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혼합문자체계란 한 언어에서 문장을 쓸 때 여러 문자 체계를 섞어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2. 용어
영어로는 'mixed orthography'(혼합 정서법)이라고 한다. 'mixed script', 'mixed writing'라고도 한다.'혼합문자체계'만 다룬 영어 위키백과 문서는 아직 생성되지 않았지만, 한국어 국한문혼용체는 'Korean mixed script' 등으로 문서가 있다. 일본어의 사례를 두고는 'Japanese mixed script'라고 지칭할 때도 있다. 일본어는 예나 지금이나 섞어 쓰는 것이 보편적인 반면, 한국어에서는 혼용할지 한글만 쓸지 논쟁이 있어왔던 만큼 'mixed script'라고 검색하면 한국 자료가 많이 나온다.
3. 범주
혼합의 최소 단위는 대개 단어이다. 아래 다루는 일본어의 혼합 표기는 기본적으로 한자어/어미 식으로 나뉘며 각각의 한자어는 통째로 한자로 적거나 통째로 히라가나로 적지 일부만 한자로 적는 일은 드물다. 특정 한자의 제한으로 인해 일부만 한자로 적는 일이 간간히 등장하기는 한다(ex: 障がい者, は虫類). 단어 자체가 혼종어인 경우 단어 내에서 혼합 표기가 등장한다. (ex: 製パン) 일본어의 한자-오쿠리가나 표기처럼 하나의 형태소를 적으면서도 혼합 표기를 사용하는 드문 예도 있다. 영어의 1st(first)도 그런 예이다.대개 문자 종류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지칭하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문자는 같되 운용방식이 다른 것을 섞어 쓰는 예를 포함할 수 있다. 가령 로마자 문화권에서 언어마다 다중문자나 diacritic의 구체적인 사용법이 사뭇 다른데, 이를 섞어 쓰는 것도 넓은 의미로 혼합문자체계라고 할 수 있겠다.[1] 한국의 이두 역시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다. 이두 문장은 기본적으로 한자로 표기되기 때문에 표기 문자는 한자어와 동일하다.[2] 그러나 독법과 쓰임이 한자어와 다르기 때문에 혼합문자체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혼합문자체계는 문자언어 본문에서 문자가 혼합되는 것을 의미하며 첨자, 괄호 등으로 주석화된 보조어 병기는 포함하지 않는다.
단일한 문자체계가 존재하되 한 언어에서 2개 이상의 단일문자체계가 공존하는 것은 다중문자체계(digraphia)라 한다.
4. 현황
엄밀하게 따지면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라는 별개의 체계를 사용하므로[3] 대부분 언어들은 숫자와 언어문자를 혼합해 사용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자문화권에서는 전근대 시기 한문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으므로 한자와 혼용한 글쓰기가 나타났다. 주로 한자만으로는 온전한 자국어 표기가 어려운 일본어, 한국어에서 그러하다.
잘 알려진 언어 중에서는 일본어가 혼합문자체계로 유명하다. 일찍이 헤이안 시대에 정립된 가나-한자 혼용체계를 일한혼효문(和漢混淆文)[4], 오늘날의 혼합체계는 가나혼용문(仮名交じり文)[5]이라 한다. 기본적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한자를 섞어서 쓴다. 현대 일본어에서는 한자어와 훈독 한자로 표기된 일본 고유어는 한자로,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 순일본어와 문법 형태소들은 히라가나로, 외래어는 가타카나로 표기하는 방침을 따른다. 이렇듯 일부 고유어를 훈독이라는 기능을 통해 한자로 표기하며, 훈독 훈 중에서 일부를 가나로 표기하는 오쿠리가나 체계가 있어 한자와 히라가나 간 경계가 칼로 자른 듯이 선명하지는 않다.[6] 근대의 격동기를 제외하면 이웃 한국처럼 한자를 글말 생활에서 완전히 배제하자는 주장은 나오지 않지만 상용하는 한자의 수를 제한하게 되면서 전근대 시기에 비해서는 한자의 비율이 줄어들었다.
한국어에서 한자와의 혼합문자체계는 국한문혼용체라 한다. 한글이 창제된 후에도 한문의 영향력은 막대했으므로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 초기 한국어 자료는 한자와 섞여서 쓰였다.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공식적인 문자언어는 한자로만 이루어진 한문과 이두였고, 민간에서는 순한글체 소설이 일찍부터 퍼져 국한문혼용체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잡진 않았다. 보편적인 표기로서 국한문혼용체는 개화기에 와서야 재등장했다. 20세기부터는 마찬가지로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로마자가 혼용되는 한영혼용체도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취급되진 않는다.
대만어에서도 일부 방언에 대하여 로마자 표기가 섞이는 경우가 있고# 푸젠성 일대에서도 이러한 표기가 나타났다.#
20세기 서유럽-미국 문명의 확산으로 세계 각지에서 로마자 혼용 사례가 늘어났는데, 미국과 영어의 심대한 영향력 때문에 영어 단어를 적는 사례가 많다. 특히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키보드는 기본적으로 로마자를 기반으로 제작되어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의 컴퓨터로도 로마자는 타이핑할 수 있으므로 로마자를 혼용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할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한영혼용체로 나타나고, 러시아어에서도 간간히 로마자와 키릴 문자를 섞어 쓰곤 한다.#[7] 일본어에서도 나타나지만 세로쓰기가 주도적인 일본어 표기의 특성상 형식적 이질성[8]이 크다. 단어 차원의 혼용 표기는 여러 언어에서 다소 저항이 있지만 'A 학점', 'SI 단위', '30 cm 자' 등 기호적 용법이나 두문자어는 저항이 훨씬 약해 세계 각지에서 널리 섞여 쓰인다.[9]
로마자 문화권에서는 혼용 사례가 비교적 적다. 아무래도 로마자는 사실상 표준이기에 타 문자권 단어들이 로마자로 자주 표기되므로 외래어로 받아들일 때에도 로마자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권에선 같은 말을 키릴 문자로도 쓰고 로마자로도 쓰지만 일본어마냥 기본적으로 섞어서 쓰진 않는다.
5. 여담
제프리 샘슨의 "세계의 문자 체계"(Writing Systems: A Linguistic Introduction)#에서는[10] 9장에서 일본어의 문자 체계를 대표적인 혼합 체계(mixed system)라고 소개하였다. 책 내의 언급은 대충 말하면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문자체계라는 것이다.[11] 복잡하다고 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고,[12] 다양한 문자를 씀으로 인해 (단순하지 않은) 복합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혼합 체계로 인해 문자 전환 과정이 필요하며 시각적 혼란함을 주는 등 세계의 몇 안 되는 혼합문자체계 언어로서 일본어의 특징은 분명 존재한다.일본어는 오늘날 컴퓨터로 입력할 때 우선 발음을 로마자로 쳐서 한자나 가나문자로 변환하여 입력하는 방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와중에서 오류로 혼합 표기가 가끔 생기기도 하고 은어로도 정착한다. 가령 大好き(daisuki)를 말하려다 말이 끊기는 것을 'dais'까지 쳐서 だいs라고 쓰는 식이다. su까지 쳐야 す가 되는데 s만 치면 s라고만 나오니 가나와 로마자가 섞인다. 또한 영어 모드로 입력해야 하는데 실수로 로마자 일본어 입력 모드로 친 단어에서도 혼합 표기가 등장한다. 'google'을 로마자 일본어 입력 모드로 쳐서 ごおgぇ(go/o/g/le)가 되는 식. 한 단어 내에 로마자가 섞인 것은 아니나, 일본 인터넷의 웃음 표현인 wwwww은 로마자로 이루어진 등 일본에서는 인터넷에서 키보드 입력상의 이유로 로마자가 섞여들어가는 일이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 쓰이는 인터넷 은어 중 서로 다른 문자를 섞어쓴 것으로는 Aㅏ가 있다.
코드 스위칭이 일어난 문장을 문자로 적는다면 각각의 코드를 해당 정서법으로 적어 혼합문자체계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13] 다만 코드 스위칭 현상은 대개 구어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문자언어로는 잘 표기되지 않는다.
6. 외부 링크
[1] 예컨대 영어에서는 diacritic을 일절 사용하지 않음이 표준 표기법인데, 프랑스어 유입 단어에서는 프랑스어의 diacritic을 그대로 쓸 때가 있다. 'résumé' 등.[2] 그리고 이것이 이두 독해의 제일 첫번째 장벽이다.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은 어느 부분이 이두인지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3] 단, 중화권이나 일본에선 가격표나 메뉴판 등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한자 숫자(그리고 0)로 쓰는 경우가 있다.[4] わかんこんこうぶん. 和漢混交文이라고도 한다. 淆(섞일 효)가 상용한자표에 없기에 동음의 한자인 交(사귈 교)로 교체한 것이다.[5] 한자가나혼용문(漢字仮名交じり文)이라고도 한다.[6] 가령 '취소'를 뜻하는 토리케시(とりけし)는 取り消しㆍ取消しㆍ取消 등 3가지 표기가 공존한다.[7] 링크에서는 러시아어로 '사랑하다'를 뜻하는 любовь(lyubov)에서 -овь 부분이 영어 off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любoff, любon 식으로 사랑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장난을 하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8] 90도 눕혀서 쓰거나 1글자씩 떼어 써야 한다.[9] 중국어 글쓰기에선 로마자를 이러한 용법으로도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센티미터도 '釐米'라고 한자 표기가 따로 있다.[10] 여담으로 이 책은 한글을 '자질 문자'(featural system)라는 새로운 문자 체계라고 소개한 것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 7장이 한국의 한글, 8장이 중국의 한자, 9장이 후술할 일본어 문자 체계이다. 여기에 더해 인접 동남아시아는 주로 브라흐미계 문자를,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은 로마자를 쓰는 등 동북아/동남아 일대는 가장 다양한 문자 체계가 교차하는 지점 중 한 곳이다.[11] "일본어 글자체가 이 책에서 자리를 차지할 만한 하나의 이유는 바로 글자체가 얼마나 부담스러울 수 있고 그러면서도 실제 소용에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로서이다.(One reason why Japanese script deserves its place in this book is as an illustration of just how cumbersome a script can be and still serve in practice.)"(238쪽) 번역서의 번역이 다소 어색한 면이 있다.[12] 오히려 표의문자를 섞어서 씀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 측면도 존재한다.[13] 단, 호라! 모 젠젠 멀쩡하자나?처럼 코드 스위칭이 나타났다 해도 단일문자체계로 표기하는 예도 있다. 이는 저 표현 자체가 '일본어에 익숙한 한국어 인터넷 사용자'라는 단일한 언어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