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전인 2003년의 공화국 궁전
1. 개요
독일어: Palast der Republik영어: Palace of the Republic
공화국 궁전은 베를린 시내에 있었던 동독의 인민의회의사당(1976년~1990년) 겸 컨벤션센터 겸 국민문화회관이었다. 1973년에 완공되었고 2006년에 철거되었다.
2. 역사
2.1. 건설과 동독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공화국 궁전이 있던 자리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왕국을 거쳐 독일 제국까지 호엔촐레른 가문의 법궁이었던 베를린 성(Berliner Schloss)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벌어진 베를린 공방전에서 베를린 성은 연합국의 폭격으로 파손/파괴되었고 1949년 들어선 독일민주공화국은 베를린 성을 복원할 자금도 여의치 않았으며 베를린 성을 봉건주의를 상징하는 건물이라고 여기며 1950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렸다. 이 때 1918년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독일자유사회주의공화국'을 선언했던 4번 현관 (Portal IV)은 보존되어 동독 국무회의 청사에 붙었고 빌헬름 1세 기마상을 비롯한 베를린 성 주변의 기념물들도 철거되었다.1950년대와 1960년대에 베를린 성 터는 주차장과 열병식장으로 사용되다가 동독 인민의회 건물의 터로 낙점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 건축학교에 의뢰하였던 공화국 궁전의 조감도는 구리로 코팅된 창문이 특징인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로 돌아왔다. 실내도 모더니즘 양식을 최대한 반영해서 21세기 기준으로 보아도 꽤나 세련돼 보일 정도로 잘 꾸며졌다. 해당 계획은 베를린 성 부지의 동쪽 반분에 지어지고 서쪽 반분은 열병식장으로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으나 건물이 위치한 박물관 섬의 연약한 지반과 공화국 궁전의 창문에 열병식으로 인한 진동으로부터의 위험을 감안하여 서쪽 반분은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문화궁전 및 인민궁전 개념들에 영향을 받아 공화국 궁전은 한편으로는 인민의회의사당과 컨벤션센터였으며 한편으로는 국민문화회관(볼링장, 공연장, 연회장, 레스토랑, 찻집, 술집)의 기능도 갖췄다. 다행스럽게도 2004년에 RBB Fernsehen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공화국 궁전의 활용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관심있는 독자들은 꼭 시청할 것을 추천한다.
특히 엄숙해 보이는 문화행사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행사들도 많이 개최했다. 이것이 어느 정도냐면 패션쇼도 개최하고 록 페스티벌도 개최해서 록 밴드나 서구권 가수돌도 공화국 궁전에서 공연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독일 재통일 직전에 일어난 동독 정부의 대규모 행사로서 1989년 10월에 열린 독일민주공화국 건국 40돌 기념행사도 공화국 궁전을 중심으로 거행했는데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폴란드 인민공화국 주석)와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가 이곳을 방문했으며 독일 재통일을 마무리지은 동독 인민의회의 동독 5개주 독일연방공화국 가입 비준도 이곳에서 1990년 10월 3일에 실행되었다. 어떻게 보면 동독의 정치역사와 함께한 건물인 셈이다.
여담으로 베를린 시민들은 공화국 궁전을 Erichs Lampenladen, 즉 《에리히의 램프 가게》 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 당시 천장에 10,000개의 전구를 빼곡히 매달아 둔 특이한 설계를 했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는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 프로파간다의 영향으로 동베를린에서 공화국 궁전만 유일하게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 건물이라서 이 별명이 붙었다는 오해가 퍼져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동독을 포함한 당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북한 같은 막장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력 공급 같은 기본 인프라에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 동독에서는 밤에 멀쩡히 불을 켜고 지냈으며 심지어 디스코텍이나 볼링장 따위의 네온사인, 분수대의 경관 조명 같은 것도 잘만 켜고 살았다. 오히려 카를-마르크스 알레 같은 판상형 아파트촌들의 존재로 인해 동베를린의 야경은 서베를린보다는 대한민국의 야경과 흡사했다.
2.2. 독일 재통일과 철거
1990년 9월 19일부터 전국민에게 개방을 중지하고 1991년 12월 31일까지 동독 인민의회의 잔무처리에만 주력했다. 독일 재통일은 동독 정부가 스스로 해산하고 그 밑의 주들이 서독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그 결과 석면 문제에 널널했던 동독 건축법대로 지어진 공화국 궁전에 석면에 관대하지 않은 서독의 건축법이 적용되었다. 통일과 함께 불법 건축물로 전락한 공화국 궁전은 미래의 용도를 놓고 저울질하기 전에 일단 석면부터 제거해야 했으며 석면 제거 작업을 끝낸 2003년 9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최하는 예술회관으로 재활용됐다.독일 연방정부는 기존 공화국 궁전을 연방의회의사당으로 사용하지 않고[1] 공화국 궁전의 터에 있던 옛 베를린 성의 복원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공화국 궁전의 철거를 두고 동독 시절의 향수에 젖어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기본적으로 공화국 궁전이 흔히 아는 인민궁전이나 소비에트 궁전 따위의 공산정권의 흉물들과는 달리 상당히 멋지게 생긴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되었듯 석면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았고[2] 통일 독일 정부에서는 분단과 공산주의 동독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 건물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결국 호엔촐레른 가문 종친회의 로비사업으로 2002년 베를린 성 복원이 결정되어 공화국 궁전은 2006년 철거되었고 서독 시민들의 성금으로 베를린 성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2021년 7월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복원되 베를린 성은 훔볼트포룸(Humboldtforum)이란 이름으로 세계민속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여러모로 한국인에게는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청사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인데 실제로 베를린 성 복원협회 이사인 빌헬름 폰 보딘이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현재의 베를린 성은 완전 복원한 것이 아닌데, 베를린 문서에 기재된 파괴 이전의 사진과 비교하면 많이 다르다.
2차대전 전 베를린 대성당과 베를린 왕궁의 모습과 현재의 베를린 성
정면부 꼭대기의 둠 지붕을 비롯해 정면과 좌우 측면의 경우 파괴 이전의 베를린 성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후면과 내부 인테리어는 복원과는 거리가 먼 모더니즘에 들어가는 현대 건축물로 된 재현물로 중정 한가운데 자리한 구조체 또한 원래는 사진에 나와 있듯이 두 채의 별개의 건물이었으나 복원 공사 후 모더니즘 양식의 현대 건축 구조체로 바꿔졌다.
도이체 벨레에 따르면 공화국 궁전을 철거하면서 나온 자재들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로 팔려가 부르즈 할리파를 건설하는 공사장에서 써먹었다고 전해진다.
3. 매체에서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모멘트'의 에필로그에서 독일 재통일 후 공화국 궁전이 철거되고 베를린 성이 복원되는 장면이 묘사된다.[1] 애초부터 공화국 궁전은 3대 기능(인민의회의사당 겸 컨벤션센터 겸 국민문화회관)에 특화된 맞춤형 건물이기 때문에 연방정부의 정부청사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동독 정부의 중앙관청들을 수리해 연방정부 청사로 재활용했다.[2] 석면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일 때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2003년 재개장했을 때 공화국 궁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철거가 확정됐음에도 석면 제거작업을 계속한 건 내부에 석면 자재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철거를 강행할 수는 없으니 철거 여부와는 별개로 석면 제거작업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