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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6:36

가평군/역사


1. 선사시대2.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3. 고려시대4. 조선시대5. 현대

1. 선사시대

청평면 고성리에는 석영제 찍개류에 속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하며, 발굴된 석기들이 모두 북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석영제 찍개류에 해당된다.

신석기시대부터는 북한강 유역 신석기 문화 집단의 생활권 안에 포함된 곳 중 한 곳이 가평군이였고, 이 당시 신석기인들의 활동 범위는 북한강 상류역인 강원도 춘천권까지 포함하고 있다. 춘천시 봉의산 동굴과 조합 낚시 바늘이 그 증거.

청동기 시대의 전기 문화인 공렬토기문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후기 문화인 점토대토기문화는 발견된 사례가 없다. 가평역 신역사 소재지인 가평읍 달전리를 포함해서, 북면 마장리, 이곡리, 청평면 대성리 정도가 존재한다.

철기 시대의 유물이 가장 많이 발굴되었는데, 북면 마장리와 가평읍 달전리의 유적은 한국 고고학사적인 측면과 철기문화연구사적인 측면에서 한국 고고학계에 그 중요성이 널리 인식된 유적이다. 특히 2003년에 발굴된 달전리 토광묘는 한국 고고학 역사상 남한 최초로 발굴된 고조선계 토광묘 유적이기도 하다.

2.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한강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백제 > 고구려 > 신라 영토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가평 지역의 여러 읍락들이 2개의 행정 성, 촌으로 편제되어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일단 가평읍과 청평면 지역은 고구려였고, 백제 영역도 일부 있었는데 설악면과 조종면, 상면의 경우에는 백제에 속했다.

가평군[1]은 원래부터 고구려 땅이었고, 당시에는 근평군(斤平郡)으로 불렸다. 진흥왕신라에 편입되어 9주 5소경삭주에 편입되었고,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 가평군(嘉平郡, 지금의 加平과는 한자가 다르다)으로 개칭되었다. 삭주는 지금의 춘천시로, 경기도 소속인 지금과 달리 강원도 춘천시 관할이였던 셈.[2] 이 시대의 유적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현등사가 가장 유명하다.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궁예양길의 한반도판 관도대전비뇌성 전투로 가평군은 한국사에 한 획을 남기게 됐다. 비뇌성 전투에서 궁예는 양길군을 대파함으로써, 양길의 세력까지 한 번에 처묵처묵했다. 궁예는 가평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 한 번으로 한반도 중북부 지방을 통째로 꿀꺽(...)했고 이후 후고구려-태봉을 세우게 된다. 비뇌성 전투가 가평군 어디에서 진행됐는 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비뇌성이 가평군에 있는 건 사실인데 가평군 땅이 워낙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불명이다.(...)

3. 고려시대

행정구역상으로는 교주도에 속했다. 신라 때처럼 이때까지는 경기도보다는 강원도 쪽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고려시대 가평은 수도 개성에서 북한강 상류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정적 군사적 기능까지 수행하던 곳이었다.

1018년(현종 9)에 춘주의 속군이 되어 내속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춘주는 강원도 춘천시를 말하며, 교주도의 행정적 중심지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가평군의 대표적인 산으로 화악산과 청평산을 언급한다. 참고로 청평산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의 오봉산을 얘기한다. 따라서 현재의 가평군 북면과 춘천시 사북면 일부와 북산면 일대까지 영역을 넓힌 셈.

1348년에는 공민왕우왕대 왕사와 국사를 책임진 승려 보우가 48세 되던 해에 가평에다 소설암을 짓고, 82세(1382년, 우왕 8)에 입적할 때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머문 적이 있다.

1383년(우왕 9) 9월에 강릉에 침입한 왜구가 강릉-회양-김화-평강-홍천-화천-양구-춘천-가평 등 주로 북한강 유역을 따라 강원도 내륙지방으로 침략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10월에 가평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 하고, 청평산으로 퇴각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가 시작될 때부터도 춘천에 소속되어 있었고, 따로 지방관이 파견되지도 않았으며, 토착 향리가 사회를 통솔하고 있었다. 제도 변화는 1396년(태조 5)에 가평에다 처음 감무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396년(태조 5) 조종현(현 조종면, 상면)을 흡수하고, 최초로 감무를 설치하였고, 1398년에는 가평향교가 건립되었다. 가평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1413년(태종 13)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어,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다.

1507년(중종 2)에는 중종 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한 후에, 국왕의 태가 봉인된 곳이라 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가평군(加平郡)으로 바뀌었다. 신라 경덕왕 때의 한자와는 다르나 혼용된다.

1661년에는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에 경현단 서원이 건립되었고, 1697년(숙종 23)에는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1888년 5월 9일 경기 감사가 춘천부 유수를 예겸하고, 가평의 읍호를 감하하여 춘천유수부에 소속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의 통폐합 및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개편하면서 가평군은 5월 26일 한성부에 편제되었다.[3]

동년 7월 19일 "가평군·포천군 합병의 건"[4]을 통해, 가평군은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벌어지듯 가평에서도 이충응과 신재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이소웅을 중심으로 한 춘천의 의병과 결합하여 관군과 전투를 별였다. 이들 의병연합은 신임 관찰사인 조인승을 붙잡아 처단, 이후 서울로 진격한다. 그러나 가평 보납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1896년(건양 1년) 8월 4일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기존의 23부제를 폐지, 13도로 분할하면서 경기도에 편제되고 포천군에서 재분리되어, 가평군으로 독립했다(칙령 제36호, 지방제도 관제 개정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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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1910년에는 삼충단 제단이 건립되었는데, 이 제단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 등 세 충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위치해 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내서면이 군내면에 합쳐졌다.

1938년 1월 1일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명되었다.

1942년 설악면양평군에서 가평군으로 편입되었다. 청평발전소 개설로 인하여, 남면의 달전리, 이화리, 산유리, 복장리, 금대리는 가평면으로 편입 되었고, 고성리와 호명리는 외서면, 즉 현재의 청평면으로 편입되면서, 이때부터 남면이 폐지되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군 최북단의 북면 적목리 일부가 삼팔선 이북으로 넘어가 인접한 춘천군 사내면과 함께 화천군에 편입되어 화천군 사내면 적목리가 되었다. 적목리는 수복 후 가평군 북면으로 환원되었고, 함께 화천군에 편입된 사내면은 임시로 설치한 북포천군이 관할하다가 화천군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51년 한국 전쟁 당시 4월 22일 ~ 25일까지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군(영 연방군)이 북면 일대에서 치열하게 벌인 가평전투에서 승리했는데, 이 전투의 승리로 서울에서 춘천 간의 도로를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을 막아내어, 한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여 막대한 피해를 막아낸 역사적 의미를 지닌 전투로 기록되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1958년 3월 15일에는 가평지구전투전적비, 1967년 9월 30일에 영연방참전기념비가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에 건립되었다.

1963년 외서면 입석리, 내방리, 외방리가 양주군 수동면(현 남양주시 수동면)으로 편입되었다. 4월 24일에는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 호주전투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72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 현충탑이 건립되었다가 1977년에 재건립되었다.

1973년에는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 12 공포)에 의하여 7월 1일 가평면이 가평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양평군 서종면 서문리가 가평군 설악면으로, 서종면 삼회리가 가평군 외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5년에는 가평군 북면 이곡리에 캐나다전투기념비가 건립되었다가, 1983년에 재건립되었다.

1986년 6월에는 중종대왕태봉이 향토유적 제 6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3월 1일에는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가평 의병, 삼일 항일운동기념비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1895년 을미의병운동과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3.1 운동)에 참여했던 가평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다.

2004년 12월 1일에는 외서면이 청평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0년 12월 21일에는 경춘선 복선전철 신 가평역이 개통되었다. 그와 동시에 구 가평역은 버려졌다.

2015년 12월 16일에는 하면이 조종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현재, 행정구역 1읍 5면 125개리 569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6년 11월에 조종면 하판리가 조종면 운악리로 행정구역명이 변경되었다.


[1] 일단은 역사학계의 다수설에 의하면 실제의 근평군이었던 가평군의 영역은 가평읍, 북면, 그리고 청평면 또는 구 외서면 일부에 한정된다고 보면 된다.[2] 현재도 강원도청이나 춘천시청에서 가평 출신이 있을뿐더러 가평군청에 근무하되 춘천에 거주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장을 보러 춘천으로 가는 거야 지극히 당연하다. 뭐 가평에서 춘천고 통학이나 강원대학교 통학은 말할 것도 없이 두 지역이 교류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여주는 게 당연한 사실이다.[3] 칙령 제 98호 지방제도 개정건[4] 加平郡抱川郡合倂件(칙령 제144호). 말이 합병이지 사실은 가평군이 포천군에 편입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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