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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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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
2.1. 러시아 내
3.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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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평가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이자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양대문호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본인이 쓴 소설들만큼이나 극적인,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던 사건,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가난, 사형 선고 후 집행 직전 특사로 풀려나 혹독한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난 일, 광적인 도박 중독, 평생을 달고 산 뇌전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념 어린 애정 등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는 누구인가'라는 책들도 연구자들에 의해 시중에 많이 출판되어 있다.

20세기 학계를 뒤흔든 유명 철학자, 심리학자, 소설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1], 헤르만 헤세, 서머싯 몸, 윌리엄 포크너[2], 코맥 매카시, 버지니아 울프, 커트 보니것 등 서구권의 유명 문호뿐 아니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작가에게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같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 작가다.

작품에서 그려낸 캐릭터와 세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묘사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삶에 베풂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임사 체험이나 수년간의 시베리아 수감 생활 간 읽은 성경 등이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으며, 이러한 경험은 인류에 대한 '연민'이라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특유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또 그에게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결한 존재에 의한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며, 이는 죄와 벌의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2.1. 러시아 내

러시아 제국 황실에서도 유족들에게 매해 2천 루블을 연금으로 하사했다. 1880년대 러시아 직물 공장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의 7년치 연봉, 1900년대에는 노동자 중에서 임금이 가장 높은 축에 들던 인쇄공이나 페트로그라드 금속 기술자 연봉의 3 ~ 4배에 해당하는 돈으로 꽤 많은 액수였다. 이 연금 상속을 두고 양아들 파벨이나 아내랑 친가 친척들이 싸우자 러시아 황실에서 연금 및 재산에 대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상속권을 인정받게 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아내와 딸, 두 아들을 비롯한 식솔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갔지만, 양아들 파벨은 뒷골목에서 찌질하게 살다가 1895년 칼에 맞아 살해당했고, 사치스런 형수나 여동생 같은 친가 사람들도 거지꼴이 되어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죽은 뒤 아내 안나는 상술한대로 출판사를 정리하고 연금을 받아가며 느긋하게 살아가다가 1918년 만 71살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 딸 소냐는 1868년에 태어났지만 3달만에 요절하고 만다. 둘째인 류보프 표도로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1869~1926)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고 1920년에 쓴 회고록 "딸이 회고하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인기와 평이 좋았다. 러시아 제국 멸망 이전인 1913년부 류보프는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독신으로 죽었다. 큰 아들인 표도르(1871년 7월 16일 – 1922년 1월 4일)는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결혼하여 아들,딸을 남겨 후손이 이어지고 있으며 둘째아들인 알렉세이(1875년 8월 10일 – 1878년 5월 16일)는 일찍 죽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훗날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래서 레프 톨스토이와 달리 그는 평가절하당하고 후손들에게 주어지던 연금도 끊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칭송하던 톨스토이의 자손들은 대부분 해외로 망명한 데 반해서, 소련이 규탄하던 도스토옙스키의 자손들은 모두 소련에 남았다.

그렇지만 소련도 도스트옙스키를 완전 부정하지 못했고, 그의 책은 소련 시대에도 금서로 지정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혁명세력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 "악령"을 제외한 다른 소설들은 워낙 뛰어났던 데다가, 러시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도 그의 작품을 모두 즐겨 읽었고, 소련의 작가 대다수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금서 지정을 결사반대했다. 글을 정말로 잘 쓰면 정부의 성향에 상관없이 체제도 인정한다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를 부정하기에는 러시아 문학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이 너무 컸고, 소련 시절 작가 지망생들도 그의 작품을 교재로 삼아 습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죄와 벌1930년대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스탈린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좋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근거로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사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절하도 1930년대 제정시대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던 대숙청 이후에야 가능했으며, 혁명 직후인 1920년대만 하더라도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로 좌익 평론가들조차 찬양할 정도였다. 대숙청이 마무리된 193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학교 교과과정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1950년대 이후 장편을 기반으로 영상화가 많이 되면서 어느 정도 복권되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비판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도스토옙스키는 "반동 작가"로부터 "위대한 작가"로 복권되었고, 그의 문학성이 재평가되면서 후손들은 정부가 주는 작가 연금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저작권과 판권도 인정받았지만,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그랬듯이 소련 붕괴 후에는 당시 생존해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증손자들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처럼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3]

러시아 연방 치하에서는 소련 시절보다 더 위대한 작가로 칭송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했고 파문당한 톨스토이와는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그리스도러시아인그리스도라 믿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작가였다. 현재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 다음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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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국립 러시아 도서관(구 레닌 도서관) 앞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4] 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5]도 건립되었다.

러시아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가면 그의 유품에서 별별 물건이 다 남아있다. 그가 죽던 날, 딸아이가 슬퍼하며 쓴 낙서도 그의 담뱃갑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러시아어로 "1881년 2월 9일 사랑하는 아빠가 하늘로 가셨다..."라고 적혀 있다.

2008년에는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채널, '로시야 1'의 주최 하에 무려 5천여만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라디오, TV 투표 등을 통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의 가장 위대한 100명의 영국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는 다른 유사한 프로젝트들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7위를 차지했다. 문학가로서는 푸시킨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순위였다.[6]

3. 관련 어록

도스토옙스키는 보통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훌륭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문학적 모더니즘, 실존주의, 그리고 심리학, 신학, 문학 비평의 다양한 학파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의해 깊이 형성되어 왔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예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도스토옙스키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전집 서문

도스토옙스키는 단순히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예술적 심리학자가 아니다. 그의 창조적 모습의 독자성을 여기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내가 이 책의 전편에 걸쳐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는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이다. 러시아의 모든 형이상학적 관념은 그에서 비롯된다. 그는 열화 같은 정열적인 관념의 분위기 속에서 산다. 그는 이 관념으로 주위를 감염시키고 그 주위로 사람을 유인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관념은 일용할 정신의 양식이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신과 악마, 불멸, 자유, 약, 인간과 인류 운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사치가 아니라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불멸이 없다면 살아야 할 가치도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관념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념이다. 그에게 관념은 살아있다. 도스토옙스키의 형이상학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이상학이다. 그는 우리에게 관념의 이 구체적인 생활의 필수적 성격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적 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있다가 규칙적인 한정된 우리 세계, 3차원의 우리 공간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거다. 도스토옙스키를 정독하는 것은 반드시 인생의 한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를 불태우므로 정신은 새로운 불의 세례를 받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 접해 본 사람은 새로운 인간이 되고 그에게는 존재의 다른 차원이 전개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정신의 혁명가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를 알고 난 후부터 인간은, '도스토옙스키人'과 '그와는 무연한 인간'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그의 후기 생활로 미루어 보건대, 명성에 의해서도 그처럼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던 위대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에드워드 카, 《도스토옙스키 평전》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다 :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멋진 행운 중의 하나이다. 이 심오한 인간이 천박한 독일인을 하찮게 평가한 것은 열 번 지당한 일이었으며, 그는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시베리아 형무소의 수감자들, 사회로의 복귀 가능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하는 중범죄자들을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느꼈다ㅡ 러시아 땅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재목이자 가장 강하고 가치 있는 재목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7]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막심 고리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문학이라는 산의 여행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나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다볼 때에나 고원 사이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가 보일 법한 장대한 봉우리가 톨스토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너머에 솟은 광대무변한 봉우리다.
앙드레 지드#

도스토옙스키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창조해냈다. 사람들이 광기라 부르는 그 안에 그의 천재성의 비밀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근대 작가 그 누구보다 위대하다.#
제임스 조이스

도스토옙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는 사실상 신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헨리 밀러#

도스토옙스키는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그는 인간 지옥의 모든 계(界)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옙스키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심지어 수학자 가우스보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도스토옙스키밖에는 아무도 없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더 이상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없다.#
그의 소설은 오직 순수하게 영혼의 재료로만 빚어낸 작품들이다.#
버지니아 울프

도스토옙스키는 근대적 서사의 틀을 넘어섰다.
― 루카치 죄르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인간'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이자 대변인이다. 이 작품과 인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장폴 사르트르#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안에 있다.
커트 보니것#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였다.
알베르 카뮈#

삶 전체가 그냥 타는 듯한 아픈 상처로 느껴질 때, 절망을 숨쉬고, 희망 없음의 죽음을 죽을 때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비참함으로 고독해지고 마비되어 망연히 삶을 건너다볼 때, 삶의 거칠고도 아름다운 잔인함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고 더는 삶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가 울리는 음악에 마음을 연다.
헤르만 헤세#

만약 찰스 다윈이 도스토옙스키가 본 것을 인생에서 보았다면, 그는 종의 기원에 관한 법칙이 아니라 그것의 파괴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 레브 셰스토프

그의 심리학적 감각은 압도적이고 예지력 있다.
크누트 함순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 밤새워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감동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제 30여년이 지나 그 감동을 제대로 정리해 냈다는 기분이다. 19세기 작가였던 도스토옙스키를 21세기에 읽는다는 것에 의문을 느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작품을 통해 추구했던 자유 의지와 신,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출간하며 남긴 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은 인간이 써낸 가장 충격적인 예닐곱 편의 소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정치 소설이다.
오르한 파묵#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다양한 희화(戱畵)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 희화의 대부분은 분명 악마조차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들은 허영심이 많고 질투가 심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와 견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레프 톨스토이#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을 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
조이스 캐럴 오츠#


[1] 카프카의 작품 소송죄와 벌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도스토옙스키를 문학적 '혈연관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2] 포크너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셰익스피어 작품과 성경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문학 영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문학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비할 만큼 충분히 위대한 것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압살롬, 압살롬!>의 등장인물 토마스 서트펜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외 유사점이 많다.[3] 2000년 영국 가디언지의 탐방기사. #[4] 이 동상을 레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 과거 이름이 레닌 도서관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5] 모스크바 지하철 10호선도스토옙스카야역. 다만 러시아 지하철에 유명인의 이름을 본떠 역 이름을 짓는 것은 일종의 관습이다.[6] 1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2위 표트르 스톨리핀, 3위 스탈린, 4위 푸시킨, 5위 표트르 대제,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도스토예프스키, 8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10위는 이반 4세였다.[7] <<죄와 벌>>의 여주인공이자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인 소냐는, 니체의 기준에서 보자면 '노예의 도덕'을 신봉하는 부정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 심리 묘사를 높게 평가한 듯. 니체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상에서는 그를 깐 전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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