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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395><colcolor=#fff>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Raoul Charles Magrin-Vernerey | |
출생 | 1892년 2월 7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1964년 6월 3일 (향년 72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생 시르 사관학교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중장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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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6.25 전쟁에 파병된 UN 프랑스 대대를 지휘했다. 본명보다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로 널리 알려져 있다.[1]2. 생애
2.1. 출생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1892년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헝가리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 교사였다. 16세 때 가출하여 프랑스 육군 프랑스 외인부대에 지원했으나 연령 미달로 입대가 거부되었다.[2] 이후 그는 당시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교 예비과정으로 1년간 육군 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 1912년 사관학교에 입교, 1914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임관 후 그는 프랑스 육군 제14사단 60보병연대 소대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소대장 부임 이틀만에 전사한 중대장을 대신해 중대를 지휘했다. 부임 9일 만에 전투 중 부상으로 후송되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 중 모두 7차례 부상을 입고 수많은 훈포장을 받았다.[3]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대위로 진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제1모로코 척후병 연대(1er régiment de tirailleurs marocains (RTM)) 참모로 근무했고, 관측기 조종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24~1927년까지는 제3외인 보병연대에서 근무하고, 1928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1930년 제16샤쇠르 대대(16e bataillon de chasseurs)에서 근무하고, 1931~1941년까지 제2, 3, 4, 5외인 보병연대에서 근무했다. 1938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39년~1940년 사이에 프랑스군의 몇 안되는 승리였던 1940년 나르비크 전투(Land battles at Narvik)에서[4] 제13외인 경산악반여단(13e DB.L.MLE)(2개 대대 규모)을 지휘했다. 1940년 6월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합군이 패전한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했다. 이때 13외인여단의 절반은 영국으로, 절반은 프랑스로 철수했다.
나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항복이 임박하자 1940년 6월 9일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은 1940년 6월 18일 호소문을 통해 프랑스인의 망명과 저항을 촉구했다. 노르웨이에서 500명의 부대원과 함께 6월 16일 프랑스 브르타뉴에 도착한 그는 6월 19일 프랑스 브르타뉴의 Saint-Jacut-sur-Mer 항구에서 배를 타고 브르타뉴 앞 바다의 영국령 저지 섬으로 망명했다가 6월 21일 영국으로 철수한 13외인여단과 합류하여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한 첫번째 고위장교가 되었다.[5] 그는 보복을 우려해 '랄프 몽클라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나, 비시 프랑스 군사법원은 반역행위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한 공로로 1940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자유 프랑스 동방여단(Brigade Française Libre d'Orient)장으로 취임, 1941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에서 벌어진 케렌 전투(Battle of Keren)에 참여하기도 했다. 케렌 전투는 영국 중동사령부 산하 수단주둔군(2개 인도사단, 자유프랑스 동방여단)과 이탈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이탈리아 해군 대장을 포함해 1만 4천 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항을 점령한 전투이다. 이후 그는 1941년 장성 진급 후 동지중해 지역 최고사령관을 지내다 종전을 맞이 했다.
2.2. 6.25 전쟁
6.25 전쟁에 중령으로 참전했던 때의 모습 |
프랑스의 이런 무성의한 태도에 미국 정부는 프랑스군 시찰단이 극동지역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일본을 벗어나지 않게 할 것임을 프랑스 정부에 통고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기만적인 행위에 실망을 표명했다. 미국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좀 더 많은 유엔 회원국의 전투부대가 미국 측에 동참해 6.25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이 전쟁이 단순히 '미국 대 소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 간의 전쟁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 지상군 참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치, 외교적으로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정치, 외교적 명분상 같은 상임이사국이었던 영국과 비슷한 규모의 파병 압박을 받았고, 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실질적인 군대 파견을 요구했는데,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인 블랑 장군과 제2차 세계대전 나르비크 전투의 전쟁 영웅으로서 제2대 외인부대 사령관(1948~1950)[6]으로 근무하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 등이 군대 파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견 결정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 국방차관 막스 르젠은 위의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블랑 장군과 몽클라르 장군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블랑 장군은 "기존 부대와 관계가 없는 특별부대를 창설하고, 현역 및 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군 보병대대 형태로 구성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르젠 차관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내에 창설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블랑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했고, 몽클라르 장군도 이에 덧붙여 "만약 부대가 창설되면 제가 그 부대의 대장직을 맡겠습니다"라며 르젠 차관의 결심을 촉구했는데, 이 말에 르젠 차관은 몽클라르 장군에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몽클라르 장군은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7] 그 결과 르젠 차관도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그를 UN 프랑스군 사령관 겸 UN프랑스 대대의 행정 대대장에 임명했다. 작전대대장은 르 미르 소령이었다.
이로써 몽클라르 중장은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초대 행정대대장[8]을 역임하게 되었다. 대대장 몽클라르 중장은 처음 몇달간은 직책에 맞춰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유엔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여전히 그를 중장으로 대우해주었고, 몽클라르도 나중에는 원래대로 중장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몽클라르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 중장과 군 경력도 비슷했다. 그는 행정 대대장이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낮은 계급인 상급부대 미군 지휘관들의 명령을 받지 않았고, 군수 행정 관련 회의에는 참석해서 미군 지휘관들과 얼굴을 맞대고 여러 부탁을 해야 했다. 다른 대대와 공평하게 보급품을 분배하려는 미군 군수장교들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프랑스군 중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큰 곤란을 겪었다.[9] 미군에게 전투 명령을 받는건 작전대대장 르 미르 소령이었고, 르 미르 소령은 포탄이 난무하는 최일선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 도착한 후 미 육군 제2보병사단 23연대 휘하로 들어갔다. 수하에 국군 1개 중대를 배속받아 편제를 꾸린 몽클라르는 1951년 2월 13일에서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미 육군 제23연대와 중공군 제39군 사이에 벌어졌던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고, 원형방어진의 서면을 맡은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방어진이 뚫릴 위기에서 맞불을 놓아 총검 돌격까지 해가면서 혈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몰아내고 전투에 승리했다. 지평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실질적인 중공군의 공세종말점을 확인한 6.25 중반기 중대 전환점이었다.
몽클라르 중장은 1951년 3월 3일~8월 24일 사이에 UN 프랑스 대대의 군수지원 문제와 병력교대 문제 해결을 위해 프랑스로 일시 귀국했다. 이후 1951년 11월 28일 1년간의 한국 파병을 마치고 다시 출국하여, 일본에서 요양을 거쳐 1951년 12월 18일 프랑스에 귀국했다. 1951년 12월 28일에는 UN 프랑스 대대 파병 1진이 1년의 파병기간을 채우고 파병 2진과 교대하여 프랑스에 귀국했다.
몽클라르 중장은 1952년 5월 29일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정년 퇴역했다.
여담으로,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인 당번병을 배속받았다.[10] 몽클라르와 의사소통이 잘 될 거라는 사전 통보와는 달리, 정작 그 신학생 출신 당번병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몽클라르와 한국인 당번병은 라틴어로 서로 대화했다고 한다. [11] [12]
2.3. 말년
1962년 국립 앵발리드 보훈병원장에 취임, 재직 중 1964년 6월 4일 화창한 아침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Val-de-Grâce 국군병원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국립 앵발리드 보훈병원장으로 열린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표했다.3. 평가
몽클라르 장군은 위에서 서술한 그의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2차대전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에 그냥 남아 있었다면 좀 더 편안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 여단급 병력을 파병하지 못하고 부득이 대대급 부대를 파병하는 궁색한 상황을 가리기 위해 그의 명성을 필요로 했고, 그는 조국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던 것이다.[1] 그의 이름인 라울(Raoul)은 영어의 랄프(Ralph, 영국에서는 레이프)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두 이름의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 Raðulfr(라둘프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늑대의 충고'라는 의미이다.[2] 생전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외인부대에서 1년간 군복무를 하던 중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가족들에 의해 만 18세 이하 입대연령 미달사유로 의가사 전역 조치되었다고 한다. (파비안 몽클라르,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 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사)한국에너지법연구소, 2013, 99페이지.[3] 그는 52년 간의 군복무 중 18종의 프랑스 훈포장을 41회 수상했고, 외국에서 수여받은 훈포장도 17종에 달한다.[4] 노르웨이, 프랑스, 폴란드 연합군의 나르비크 전투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합군의 패전으로 종결.[5] 생전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 철수하여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3일 동안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부대에 가입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아직 레지스탕스 부대가 생기기 전이라 신빙성이 없다. 본인의 주장은 파비안 몽클라르,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 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사)한국에너지법연구소, 2013, 196페이지, 221페이지에 한 줄씩 언급된다.[6] 당시 명칭은 외인부대 감독관(Inspection de la Légion étrangère (I.L.E))[7] 에드완 베르고, <6·25전란의 프랑스대대>, 동아일보, 1983, 40페이지[8] 재임기간: 1950년 11월 29일 ~ 1951년 11월 30일. 일반적인 계급 강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대장에 격을 맞추기 위해 처음 몇 달간 계급장만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가 나중에는 원래대로 중장 계급장을 달았다.[9] 제아무리 동맹국 출신 아저씨라지만 영관급, 잘해야 준장들로 구성된 회의에 3성 장군이 찾아와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기 매우 난감하다. 이 중장 아저씨의 부탁을 잘못 거절했다 다른 전쟁 때 자기와 같이 싸운 (현) 직속상관 귀에 들어갔다가는(...) 이하생략. 실제로 그 안하무인 유아독존 맥아더조차 몽클라르를 제대로 장군 대접을 해줬으니 리지웨이보다 계급이나 군 경력이 낮은 알몬드 이하 미군 지휘관들은 이 백전노장을 다른 유엔군 지휘관 대하듯 대충대충 부릴 수 없었다.[10]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등 다른 외국군에도 똑같은 목적으로 한국인 병력이 배속되었었다.[11] 이상한 건 아니다. 가톨릭 신학생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라틴어, 그 다음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또는 스페인어고 프랑스어는 우선순위에서 좀 뒤로 밀려 있기 때문.[12] 라틴어로 대화를 했다는 점이 비범해 보이긴 하는데, 프랑스어의 기원을 알아보면 이상할 것은 아니다. 프랑스어가 인도유럽어족 로망스어군에 속하는데,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은 대부분 라틴어의 후손 격에 해당하는 언어들이기 때문. 특히 프랑스어는 발음을 라틴어 식으로 못 해서 그렇지 라틴어의 직계 후손으로 이탈리아어와 함께 회자될 정도로 유사성이 상당히 높다. 차이를 몇 개 들자면 어순, 굴절의 단순화(이와 함께 2/3인칭 단/복수 형태의 동사들이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주어를 꼭 써줘야 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