지만 외야수 출신이었다는 것이 한계였고 이미 세대 교체가 이뤄지는 바람에 현장 복귀가 막혔다. 잘 해야 2군 감독 정도?.[28] 특히 김성한은 선수 폭행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지도자 생명이 끊겼다. 심지어 진천선수촌장 후보에 올랐으나, 과거 행적 때문에 낙마했다는 설이 돌 정도였으니.[29] 그래도 선동열은 프리미어12에서 투수코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2018 아시안게임에서 감독 역할을 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에 이바지하는 공로를 세우긴 했다. KIA에서 커리어를 깨먹긴 했어도 기본적인 투수 조련이나 코치로서의 역할은 확실하게 날이 서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