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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1:43:11

고려(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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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46cd> 고려연방제국
高麗聯邦帝國
파일:남미고려_고려제국_영토.jpg
▲ 본편 완결 이후 고려 전도
1275년 ~
성립 이전
고려(한반도)
위치 아메리카, 한반도 개성, 제주도, 태평양 도서지역, 대동양 도서지역, 남극
수도 창양
인구 31억 이상[1]
민족 예맥한족[2]
언어 고려어
문자 한글, 한자
종교 제국교, 쿠쿨칸교, 유교, 불교, 기독교
정치 사상 홍익인간, 민본주의, 문화다원주의[3], 자본주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다당제, 연방제
국가원수 황제
정부수반 시중
국성 창양 해씨
정당 경당, 교당, 귀당[4]
소속 기구 국제연합[5], 대동양 조약 기구
통화 [6]

1. 개요2. 역사3. 영토4. 황실
4.1. 황제4.2. 종통 및 방계
5. 정치
5.1. 전제 정치 시기5.2. 가면 시중 시기5.3. 민선 시중 시기
6. 외교
6.1. 외교 등급6.2. 국제 연합6.3. 대동양 조약 기구6.4. 하늘눈
7. 경제8. 사회9. 군사10. 문화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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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 웹소설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 작중 세계의 기술, 문화, 경제 선도국이며 극초강대국이다.

2. 역사

본래 고려는 태조 왕건이 한반도 개경을 수도로 하여 건국된 국가이다. 개성 왕씨를 국성으로 하는 한반도의 국가였으나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고 몽진한 고려 정부가 버티지 못하고 환도를 하게 된다. 이때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한 삼별초가 남려대륙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고려를 세우게 된다. 해민 황제가 개성왕씨이자 왕건의 후손으로 고려 황실의 일원인 왕예와 혼인하여 고려를 이었고 원래의 한반도 고려는 조선에게 대권을 넘겨주게 되었다.[7]

3. 영토

"하루에 한번 태양을 독점하는 국가"

북려 대륙 전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창양으로 시작해서 개척과 동화정책을 시행하여 대륙 전체를 소유했으며 양쪽 바다의 핵심 도서들을 영토로 삼았다.[8] 한반도의 개성은 왕씨고려의 첫 번째 수도였기 때문에 직할통치 중이다.

영토는 부속도서 전부 포함한 범 아메리카 대륙 전체,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부속도서, 한반도 개성, 제주도 그리고 남극 대륙 전체.

4. 황실

상민과 왕예의 후손들이며 개천제인 상민이 김씨에서 해씨로 성을 바꿔서 국성이 해씨가 되었다. 상민의 영향으로 국가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인 해씨 후손들의 역사적 정통성도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상민이 왕예와 혼인하여 예맥한계의 고려(한반도와 만주)의 정통성을 가지는 것으로 시작, 동로마가 멸망하고 최후의 황녀가 황후가 되어 로마를 계승하였다. 중화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전국옥새도 고려의 손에 들어갔으며 라이히스크로네 또한 얻어서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제관을 해씨 고려가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사용하는 융단은 보라색, 황금색, 붉은색의 3가지 색으로 짜며, 각각 보라색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 황금색은 고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군주권, 그리고 붉은색은 범세계적인 존귀함을 상징한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도 해씨 황실의 일원이며,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왕실과 통혼했고, 후반에는 해씨 고려의 숙적인 몽골의 황금씨족도 며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9] 다만 대부분 고려쪽에서 황후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통혼해서, 고려 바깥의 쌍용지손의 후손은 고려 초창기에 국혼을 한 잉글랜드 왕실외에는 없다. 황실 혈연과는 상관없으나 유럽국가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몽골을 고려가 격파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막강한 권위와 공포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작중묘사에 따르면 미남 미녀들이 많다.

4.1. 황제

4.2. 종통 및 방계



5. 정치

5.1. 전제 정치 시기

태조 해민을 포함한 오현제들 중 해윤을 제외한 황제들의 통치 시기이다. 원래는 상민이 제위를 물려주고 제국을 떠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가 성종 해권이 급사하고 어린 무종 해윤만이 남게 되자 시중지위로 복귀하고, 전권을 대리하였으며, 무종은 성장해서 여기저기 원정을 다니며 업무를 상민에게 떠넘겼다. 이후 무종 해윤이 금헌칙서를 제정하여 완전한 입헌군주체제로 전환되었다. 무종 본인은 앞선 황제들이 전원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나 후계가 끊기지 않은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으로 평가하고 이후에는 이런 일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 하에 벌인 일이지만, 주인공은 전쟁하려고 행정 떠넘기는 거냐는 생각을 했다.

5.2. 가면 시중 시기

폭군 해제를 명분으로 가면시중이 대대로 집권, 통치하던 시기. 물론 가면시중의 정체는 태조 해민이었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신이자 조상의 통치를 그대로 따랐다. 남려대륙의 고려가 북려대륙으로 진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시기이다. 유럽 국가들과 충돌하기도 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강대국들이 고려와 국력을 어느 정도 비교해볼만은 했지만 결국 고려에게 세계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상민이 가면시중으로 통치를 하는 만큼, 업무의 효율성은 완벽 그 자체라 후대의 민선시중들도 가면시중들의 능력을 경외한다. 고려의 최고 권력자라는 지위는 그만큼 엄청난 업무량과 책임을 동반하는데, 민선시중들은 이러한 막중한 책임을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후대에는 이 시기 가면시중들의 정체를 황실의 방계 중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맡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대의 민선시중 시기로 이행한 뒤에도 시중 조지 워싱턴이 자신도 가끔은 반대 의견을 다 깔아뭉개고 가면시중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에는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라가 수월하게 잘 돌아갔던 강력한 카리스마의 시절'정도로 기억되는 것으로 보인다.

5.3. 민선 시중 시기

황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국민들에게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보냈으며 입헌군주체계가 완전히 자리잡혔다. 제국의 전성기나 다름없는 시기인데 북려대륙 개척시기에는 공격적인 원주민의 공격과 내부 혼란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었고 사상, 경제, 문화가 발전하면서 고려와 고려 이외국가의 생활 수준이 극명하게 차이나게 되었다. 철학자 존 로크는 민선시중 시기야말로 고려가 드디어 제대로 된 국민국가에 들어선 시기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6] 원래 의회인 중서성에서 투표로 뽑는 간선 형태의 구도였지만, 이후에 상민의 뜻대로 국민들이 직접 투표로 전환된다.

이때의 시중과 황제의 관계는 특수한데, 황제가 시중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대외적으로 자제하며[17] 시중에게 황제가 명령이 아닌 요청이라 하여 부탁을 하는 구도로 이뤄져 상호존중관계가 이뤄져 있다. 이는 황실의 권력을 시중에게 양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실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역대 황제들은 얼마든지 회수할 권력이 있음에도 아름다운 전통을 존중하고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중과 상호존중구도를 알아서 유지하고 있는 것임을 역대 시중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황태자 시절 해청이 외교에서 식민지를 없애야 한다는 등의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시중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우려를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민선시중에게 넘기고 황실은 물러선지 꽤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시중들이 황제를 어려워했다는 묘사도 있어, 비록 권력은 이양했지만 권위는 그대로라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역대 고려의 황제들은 모두 자국 내에서 뛰어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는 욕을 먹을 일은 직접 통치를 하는 시중들이 담당하며 황제들은 국민들의 복지 등을 주로 신경 쓰며 사적인 재산으로 이를 챙겨주는 구도로 나가기 때문이다.[18]

단, 작중에서 시중의 일은 상당히 고되다고 나오는데 가면시중 시기의 상민의 업무량과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시중을 경험한 이들은 첫날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19] 나라가 너무 큰 만큼 업무량도 상상을 초월해서 엄청난 혹사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한다.[20]

시중 집무실의 탁자는 수백 년을 쓴 것인데,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상민이 필록세라병의 대응에 쫓기다가 화가 나서 내리쳐서 갈라진 흔적이 남은 것인데, 후대의 시중들에게는 '마지막 가면시중이 내가 물러난 후에도 일 똑바로 못 하면 이 탁자처럼 만들어주겠다'라고 쪼개버리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또한 상서령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같은 위치로서 굳혀졌고, 시중이 직접 자신의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 동료를 지명하는 것이 전통이 됐다고 한다.

6. 외교

고려는 역사에 등장하는 역대 패권국 중 가장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제국의 라이벌을 자처하는 국가들도 이 부분은 차마 언급하기를 꺼려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은 도덕에 근거한 왕도정치이며, 고려가 외국을 상대로 먼저 선제공격을 한 사례는 없다. 이런 외교 원칙의 효과로 제국을 둘러싼 열강급 동맹국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21] 더 많은 우방국을 가지게 해주었기 때문에 고려가 국제 정치를 주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나 고려의 도덕주의가 유럽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작중에서 도덕주의는 고려 내부에서는 도덕적 우월주의를 강조해서 고려인들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데 써먹히지만, 세계 각지에서도 고려의 긍정적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각국의 주권 지역, 포로 대우 등을 제정한 국제법의 수호자이자 질서를 중시하며 법 지키기 좋아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어서 친고려 국가들에게는 깊은 신뢰를 사고 있으며 중화사상에 빠진 명나라 지식인들조차도 도덕성과 질서를 강조하는 고려를 군자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이 신뢰는 매우 확고해서 전쟁 도중에도 고려가 한 약속을 적국이던 오스트리아 병사들조차 한 치의 의심없이 믿을 정도다.[22] 한편으로는 고려를 적대하는 나라들이 이런 점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고립주의가 강한 고려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23] 전쟁을 마무리해서 협상장으로 끌어내 유리한 조약을 맺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아무리 깽판을 쳐도 일단 조약만 맺는다면 고려가 그 조약을 절대적으로 지킬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판단인데, 현실이라면 행복회로라는 말도 모자랄 수준의 유아적 발상이지만 이런 발상을 진지하게 믿고 실행에 옮길만큼 고려의 이미지가 굳게 자리잡혀 있다.

또한 고려는 압도적인 패권국이지만, 자연재해 등으로 피해를 본 나라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지원을 보내왔기에 압도적 1위의 자리에 있는 대신 그만한 의무를 지는 것을 패권국을 노리던 러시아 등의 나라들이 보인 만행으로 인해서 특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세계 각국이 깨달았기에 고려의 패권에 대한 반발은 없어지게 된다.[24]

6.1. 외교 등급

모든 국가는 고려와의 친선을 바라기에[25] 고려 또한 친선외교에 적극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국가들은 등급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으며 정치 외교적 특성상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26] 기준은 역사적 관계와 국가안정성, 정치체제, 국민감정, 문화나 언어 동질성을 포함한다.

6.2. 국제 연합

사국동맹과 전쟁을 겪고 전후 질서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식민지를 해방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의장국은 고려이며 상임이사국으로 조선, 도이츠 연방, 네덜란드, 옥저, 백제, 알비온 연합, 프랑스가 소속되어 있다. 원 역사의 국제연합보다 강제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세계 정부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고 있다. 현실의 국제연합과 다르게 거부권은 오직 의장국인 고려만이 행사할 수 있으며, 이 점이 현실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때문에 항상 삐그덕거리는 UN과 다르게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6.3. 대동양 조약 기구

고려와 유럽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 조약이다.

6.4. 하늘눈

고려가 주도하는 정보공동체. 소속 기관은 고려 정보총국, 조선 국가정보원, 백제 왕립정보조사실, 옥저 기무처, 에이레 수호감시단, 네덜란드 왕실정보국, 도이치 비밀경찰까지 7개국이며 설립 목적은 공산주의 확산 방지. 각 정보기관이 획득한 정보는 서로 공유하도록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정보총국이 정보 습득을 피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7. 경제

경제 비교는 고려와 고려 이외 국가로 나뉠 정도로 경제 수준이 차이가 난다. 17세기 기준 고려 혼자서 19세기 초반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의 노동자와 유럽의 상류층의 생활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작중 묘사로 보면 아센제웅이 불가리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촌구석으로 가기 싫다면서 왕 안 할 수 없냐고 애원하기도 했다. 실제 작중 묘사를 보면 고려의 중소 도시 > 콘스탄티노폴리스 > 소피아 수준으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규모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경신대기근 당시 조선에 투하된 구호물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기에 조선 조정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18세기에 전세계적 규모의 자연재해로 각국이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난감해 하면서도 48개국에게 지원을 확정했다. 오죽하면 각 국가들이 "왜 우리는 지원을 안 주냐"가 아니라 "왜 우리는 지원을 상대적으로 적게 주냐"고 불만을 품을 정도로, 사실상 전 세계에 경제원조가 가능한 수준.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에이레와 루테니아 등 동맹국들에게 식량을 무제한으로 뿌렸고, 이 탓에 현지 주민들은 전쟁전보다 더 잘 먹는다고 느낄 정도로 풍족한 식사를 맛봤다.[28]

국가들과의 격차가 좁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벌어지는 중이다. 인구도, 교육도, 자원도, 기술도, 산업도 가진 나라가 정치경제적 혼란 없이 계속 재투자를 하니 스노우볼이 굴러갈 수밖에 없다. 미래지식을 알고 있는 주인공의 영향으로 오류를 겪지 않으면서 최적의 사회, 기술, 사상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에 더하여 외국이 시행착오를 거치도록 의도적으로 기술을 유출하거나 자본을 낭비하게 하는 공작을 진행하여 격차를 매울 수 없을 정도로 벌리고 있다.

타국에서는 지하자원이 부족한 것이 고려의 약점이라 여기지만, 자국 자원을 아끼려는 고려가 자국 자원을 일부러 봉인하고 다른 나라 자원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있어서 생긴 오해이다.

청해 담쟁이거리에 전세계의 경제를 주도하는 중권거래소가 있다.

제국원 1당 10.3$
개천577년 1인당 구매력평가지수(PPP)[제국 원]는
고려연방제국이 11737원으로 3위

개천577년 구매력평가지수 기반 국내총생산(PPP GDP)
고려연방제국이 36,729,046,807,827원이다

8. 사회

풍요로운 대륙에서 나오는 경제적 여유와 상민의 정치 사회 리스크 관리 덕에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유토피아 같은 사회이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사는 동네라 범죄가 없지는 않으며 일부 고위층의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동시대 다른 국가에 비하면 인권의식이 매우 높고 국민의 생활 수준이나 의식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인권의식은 고려의 프로파간다로도 자리 잡았는데, 약속을 잘 지킨다는 이미지가 수백 년에 걸쳐서 굳혀졌다 보니 고려가 조약, 약속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을 모두가 당연시하며 또한 인권을 잘 챙기는 이미지를 내부적, 대외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29]

내부적으로는 도덕적 우월주의로 고려인들의 자부심을 채우는 식으로 사용되며, 외부로는 고려의 노동환경에 비해서 떨어지는 타국의 노동환경 탓에 고려의 기업들과 공장들이 해외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여 세계 각국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것을 압박하며 이에 대한 명분으로는 인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려에서 내부에서도 노동자들의 인권까지 챙기는 것이 유명하다 보니 고려의 본래의 의도로 생각하기보다는 각국에서는 "고려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혀를 차면서도 결벽증이 발동한 것 정도로 취급할 정도로 본래의 의도가 감춰질 정도의 효과를 보인다. 사실상 인권의식이 고려의 강력한 무기로 굳혀진 셈.

9. 군사

작중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유럽전쟁이 발발했는데 사국동맹의 국가들이 참호전과 비행선을 투입하여 전쟁을 수행할 때 고려는 군사기술 차이를 벌려 지상에서는 제병합동전술로 적을 분쇄하고 공군이 대규모 폭격을 시행한다. 2차대전 시기에는 아예 헬기가 떠오르고 보병들은 AR-15 계통의 소총을 사용하며 F-4 팬텀급의 제트 전투기와 초기형 공대공 미사일까지 사용할 정도. 상민의 기술관리 덕에 고려의 군사기술(민간 기술도)은 오류나 시행착오라는 것을 겪지 않아서 빠르게 발전하고 오히려 적성국의 시행착오를 유도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는 말.

자신들이 최강대국이고 유럽 여러 국가의 연합도 간단히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럽의 대전쟁 이후에야 자신들이 유럽 전체가 연합해야 겨우 대항할 수 있을 수준이고, 동아시아 전체가 합쳐도 당연히 자신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최초로 유럽과 접촉했을때는 이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주인공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럽 내부를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 사이에 국력 스노우볼을 굴린 결과 극단적으로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군대 내부의 복지는 최고로, 장병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다가[30] 전쟁터에서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게 신경써주는 등[31] 고려군의 복지는 좋기로 유명하다. 외인부대도 다르지 않아서, 외인부대원들은 고려 국적을 따기 위해서 입대한 외국인들이지만, 봉급도 높고 복지도 좋아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외국에도 고려군의 좋은 복지는 잘 알려져서 다들 고려와 비교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한다.[32]

10. 문화

다문화주의를 표방하여 각 대륙국가의 다양한 문화가 고려에서 융합되고 발전하고 있다.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산업의 발달이 이를 가속하고있다. 17세기 이후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을 능가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으로 구매력이 상승한 중산층이 이를 더욱 가속하고 있다.

동시에 매우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조선도 지역별 사투리가 있는데 그보다 더 거대한 고려에서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있지만 지역별 사투리는 거의 없다는 것을 보면 언어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동화가 진행된 것 같다.

앙주계나 진주계 같은 유럽계 고려인들도 고려어를 능숙하게 하며 고려의 사회에 섞여있고,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이들이 정계에서 주요인물로 활동할 정도로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없다시피하다. 그러나 아예 차별이 없는건 아니고 존재하긴 하지만, 현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한 편. 하는 이들의 경우는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데, 황실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33] 또한 우생학과 그에 따른 차별적 여론이 막 생겨나려던 시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차별을 하는 뿌리를 끊어버린 결과이기도 하다.

앙주와 진주는 고려 제국에 속하지만, 자치권을 갖고 있으며, 음식 문화 역시 미묘한 차이가 있다.[34] 그러나 조지 워싱턴처럼 유럽계 출신 시중도 나오거나 군 장성 중 유럽계 고려인들도 존재하는데, 사투리 같은 언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다양한 문화가 있으나 그에 따른 갈등은 없으며 오히려 '고려인'이라는 정체성 하나로 뭉쳐있다는 뜻이다.

전 세계에서는 예맥한족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이는 주로 동북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이나 해당 국가 1세대들이 미는 것이고 2세대나 고려인들은 문화적으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엇보다도 최우선시된다고 한다.

11. 기타

대체역사에서 극초강대국의 존재는 계륵 같은 존재인데 너무 강하기 때문에 긴장감이나 적국이 생기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하면 애초에 극초강대국이라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작중의 고려제국은 이러한 부분을 잘 피해서 묘사되고 있는데 발전하는 사회상이나 군사기술을 유럽과 비교하여 고려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원 역사에서 벌어진 사상 대립을 통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독자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법을 선도하고, 자신이 만들기 전부터 무조건 준수한다는 패러다임은 내로남불 끝판왕 대통령 각하 만세의 대한민국과 정반대의 분위기라 할 수 있다.


[1] 1852년 기준. 1800년도에는 15억 이상이었다.[2] 다만 지역에 따라 앙주의 프랑스계, 진주의 동로마계 등 유럽계 고려인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남려(남미)의 경우 예맥한과 원주민의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북려(북미)나 중려(중미) 지방은 각각 유럽계, 아즈텍을 비롯한 원주민계도 많다.[3]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며 증오와 차별을 멀리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한다. 그 큰 대륙에 사투리가 없을 정도로...[4] 제국의 3대 정당이다.[5] 의장국[6] 1원 당 10.3 달러.[7] 상민은 이 때문에 고려를 계승한다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의 군주들에게 술잔을 따르는 의식을 할 때, 속으로 왕건에게 자신의 자식은 당신의 DNA도 좀 있다고 화내지 말고 잘 봐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고려 황실은 조상을 알 수 없는 상민의 조상이 아니라 왕예의 조상인 고려 현종을 직계조상으로 여기며 제사를 올린다.[8] 지상으로 연결된 나라가 아예 없고, 바다의 경우 동서로 태평양대동양이라는 대양을 해자로 두고 있기에 제국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선을 넘기가 너무 어렵다. 농담이 아니라 타국이 공격할 수 있는 고려영토는 (제국 본토라고는 하기 힘든) 한반도의 개성과 제주도밖에 없다.[9] 이 때문에 유럽에서 후계문제를 구실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경우가 없어졌다고...[10] 원래 황후는 고려 귀족이었지만 아들과 함께 폐위 당함[11] 장인이 원역사의 세종대왕이다. 이 대체역사물에서는 고려가 대양항해를 통해 고향인 한반도를 다시 방문하며, 형인 양녕대군이 심양에서 여진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군사적 업적을 세워 세자 자리를 지키고 태종의 총애를 받아 왕이 되면서 어중간한 위치가 된 충녕대군을 포섭해 고려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때 양녕대군 역시 정치적으로 위험하지만, 자신을 잘 따라주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고려로 이주하는 것을 은근히 바랐다. 조선 왕위는 양녕대군이 머물며, 작중의 모든 조선국왕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다.[12] 후일 동방정교회의 수장 고려 로마 같은 아스트랄한 칭호가 붙는 것에서 독자들은 기묘한 감정을 느끼기도..)[13]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흙을 가져와서 고려에 뿌렸다. 손자 해원이 콘스탄티노플을 해방시키면서 다시 언급된다. 또한 황후와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 식으로 자란 덕분에 각별했고, 어린 시절에는 외조부인 이도가 운동을 강요받아서 사위인 해광과 같이 뛰고 있을 때 헬레나에게 멋져 보이려고 폼을 잡으며 "오늘 연병장에서 흘린 땀 하나가 훗날 너희들과 백성들이 흘려야 할 피를 줄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나라가 멸망한 트라우마가 있는 헬레나가 울면서 "너도 가서 뛰어."라고 떠 밀리기도 했다.[14] 그러나 상민 역시 자신이 세운 나라를 망치려는 우생학에 분노하여 쓰고 있던 가면이 금이 갈 지경으로 힘을 주는 등 말만 차분하게 하지 행동으로 분노를 대놓고 표출하고 있었기에, 해건의 분노를 탓하지 않았다.[15] 친정 집인 도쿠가와 가문이 강화 내부에서 서서히 위축되면서 왕위를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지에 몰리는 이유 때문이었다.[16] 원 역사에서 자유주의의 아버지였지만, 여기서는 고려가 먼저 기틀을 잡았기에 그 타이틀을 얻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황제는 상징적인 존재로 남고, 국민들의 투표로 뽑힌 정치인들이 임기를 갖고 통치를 담당한다는 것에 자신의 이상이 이뤄진 모습이라서인지 깊은 호감을 드러내며 고려의 대학에서 열성적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있다.[17] 딱 한 번 아동들을 착취하는 노동문제가 터져서 해원이 대노했을 때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그때가 유일한 예외였다. 온건한 해원이 대놓고 욕을 퍼부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기에, 여론도 황제랑 같이 분노하는지라 시중도 이에 항의할 수 없었다.[18] 즉 욕을 먹을 일은 시중이 다 하고, 칭찬받을 일은 황제가 독점한 구도. 하지만 실제로 고려를 통치하는 것은 시중인 만큼 불만들은 아무도 없었다.[19] 당연한 것이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진짜 세상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20] 세종대왕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어떤 시중의 경우는 휘하 상서(장관)들을 업무지옥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었다.[21] 작중 조선과 도이치는 서로 세계 2위 자리를 다투는 국가이지만, 동시에 고려의 핵심 동맹국 이기도 하다.[22] 약속 지키기 좋아하는 고려인들이 공개적인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는 믿음이다. 타국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병적인 집착이었지만, 동시에 수세기에 걸쳐서 못 박힌 신뢰의 힘이다.[23]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귀당이 창당하자 마자 곧바로 원내에 진입해서 3대 정당이 됐을 정도. 이외에도 고립주의 여론 때문에 대외 개입의 타이밍을 놓칠 것을 걱정하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24] 대신 패권과 별개로 자주성을 위해서 유럽은 유럽연합을 만들었고, 친고려 국가들이 아예 주축이 되어서 유럽에 대한 내부 패권다툼을 벌인다.[25] 혁명을 전파하려는 소비에트조차도...[26] 상대국 입장에서 왜 우리가 등급이 낮냐며 반발할 수 있기 때문.[27] 내전으로 평가가 떨어졌다.[28] 물론 냉동 고기, 야채, 곡물은 한도가 있다보니 쉽고 대량으로 운반이 가능하고 보존도 오래가는 통조림 계열이 많았지만 소고기와 참치 통조림 등 종류가 120여종에 달하는지라 원하는대로 골라서 집으로 가득 실어가고는 했다.[29] 이 때문에 초창기에 고려의 별명이 억울하게도 원조 빨갱이였다. 사실 공산주의 사상이 나오기도 전부터 고려의 정규군인 적포군의 복장이 코치닐로 염색한 붉은색이었기에 거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물론 군주제 국가다 보니 유럽 국가들도 별명으로만 취급할 뿐 결혼동맹을 맺기 좋은 상대로 여겼으며, 고려도 일단 황제가 존재하는 입헌군주제긴 해도 군주제 국가라 내심 억울해했으며, 시대가 흐른 후에 빨갱이들이 초기의 목적을 잊고 고려마저 적대하는 미치광이들이 되자 오히려 빨갱이들을 억누르는 대척점의 상징이 됐다.[30] 황실에서 특히 돈을 아끼지 않는다.[31] 심지어 간이 욕탕까지 있어서 샤워만이 아니라 목욕까지 가능하기도 하다.[32] 2차 세계대전의 소련군 역시 식사 등의 문제를 고려군과 비교는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도 아닌 도이치와 프랑스군의 풍족한 모습과 비교되어서 절망하게 된다.[33] 황후들 중에 유럽인 출신들이 여럿 있다 보니 유럽계 피가 섞인 황실 모독죄로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34] 예로 진주 사람들은 국밥에 건락(치즈)과 땅콩청(피넛버터)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놀랍게도 현실에서도 유명 프랜차이즈에서 맛을 위해 저 둘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론 신선설농탕이 땅콩과 치즈를 사용하는 체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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