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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기태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아마추어 시절
초5 때 투수로 야구에 입문, 광주일고 1학년 때 팔꿈치 부상 때문에 1루수로 전향한다. 중고교 때만 해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인하대 진학 이후 급성장해 양준혁과 함께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한다.3.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92~1994) |
옆의 김기태보다 더 몸 좋은 분은 장훈 선생이며, 신인 시절인 1991년 훈련 당시의 모습이다.
1991년 신생 팀 특별우선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1] 쌍방울은 구단 차원에서 첫 시즌부터 투수에는 김원형과 조규제, 타자에는 김기태를 구도로 팀의 간판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김기태는 입단하자마자 팀의 4번타자라는 중책을 맡았으나, 5월까지 홈런 0에 타율도 2할 턱걸이라서 초창기 전주아재들이 김기태가 타석에 나오면 욕을 엄청나게 해댔다. 이 기간 본인도 마음고생이 굉장히 심했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믿고 계속 4번타자로 기용한 김인식감독 덕택에 5월부터 홈런을 쳐가면서 부진에서 탈출하였으며, 1991시즌 타율 0.262에 27홈런을 때려내며 35개를 친 장종훈을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하는 등 슈퍼루키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나 신인왕은 하필 팀 동료였던 좌완투수 조규제가 엄청난 퍼포먼스를 기록하며 수상하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2]
이후 김기태의 기량은 더욱 발전하여, 2년차인 1992년에 3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좌타 최다 홈런 기록을 갱신했으며,[3] 1992~94년까지 3년 연속 지명타자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당시 스몰마켓이었던 쌍방울의 핵심 선수이자 타선의 해결사로 맹활약했다. 3년차인 1993년에는 타율 0.240에 고작 9개의 홈런을 치며 겉보기에는 민망한 성적을 냈지만 1993년이 KBO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라 전체적으로 타자들의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는 걸 감안해야 하며, 실제로는 0.380의 높은 출루율과 wRC+가 135.1을 기록하는 등 나쁜 성적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당시 관점으로 보면 골글 수상은 좀 무리였음에도, 그해 타격왕과 홈런/타점왕을 차지한 양준혁, 김성래가 둘 다 1루수 후보로 가버리는 바람에 김기태가 그대로 지명타자 부문을 지켰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각성하여 25개의 홈런을 때려내 KBO 최초의 좌타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심지어 당시 방위병 신분이라 원정경기에 제약을 받아 당시 126경기체제였던 리그에서 18경기를 결장한 108경기만 뛰고도 홈런왕을 따냈다. 1995년과 1996년에는 여전히 투고타저의 여파로 인해 홈런은 12개에 그쳤으나, 좋은 선구안을 바탕으로 한 1할에 근접한 타출갭과 5할에 달하는 장타율로 여전히 리그 최고의 1루수였다.
김기태의 최전성기는 1997년으로, KBO 역사에 남을 시즌을 만들어냈다. 0.344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으며,[4] 26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344/.461/.636 라는 엄청난 슬래시라인을 기록하며 OPS 1.096에 wRC+가 무려 202.6이었다. 이는 2023년 기준 단일시즌 wRC+ 역대 9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며, 이 시즌 이승엽과 이종범, 양준혁, 박재홍의 홈런왕 경쟁으로 김기태는 주목도가 덜했으나 세이버로 봤을 때 1997년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는 김기태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쌍방울은 과거 김기태와 아이들 시절이 아니라 모기업의 대대적인 투자로 수준급의 투타를 구축한 팀이라서 당시 박경완과 심성보, 조원우가 같은 팀 동료로 있던 1997시즌 쌍방울 레이더스의 타선은 상당한 무게감을 자랑했으며, 그 중심에는 김기태가 있었다. 핵타선 그 자체였던 삼성 다음으로 팀 타율 및 출루율, 장타율, ops가 전체 2위로, 우승팀 해태보다 우위였다. 다만 그건 번트를 자주 시도한 당시 김성근감독의 성향도 있을 거고,[5] 득점만 3위. 도루수가 해태 148, 쌍방울 81로 당시 쌍방울 감독 김성근은 도루를 자주 시도하지 않았고, 이게 득점 저하로 이어졌던 것.[6]
그럼에도 쌍방울에서 김기태를 제외하면 엄청나게 강력한 타자는 없었던 관계로 타 구단 감독이 "쌍방울은 김기태만 조심하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항상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는데, 15시즌동안 사사구 975개를 얻어낸 것도 이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무려 한 시즌당 평균 65개다! 그것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굳이 집중 견제를 할 필요가 없어져 저기서 멈췄지 쌍방울 시절에는 시즌 100사사구를 무려 3번이나 기록했을 정도이다. 쌍방울이 해체되지 않고 은퇴할 때까지 뛰었으면 통산 1000개는 가볍게 넘었을 것이다.
1996~1998년까지[7]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쌍방울의 주장을 맡으며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다. 오죽하면 당시 김성근 감독이 "구단이 아무리 어려워도 김기태만은 절대 팔지 말아달라", "김기태는 미래의 감독감"이라 했을까.[8] 훗날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 주최를 주도한 두 제자가 바로 김기태와 이연수[9]였으니 쌍방울 시절의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01 이후의 행보를 보면 홍현우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 역시 먹튀의 모습을 보였다.
4.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7년 외환 위기로 모기업이 부도난 쌍방울은 결국 핵심 선수인 조규제, 박경완(현대) 김현욱, 김기태(삼성)을 팔아치워 구단 운영비를 대야만 했다. 특히 김기태의 경우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쌍방울이 IMF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때 선수단에서 가장 힘이 되었던 선수가 김기태였고, 쌍방울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998년 시즌 끝난 뒤 팔려 나갔으니...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모든게 다 끝났다.' 라고 말하며 실의에 빠졌다. 전 해 6위팀의 중심타자+중심 중간계투를 빼앗긴 건 팀에겐 사형선고였다. 김기태의 존재가 쌍방울에 있어서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쌍방울 시절 문서에 서술되어있다시피 쌍방울 선수단에서 김기태는 선수단을 하나로 뭉치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한 선수였다.
1998년 겨울 임창용과의 3:1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에 팔려간 양준혁 대신 삼성에 들어와 이적한 첫해에 수비 포지션을 좌익수로 옮기는 등의 대란에도 불구하고[10][11] 괜찮은 활약을 보여 줬고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으로 뽑힐 정도였었다. 그러나 김응용 감독과의 마찰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당시 이승엽을 불참시켰다는 이유로 좋은 이미지를 다 깎아 먹이는 바람에 삼성 팬들에게 실망만 남겼으며, 이후 이적하기 전의 팀이 하필이면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였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언급이 잘 안되는 편이다. [12][13]
선수협 관련 활동이 있던 이 시기에 선수협을 주도했던 동갑내기 좌타자[14] 양준혁과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15] 그렇긴 한데, 사실 김기태도 선수협 창단 자체에는 우호적이였다. 그런데 양준혁은 선수 노조를 원했고, 김기태는 구단에게 인정을 받는 조직을 원한 것이 차이점이자 갈등의 시작. 다른 건 둘째치고 선수협 참가 선수들과 팬들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대치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선수협 오적 중에서도 수위권에 든다는 평가. 물론 무노조 원칙을 주로 했던 삼성이라는 환경, 그리고 삼성 입단 직후인 불안한 입지를 생각할때 그가 어느정도 윗선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선수협에서도 삼성 라이온즈의 모든 선수는 선수협에 호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훗날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에 출연한 김기태는 '부자구단 삼성으로 이적을 했는데 삼성은 모든 것이 우월한 환경인데도 선수들은 불평불만을 하더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16] 간접적으로 선수협을 디스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본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야구 시켜주는 데 감사할 줄 모르니 구단 편에 선 것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김기태는 은퇴 후 아이 러브 베이스볼과의 인터뷰에서 쌍방울은 계속 이길 수 없는 팀이었는데 반해 삼성의 경우 계속 이길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서 이적했다고 한다. 허나 립서비스에 가깝고 애초에 쌍방울의 자금 사정 문제와 삼성의 양준혁을 대체할 장타자 구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억지로 팀을 옮긴 거라 새 팀인 삼성에서의 적응은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그 처참한 수비력으로 좌익수까지 해야 했다. 2001년에 취임한 김응용 감독 역시 김기태에 이어 마해영까지 오자, 거포들 기용문제를 두고서 골머리를 앓았고, 그 마해영이 좌익수 수비를 보았다. 그나마 김기태보다 조금은 수비가 나았기에.. 김기태의 좌익수 수비는 폭탄수준이었다. 현재 나지완 & 고종욱 보다도 못했다.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와 롯데에서 이적해 온 마해영에 밀려 결국 김기태는 주전급 기량은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벤치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용병 매니 마르티네스와 신인 박한이의 외야 정착,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강동우의 부활은 김기태에게는 삼성에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17]
비록 선수협 5적 파동과 막판에 김응용 감독과의 마찰로 인해 이미지가 흠집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고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었을 당시에도 맏형 이미지가 있었다. 삼성 구단 사상 첫 이적생 출신이 주장을 맡은 사례기도 하다. 특히 이승엽은 대놓고 그를 보스라 칭하였다고(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인터뷰 중). 포지션이 경쟁에서 이승엽에게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투수가 아닌 타자로 뛰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엽에게 '너같이 재능있는 타자가 방망이를 놓는 건 한국프로야구계의 큰 손실이다'라며 달래던 것이 김기태였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과도 큰 마찰은 없었다는 듯. 최근 올라오는 기사나 사진을 보면 양준혁하고도 앙금은 많이 풀린 듯 하다.
5. SK 와이번스 시절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4) |
2001년 시즌 종료 후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은 뒤 트레이드 시장에 나오자 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가 김기태를 얻으려고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결국 6:2 현금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게 된다.[18] 과거 몸담았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정식 후계는 아닐지라도 후신이라 볼 수 있는 팀에 베테랑의 연차에 복귀하게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김기태 역시 더이상 과거의 김기태가 아니었다.
2002~2003년은 많은 타석을 제공받으면서 홈런수도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2003년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준우승을 하였다.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였다. 2004년 SK에서 126경기에 출장, 3할에 복귀[19]하며 지명타자 부문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2005년 시즌에는 부상으로 1군 54경기에 그쳤고, 타율 또한 2할 5리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은퇴한다. 동갑이면서 1년 후배인 양준혁이 30대 후반에 나이에도 3할을 치며 42세까지 롱런해서 비교되긴 하는데, 사실 이건 양준혁이 터무니없이 오래 버틴 거고 김기태도 37세에 은퇴면 지금 기준으로도 그다지 이르지 않은 은퇴로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여담으로 마지막 시즌 중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었는데, 몸 상태 체크를 위해 당시 같은 팀 소속이었던 신승현과 라이브 배팅 훈련을 했다고 한다. 당시 김원형과 선발 원투펀치로 활약하면서 절정의 기량을 보이던 신승현의 강속구를 받아쳐 좌익선상으로 날아가는 빨래줄 안타를 쳤는데, 이로 인해 복귀를 서두르다 일주일 만에 부상을 당하면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은퇴의 단초가 되었다 회고한 바 있다.[20]
6. 총평
3000타석 이상 기준 누적 스탯을 보면 wRC+, 출루율, 장타율, OPS, 볼넷이 모두 10위권 내에 랭크되어 있고, 15시즌 6003 타석동안 통산 wRC+가 150대, 통산 타격 WAR이 70에 근접할 정도로 역대급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타자이다. 발이 아주 빠른건 아니었지만 주루센스가 괜찮아서 10도루 이상 기록한 시즌도 여럿 된다.[21] 하지만 수비는 뛰어나다곤 할 수 없었다. 1루 수비는 곧잘했지만, 삼성 시절 잠시 뛰었던 외야수비는 20시즌 이전의 나지완을 떠올릴 정도로 95-117-95의 작은 구장이었던 대구에서도 불안정한 수비를 보였다.[22] 타구판단도 타구판단이지만 어깨는 그 이대형, 박용택, 최형우, 나지완에 비교될 정도로 소녀어깨였다.[23]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S급이라곤 그 혼자인 약체타선에서 견제받으면서도 화려한 성적을 쌓은 선수로, 1990년대 KBO 리그와 쌍방울 대표하는 선수이며 프로야구 역사에 남기에 충분한 선수이다. 동시대에 뛰었던 선수 중 기록면에서 김기태보다 확실히 위인 좌타자는 양준혁, 장효조, 이승엽 외엔 없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 ||||||||||||||
<rowcolor=#000>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1 | 쌍방울 | 124 | 427 | .262 | 112 | 15 | 0 | 27 (2위) | 92 (2위) | 65 | 7 | 76 | .487 | .370 |
1992 | 123 | 398 | .302 | 120 | 28 (2위) | 3 | 31 (2위) | 96 (3위) | 86 | 5 | 122 | .621 (2위) | .461 (1위) | |
1993 | 96 | 317 | .240 | 76 | 17 | 2 | 9 | 43 | 36 | 11 | 74 | .391 | .380 (4위) | |
1994 | 108 | 376 | .316 (5위) | 119 | 20 | 4 | 25 (1위) | 79 (3위) | 70 (5위) | 9 | 76 | .590 (1위) | .430 (2위) | |
1995 | 116 | 402 | .321 (3위) | 129 | 34 (1위) | 3 | 12 | 72 | 48 | 12 | 73 | .510 (3위) | .419 (2위) | |
1996 | 91 | 310 | .297 | 92 | 17 | 3 | 12 | 53 | 47 | 3 | 54 | .487 | .399 | |
1997 | 111 | 390 | .344 (1위) | 134 | 30 (5위) | 3 | 26 (5위) | 79 (4위) | 95 (4위) | 10 | 86 | .636 (1위) | .460 (1위) | |
1998 | 126 | 434 | .309 | 134 | 28 | 4 | 31 (3위) | 90 (4위) | 84 (5위) | 10 | 104 | .606 (3위) | .440 (2위)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9 | 삼성 | 130 | 468 | .293 | 137 | 33 (5위) | 2 | 28 | 88 | 82 | 5 | 88 | .551 | .403 |
2000 | 101 | 333 | .309 | 103 | 24 | 1 | 26 | 80 | 69 | 5 | 59 | .622 | .410 | |
2001 | 44 | 85 | .176 | 15 | 2 | 1 | 0 | 9 | 5 | 0 | 17 | .224 | .314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2 | SK | 101 | 284 | .257 | 73 | 15 | 1 | 9 | 46 | 32 | 2 | 47 | .412 | .359 |
2003 | 93 | 236 | .292 | 69 | 7 | 0 | 3 | 18 | 32 | 2 | 27 | .360 | .364 | |
2004 | 126 | 403 | .320 | 129 | 24 | 0 | 10 | 67 | 60 | 2 | 57 | .454 | .403 | |
2005 | 54 | 112 | .205 | 23 | 4 | 0 | 0 | 11 | 5 | 0 | 15 | .241 | .297 | |
<row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 1544 | 4975 | .294 | 1465 | 298 | 27 | 249 | 923 | 816 | 83 | 975 | .516 | .407 |
[1]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은 해태가 김기태 대신 한양대 투수 출신의 오희주를 선택하여 김기태가 쌍방울 유니폼을 입게 된게 두 선수의 운명을 갈랐다고 술회했다. 김기태가 만약 해태에 입단했으면 붙박이 1루수 및 중심타자 김성한을 밀어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김성한이 1991년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전만큼의 맹렬한 타격을 더이상 보이지 못했으며, 해태는 김성한 이후 장성호가 나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1루수가 없었기 때문에 김기태가 해태를 갔더라도 기회는 충분히 받았을 공산이 크다.[2] 조규제 역시 1년차 신인임에도 계투로 14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64에 27세이브로 구원왕을 차지했다.[3] 이는 이승엽이 1997년 32개를 때려내며 경신했으며, 이후 1999년 54개, 2003년 56개로 아예 차원이 다른 기록을 써내려가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다만 99~03년은 KBO 역사에서 타고투저가 매우 심했던 기간인 것은 감안해야 한다.[4]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홈런왕과 타격왕을 모두 수상해 본 선수는 김기태를 제외하면 이만수와 이대호, 김태균, 최형우 뿐이다. 즉, 이만수 이후로 홈런왕과 타격왕을 둘 다 수상해본 첫 사례다.[5] 번트를 하면 진루타인 내야땅볼과 결과는 같지만 타율이 보존된다. 당시 쌍방울은 시즌 해태보다 번트성공이 61개 높았다. 즉 아무리 지표가 높아도 내야땅볼이나 깊은 플라이와 결과는 같으므로 쌍방울의 저 지표는 해태와 비교했을때 허수가 많다. 홈런수가 해태(133)가 쌍방울(110) 한참 많은 것도 그렇고.[6] 쌍방울에 발빠른 선수가 없는 건 아니었고 1998~1999년에는 쌍방울 팀 도루가 늘어났기 때문에, 그냥 이 기간동안만 도루를 적게 했을 뿐이다.[7] 1998년에는 삼성으로 팔려가기 전까지 주장직을 수행하였다.[8] 그리고 2015 시즌 당시 감독과 미래의 감독감은 각각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서 만나게 되었다.[9]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외야수로 선수 생활을 했고, 쌍방울에서 선수단 매니저로 일하다가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1999년에 잠시 선수로 복귀한 바 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이다.[10] 당시 찰스 스미스, 이승엽과 수비 툴이 겹치고 지명타자도 자리가 없어서 결국 누군가는 좌익수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웃긴 건 찰스 스미스도 가끔 좌익수비를 봤다는 것. 체구가 이대호만 했는데도 말이다![11] 거기다가 시즌 중반에는 우익수도 봤다![12] 그런데 사실 김기태는 해태의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1991년에는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후 신생팀 쌍방울을 위한 10명 특별지명이 있었다. 쌍방울은 1차지명으로 조규제를 지명했고, 해태는 1차지명에서 김기태와 한양대 우완 투수 에이스 오희주를 놓고 갈등했다. 결국 선택은 오희주였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태에 1차지명되지 못한 김기태는 당연히 쌍방울에 특별지명되게 된다.[13] 결과론이긴 하지만 나중에 김응용도 그 때 김기태를 데려왔어야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응룡 감독과 오희주의 첫 대면에서 오희주는 백구두, 반짝이는 정장, 파마머리를 하고 등장해서 김응룡 감독이 '가수신가?'하고 황당해했다고.[14] 다만 김기태가 조기입학을 해서 양준혁보다는 1년 선배이다.[15] 다만 주먹다짐을 하긴했는데, 상대는 양준혁이 아닌 유지현. 그 이유는 LG부터 창립총회에 들어가느냐, 삼성부터 들어가느냐인데, 그 뒤로 김기태가 말대꾸를 한다고 유지현을 나무라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기태, 유지현은 구단파로 옮기게되고, 조경택을 제치고 선수협 오적이 된다.[16] 실제로 삼성의 구단지원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풍부했었다. 반면에 해태보다도 가난한 쌍방울은 그런 거 없었다.[17] 셋 중 하나가 못했다면 김기태에게 기회가 있었겟지만, 그들이 모두 준수한 활약을 보임으로써(솔까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지만, 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방망이 자체는 김기태가 그들에게 밀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주루나 작전수행능력은 김기태보다 월등했던 것)아시다시피 야구는 전타선을 20홈런타자로 채워서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마해영은 지명타자로 돌아서게 되고 다시는 삼성시절 김기태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18] KIA는 오철민, 최영완에 현금을 더 얹어서 준다했고, 결국 SK가 엄청난 현금으로 트레이드에 성공했다.[19] 작가 김은식의 칼럼에 따르면 김기태 하면 장타력 있는 타자라는 생각으로 수비수들이 후진수비하는 것을 역이용, 컨택에 중점을 둔 간결한 스윙으로 타격을 바꾸면서 3할 복귀에 성공했다고 한다.[20] 그 뒤 신승현과 마운드에서 재회하게 되는 데에는 8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13년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이대형의 보상 선수로 신승현이 선택되면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된 것. SK 시절에는 선후배 관계였던 두 인물이 짧게나마 감독, 선수의 관계로써 재회하였다.그러나 김기태가 고른 신승현은 LG에서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2군에서만 맴돌았고, 김기태가 강력하게 요청해서 2014 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데려온 김선우와 임재철도 팀에서 빅똥만 싼채 둘다 2014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21] 다만 성공률은 60%도 채 되지 않아서 뛰어난 주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22] 다만 이적 첫시즌인 99시즌만 좌익수로 어느 정도 출전했고 그 이후는 드물게 나왔다. 주로 지명타자로 나오던 00시즌에 어쩌다 좌익수 김기태, 중견수 김종훈, 우익수 프랑코의 역대급 외야진이 나오기도 했는데, 좌익수 경험이 거의 없던 김기태와 주로 내야수를 봤던 프랑코에 김종훈은 좌익수로는 괜찮지만 중견수로는 수비범위가 넓다곤 할 수 없었기에.. 게다가 김종훈, 김기태 모두 어깨가 약해서 좌중간으로 빠지면 주자의 추가 진루의 위험이 다분했다.[23] 최형우와 나지완은 소녀어깨는 아니다. 송구 컨트롤이 안좋아서 소극적으로 송구하는 것일 뿐. 반대로 이대형과 박용택은 어깨 부상 때문에 소녀어깨가 되었는데, 이대형은 고교 시절 투수로 혹사, 박용택은 데뷔 시즌 김성근의 지옥의 송구 훈련으로 어깨가 망가졌는데, 단 한 시즌도 쉬지 못하며 부상을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