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IG Farben로고 |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옛 본사 사옥[1] |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독일에 존재했던 염색·화학공업 기업집단.
20세기 초에는 유럽 최대의 화학회사였지만 동시에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고[2] 기업이 해체된 지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바이엘, 바스프, 훽스트 등 옛 자회사들은 전범기업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IG Farben'은 약칭이고 정식 기업명은 'Interessen-Gemeinschaft Farbenindustrie AG'였다. 번역하면 "합동염료공업주식회사" 정도다.[3]
2. 역사
본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던 1925년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게바트[4], 훽스트[5], 그리스하임엘렉트론, 바일러 테어 메어 6개사가 협약으로 기업연맹을 맺은것이 시초다. 통합을 주도하던 인물은 바스프의 카를 보슈[6]와 바이엘의 카를 뒤스베르크였으며 위의 그림은 당시 기업통합 협정에 서명하는 모습이다.(앞쪽 왼쪽이 카를 보슈(합병후 이게파르벤 의 CEO가 됨) , 오른쪽이 카를 뒤스베르크(합병후 감독위원회 의장)) 일명 '신들의 위원회' 라고 불리던 이게파르벤 감독위원회이기도 하다.
1920년대까지는 온건 우파 성향인 독일인민당을 지원하였으나 1930년대부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설파제'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술파닐아미드(Sulfonamide) 계열 물질의 특허를 갖고 있었고 이를 독점했다. 처음에는 '프론토실(Prontosil)'이란 이름의 약품이었지만 프론토실의 복잡한 화학구조 중 일부만이 항생 효능을 갖는다는 것을 곧 간파당했고 이는 복제약인 설파제의 대량 생산을 불러왔다. 특히 페니실린의 양산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 연합국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부상병들을 파상풍 등의 위험에서 구해냈고 지금도 여러 2차대전을 다룬 영화에서 상처에 흰색 가루를 뿌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업적은 치클론 B 양산으로 모두 묻혀 버렸고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학살에 치클론 B를 대량 납품하면서 대량학살용 약품 공급원이라는 오명을 영원히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는 이게파르벤의 화학 공장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생체실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2.1. 전후 처리와 해체(이게파르벤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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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슈츠슈타펠 등 정치인이나 군 관련 인사들이 혹독한 단죄를 받은 것에 비해 이게파르벤 사건의 피고들은 모두 독일 화학회사들의 대기업인 이게파르벤의 이사들이었다. 이들은 아래 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 침략전쟁과 침략전쟁의 계획, 준비, 시작, 그리고 실행.
2. 점령지의 약탈과 분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러시아에서의 공장 압류를 통한 전쟁범죄와 반인륜 범죄.
3. 점령국 수용소 수감자와 민간인, 전쟁포로, 학대, 테러, 고문, 노예 살해 등의 대규모 강제수용소 수용소 강제노역 참여와 강제노역 등을 통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4. 범죄 조직인 친위대의 일원인 죄.
5. 1, 2, 3번에서 언급된 범죄를 저지르려는 음모의 주범 또는 공동정범 역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재무장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검찰이 제시했으나 법원은 1, 2, 4, 5번 혐의를 무죄로 판정했다. 3번 "노예 노동"에서 법원은 "피고인들에게 '필요한' 방어권 행사를 허락했다."[7] 이게파르벤이 적극적으로 공장을 세워 경영한 것이 명백히 드러난 아우슈비츠만 유죄를 선고했고 다른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8] 여기서 맹활약한 이게파르벤측 변호인 중 하나가 다름아닌 반민주주의, 반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정치신학의 대가이자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법학자 중 하나인 카를 슈미트였다.
이 재판에서 인사들의 대부분은 관련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거나 감방살이만 하고 복권되는 등 솜방망이 처벌로 마무리되었으며(영어 위키백과 참고)[9] 연합군은 1951년에 이게파르벤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아그파 게바트, 바이엘, 바스프, 훽스트와 중간에 가입했던 데구사[10] 등 6개사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 관련 문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1] '푈치히 빌딩'이라고도 불린다. 운 좋게 폭격에도 살아남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는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 겸 미군 점령 지역 본부, 서독 정부 수립 후에는 미5군단 사령부로 쓰였고 독일 재통일 이후인 1996년 헤센 주정부가 매입하여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도서관으로 쓰고 있다.[2] 이 회사가 없었다면 나치가 홀로코스트는 물론, 2차대전 자체도 제대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폴 아르젠티, 제니스 포먼 《기업 홍보의 힘》37p.)[3]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한때 '파르벤 이익공동체'로 표기하였으나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다. 현재는 수정되었다.[4] 아이러니하게도 아그파의 설립자는 혈통상 유대인이자 대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둘째 아들인 파울 멘델스존이었다.[5] 현재는 프랑스계 화학회사인 사노피-아벤티스에 합병되어 사라졌다. 이 회사도 대형 화학회사였던 만큼 1990년대 초까지는 한국에도 진출해 있었고 지면광고를 싣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었었던 기업이 바로 한독약품.[6] 프리츠 하버와 함께 하버-보슈 질소고정법을 개발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7] Telford Taylor, "Nuremberg 전쟁 범죄 재판", 1949년 4월 제 450호, 국제 조정.[8] 법리적으로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문제는 정말 합리적으로 내려진 판단일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9] 당연히 무죄 또는 약한 처벌을 받은 구 제3제국 시절 임원들은 슬그머니 다들 원 소속사로 복귀했다.[10] 금괴로 유명했다. 2007년 석탄 가공 회사인 RAG와 합병하여 에보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