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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2:55:37

짱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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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3. 기타4. 관련 문서

1. 개요

중국 요리중국 음식점, 중국(중화권) 및 중국인화교(중화권), 한족, 조선족만주족 등을 가리키는 비하어, 멸칭.

2. 어원

가게의 금고(궤; 궤짝)를 관리하는 사람, 점주, 홀지배인이라는 뜻을 가진 어휘 '장궤(掌櫃, 간체: 掌柜)' 혹은 그 표준 중국어 발음인 장구이(zhǎnggu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근거 자료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만주족 군인들이 허드렛일을 맡기기 위해 산둥성에서 천민 출신의 한족들을 끌고 왔는데, 베트남과 관련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동원되기 위해 철수하자 귀국할 방법이 없던 한족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가족 단위의 소규모 매춘업[1]과 식당 등으로 돈을 벌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화교 신분을 지켜줄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믿을 것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돈을 궤짝에 넣어 두고 숭배하는 모습을 비꼬아 불렀던 것이 시간이 지나 중국인 또는 중국음식(점)의 통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식당으로 돈을 많이 번 화교들이 꽤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화교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기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돈을 궤짝에 두고 과잉반응을 일으켰지만 화교들이 모여 그 수입의 절반을 중국으로 송금을 하였는데 수입의 절반이다 보니 1923년에는 그 송금 금액이 높다는 것이 알려져 반화교 사건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
이집 장궤 전서방은 새를 심히 사랑한다. 초향이가 지금 가지고 간 앵무도 이집에서 산 거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초향이는 자로 그 상점으로 가 보았는데 더구나 그 집 주인이 마침 남방사람이어서 초향이 상해서 배운 지나어가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하였다.
1939년 12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장편소설 '마음의 향촌' 134회
최병장이 면 그릇에 담긴 전복 조각을 입에 넣자 이가 아리도록 씹히는 것이 있었다. 십만원짜리 복이 입속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짱궤'를 외치며 돌 든 음식을 탓했고...
1964년 1월 5일 조선일보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 흑진주 횡재'
스무 살 때던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짜장면을 잘 사 먹었는데, 그 그릇이나 맛, 그 방안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인의 모습까지도 내 고향의 짜장면, 그 중국집, 그 짱궤와 다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정진권 수필 '짜장면'(1976년 수필집 '비닐우산'에 수록)

일제강점기부터 일상에서 중국인 사장을 '장궤'라고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고, 1960년대 어떤 사람이 중국요리를 먹다가 음식에 돌(실은 흑진주)이 씹히자 주인을 "짱궤"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화한 이연복 쉐프도 원래 화교들이 사장한테 장궤(장궤이)라고 불리던것이 방송에서 발음 때문에 변화하였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래서, 2020년대인 현재와는 다르게 옛날에는 상업의 위상이 낮았던 시대였으므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쉽게 보면서 경멸하고 비하하는 어조로 '사기나 치는 장사치같은 중국인 새끼들' 이라고 비하하는 것이었다.

'짱깨'라는 표기는 1970년대 와서야 등장하며, 순서 상 '장궤'가 가장 먼저 쓰였고 이후 '짱궤'가 등장하며, 짱깨가 가장 나중에 등장한 점과 장궤와 짱깨의 중간 어형이 '짱궤'가 중간 시기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장궤→짱궤→짱깨로 변화해 온 것으로 봄이 합당하다.

다른 설로 짱꼴라 유래설이 있으나 학계에서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으며 이 설을 뒷받침할 근거도 제시된 바가 없다. 짱꼴라의 발음이 축약 변화하여 짱깨가 되었다는 설인데 짱꼴라(혹은 짱꼬로)→짱개의 변화는 축약이라고 하기엔 비약이 심하여 유사성이나 연속성을 찾기 힘들고 중간형 표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짱꼴라의 어원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

짱깨라는 표현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우리 동네 옆에는 짱깨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라는 예문도 등재되어 있다.

3. 기타

4. 관련 문서


[1] 당시 매춘공창제였으나 한족은 가족을 이용하여 식당으로 위장한 매춘업을 하기도 했다.[2] 참고 (한국화교의 정착과정과 실패요인 - 한국민족연구원).[3] 상표심사 기준에 대표적인 예시로 등재 된 것이 양키 고 홈이 있다.[4] 정작 3개의 전투는 수공을 쓰진 않았다. 다만 살수대첩은 도하 도중 공격받아 대부분 하천에서 궤멸되었으며, 파로호는 사망자 대부분이 파로호에 처박혀 익사한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