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원 姜錦遠 | |
출생 | 1952년 11월 10일 |
전라북도 부안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 |
사망 | 2012년 8월 2일 (향년 59세)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요셉)[1] |
학력 | 전주공업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 / 학사) |
약력 | 창신섬유 회장 한국 염색연합회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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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 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 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호남 사람 의리 없다, 신용 없다고... 하지만 나는 보여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면 나 또한 역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다. 권력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도 내가 대통령 옆에 있음으로서 호남 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 주고 싶다.''
- 2004년 1월 노무현 대통령 측근 수사로 구치소 수감 중 만난 안희정 전 지사에게[2]
- 2004년 1월 노무현 대통령 측근 수사로 구치소 수감 중 만난 안희정 전 지사에게[2]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국염색연합회 이사, 창신섬유 회장 등을 역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순수한 의미의 유일한 재정적 후원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3]
2. 생애
1952년 11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공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섬유사업을 했는데, 지역 차별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4] 그래도 1975년 설립한 창신섬유가 크게 성장하여,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5]1998년 정치인 노무현이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할 당시 전화로 처음 만났으며, 노무현이 지역주의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에 감명받아 2000년부터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6] 노무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소신껏 정치를 하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노무현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까봐' 한치의 사업도 확장하지 않았다고 한다.[7]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자기 측근들을 요직에 거의 챙겨주지 못했는데, 강금원이 그를 대신해서 가난한 친노인사들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8]
이후 2003년 12월, 검찰 수사를 받고 배임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는데[9],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지 단 6개월만에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었다.
노무현 퇴임 후에는 검찰이 그와 노무현 주변에 대해 수사를 실시하였는데[10] 이 당시 검찰에게 최우선의 수사대상이었던 게 노무현과 강금원 사이의 비리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비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시작되면서 노무현과 강금원을 본격적으로 옥죄기 시작했다.[11] 이때부터 봉하마을에는 친노 인사들이 거의 발길을 끊다시피 하였고, 오직 강금원과 안희정 등 몇몇만이 노무현 곁을 지켰다고 한다.
2009년 4월에 1999년~2002년 주주임원에 대한 단기 대여금 형식으로 회사돈 50억원을 빼내서 회계장부상 비용과다 계상 등으로 허위변제 처리하고 같은 기간 법인세 13억5000만원을 포탈한 혐의. 특경가법상 배임 및 특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당시 노무현이 미안한 마음에 면회를 신청하려고 했으나, 마음은 알겠다면서 만류했다.[12] 강금원이 수감되기 전까지 창신섬유는 직원이 400명에 이르는 등 부산의 대표적인 섬유업체였는데, 검찰의 계속된 수사와 거래업체 압박으로 직원이 60명까지 줄어들었다. 지금도 회사 자체는 동생이 이어받아서 남아 있지만 20명 내외의 직원만 남아있는 수준이며, 예전에 비하면 회사 규모가 많이 영세해졌다.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담요를 만드는 공장만 남겼다고 한다. [13]
구속기간 동안 지병인 뇌종양이 악화되어 보석을 신청했으나 거부되었다가, 며칠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서거 당일 보석이 허가되어 노무현의 빈소 방문 후 수술을 받았다. 다만, 수술 시기를 놓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요양 생활을 하다가 2012년 8월 2일,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강금원의 사후 민주당 일부 인사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느 것이 송인배를 조사하며 확인하였는데, 검찰은 수사를 통해 2019년 송인배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하였으며, 다른 인물들(안희정, 양정철, 서갑원 등)은 수사하지 않았고 [14] 처벌 대상도 되지 않았다. 송인배가 기소된 혐의는 강금원의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자금이 아니라 그 사후에 발생한 일이다.
2018년 5월 1일, 봉하마을에 강금원의 이름을 딴 강금원기념 봉하연수원이 개원되었다.
3. 여담
- 노무현을 금전적으로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갖고 있던 요트를 노무현에게 빌려주어, 부산에서 전남 보길도까지 노무현이 쾌속 요트를 타고 다녀온 적도 있었다.
-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청와대 뒤편에 있는 원두막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노무현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청와대 경내를 둘러본 적도 있고, 대통령의 여름휴가 때는 경남 진해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15]
-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민정수석 문재인이 안희정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면서, 문재인과 불편하게 지냈다고 한다. 다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문재인과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강금원의 빈소에서 문재인은 눈물을 흘리며 강금원을 추모했다.
-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에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특히 유시민 전 의원 등이 국민참여당으로 독립해 나가는 것에 대해 강하게 만류하였으나, 결국 나가서 섭섭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16]
- 노무현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병완과 사돈을 맺었다. 그때 퇴임 직후의 자녀들의 결혼식에 노무현대통령이 주례를 섰다.
- 노무현 뿐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YS는 강금원을 강회장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해었다고. 2003년 초 노무현이 인수위원회를 통해 양김의 화해를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17] YS는 자신을 전두환/노태우와 함께 만찬에 초청했던 사실을 불쾌해하며 화해에 회의적이어서 결국 무산되었다고 한다.[18]
- 노무현이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소유 골프장에서 라운딩했다는 등의 자세한 동정이 담긴 문건을 이명박 정부에서 작성했다는 사실이 추후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당시 밝혀졌다. 즉 불법사찰을 당한 것. #
[1] #[2] 안희정 전 지사가 대통령 임기도 끝나고 덕 볼것도 없는데 대체 무슨 마음으로 대통령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3] 또다른 후원자로 박연차가 있긴 하지만, 박연차는 노무현의 형 노건평과 엮인 사람이고, 노무현을 순수하게 후원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노무현 대통령 휘하의 힘 있는 정치인들에게 로비자금을 많이 뿌린 사람이라 본인과 본인 기업의 이익을 위해 후원했다는 게 정설이다. 박연차는 그 뿐 아니라 PK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이명박의 측근에게도 상당히 많은 로비자금을 건넸다. 반면 강금원은 친노 인사들 가운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생계비를 지원했다.[4] 후일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 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호남 사람 의리 없다, 신용 없다고... 하지만 나는 보여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면 나 또한 역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다. 권력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도... 내가 대통령 옆에 있음으로서 호남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주고 싶다.”[5] 특히 창신담요는 따뜻하고 정전기가 없어서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6]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 북·강서 을 지역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에게 "이제 대통령밖에 할 게 없네"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7] 반면 박연차는 노건평 등을 앞세우며, 대대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실제로 박연차는 참여정부 기간 동안 신발산업협회장을 지냈으며, 세종증권 주식투자와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 인수로 쏠쏠한 이익을 봤다. 골프장을 건설하는가 하면 베트남 화력발전소 건설 국책사업 입찰에도 성공했다.[8] 후일 강금원은 “내가 돈 준 사람은 다 백수”라면서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이 “그 많은 돈을 왜 줬냐”고 묻자, 강금원은 “사고치지 말라고 준 것”이라면서 “그 사람들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데 먹고 살 것 없으면 사고치기 쉽지 않겠느냐. 사고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도와 준 것”이라고 답했다.[9] 2003년 12월 31일,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비서관 등이 강회장에게 면회하러 왔는데, 문재인이 "대통령께서 내일(2004년 1월 1일) 면회를 오고 싶어 하신다"고 전하자, "미쳤느냐. 여기가 어디인데, 오신다는 것이냐. 오시지 말라고 해라"라고 크게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10] 노무현이 사법시험 치르기 전부터 다녔던 성당의 송기인 신부는 이 당시 식당 가서 밥 사먹고 받은 영수증까지 검찰에게 털렸다고 한다.[11] 박연차가 노무현 퇴임 후에 권양숙에게 100만 달러의 돈을 줬다는 것에 대한 수사이다. 박연차가 준 돈에 대해 노무현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권양숙이 받은 것은 사실인 듯하고, 이를 계기로 노무현의 도덕성은 급격히 무너져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12] 이 당시 노무현은 강금원에 대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면서 홈페이지에 자신을 ‘면목 없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노무현의 자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13] 거래처 다 끊기고, 나중엔 이불 등 재고 상품들을 땡처리로 오픈마켓에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제품 품질이 무척 좋아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14] 당시 안희정과 양정철, 윤태영 등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정치자금법 위반의 소지가 없었던 점도 있다.[15] "국정원의 통치 자금이 연간 2백억원가량 되어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1천억원은 챙길 수 있다. 그런데 강회장이 ‘단 1원도 받지 말라고 해서 못 챙기겠네"라고 노무현이 농담을 해서 함께 크게 웃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통치자금의 진실은 나중에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으로 드러났다.[16] 이때 유시민에게 ‘쥐새끼처럼 정치하지 마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안희정과 이광재도 ‘유시민이 언제 우리들 말을 들었느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라고 말했다고. 강금원은 "유시민은 친노 아니다. 어떻게 해서 유시민이 친노 핵심으로 분류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말했으며 정동영과의 관계보다도 이하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17] 노무현은 3당 합당 이후 YS와 갈라서면서 대면대면한 상태였기 때문에, YS를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강금원에게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18] 양김은 2000년대까지도 서로 으르렁거리며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다. YS는 2000년 전직 대통령 초청만찬 이후 DJ에 대한 반감을 들어내며 모든 초청에 불참했고, DJ의 퇴임 이후에도 그에 대해 연일 독설을 쏟아냈다. 그나마 2005년 11월 DJ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안부전화를 하긴 했지만 5분 남짓으로 짧게 끝났다. YS가 DJ에게 가진 반감은 실로 엄청나서,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양김의 화해를 주선하려던 구 상도동계/동교동계 정치인들도 이러한 YS의 어마어마한 반감을 느낀 뒤에는 이러한 움직임을 자제했을 정도. 그렇게 곪아가던 둘의 사이는 2009년 8월, DJ가 서거하기 직전 YS가 병문안을 오면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어냈다. YS도 서거 이후에는 DJ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업적만을 이야기하며 감정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