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37년 11월 16일 |
유형 | 악천후, CFIT |
발생 위치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오스텐드 |
탑승인원 | 승객: 9명 |
승무원: 3명 | |
사망자 | 탑승객 12명 전원 사망 |
기종 | Ju-52/3mge |
항공사 | 사베나 항공 |
기체 등록번호 | OO-AUB |
출발지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뮌헨-림 공항 |
1차 경유지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 |
2차 경유지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브뤼셀 에베레 공항 |
도착지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크로이던 공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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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는 1937년 11월 16일에 발생한 비행기 사고이다. 당시 사고기 모델은 Ju 52의 여객기 버전이다.이 사고의 여파로 헤센 대공가인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은 사실상 통째로 단절되었다.
2. 배경과 사건
헤센 대공국은 독일 제국에 속했던 소국들 중 하나로,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이미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포함한 헤센 대공가의 비극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헤센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인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1937년 10월 9일 죽으면서, 10월에 예정되었던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차남인 루트비히와 영국 출신 마르가레타 게데스(1913~1997)의 결혼은 11월로 미루어졌다.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장남인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일가족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로 가려 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오스텐더에서 추락해 탑승하고 있던 헤센 대공가 일원 5명과 아이들의 간호사, 친한 친구, 비행기 조종사, 승무원 2명 등 총 12명이 전원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행기의 잔해 안에서 출생한 지 얼마 안 된 체칠리아[1]의 넷째 아이의 시신의 일부가[2] 체칠리아의 곁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체칠리아가 비행기 안에서 갑작스럽게 조산을 했고 이로 인해 급히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무리 남동생(시동생)의 결혼식이라지만 애초에 임신 초기도 아닌 만삭의 임산부를 비행기에 태운 것부터가 잘못이다. 갑작스럽게 조산을 한 것도 지상에서와 달리 비행기 안이라는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여담이지만 평소에 체칠리아는 비행을 무서워했다고 하는데 결국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비행기는 추락할 때 "I am coming down"(내려가는 중이야)라고 신호를 보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비행기는 시속 100마일의 속력으로 굴뚝을 쳤고, 하나의 날개와 엔진이 떨어졌으며 비행기는 결국 지붕에 떨어졌다. 비행기의 나머지 부분은 뒤집혔고,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거주민들은 사고현장에 즉시 달려나갔지만 끔찍한 폭발이 일어났다. 사고 2시간 이후에도 계속 불이 멈추지 않아 비행기에 다가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체칠리아의 두 아들[3]과 아이젠바흐 남작은 비행기에서 내던져진 후에 짚더미에 떨어졌지만 즉시 짚더미에 불이 붙었다 한다.
남은 것은 금속 덩이리들과 재 뿐이었으며 사상자들은 폭발 당시 모두 의식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폭발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모든 시신들은 수습되었으며 공장 방(factory room)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특파원은 대공과 대공비는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끔찍한 시련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7년 11월 비행기 추락 현장 영상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 게데스가 크로이던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제국항공의 관리가 행복해하며 웃는 둘에게 소식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루트비히는[4] 너무나 충격받아서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치료를 요구했다.
3. 사망자
헤센의 (명목상) 대공 게오르크 도나투스(1906년 11월 8일 ~ 1937년 11월 16일)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아내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체칠리아(1911년 6월 22일 ~ 1937년 11월 16일)[5]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어머니이자 죽은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아내 엘레오노레(1871년 9월 17일 ~ 1937년 11월 16일)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체칠리아의 장남 루트비히(1931년 10월 25일 ~ 1937년 11월 16일)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체칠리아의 차남 알렉산더(1933년 4월 14일 ~ 1937년 11월 16일)
Sister Lina Hahn: 아이들의 유모
Arthur Martens: 대공가의 친구
Baron von Riedesel zu Eisenbach[6]
승무원:
Antoine Lambotte: 조종사[7]
Philippe Courtois: 무선 전신 통신사
Yvan Lansmans: 정비공
4. 사고 이후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남동생 루트비히는 형 일가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마르가레타와는 다음날에 개인적으로 결혼하겠다고 알렸다.[8]친한 친구들과 가족들만이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신부는 검은색 옷을 입고 등장했고 오직 동백꽃만이 하얬다고 한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친인척들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9]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10],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나데이다[11] 등이었다.[12]
이후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는 사고를 수습하러 떠났다. 장례식은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고향인 헤센다름슈타트에서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체칠리아의 남동생인 필립 마운트배튼과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도 참석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는 애도의 뜻을 전했고, 헤르만 괴링은 직접 장례식에 참석했다.
마르가레타는 가울리터 스프렌거[13]가 헤센-다름슈타트 가족의 다섯 구성원의 목숨을 앗아간 1937년 11월 비행기 추락 이후 슬픔과 공식 의식에 대한 대중의 표현을 금지했다고 말했다. 순전히 가족에게 더 많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다름슈타트는 따르지 않았는데, 그 도시는 슬픔의 상징(검은 깃발)을 보였고, 대중은 마운트배튼경과 일련의 왕자들이 등장하는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많은 수가 나왔다. 명시적으로 반귀족-왕족 선전은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크라운에서 묘사한 장례식 장면. 영구차 바로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필립이다.[14] 이 때가 하필 나치 독일 집권기라서 나치식으로 장례식을 행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배경음악은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눈물의 날'(Lacrimosa).
사고를 수습한 이후 결혼한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는 형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형수 체칠리아가 비행기에 태우지 않고, 집에 남겨둔[15] 딸 요하나를 입양했지만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요하나도 2년이 채 못되어 수막염에 걸려 요절했다.[16] 그리고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헤센 대공국의 남계는 끊기게 된다.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남동생 루트비히가 1968년 죽은 이후, 헤센 대공국의 (명목상) 대공위는 친척 헤센카셀의 필리프, 헤센카셀의 모리츠를 이어 헤센카셀의 도나투스(1966년생)에게로 갔다.
헤센카셀의 필리프[17](1896년 11월 6일 ~ 1980년 10월 25일)
헤센카셀의 모리츠(1926년 8월 6일 ~ 2013년 5월 23일)
5. 헤센 대공가의 수난사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 : 1837년 9월 12일 ~ 1892년 3월 13일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 : 1843년 4월 25일 ~ 1878년 12월 14일, 슬퍼 보이는 건 절대 기분탓이 아니다.
헤센 대공가는 사실 역사에 크게 족적을 남긴 가문은 아니기 때문에[18]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문은 아니지만, 유럽이나 한국의 역덕후들은 이 가문이 비극으로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극의 시작은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차녀인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가 1862년에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앨리스는 루트비히 4세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1873년에 앨리스의 차남 프리드리히가 창문밖으로 떨어져 사고사했고[19], 이후 1878년에 디프테리아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앨리스의 막내딸 마리가 병사했다. 앨리스 본인도 아이들을 직접 간호하다 전염되어 끝내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비극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간 차녀 엘리자베트와 4녀 알릭스가 19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총살당하면서[20] 비극이 본격화되었다. 알다시피 알릭스와 그녀의 남편 니콜라이 2세, 장녀 올가 공주, 차녀 타티아나 공주, 3녀 마리야 공주, 4녀 아나스타시야 공주, 장남(막내) 알렉세이 황태자는 전부 총살당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앨리스와 루트비히 4세의 자녀들 중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전처[21] 사이에서 얻은 딸 엘리자베트[22]가 8살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했다. 비행기 추락 사고의 피해자 게오르크 도나투스 대공의 딸 요하나는 할머니, 부모, 오빠들과 달리 당시에 너무 어린 14개월이라는 이유로 비행기에 타지 않아서 살아남았다. 사고 직후에 요하나는 작은 아버지 부부에게 입양됐지만 이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2년도 채 안된, 1939년 6월 14일에 3살의 어린 나이로 수막염에 걸려 사망하면서 부모와 오빠들의 곁으로 갔다.
남편과 사별한 후 수녀가 되어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고 수도생활을 한 엘리자베트 : 1864년 11월 1일 ~ 1918년 7월 18일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살해된 헤센의 알릭스 : 1872년 6월 6일 ~ 1918년 7월 17일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빅토리아 멜리타의 딸로 8살에 요절한 엘리자베트 : 1895년 3월 11일 ~ 1903년 11월 16일
만 2살에 요절한 요하나 : 1936년 9월 20일 ~ 1939년 6월 14일
[1]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아내이자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이다.[2] 아들이었다고 한다.[3] 알렉산더와 루트비히는 결혼식에서 시동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4] 이미 루트비히는 한 달 전에 아버지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사망했는데, 이 추락사고로 인해 어머니, 형, 형수, 조카들까지 전부 잃게 되었다.[5] 그리스 왕국의 왕자 안드레아스(1882년 2월 2일 ~ 1944년 12월 3일)와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1885년 2월 25일 ~ 1969년 12월 5일)의 3녀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이다. 즉, 그녀의 아이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시조카들이다.[6] 신랑인 루트비히 공자의 친구로 신랑의 들러리를 맡을 예정이었다. 헤센 대공가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7] 벨기에 왕 레오폴드 3세의 친구이자 조종사.[8] 루트비히의 어머니 엘레오노레 대공비는 시누이인 빅토리아가 지내는 켄싱턴 궁전에서 머물기로 되어있었다.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체칠리아는 루이 마운트배튼경의 저택에서 머물기로 했었다.[9] 켄트 공작의 아버지 조지 5세와 루트비히의 아버지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사촌이기에, 켄트 공작과 루트비히는 육촌 지간이었다.[10] 체칠리아의 친사촌이다.[11] 나데이다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 여백작(Countess Nadejda Mikhailovna de Torby). 2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내로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친손녀이자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손녀다. 글로리아 밴더빌트 소송사건과 관련되어있다. 조지 마운트배튼은 루트비히와 사촌임과 동시에 체칠리아의 외삼촌이었다.[12] 신랑의 들러리가 사고로 사망해, 루이 마운트배튼이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다.[13] 가울리터 는 가우 또는 라이히스가우의 수장을 역임한 나치당(NSDAP)의 지역 지도자였다. Gauleiter는 나치 정치 지도력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이었고, Reichsleiter와 총통에게만 종속되었다.[14] 필립 뒤에는 나치당원들이 대열을 이루어 걷고 있으며 영국 해군 대령 한 명이 끼어 있는데, 이 사람은 필립과 체칠리아의 외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이다. 영상에는 안 나오지만 필립이 멘붕해 걸음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루이가 조카를 다독이고 같이 데려간다.[15] 아이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또 너무 아프기도 해서.[16] 요하나의 외할머니이자 체칠리아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는 요하나의 죽음을 두고 '내 아이를 두 번 잃는 기분이었다.'라고 편지에 적었다.[17] 참고로 헤센카셀의 필리프의 아내는 사보이아의 마팔다 공주(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차녀)다. 필리프의 어머니는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막내딸 마르가레테이기에,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루트비히와는 6촌이다.[18] 헤센 가문 전체적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를 지지한 필리프 정도이며 필리프도 헤센 대공가의 시조인 게오르크 1세의 부친이라 헤센 대공가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다.[19] 혈우병 환자였고 사고 이후 피가 멈추지 않아서 사망했다고 한다. 피가 멈췄더라면 살았을 거라고.[20] 4녀 알렉산드라 황후는 국민들과 일절 소통하려는 의사도 없었고,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말만 믿고 국정을 엉망으로 처리해서 죽어도 싸다는 의견이 다수다. 하지만 차녀 엘리자베트는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암살당한 이후 수녀가 되어,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며 러시아 민중들을 보살폈다는 점에서 러시아 국민들도 연민을 느꼈던 인물이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전임 황제들 때부터 이어져온 가혹한 민중들의 삶 때문이다. 물론 니콜라이 2세가 정치를 잘 못하고 민중들과의 소통은 멀리한 채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가까이 한 실책도 컸고, 이 부분에서만큼은 라스푸틴을 등용한 장본인인 알렉산드라 황후의 책임도 크다. 알렉산드라 또한 라스푸틴에게 홀려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는 시누이 올가 여대공의 조언을 무시하고, 적반하장으로 시누이를 미워했으며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21]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22] 1895년 3월 11일 ~ 1903년 11월 16일.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이복 누나이자 사망한 아이들의 이복 고모이다. 여담으로 엘리자베트와 루트비히 4세의 막내딸 마리가 죽은 날은 11월 16일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1937년 11월 16일과 날짜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