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J2리그가 출범하기 전까지 단일리그로써 몸집을 키우며 운영되던 시절이다. 원년 시즌에는 기존 일본 사커 리그에서 프로화한 9개 구단과 신생팀으로 창단한 1개 시민구단까지 총 10팀이 참여했다. 이후 시즌이 거듭될 수록 조건을 충족하는 JFL 구단들을 가입시켜 1998년 지금의 J1리그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18개구단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2021년 COVID-19 범유행 여파로 20개 구단 체제를 한 해 실시한 것을 제외하면 20년 넘게 18개구단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93 시즌이 시작되었고, 각 팀들은 게리 리네커, 지쿠 등 1980년대를 주름잡은 세계 축구계의 스타들을 영입하면서 리그 흥행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또한 무승부를 폐지하고 끝장 승부를 유도하면서 축구에 별 관심이 없던 라이트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시즌 평균 관중이 17000명을 돌파하며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고, 시즌 우승팀 베르디 가와사키는 특히 평균관중 25000명 돌파를 달성하면서 인기구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초 리그의 유일한 시민구단으로 고전이 예상되었던 시미즈 S펄스가 전기 4위, 후기 2위를 기록하며 의외의 선전을 했고, 반면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미쓰비시의 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는 전기와 후기 모두 최하위를 차지하며 체면을 많이 구겼다.
1996 JFL에선 J리그 준회원 자격의 팀 중 빗셀 고베 한 팀만이 리그 2위를 차지해 J리그 가입에 성공했다. 따라서 리그 출범 처음으로 17개팀 홀수 팀 체제로 시즌이 진행되었다.
연중 리그를 1년만에 버리고 다시 전,후기 리그를 시행한다. 전기리그 16경기, 후기리그 16경기로 팀당 32경기씩 소화한다.
승점제에 대한 조정이 있었다. 골든골 승리와 승부차기 승리에 지나치게 많은 승점이 걸려 이로 인해 지난 시즌 우승팀이 갈리게 되자, 골든골 승리는 2점, 승부차기 승리는 1점으로 승점을 낮췄다. 또한 기존 승부차기 패배시에도 1점을 받을수 있던 것을 폐지해 패배는 무조건 0점처리된다.
1997 JFL 우승을 차지한 준회원 클럽 콘사도레 삿포로가 리그에 가입해 18개 팀 체제가 되었다. 1999년 J2리그가 출범할 예정이라 JSL에서 J리그로 직행한 마지막 클럽이 되었다.
전, 후기 리그를 유지하고 팀 당 경기수는 전기와 후기 17경기 씩 도합 34경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강등제를 실시했다. 전기와 후기 리그 우승팀만이 챔피언결정전에 나가는 건 동일하나, 1997~1998시즌 통합 승점 하위 5팀이 1998시즌 JFL에서 2위 이내에 들어간 준회원 팀들과 J리그 승강결정전에 진출하여 차기 시즌 잔류를 위해 싸운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잔류권에 들었던 요코하마 플뤼겔스가 해체 후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합병하며 소멸했고, JFL의 J리그 준회원 2팀 중 볼랑멜 센다이가 기준 순위를 달성하지 못하며 승강결정전에는 J리그 하위 4팀, JFL 상위 1팀이 참여하는 규모로 축소되었다. 이 제도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본 팀이 1998시즌 승격한 콘사도레 삿포로. 당시 삿포로는 스몰마켓 승격팀치고는 비교적 좋은 14위로 1998시즌을 마무리했으나, 1997시즌에 승격하지 못했다는 죄로 승강 플레이오프로 밀려났고,[14]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거짓말같이 4연패를 당하며 강등되고 만다.
[1] 일본계 브라질인[2] 일본계 파라과이인[3] 재일 조선인[4] 일본계 페루인[5] 국가대표팀에선 호나우당으로 불리던 선수다.[6] 재일 조선인[7] 일본계 페루인[8] 재일 한국인[9] 국가대표팀에선 호나우당으로 불리던 선수다.[10] 재일 조선인[11] 재일 한국인[12] 재일 한국인[13] 1997년 9월 일본 귀화[14] 만일 공평하게 1998시즌 승점만으로 하위 4팀을 정했다면 14위인 삿포로는 잔류 막차를 탈 수 있었다.[15] 1997년 9월 일본 귀화[16] 재일 한국인 선수[17] 재일 한국인 선수[18] 재일 조선인 선수[19]디에고 마라도나의 친동생.[20] 일본계 페루인, 시즌 중 일본으로 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