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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1:50:31

철새(정치)

철새 정치인에서 넘어옴
1. 개요2. 사례3. 역사4. 지방의원5. 해외 사례

1. 개요

철새가 철마다 서식지를 옮겨다니듯 정체성 없이 소속 정당[1]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정치인들을 속되게 일컫는 말. 박쥐도 유사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스포츠로 치면 저니맨이라고 한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이지만 당연히 남이 하면 철새짓 내가 하면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구국의 결단이 된다.

2. 사례

이런 평가를 자주 받는 대표적인 정치인들로는 이인제, 손학규, 김한길, 김종인, 김민석, 이찬열, 이언주, 안철수, 이상민, 조경태, 신구범, 이은영, 이용휘, 장기표, 백현종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물론 상기한 바와 같이 정치인의 이적이란 내가 하면 구국의 결단, 남이 하면 철새짓이므로 이 정치인들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긴 할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을 고른다면 아예 철새를 넘어 새들의 왕인 불사조, 피닉제라는 별명까지 얻은 이인제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민자당계 보수정당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군소정당, 민주당계 정당, 충청권 보수정당을 두루 옮겨다닌 끝에 결국 민자당계 보수정당의 후신인 주류 보수정당으로 회귀하여 안착하였다. 다만 이인제는 정말 의외로 단 한번도 가장 장수한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 마크가 찍힌 명함을 가진 적은 없었다.

김한길은 2016년 무렵 타의로 딸려간 경우는 빼고 자의적 당적 변경[2] 횟수를 세 보니 그 이인제와 타이기록인 8회였다고 해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즉 이인제의 날개그늘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 알고 보면 그 못지 않은 철새 경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느냐고 주목을 받았던 것. 하지만 당시 정치철새의 생태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철새로서 김한길은 이인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가 주류였는데, 그 이유는 김한길의 당적 변경은 어디까지나 민주당계 정당제3지대 정당의 범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데 비해 이인제는 주류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 제3지대 정당까지 아예 정당 계통을 가로지르는 행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김한길의 당적 변경은 범 민주당계 정당 내의 이합집산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인데 비해 이인제의 당적 변경은 적극적으로 소속 정당의 계통까지 바꿔타는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사실 김한길의 철새 행보는 2016년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때 조명된 것으로 이인제와 비교하면 역사가 짧다. 분당(탈당)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던 김한길을 비판적으로 보던 이들이 "당 내에서 자꾸 분열과 혼란을 주도하는 김한길 같은 인물은 이인제 같은 정치철새와 다를 게 없다"고 비판하며 그의 과거 전력을 문제삼았는데, 또 하필 그 전력에서 자의적 당적 번경 횟수가 딱 이인제와 타이기록이었더라는 좋은 놀림거리가 나와버린 덕분에 큰 화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김한길의 정치행적을 조명해보면 그의 행적에서 흔히 '정치철새'라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의 전형적 행보, 즉 정체성과 소속감보다는 상황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하여 당적을 이리저리 옮기는 행보가 나타난 것은 오히려 2017년 ~ 2018년 이후의 일이다. 범 민주당계와 접점이 있는 제3지대 정당이던 국민의당를 교두보로 삼기는 했지만 바른미래당에 합류함으로써 보수정당과 근접조우하였고, 결국 2021년 윤석열 캠프에 합류하여 이후 2022년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사실상 보수정권의 구성원으로써 정계에 복귀한 것. 다만 윤석열 캠프 및 국민통합위원회 활동은 무소속으로 하고 있으므로 2023년 8월까지도 당적 기준으로 순수한 보수정당에 속한 적은 없다. 이 점에서는 '당적 변경 횟수 논란'이 한참 퍼져나가며 유행하던 2016년 초반에는 오히려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에 회의적이던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한 갈등을 빚는 등, 제3지대 정당에 나와있기는 해도 범민주당계 정치인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편이다. 물론 이 시기는 김한길과 사이가 벌어졌던 친노계 대신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를 지내는 상황이기는 하였다.

이 문서의 설명이 이렇게 길고 장황한 이유는 특정 정치인을 '철새'라 일컫는 것은 부정적 의미가 아주 강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평가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평가자의 주관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인제쯤 되면 철새 정치인이라는 평가에 거의 반론이 나오지 않는 수준이지만 그것은 그의 행적이 소위 '철새짓'의 너무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주었기 때문으로 '아무리 주관식 서술형 문제라도 모범답안은 만들 수 있다'는 수준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당적 변경사 문서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이인제는 단지 당적을 여러 번 바꾸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대표 철새정치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당적을 바꿀 당시의 여러 전후 상황들[3]도 함께 고려되어 그에게 불사조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비교 대상으로 제시된 김한길은 물론 이 사람도 철새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 대표적인 정치인이긴 하지만, 정말 이인제와 동급의 철새라고 보는 것은 과장으로 볼 면이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김한길 당적 변경 횟수 세보니 이인제랑 타이기록'이라는 조롱거리로 소비되던 당시의 김한길에게는 양당(보수계-민주당계) 구도에서 아예 반대정파로 넘어가버리는 계통간 이적 경력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 지나 2020년대 이후 계통간 이적 경력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인제를 따라잡았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정말 이인제를 따라잡을 생각이라면 국민의힘에 아예 입당하여 윤석열 정권의 주요인사로 계속 활동하다가 또 보수정당 계통에서 떠나 새로운 노선의 정치세력에서 정치활동을 이어가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장대한 여정을 펼치기에는 그의 나이도 적지 않고 건강상의 불안요소도 상당하다는 것. 다만 민주당계 정당 내부의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그의 행보에 불만이 폭발한 민주당계 지지자들(대표적으로 친노계 지지자들)이 '같은 계통 내에서긴 하지만 그렇게 왔다갔다하면서 분란을 조장하면 철새랑 다를 게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침 철새의 대명사인 이인제와의 유사성을 찾아서 공격소재로 사용한 것에 가깝다.

그밖의 사례로는 김민(석)+(철)새='김민새'라는 별명이 붙어 조롱거리가 되었던 김민석이 있다. 이 별명이 하도 유명하다 보니 '오죽 이적 횟수가 많으면 그런 부정적인 별명이 다 붙었을 정도'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상상으로 지어내 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김민석은 오히려 실질적인 이적 횟수는 적은 편이다. 일단 2024년 기준으로 철새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의적 당적 변경 횟수'는 높게 잡아봐야 4회로 그리 많은 편이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4회 중에서도 후반의 2회는 민주당에서 사실상 쫒겨난 상태에서 당적이 소멸한 이후 신규 창당을 주도한 것,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원외 군소정당이던 이 정당을 정치적 고향이자 민주당계의 본가격인 더불어민주당에 통째로 합당시킨 것이라 '소속되어 있던 정당을 떠나 다른 정당으로 옮겼다'는 의미에서 이적(移籍)이라 보기는 민망한 점이 많다. 결국 김민석에게 철새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계기는 2002 ~ 2003년 16대 대선 정국 당시 새천년민주당국민통합21새천년민주당 사이에서 움직인 2회 이적이다. 그런데 국민통합21은 보수정당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제3지대 정당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거대 양당의 한 축인 민주당의 주된 라이벌인 민자당계 주류 보수정당이 아니다. 즉, 정치적 고향인 민주당을 적으로 돌린 적은 없으니 정치인의 이적 행보로 치면 제3지대 정당에 한 번 나갔다 온 수준이며, 게다가 그 기간도 1년 남짓으로 비교적 짧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민석은 당시 행적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도 하였다. 자신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성사시키기 위한 교섭을 목적으로 잠시 정몽준 캠프에 갔던 것일 뿐이며, 막판에 정몽준의 변심으로 단일화가 결국 파기되긴 했지만 어쨌건 노무현의 당선으로 대선도 끝나고 교섭인의 역할도 끝났으니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당사자 단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해명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과 딱 들어맞는 설명이기도 하고, 또 이에 대한 명확한 반박도 제기된 적이 없으니 완전히 무시할 만한 내용이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만약 이 해명을 받아들인다면 애초의 김민석의 행적은 소속 정당의 구성원으로 본인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므로 철새 행위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최소한 '전형적인 철새 정치인의 행태'라는 악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있는 셈이다. 당장 이 문제에서 최대 이해 당사자였던 노무현도 자서전에서 "김민석의 행동은 충격이었으나, 단일화를 위한 합리적 충정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김민석의 해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로 인해 본인(김민석)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뜻까지 보인 이상 그의 해명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김민석의 행적은 상당히 가혹하게 평가하더라도 오히려 골수 민주당 정치인에 가까운 것.

그런데 이런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김민석이 '김민새'라는 오명까지 붙으며 철새 정치인의 대명사로 낙인 찍힌 배경은 역시 해당 사건 전후의 상황 전개와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때문이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당대 정계의 최대 거물이던 이회창을 상대하기 위해 두 후보가 힘을 합치자는 의도였지만, 노무현의 지지자들을 비롯한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여당이자 거대정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선출한 대선 후보인 노무현사실상의 일인정당인 국민통합21의 대선 후보인 정몽준이 대등한 입장에서 단일화를 논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또다른 민주당 지지자 및 당내 세력들은 오히려 정몽준의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며 노무현 사퇴를 통한 정몽준으로의 후보 교체를 요구하는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후단협 파동이다. 그리고 물론 노무현 지지 세력은 이를 경선을 통해 정당하게 선출된 대선 후보를 배신하고 내부에서 공격하는 해당행위로 받아들여 격분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예 정몽준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통합21로 당적을 옮긴 김민석은 속사정이야 어떻든 가장 노골적인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노무현 지지자들을 심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그나마 단일화 논의가 성공하고 노무현으로의 단일화가 이뤄졌으니 그대로 무사히 선거가 끝나기만 했으면 김민석의 행동 역시 이해를 얻을 여지가 훨씬 많았겠지만,[4] 노무현 - 정몽준 단일화는 결국 선거 하루 전날 정몽준의 일방적인 단일화 파기로 결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다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김민석을 배신자로 여기고 격분한 것이다. 게다가 민주당 지지자 중에서도 노무현에 대한 호감이 강한 친노 성향일수록 김민석에 대한 비호감과 적대감을 더욱 크게 느꼈음은 당연지사인데, 이들은 '최초의 온라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세력답게 온라인상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자연스레 민주당 지지층에서 주류가 되었다. 이들이 '김민새'라는 입에 착착 붙는 밈을 널리 퍼트리면서 김민석의 이미지가 완전히 철새로 못박힌 것이다. 즉, 김민석의 철새 이미지는 이리저리 정당을 옮겨다니는 행적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행적에서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기까지 '정치철새'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며 인터넷 밈까지 된 정치인 세 명의 사례를 비교했는데, 보는 바와 같이 각 인물마다 그 사례의 성격과 특징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구체적인 지식 없이 정치를 그저 이미지로 소비하는 이들 중에는 이 셋이 철새 정치인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이유로 당연히 다른 정치인들보다 두드러지게 잦은 당적 변경 이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넘겨짚는 이들도 있지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조차 않은 것이다. 이 외에도 철새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은 많지만, 이 사례들을 일일하 다 소개하자면 그 분량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논란의 여지도 막대할 것이며 당연히 독자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일일이 적기보다는 각 인물에게 흥미있는 이들이 직접 해당 인물의 행적을 찾아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3. 역사

대한민국 정치에서 이러한 '철새 정치인' 들이 본격적으로 많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이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이루어진 민주화로 일단 정당정치의 제도적 틀은 자리잡았지만, 3당 합당통일국민당 창당, 자유민주연합 창당, DJP 연합을 비롯한 비롯하여 진영을 뛰어넘는 굵직굵직한 정계 개편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김영삼통일민주당(상도동계)과 김대중평화민주당(동교동계)은 각각 이후 한국의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의 중요한 기반이 되지만 그 자체는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두 민주화 운동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인맥 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초반 무렵의 당적 변경에 대해서는 딱히 철새짓이라는 평가가 붙는 경우가 드물다. 예를 들어 단순히 당적 변경만 가지고 철새여부를 성급히 판단하는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종종 제기되는 의견으로 "당적 변경했다고 무조건 철새면 노무현도 철새겠다"와 같은 것이 있는데, 사실 노무현도 통일민주당 탈당 이후 꼬마민주당 창당을 거쳐 91년 민주당에 합류했으니 당적 변경 행위 자체만 따진다면 이후 철새정치인이라 불리게 될 이들의 전형적인 행적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행적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비아냥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90년대 초반의 정국에서 노무현의 이적(移籍)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체성 없이 정당을 이리저리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정체성을 지키려 하는 행위, 말하자면 철새행위가 아닌 텃새행위로 인정받았고, 이것이 이후 노무현의 정치행보에 큰 호감요인이 되기까지 했다. 또 비꼬아 말하자면 새는 가만히 있는데 서식지가 움직일 정도로 (정치적) 기후변화가 격심했던 것.

하지만 수년이 지나 이런 이합집산이 일단락되고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1991년)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의 양당 구도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이제 이 사이를 넘어가는 정치인은 철새다' 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 양당 사이를 이동하는 정치인은 적지 않게 등장했는데, 이는 당시 양당 모두 수권능력 확보를 위해 빅 텐트 정당화를 지향했기 때문이었고, 또한 양당 구도가 정착했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의 영역, 즉 양당의 영향력이 공고하지 않은 영역에서 제3의 정당이 등장하여 적지 않은 비율의 표를 확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보수계 정당의 경우 군부독재 잔당 딱지를 달고서는 죽었다 깨도 재집권이 불가능할 것이 뻔하니 민정계건 공화계건 옛 적수인 김영삼 및 상도동계(김영삼계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고, 민주당계 정당 역시 선명 야당 이미지만으로는 선거에서 재미를 통 못 보고 있으니 '두터워진 중산층을 잡고 중도로 지지층을 넓혀야 한다'는 노선을 지향하여 전문 관료, 군인, 법조인등도 대거 영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당의 인적 기반과 정치적 이념 및 노선에도 교집합이 상당히 발생하게 됨으로써 정치인들에게 소속 정당을 갈아타는 일이 어렵지 않은 일이 된 것이다. 또한 흔히 말하는 '제3지대 정당'의 등장 사례들 역시, 결국 부동층(浮動層), 즉 양당 구도에서는 양당간 지지기반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영역을 기반으로 등장한 사례가 다수이므로 양당간 직접 이동은 힘들더라도 종종 솟아오르는 제3지대 정당을 징검돌삼아 움직이면 더욱 쉬운 이동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14대 총선에서부터 16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공천에 탈락하면 불복하여 상대 정당으로 이적해 공천을 받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이합집산이 '일단락'되었다는 것과 '완전히 마무리'되었다는 다른 문제라서 이 시기 정치인들의 이적(移籍)은 상당부분 해당 정치인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또 예를 들자면 김원웅 같은 경우 본래 노무현 대통령의 출신 정당이었던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조차 열린우리당 참여가 저조했던 상황에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소위 독수리 5형제 의원들[5]보다도 또 한발짝 더 빠르게, 아예 대선 이전에 탈당하여 아예 개혁국민정당에 1호 의원으로 합류했던 인물이다. 당적을 바꾼 행적만 봐서는 정치철새, 배신행위라는 평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 보수언론인) 조선일보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여주는 만평으로 이 사건을 희화화했다. 즉, 조선일보가 대변한 당대 보수 지지자들은 김원웅이라는 정치인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가 한나라당을 떠난 것에 대해서는 나갈 사람이 나간 것이다, 차라리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여기지 배신당한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김원웅뿐 아니라 당시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한나라당 탈당파 대부분은 성향 자체는 어지간한 민주당 정치인들보다 더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적에 대해서도 자기 갈 자리 찾아갈 만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6]. 물론 상기된 바와 같이 '철새냐 아니냐'는 결국 각자 받아들이는 이의 주관적 평가에 따르는 것이기에 이들 역시 철새라는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7]. 예를 들어, 점차 보수성향이 명확해지고 있던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진보성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당 내 입지가 점차 좁아지자 이를 피해 다른 당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적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등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이합집산의 시대가 마무리된 것은 대략 민주당에서는 노무현,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을 대통령으로 배출한 이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양대 정당 내에서도 각각 진보/보수 성향이 강한 편에 속하던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또는 그런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될 정도로) 양당의 정치적 정체성이 명확해지고 그 이념적 거리 역시 멀어진 것이다. 당연히 양당간의 교집합 역시 작아지게 되었으니 이전처럼 쉽게 이 양대 정당 계통을 갈아탈수는 없게 되었다. 거물 정치인 중에서는 2007년 손학규의 이적 정도가 이 시대를 마무리한 대규모 이벤트였다고 볼만할 것이다[8]. 물론 이 이후에도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나 정당의 당내 주도권 다툼은 당연히 계속되고 있고, 당적 변경이 꼭 정치 이념을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다, 제3지대 정당이라는 변수도 있으니 철새 정치인 논란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념 구도 편성을 위한 이합집산의 시대가 끝난 만큼, 정치인의 당적 변경에서 '본인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인한 자기 자리 찾기' 변명거리가 하나 줄어들고 이 때문에 오히려 갈짓자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들이 '철새'로 낙인찍히기 더 쉬워진 시대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

2020년대 이후 활동한 정치인의 예를 들어 본다면 김종인 등이 참고가 될 것이다. 사실 김종인 같은 경우는 특정 정당에 대한 소속감을 거의 보이지 않는 인물이고, 이 때문에 특히 정치인을 평가할 때 소속 정당에 대한 소속감과 충실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경우 그를 최악의 철새정치인, 배신 전문 정치인이라고 나쁘게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의 경우 애초에 김종인은 특정 정당에 쭉 소속되어 그곳에서 정치활동을 해 오던 정치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원하는 정당에게 초빙받아가는 형태로 정치활동을 해 온 인물이니 요청에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을 정치철새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프리랜서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는 인물인데, 프리랜서가 계약대상을 이리저리 바꾼다고 해서 그것을 이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또 이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가 특정 정당에 초빙되어 중책을 맡을때마다 '전권을 다 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일 안한다'는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지만 그래서 정말 전권을 내 줄 경우 매번 상당히 좋은 성과를 내놓는다는 특이한 행적을 가진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호오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정치인을 정치철새라고 생각하기에 그 인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인물을 싫어하기에 그에게 정치철새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김종인에 대한 평가 중에는 <정치적으로는 갈짓자 행보를 보이지만 본인의 경제정책적 소신인 소위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있다. 즉, 어떤 관점에서 보면 '철새정치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일정 측면에서는 오히려 명확한 줏대를 가지고 그 일관적인 입장을 실현하기 위해 정파를 옮긴 것이라 변명할 여지도 있다는 것. 물론 현대 사회의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이 가진 의미와 비중을 생각하면 '정당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행위'를 빼놓고 그 정치인의 정체성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정당 소속감' 이외에도 정치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결국 어떤 정치인이 철새냐 아니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독자가 각각의 정치인들의 사례를 보고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4. 지방의원

지방의원(광역·기초의원)은 지역 기반이 탄탄한 토호가 입성하는 경우가 많고 언론에 잘 보도되지도 않기 때문에 철새가 매우 많다. 이 쪽에 좋은 예시가 될만한 사례로는 울산 동구청장 3선(제4·5·8대) 당선경력을 가진 정천석이 있다. 각각 무소속, 보수정당(한나라당), 민주당계(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3회 당선되었다는 신기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구청장 당선 이전의 경력까지 따지면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정치에 입문해서 새정치국민회의까지 몸담았지만 이후 정몽준계에 합류하여 한나라당으로 입당한 이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정당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면서도 3회나 당선되었으니 지방 정계에서 단단한 지역기반을 가진 정치인이 철새적 행보를 보이기 쉬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인 것. 정천석의 경우 이러한 행보 때문에 흥미로운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울산 동구청장 선거는 얼핏 보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 및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거대 양당과 팽팽한 경쟁구도를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정당 차원에서는 오히려 진보정당이 양당보다도 명확한 우위를 보이는 특수한 선거구였던 것이다. 다만 정천석이 양당을 오가며 승리를 나눠준 것 때문에 양당 역시 동구에서 승리 이력이 생기게 된 것.

5. 해외 사례

이러한 일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일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인데 미국에도 공화당과 민주당을 서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심지어 미국 대통령을 지낸 바 있는 도널드 트럼프도 당적을 자주 바꿨으니 일종의 철새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말레이시아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총리 또한 범여권(중도우파 ~ 우파)을 나가 극우성향의 범야권에 붙는 철새 행각을 보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정치권에서는 철새논란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편인데, 이를 '각 정당이 청년조직의 운영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다보니 그 정당에 대한 애당심이 강하게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유럽 정치계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도 기성 정당의 청년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다 실망을 느끼고 타 정당 지지로 입장을 바꾸거나 아예 새로운 정당 활동에 나선 이력을 가진 이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런 현상은 20세기 중후반부터 꾸준히 일어났던 일이니 '청년 조직 활동을 통한 애착심 형성이 정치인의 이적을 어렵게 만든다'는 해석은 지나친 면이 있다.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인물로 노동당에서 자유민주인민당을 거쳐 극우로 전향한 네덜란드의 핌 포르튀인같은 인물도 있고, 이보다 더 유명한 인물의 사례를 꼽아본다면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에마뉘엘 마크롱까지 대통령중에서만 세명이나 찾아낼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 녹색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사 중 하나인 페트라 켈리 역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청년당원이었던 인물이다. 물론 사민당과 녹색당은 넓게 보면 같은 범좌파 계열이니 <극우에서 사회당>, <공산당에서 우파 공화국연합>, <사회당에서 중도주의 제3지대 정당> 사이를 종횡무진 날아다닌 프랑스의 세 대통령에 비하면 이념적 변화의 폭은 작다고 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반대로 보면 이념적 변화의 폭이 작은 페트라 켈리야말로 오히려 '청년조직의 운영을 통한 애당심 형성'에 대한 반례가 된다. 자신의 입장에 비교적 가까운 정당이 이미 탄탄한 세력을 갖추고 있고, 자신도 그 정당에서 청년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면서도 기성 주류 정당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이유로 그 당적을 버리고 대안정당 운동을 시작하여 주요 정치인 및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사례가 이미 있다는 것. 그리고 유럽 정계에서 이런 대안정치세력 운동이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이후에 처음 나타난 변화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상은 1970~80년대 무렵에도 이미 나타났던 현상인 것이다. 다만 70~80년대의 대안정치세력 운동은 급진 좌파 성향이 두드러졌던 데 비해 2020년대의 대안정치세력 운동은 대안 우파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이 다를 뿐이다.[9]

결국 유럽, 특히 서유럽 정치권에서 소위 '철새 정치인'논란이 별로 제기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 구도, 즉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다당제 구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 유럽 특유의 정치 지형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한국이나 미국 등 양당제 정치구도가 형성된 국가에서는 자연히 거대 양당간의 승자독식 경쟁구도가 첨예해지고, 여기서 상대 정당으로 넘어간 정치인에게는 십중팔구 배신자의 딱지가 붙기 쉬울 수 밖에 없다.[10] 하지만 연립정부가 흔하게 탄생하는 의원내각제 및 다당제 정치구도에서는 정당간 협력의 여지가 훨씬 넓고, 따라서 정치인의 이적이 각 정당 지지자들에게 용인될 여지 역시 훨씬 많은 것이다.

위에 소개된 한국의 경우들에서도 '아예 반대편 정당으로 들어가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당내 노선갈등 및 이합집산으로 인한 당적변경'이나 '제3지대 정당으로 이적'은 (다른 원인이 겹치지 않는 한) 철새라는 비판을 상대적으로 훨씬 덜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다당제 구도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로 '이해받을 여지'가 훨씬 더 많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게다가 양당구도에서는 3당 이하 정당들의 유지력이 약하고, 따라서 군소정당이나 제3지대 정당들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양당 중 한 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해당 정당을 구성하던 정치인 중에서는 출신정당과는 반대 진영의 정당에 들어가서 '당 내 중도파' 정도의 입지를 차지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게 된다. 반면 3당 이하 정당도 지속적인 유지가능성이 높은 다당제 구도에서는 아예 반대진영의 정당으로까지 들어가야 하는 상황은 그만큼 덜 발생하게 되므로, 이 역시 '배신자 철새' 논란이 덜 제기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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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당뿐만 아니라 지역구를 자주 옮기는 것도 일종의 철새라고 할 수도 있다.[2] 즉 소속 정당이 당명을 변경하거나 분당/합당된 경우는 빼고 자기 스스로 탈당 및 타 정당에 입당하거나 자기 자신이 분당/합당을 주도한 경우만 계산한다.[3] 일단 이인제는 더블이적, 즉 정당 계통을 두 번 바꾼 것(범민자당계 → 범민주당계 → 제3지대)의 영향이 컸다. 보통 같은 계통 내에서의 당적 변경은 어지간해서는 철새 소리까지는 듣지 않지만, 아예 계통 자체를 갈아타는 이적을 하면 철새 소리를 피하기 어려워지는 법인데, 갈아탄 곳에서 또 갈아타는 보기 드문 기록을 세웠으니 빼박 철새로 분류된 것. 그리고 탈당과 이적의 계기가 대부분 경선 탈락 후 불복 출마를 위한 탈당이었다는 점 역시 '오로지 철저히 자기자신의 이득를 위한 이적으로 보인다'는 평가의 원인이 되었다.[4] 김민석 본인의 해명에서도 "대선에서 이기면 다르게 평가받을 것이라 기대했다"고 말한다.[5]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사실은 이외에도 전국구 의원직을 포기하고 탈당한 김홍신이나 경남도지사직을 사퇴하고 탈당한 정치인도 있다[6]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2021년 이후 국민의힘의 대권주자급 주요 정치인으로 자리잡은 원희룡 같은 인물을 보더라도 2000년대 초중반, 소위 남원정이라 불리는 소장개혁파 정치인으로 분류되며 당 지도부와 자주 충돌하던 시기에는 일부 한나라당 지지자들로부터 '저럴거면 차라리 민주당으로 넘어가서 자기 정치 하지, 왜 한나라당에 있냐'는 평가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는 당시 원희룡이 한나라당 주류 지지자들에게 달갑지 않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정치인이 성향에 따라 한나라당↔민주당간의 정당간 이적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7] 심지어 이인제의 경우도 초기 행보는 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이니 있을 수 있는 이적이라고 이해받은 편이기에 민주당에서도 나름 대권후보급 입지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다만 거기서 또 통수를 치고 나가버린 점, 또 매번의 이적이 경선 패배 후 불복탈당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완전히 철새로 낙인찍힌 것. 반면 열린우리당 성립기의 한나라당 탈당파들은 명목상 여당이라곤 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한 초미니 정당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진정성은 있지 않으냐는 유리한 평가를 받기 쉬웠던 점이 있다.[8] 따라서 해당 인물의 평가 문단에서도 다루듯 <손학규는 철새인가?> 역시 철새 정치인 문제에서 중요한 참고가 될만한 사례이다. 긍정론자는 "철새라는 평가를 면하고 싶었으면 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다.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명확해진 2007년까지 머무르면서 대권주자 3인방 중 하나에 자기 계파까지 꾸릴 정도로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이후에 이적하면 철새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고 말하는 것이고, 부정론자는 "하지만 한나라당 내에서 손학규 및 손학규계가 상대적으로 당 내 중도파의 입장을 취하면서 민주당 정권에 대한 대립각을 덜 세운 것 역시 사실이 아니냐, 이를 감안하면 친이-친박 양대계파가 주도권을 잡은 이후 보수우파색이 더욱 강해진 한나라당을 떠난 것은 정치적 신념에 따른 선택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9] 정말 각잡고 따진다면 1920~30년대 유럽의 공산주의파시즘도 일종의 대안정치세력 운동으로 성장한 것이니 두어세대에 한번씩은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도 좋다.[10] 게다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직도 단 한 자리뿐이므로 양당제의 경쟁구도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