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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7:25:18

총검 돌격

착검돌격에서 넘어옴
1. 개요2. 등장배경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총검 돌격의 성공사례4. 발도 돌격과의 비교5. 매체에서의 총검 돌격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www.sonofthesouth.net/bayonet-charge-1250.jpg
미국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가 그린 남북 전쟁 당시의 총검돌격을 묘사한 삽화 "The War for the Union, 1862 - a Bayonet Charge". 미국의 정치 잡지인 하퍼즈 위클리(Harper's Weekly)에 실렸다.
일각에서는 이제 총검은 필요 없으며, 차라리 탄약을 더 지급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길이 15㎝의 날붙이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죠.
히스토리 채널, 밀리터리 Q&A
탄약이 충분히 남아 있다면 총검을 쓸 필요가 없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면 빈 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총검으로 싸우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잘 훈련된 사람이 살아남을 것이다.
미 육군 제100보병사단, 프랭크 E.행콕 병장
총검소총에 착검(소총의 앞부분에 총검을 장착)한 뒤, 적에게 돌격하는 것을 말한다. 백병전에서 같은 크기의 칼을 손에 드는 것보다 소총 앞에 장착하는 것이 보급 및 사정거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게 된다. 백병전은 높은 수준의 훈련이 필요하고 이기는 싸움에선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기에 화력이 지금보다 한참 떨어지던 1차 대전 시기까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1차 대전도 결국은 끝이 안보이는 데스매치 끝에 독일제국이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끝났지 총검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진 못했다. 다만 참호 돌파에 있어 없는 것보다야 나아서 장착했을 뿐.

총검 돌격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훈련 수준, 화력지원, 보전 협동, 허를 찌르는 방향에서의 공격이다. 이 중에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최소한 적의 사기를 무너뜨려야만 성공해 낼 수 있으며,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어도 적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다면 실패하거나 희생이 클 것이므로 아군의 훈련 수준과 사기가 높으며 적의 사기가 꺾이지 않는다면 적을 21피트(6.4008m) 이내(코앞)에서 조우하길 기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총검 돌격의 임팩트를 살리려는 대중매체에서야 함성을 지르며 적에게 돌진하는 장면만 포커스를 주기에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총검돌격은 수십~수백미터를 총알을 퍼붓는 적을 향해서 걸어서 가야한다. 달려갔다간 정작 적을 찌르고 베고 두들겨 팰 체력이 전혀 안남기 때문이다. 사실상 코앞까지 걸어서 접근한다음 마지막 순간에야 달려갈수 있었다. 러시아 영화 제독의 연인에서 정확히 묘사하는데, 탄약이 떨어진 백군이 적군의 기관총 진지를 향해 총검 돌격을 하는데... 걸어간다. #. 3분 50초부터 군악대의 음악과 함께 포격과 기관총 공격을 묵묵히 맞으며 걸어가는 게 나온다. 총검 돌격이 사장된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이것으로, 사실 대중 매체에 나오는 것처럼 계속 돌진을 하는 게 가능하다면 완전히 사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많은 신형총기나 차세대 총기는 총검 장착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특수전을 염두에 두고 생산 된 화기는 아예 처음부터 총검돌기를 상정하지 않고 설계되기도 해서 총검 돌격은 현대에 와서 보기 어렵다.

2. 등장배경

중세 말에 이 전장의 주역이 되었지만 당시 총은 정확도나 재장전 시간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특히 재장전은 아무리 숙달되어도 1분에 2발 쏘기가 힘들었고, 적이 근접해 백병전이라도 벌이면 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는 테르시오의 창병처럼 냉병기로 무장한 보조병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총기 사용자들은 자신의 총에 무거운 손잡이나 칼 가끔은 도끼나 창을 끼워서 백병전에 대비했고 각국 군대들도 총병이 창병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1600년대 쯤 머스킷에 끼울 수 있는 단검인 총검이 등장하고, 서구권 전열보병들은 전열을 갖춘 상태에서 서로를 향해 사격을 반복하다 먼저 전열이 와해되고 패주하는 쪽을 향해 착검 후 돌격하는 식으로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물론 꼭 그런 상황에서만 총검 돌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양 측이 수 차례의 총격전을 벌인 후에도 전열이 붕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거리를 좁히다가 착검 후 서로 치열하게 백병전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전쟁까지 아무리 머스킷이 발전했다지만 평균적인 발사 속도는 1분에 2~3발 정도였기에 총검 돌격 전술은 보병전술의 핵심중 하나였고, 총검 훈련이 잘된 군대가 숫적열세를 극복하고 총검 돌격으로 이기는 사례가 허다해서 각국 보병장교들, 특히 프랑스군이 착검 돌격을 죽어라 훈련시켰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몇몇 전투에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 예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라첸 고지로 돌격한 술트 휘하의 사단은 고지를 점령한 후 총알이 떨어지자 반격을 위해 올라온 오스트리아군을 총검 돌격으로 갈아버려 고지를 사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바 있다.[1]

그러나 1800년대 중반부터 총은 엄청나게 진화해서 강선미니에 탄을 통해 과거 머스킷의 약점인 명중률과 재장전 속도를 상당히 극복했으며, 1800년대 후반이 되면 후장식 소총과 탄피가 발명되면서 냉병기를 이용한 총검 돌격은 구식전술이 되어갔다. 병력 태반이 강선 머스킷과 미니에 탄으로 무장했고 소수의 자동화기가 도입된 남북 전쟁시기에도 개활지에서 적진에 돌격하는건 미친 짓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북군 8,000이 돌담을 향해 돌진하다 사상당했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선 피켓의 돌격으로 남군 5,000 가량이 사상, 4,000 가량이 포로로 잡혔을 정도였다.

물론 자동화기의 미비로 인해 총검 돌격이 아주 의미가 없었던건 아니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분수령이었던 리틀 라운드 탑에서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이 총알이 떨어진 상황에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오던 남군 연대를 상대로 착검돌격하여 고지 점령 시도를 완전히 무마시켰다. 유명한 착검돌격이라 게티즈버그 전투를 묘사하는 매체에 반드시 들어가는 장면 중 하나.

그러나 이미 언급되었듯이 탄약이 바닥나자 마지막 발악으로 총검 돌격을 감행한 것으로서 달리 말하자면 계속해서 리틀 라운드 탑을 오르던 남군은 체임벌린 대령의 메인 연대가 보유한 탄약이 바닥나도록 얻어맞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몇 번이나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계속 쉴 틈도 없이 산을 타며 '공격-후퇴-재집결-공격'이라는 무한루틴을 돌던 남군의 사기와 체력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반면 몇 번이고 남군을 격퇴시킨 메인 연대는 탄약이 떨어진 와중에도 사기가 높았다. 이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총검 돌격이 제대로 먹힌 것.

그러나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남북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북군의 연발총 보유 비율이 남북전쟁 후기에 들어서며 점차 증가했다. 흔히 카우보이총, 리피터라고 부르는 레버액션 소총과 볼트 액션 소총이다. 또 아직 기관총이라곤 초기 개틀링밖에 없는 시대였음에도 원시적인 참호전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미 1860년대부터 한계를 보이고 있었던 것. 가장 결정적으로 총검 돌격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현대식 기관총의 발명이였다. 방아쇠만 당기고 있으면 분당 수백 발의 탄환을 발사하는 기관총 때문에, 개활지에서 벌어지는 섣부른 총검 돌격은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전쟁의 전훈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때 유럽 고급장교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총검돌격이 박혀있었고 그 결과 전쟁초기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서부전선 참호전의 진상. 어디까지나 초기다. 개막장으로 유명한 1차대전도 이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지만, 전차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은 참호 난입을 위한 일제 돌격 말곤 없었다. 심지어 터널전쟁으로 상대방 참호 밑을 폭파해도 결국 진입하기 전까진 적의 포화와 살아남은 적 기관포대 및 일부 보병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나마 갈리폴리 전투에선 오스만 제국군이 시도하여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어도 영연방 연합군에게 꽤 큰 타격을 준 바 있다. 오스만 제국군 57연대가 무기가 떨어지자 너죽고 나죽자 돌격한 것이었는데, 결국 전 연대원이 전멸하였지만 이들의 돌격에 고전한 연합군이 물러선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 다른 부대는 새로운 보급을 받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57연대는 영웅적인 전공을 보인 부대로 추앙받아 현재 터키에서도 전설적인 부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총검돌격이지, 좁아터진 참호 안에서는 1미터 반은 되는 창을 휘두를 공간이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총을 던져버리고 트렌치 클럽, 야삽, 몽둥이 같은 급조 둔기로 백병전을 벌이거나 장교 시체 뒤져서 득템한 권총을 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굳이 총검을 쓸 때라면 참호 위에서 참호안에서 싸우고 있는 적군을 콕콕 찔러줄 때 정도였는데. 그 짓을 계속하고 있다간 적 기관총에게 벌집이 되기 십상이었다.

현대에는 전술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이 전술이 성공하려면 대체로 3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3가지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아군의 사기와 훈련이 적보다 월등할 것
2. 충분한 화력지원 및 공중지원이 있을 것
3. 아군의 접근을 적군이 인지하지 못할 것
물론 체임벌린의 돌격처럼 세가지 조건이 전부 미비한데, 기세와 예측하지 못한 아군의 기동으로 적이 혼란하여 패주한 경우도 있긴 하다.

일반적인 경우에 이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이면 이미 이겼다는 소리다. 통상작전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총검돌격이란 이미 이긴 상태에서 승리를 굳히거나, 탄약의 고갈 등 불리한 상황에서 사용할 마지막 수단이 된 것이다. 이마저도 훈련된 병사 한명 한명의 가치가 더더욱 높아진 현대에서는 굳이 멀쩡한 총을 놔두고 목숨을 내놓고 돌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무시하고 군사적 가치만 보더라도 총알 그까이꺼보다 사람 몇명 더 살아 있는 게 더욱 유용하다. 그래서인지 이 정도로 전술적 우위가 벌어지면 불리한 쪽이 먼저 항복하거나 유리한 쪽이 항복을 권유하는 게 보통이다.

정상적인 군대에서는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부대의 탄약 재고를 항상 체크하며, 탄약이 떨어지는 상황이 올것을 미리 예측하고 보급을 받거나, 그게 안되면 차라리 후퇴하거나 한다. 또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 역시 '그래도 현 상황에서 총검 돌격을 하면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이길 수 있다'와 같은 때이다. '반자이 돌격'처럼 무조건 최후의 발악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총검 돌격을 한다고 해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예상하면 처음부터 교전을 피하고 후퇴해서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더 옳다. 이는 '총검 돌격'이 현대전에서 사장된 가장 큰 이유이다.

이후 현대전에선 대체적으로 이런 공격을 지양하게 되나 최근의 몇몇 전장에서 의외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총검 돌격의 성공사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이다. 전술과 군사기술 및 개인화기의 발달로 착검돌격은 아예 없어질 줄 알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군 신병들은 "1차 대전 때나 쓰던 무기를 쓰라고? 미쳤냐?" "깡통이나 따는 걸로 적군하고 싸우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전쟁에서 예측 불허의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의외의 곳에서 착검돌격이 발생하고, 뜻밖에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2차대전때인 1944년의 아르덴 대공세때, 총알이 다 떨어진 미군 보병들이 착검하고 독일군에게 달려든 사례도 있었다. "방금 착검하라고 한 X색히가 누구야?"라는 반응이었지만... 아무튼 이들은 착검하고 죽자고 덤벼들었고, 적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번쩍거리고 끝이 뾰족한 물건을 들이대면서 적이 돌격할 때 그 거리가 21피트 이내로 상당히 짧다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상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시간이 더 짧아진다는 21피트 법칙(21피트는 미터법으로 6.4미터 정도) 때문이다. 이것은 주로 미국 경찰이 교육 할 때 가르치는 법칙인데 사실 이건 자신은 정지상태에서 뒤로 주춤거리며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서 쏘는 시간과, 상대는 지체 없이 단검 같은걸 휘두르며 올 때의 얘기다. 총검은 총길이+검이라 좀 더 길어 방어할 시간은 짧아지지만 보병의 소총 같은 경우 즉각사격이 가능하므로 되려 짧아지게 된다. 날카로운 무기가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경우 순간 대응 속도가 늦어져 21피트 정도의 거리에서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당연히 제대로 훈련된 군인의 경우 3미터 앞에서 확인해도 총 들고 쏘면 끝장. 일반 원룸의 현관문에서 총검돌격하는 북한군을 방 끝에서 K-2로 맞출 수 있을까 없을까를 생각하면 빠르다.

특히 착검돌격하는 쪽이 훈련된 정규군이고 당하는 쪽이 게릴라 등의 비정규군이거나 훈련도가 낮을 경우에는 돌격 시도만으로도 전선이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총보다는 칼날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감을 극복하는 것에서 훈련된 정규군이 비정규군이나 게릴라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렇듯 총검 돌격의 효과는 아직 남아있고, 세계적인 전쟁의 추세가 저강도 분쟁화되면서 총검돌격이 여전히 유효한 전술임이 증명되었다.

3.1. 한국 전쟁

3.1.1. 프랑스군지평리 전투

프랑스군은 단 1개 소대, 25명의 총검돌격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쫓아버린 적이 있다. 1951년 2월 13일에 있었던 지평리 전투에서 있었던 일로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두 명 뿐이었다. 당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상받았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 8군에게 프랑스군의 사례를 언급하며
총검은 C레이션 뚜껑을 따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프랑스군 대대장이었던 몽클라르는 "아니,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저 양키들은 왜 호들갑인거지?"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총검이 꽤 효율적이긴 했지만 그 효과가 과장되었다며 전투에서 이기려면 차라리 기관총과 수류탄, 무반동총과 바주카포 등을 쓰는 게 훨씬 더 낫다고 평가했다.링크
The French also thought that the North Koreans, and later the Chinese, were more afraid of the bayonet than of bullets, pattly from the psychological effect. They believed that the peasants who largely made up the CCF were more afraid of the bayonets they could see than the bullets that they could not. This "spirit of the bayonet" was what Ridgway wanted in his entire Eighth Army, and he used it to inspire U.S.soldier, telling them to follow the example of the French. Boyonets were not designed for opening C rations, Ridgway declared, but for fighting. Monclar, for his part, felt that the importance of the bayonet in this case was overstated and that machine guns, grenades, recoiless rifles, and bazookas were far more important in the victory. Nonetheless, he admitted the positive effect a bayonet charge had on the Chinese.

프랑스인들은 중국인과 북한인들, 특히 중국 공산군은 대부분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총알보다 총검을 더 무서워 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총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총검은 눈으로 볼 수 있어 심리적으로 더 위축되기 때문이다. 상술한대로 전투원은 훈련과 정신교육+실전에서 총격에 쓰러져가는 주변 상황을 통해 번쩍이는 날붙이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훈련되지만 대다수의 농민 게릴라들은 이런 교육이 되어있지 않았다.

3.1.2. 튀르키예군금양장리 전투

튀르키예군 역시 한국전쟁에서 전설을 만들어 냈다. 1951년 1월 25일에 벌어진 151고지(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전투에서 터키군은 중국군 제50군 예하 150사단에 맞서 돌격했고, 30분만에 중국군 474명을 박살내며 중국군을 패주시켜 151고지를 점령하였다. 사체를 확인한 결과 중공군 전사자의 대부분이 총상이 아니라 개머리판이나 칼 등에 의한 타박상, 자상으로 사망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900명 사상, 튀르키예군은 12명이 전사했으며, 때문에 연합군에서는 백병전의 터키라 칭했고 API 기자의 보도 자료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3.1.3. 미군의 180고지 탈환 전투

1951년 2월 7위 루이스 밀렛(Lewis Millett) 대위가 이끄는 27연대 이지중대가 지금의 오산 공군기지가 위치한 180고지에 위치한 중공군을 총검돌격으로 격퇴하였다. 미군이 승리한 마지막 총검전이며, 밀렛 대위는 이 전과를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3.2. 한국전쟁 이후

러시아군체첸전쟁 중 사용한 우라돌격은 러시아니까 가능하다고 넘어가더라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장에서 나온 사례가 있으니…

3.2.1. 영국군

포클랜드 전쟁 당시 1982년 6월 13~14일에 벌어진 썸블다운 고지 전투에서 존 키즐리(John Kiszely)소령의 지휘하에 영국군이 사기 진작차원에서 착검돌격을 한 적이 있었다. 첫번째 돌격 때 영국군 키즐리 소령이 총격으로 2명, 총검으로 1명의 아르헨티나 군을 사살했으나, 이에 아르헨티나 해병대도 기관총을 쏘며 착검 돌격으로 맞서면서 영국군도 3명이 부상당했다.

2004년 제 2차 이라크 전쟁당시 이라크 바스라에서 영국군 아가일&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가 착검돌격을 했다는 일화가 보도되었으나 실제는 워리어 장갑차로 투입된 병력 중 5인이 하차전투를 벌인 것이며, 그 중 1명만이 착검했다고 한다. 즉, 5인의 보병이 하차하여 참호로 돌격한 것은 사실이나 워리어 장갑차의 화력지원을 받았고 실제로는 근거리 사격으로 참호안의 마흐디 민병대를 사살한 것이다.
이 전투는 애초 영국에서도 착검 돌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하차돌격한 인원 중 착검한 1인이 과장되게 인터뷰를 한 것이 이유인 듯하다. 관련문서

2009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왕립 스코틀랜트 연대(Royal Regiment of Scotland) 소속 제임스 애덤슨(James Adamson) 중위가 탈레반과 교전 중 탄약을 전부 소모하여 한명의 적군을 사살한 뒤, 또 한명의 적군이 나타나자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2004년과 2009년의 사례에서 L85가 문제 많은 총이라 착검 돌격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A2 개량 프로그램이 2000년에 시작했으므로 두 사례 모두 A1이 아닌 A2를 사용했다.

3.2.2. 로디지아군

로디지아군은 게릴라 수색임무를 자주 수행했는데, 의심되는 마을에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포위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싶은 순간에 로디지아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일시에 수류탄 투척과 총격을 가하며 총검 돌격을 하자, 의외의 사태에 빠진 게릴라들이 도리어 포위를 풀고 도망가거나 패배한 사례가 여러차례 있었다.

앞서 영국군 사례와 마찬가지로 사기가 낮은 민병대나 게릴라들에게 총검돌격이 공포감을 줘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당연히 다른나라 특수부대와 대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군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4. 발도 돌격과의 비교

발도 돌격 항목 참조. 결론적으로는 수치적인 효용성은 총검 돌격이 앞서지만,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심리적 쇼크 효과에서는 그 때 제한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시절에선 발도 돌격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사실 21세기에도 총검보다는 장검 치켜들고 달려오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더 압박적으로 보일것이다. 이제는 장검을 휴대할 여유도 이유도 없어서 그렇지.

5. 매체에서의 총검 돌격

2004년 개봉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인민군 육군 내 백병전 전문 부대인 붉은 깃발부대도 총검 돌격 부대다. 기습전에 탁월하고 육탄전에 강해 한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후반부 두밀령 전투 때 등장해 우세하던 한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2010년 6월에 첫 방영된 한국 드라마 전우에서 착검도 안하고 총검돌격을 하는 장면이 나와서 수많은 밀덕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게임 중 국산 게임에서는 의외로 크로스파이어(2009년)가 먼저 착검 기능을 등장시켰다. 정확히는 게임 내 등장 총기인 AK-47과 동일한 스펙에 끝에 착검이 된 AK-47 Knife란 무기 한정인데, 특수 기능 버튼으로 동작 시 부착된 단검으로 찌르기 공격을 한다. 이 공격은 상반신은 즉사, 하반신은 두방에 사망이라서(물론 즉사가 아니고 높은 데미지를 가하는 게 전부다. 그래서 나노전의 나노에겐 얄짤 없다) 있어서 나쁜 건 없다는 평.

배틀필드 1에서 구현되었다. 달리면서 F키를 눌러 발동하는데, 발동하면 소리를 지르며 적에게 뛰어가 총검을 찔러넣는다. 당하는 사람의 비명소리와 칼로 찌르는 효과음 등 소리구현이 매우 뛰어난 편. 적중 시 특수병과와 일반병과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즉사시키기 때문에 활용도가 매우 높다. 배틀필드 V에도 있다.

레드 오케스트라 시리즈에서 달리는 도중 근접공격키로 사용가능하며, 총검 돌격 시 사기 및 이동속도에 조금 보너스를 준다. 또한 라이징 스톰의 일본군은 기본 보너스와 더불어 근처에 돌격하는 일본군 수에 따라 최대 5단계의 추가 보너스가 붙고, 주변의 미군에게 디버프를 준다. 일본군 5명 이상이 돌격하면 근처의 미군의 조준이 급격하게 떨리는 등, 디버프가 체감되는 수준.

콜 오브 듀티: WWII에서 시리즈 최초로 소총의 부착물로써 구현되었다. 월드 앳 워에서도 총검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사실상 멀티에서는 보기 힘든 싱글 플레이 일본군 전용템 취급이기에 써볼 일이 거의 없다. 미군 캠페인 한정으로 플레이어 캐릭터도 잘 찌르고 다니기는 하지만 대부분 아리사카에 달린 것을 쓸 뿐 미군 장비에 착검이 된 건 사실상 M1 개런드에 착검이 된거 딱 한번 나오고 끝이다. 전력질주하면서 근접공격 키를 누르면 함성을 지르며 총검 돌격을 하고 보이는 바로 앞의 적을 찔러 죽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방인 데다 출시 초반에 보병사단의 기본 제공 부착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뉴비들의 애용 대상이었으나, 사단 개편 이후 개별 부착물이 되었고, 소총 레벨을 13까지 올려야 사용할 수 있는 고인물용 장비가 되어버렸다. 렌즈 조준기가 없는 존슨과 FG42는 12.

6. 관련 문서



[1] 물론 이 당시에도 총격전만 벌여서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군이 총검돌격과 백병전 훈련을 많이 한 이유는 그만큼 당시 전장환경에서 중요도가 높기 때문이었지만 실탄사격 훈련을 할 만한 화약 재고량이 없었던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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