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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6:20:28

존 고티

<colbgcolor=#000><colcolor=#fff> 존 고티
John Gotti
파일:gotti.jpg
이름 John Joseph Gotti Jr.
존 조셉 고티 주니어
출생 1940년 10월 27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
사망 2002년 6월 10일 (향년 61세)
미국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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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마피아
신체 178cm
배우자 빅토리아 디지오르지오 (1962년 ~ 2002년)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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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

일명 말쑥한 두목(Dapper Don), 기소 면역성 두목(Teflon Don), 조니 보이(Johnny Boy)

미국 대중들에게는 시카고알 카포네 이후 가장 유명한 마피아 두목이다.

2. 생애

이탈리아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마피아와 연관된 거리의 갱단에 가담한 존 고티는 트럭 강탈, 장물 처리 등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는 범죄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특히 16세 때 학교를 자퇴해 배움이 짧았음에도 군주론의 중요한 단락들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술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가 이끄는 망가노 패밀리(현 갬비노 패밀리)에 가담한 존 고티는 행동대장(Caporegime) 카마인 페티코 산하 조직원이 되어 암흑가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멘토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사진)를 만났고 패밀리 두목(Boss) 아나스타시아를 롤 모델로 삼게 된다. 1968년 트럭 강탈 혐의로 수감된 고티는 1972년에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존 고티는 마피아 세계로 돌아갔고 불법 도박 같은 사업을 관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비록 1957년 아팔라친 회합 사건으로 미 전역의 마피아 패밀리들이 신입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탓에 고티 역시 추종세력(Associate) 신분이었지만, 이미 암흑가에서 인정받는 폭력배가 되었다.

1973년 패밀리 두목(Boss) 카를로 감비노는 자신의 조카를 납치하여 살해한 아일랜드계 조직폭력배 제임스 맥브래트니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존 고티와 2명의 부하에게 내렸다. 그들은 맥브래트니를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술집에서 살해했다. 목격자와 경찰 내부자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고티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감비노의 비호로 당대 최고의 마피아 전문 변호사인 로이 콘을 선임할 수 있었고 고작 4년형을 선고받는다.

1977년 출소한 존 고티는 갬비노 패밀리에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고 바로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을 맡았다.

1980년 존 고티의 아들을 자동차로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뉴욕시민이 실종되었다.

1985년 존 고티는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였던 폴 카스텔라노를 사살하고 행동대장(Caporegime) 20명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 두목(Boss)이 되었다. 당시 카스텔라노는 연방정부의 마피아 위원회 기소에 걸려 2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간신히 빠져나온 상태였다. 예나 지금이나 마피아 패밀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지만 표면적으론 두목의 허가를 받지 않은 마약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다. 고티는 재판이 진행되면 FBI가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기 부하들의 마약거래 사실을 카스텔라노가 알게 되어 마피아 규율에 따라 자신이 처형될 수 있음을 깨닫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런 주먹구구식 쿠데타가 가능했던 것도 카스텔라노가 부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 고티(1996)에서 묘사한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그러나 위원회의 허가 없이 두목을 살해한 고티는 제노비스 패밀리빈센트 지간테 같은 다른 마피아 두목으로부터 추격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임명한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사진)가 살해되었다. 영화 고티(2018)에서 묘사한 데치코 살인사건(gif).
프랭크 데치코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이듬해인 1987년 4월엔 고티를 노린 총격 사건이 발생했지만 오히려 습격을 가한 총잡이가 고티 측 수행원들에게 폭행당하고 납치되어 5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 결국 갬비노 패밀리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은 고티는 장기적으로 자신이 위원회를 장악하여 뉴욕 5대 패밀리 전부를 관리하는 총 두목이 되려는 원대한 야망을 키웠다.[2]

새로운 마피아 '대부(代父)'가 된 존 고티는 멋진 외모와 특유의 연예인 기질로 말쑥한 두목(Dapper Don)이라 불리며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원로 마피아들은 그런 고티의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당시 고티는 이미 FBI의 추적을 십여 년간 받고 있었고 연방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시행한 조직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2번이나 기소되었지만 번번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어 나왔다. 결정적인 증인들이 피살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받은 잠재적 증인들이 증언을 거부했으며 일부 배심원들이 매수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연방법원 앞으로 몰려와 대형 스피커로 영화 대부의 주제음악을 틀어놓고 환호성을 올렸다. 고티는 재판에서 승소한 뒤 시민들을 대상으로 낮에는 대규모 축제를 열고 밤에는 대규모 불꽃놀이를 하는 등 자신의 승리를 만방에 과시했다.
존 고티 승소 축제
그는 스스로를 불사신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앤디 워홀이 그려준 그의 초상화가 타임지 표지에 오르기도 했다. 고티는 그 과정에서 기소 면역성 두목(Teflon Don)으로 불리며 약 5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존 고티는 FBI의 끈질긴 수사로 1990년 12월에 구속 기소되었다. 당시 재판의 중대성에 비추어 보석이 허가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배신한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사진)의 내부 증언으로 1992년에 폴 카스텔라노가 포함된 5건의 살인, 1건의 살인 공모, 도박업, 사법방해, 뇌물,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져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벌금 25만 달러가 선고되었다. 이 당시 고티 재판을 총괄한 인물이 미래의 FBI 국장이자 러시아 게이트 특검을 맡게 되는 로버트 뮬러다.

재판 전 FBI는 살바토레 그라바노를 정부 측 증인으로 회유하기 위해 수사 과정에서 수집한 도청 자료를 들려주며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정적인 도청은 "그라바노는 너무 탐욕적이야."라고 고티가 얘기하는 육성이었다. 마피아 세계에서 두목(Boss)에게 찍힌 이상 머지않아 살해되거나 강등되리라는 걸 잘 알았던 그라바노는 자신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내부 증언자로 나섰다. 결과적으로 고티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도청기에 잡힘으로써 거리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당시 방청석에서 판결을 지켜본 FBI 뉴욕지국장 제임스 폭스는 공교롭게도 갬비노 패밀리 간부 조셉 데치코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유죄판결이 확정되자 존 고티는 반항적으로 일어서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법정 주위에서 마피아의 프런트 회사였던 퀸즈 구조 회사 소속 견인차가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건물 주위를 돌았다. 고티의 부하와 지지자들은 소요사태를 일으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며 연방요원 자동차 1대를 전복시키고 4대를 파손시켰으며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태로 7명이 폭행과 폭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고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존 고티 주니어(사진)의 변호사들은 그 시위가 자발적인 분출이며, 계획된 폭동이라는 걸 부인했다.

재판 후 연방보안관들이 존 고티를 일리노이 주에 있는 연방교도소로 이송하기 위해 비행기로 데려갔을 때, 그는 감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고티는 비행기를 보더니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군.(You think it's too late to say I'm sorry.)"이라고 말하며 끝까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존 고티가 수감됨에 따라 그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의 패밀리 장악을 반대하는 세력이 권력 쟁탈을 위한 항쟁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예측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고티의 조직 장악력은 굳건했다.

재판이 확정된 날 저녁엔 특집으로 뉴스가 방영되기도 했다. 재판의 주요 쟁점, 시민들의 반응, 후계구도 예상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존 고티 유죄판결을 다룬 뉴스

마리온 연방교도소로 존 고티를 이송해올 때 탈취를 저지하기 위해 2대의 F-16 전투기가 고티를 태운 비행기를 호위했다.[3]

존 고티의 수감 이후 일상적인 조직 관리는 그의 아들을 필두로 한 고위 간부들이 맡았지만 고티는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Boss)이었고 사망할 때까지 조직을 관리했으며 수감 중에도 지속적으로 사업 수익을 상납 받았다.[4]
파일:John gotti family.png
아들 존 고티 주니어와 장소변경접견[5]을 실시하는 존 고티
고티는 가족, 친구, 부하, 팬, 작가, 언론매체로부터 매일 5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고 FBI 요원 2명이 그 편지들을 검열하기 위해 연방교도소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다.

존 고티는 접견 온 가족이나 측근들에게 “사자는 우리에 갇혀도 사자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발언은 그의 딸 빅토리아 고티가 언론사 기자에게 전해 세간에 보도되었다.

전 갬비노 패밀리 간부에 따르면, 법원 명령으로 대부분의 수감 기간을 슈퍼맥스급 교도소에서 보낸 존 고티는 하루 23시간 독방 감금으로 기본적인 처우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완전하게 패밀리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6] 반면 고티의 라이벌이자 그보다 약 7년 늦은 1997년에 유죄가 확정되어 수감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경우 형량도 종신형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형기를 비교적 처우가 자유로운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보냈기에 패밀리를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즉, 두 마피아 두목의 수감으로 인한 고통의 정도와 처우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과 분노를 경험한 고티는 대리인인 아들을 통해 거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 했고 여러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7] 통제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고티는 극단적인 폭력과 두려움을 유지 수단으로 삼았다.

존 고티는 수감 중 암에 걸렸지만 가족들에게 자신을 의료시설로 후송하라는 그 어떤 요청서도 제출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는 결코 정부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결국 정부가 먼저 의료시설로 이감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2002년 존 고티는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고티는 죽음이 가까워 오자 아내와 딸들에게는 병으로 쇠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아들들의 접견만 허락했고 의사들에겐 자신에게 절대로 진통제를 투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8]

존 고티의 장례식엔 갬비노 패밀리의 거의 모든 조직원이 참석했고 운구 행렬에는 22대의 리무진과 100여 대의 자동차, 19대의 꽃차가 동원되었으며 언론에서는 4대의 뉴스 헬리콥터를 동원했다. 한 언론 보도에서는 긴 운구 행렬을 보고 뉴욕 시 역사상 전례 없는 장면이라고 평했다. 장례식장과 장지 근처에는 조문객을 제외한 3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시민들 중 일부 고티의 추종자들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에 그를 추모하는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9]
존 고티의 장례식

존 고티의 사망 이후 1999년부터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그의 형 피터 고티(사진)가 갬비노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Boss)이 되었다. 존 고티의 첫 번째 대리인이었던 존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했다. 피터 고티는 2002년에 구금되어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는데, 교도소에서도 철권통치를 한 동생과 달리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름뿐인 명목상 두목으로 남아있었다. 그가 수감되자 패밀리 고위 간부 존 다미코(사진)가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어 조직을 재정비했지만 얼마 안 가 은퇴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패밀리를 장악한 세력은 도메니코 세팔루(사진)프랭크 칼리로 대표되는 시칠리아 파벌인데, 이들은 피터 고티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이행하진 않았지만 그를 명목상 두목으로 인정하며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사업 수익의 일부를 피터 고티의 친족에게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3. 여담

영화 고티(2018) 속 존 고티-빈센트 지간테 담판 장면

4. 어록

난 죽을 때까지 라 코사 노스트라야.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후에도, 오늘 밤에도, 아니면 내가 감옥에 있는 100년 후에도.
This is gonna be La Cosa Nostra 'til I die. Be it an hour from now, or be it tonight, or a hundred years from now when I'm in jail.
난 우리 가족의 보스요, 내 아내와 아이들의.
I'm the boss of my family, my wife and kids.
당신이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37]

5. 관련 문서


[1] 당시 고티를 습격한 총잡이는 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37세의 윌리엄 시코네로 밝혀졌다. 그를 살해한 범인들은 검거되지 않았다.[2] 고티를 노린 회심의 폭탄 공격이 실패하자 위원회는 암살 시도를 중단한 뒤 통제권을 인정하고 그를 위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대대적인 기소로 마피아 지도부가 혼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실 제노비스 패밀리의 빈센트 지간테 같은 두목은 굳건했고 루케시 패밀리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으며 보난노 패밀리와 콜롬보 패밀리는 수감된 두목을 대리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이 있었기에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제일 합리적인 시각은 조직 간 항쟁은 원활한 사업에 좋지 않다는 걸 마피아 본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갬비노 패밀리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고티를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3] #[4] 월 스트리트의 부패한 은행가로 마피아의 자금 세탁을 하다 2003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살 로마노의 출소 후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갬비노 패밀리 소속이었는데 본인의 사업 수익을 고티 측에 상납했다고 밝혔다.[5] 교도소장 직권으로 접촉차단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특별한 장소에서 실시하는 접견[6] 고티가 수감되었던 마리온 연방교도소는 그가 사망한 뒤인 2006년에 중간 계호급 교도소(Medium-Security Prison)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중경비시설로 분류된다. 기존의 슈퍼맥스급 처우를 받던 수용자들은 ADX 플로렌스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것이다.[7] 이에 갬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두목에게 보낼 사진을 찍었다.[8] 말기 암 환자가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진통제를 거부했다는 건 고티가 지독할 정도의 마초였다는 걸 알 수 있다.[9] 고티와 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도 2005년에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지간테의 장례식 역시 뉴욕 시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당을 거의 가득 메울 만큼 많은 조문객이 모였지만 대부분 일반인들이었고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선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그의 형을 포함해 고인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몇몇 원로 조직원만 참석했으며 그 외에 다른 폭력배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운구 행렬도 운구차 1대와 리무진 3대만 동원되어 고티 때와 비교하면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렇듯 동시대에 활동한 두 마피아 두목의 성격 차이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10] IMDB에서는 4.8점, 로튼 토마토에서는 Tomatometer 0%를 받았다. 골든 라즈베리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연출상, 커플상 총 6관왕을 차지했다.[11] 고티 주니어의 침실에 서재와 통하는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12] 훗날 줄리아니는 뉴욕시장까지 된다.[13] 갈리온은 루케시 패밀리의 행동대원(Soldier)으로 알려져 있다.[14] 출소한 그라바노는 2020년에 유명 유튜버와 인터뷰를 가졌고 같은 해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고티 가문의 영향력이 미미한 현재의 갬비노 패밀리는 그라바노에 대한 복수에 관심이 없다.[15] 1978년의 600만 달러를 2013년 가치로 환산할 경우, 약 3배인 1790만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16] 고티의 아내와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은 아들이 포함된 4명의 자녀에게 골고루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17] 영상에서 ‘마피아 두목들’이라고 묘사하는 걸로 보아 그가 1985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수감된 두목들을 목격한 것으로 보인다.[18] 한국의 교정시설과 다르게 미국 연방교정시설은 2000년대 중반까지 수용자들의 흡연이 가능했다. 단, 술을 마시는 건 특별한 날이 아니면 허용 범위 밖이며 명백한 특권이다.[19] 당시 족벌주의로 비난받는 걸 우려해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가 고티 주니어의 입단식을 주재했다.[20] 고티 주니어가 재판 과정에서 FBI에 정보를 넘긴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는데, 2015년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은 거짓 정보를 주었고 그 정보로 기소된 마피아가 하나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고티 주니어가 마피아 재판의 증인석에 선 전례가 없다.[21]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은 마피아 패밀리가 아닌 진짜 가족(Blood Family)을 선택했고 마피아 두목(Boss)으로 살면 높은 확률로 교도소에서 죽거나, 거리에서 죽는 2가지 운명이 존재한다고 말했다.[22] FBI는 아버지와 접견했을 당시 고티 주니어 측에서 마피아를 은퇴하겠다고 알린 것 또한 고도의 전술로 보고 있다.[23] 만약 고티 주니어가 제공한 거짓 정보에 FBI가 속아넘어간 게 사실이라면, 그만큼 약이 올랐기 때문에 더욱 집요하게 그를 기소했던 것일 수도 있다.[24] 고티 주니어의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를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 로에라가 2017년에 선임하기도 했지만, 구스만은 종신형을 피할 수 없었다.[25] 물론 이 사람이 공개적으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26] 웰터급, 5전 5승 4KO.[27] 존 고티 3세의 실력만 뒷받침된다면 UFC 입장에서 '고인이 된 전설적인 마피아 대부의 손자이자 전직 마피아 수괴의 아들이 옥타곤에서 싸운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기 때문에 계약에 관심을 가질만하다.[28] 훗날 슬리와는 2021년 뉴욕시장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민주당 후보 에릭 애덤스에 패해 낙선한다.[29] 우바 부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30] 바꿔 말하면 정보원이라고 확인되었거나 의심된 사람들은 처형했다는 소리다.[31]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2002년에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와중, 패밀리의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심을 받고 조직으로부터 모든 지원이 끊긴 데 환멸을 느껴 정부 측 증인이 된 인물이다. 재판 과정에서 과거의 동료들을 밀고해야 한다는 죄책감에 자살시도까지 한 그는 훗날 진행한 인터뷰에서, 배신자가 된 사실 자체는 변명할 생각이 없으며 정부 증인이 되는 행위는 조직 세계에서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행동이라고 인정했다.[32] 유죄로 인정된 죄 중에는 스티븐 시걸 살해 협박죄 및 갈취 협박죄와 배신한 전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의 살인을 공모한 죄가 있다.[33] 한국에서는 ‘고티 가족 길들이기’라는 이름으로 방영.[34] 당시 마피아와 그 가족의 인간적인 면을 담은 HBO 드라마 소프라노스가 대히트를 치면서 기획된 성격이 강하다.[35] 마피아 패밀리 내에서 행동대장 이상 직책에 있는 사람은 두목(Boss)에 의해 특별히 강등되지 않는 한 수감된다 하더라도 대리인을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 수감자의 대리인은 사업 수익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가지는 걸 제외하고는 기존의 상사에게 돈을 그대로 상납해야 한다.[36] 코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37] 2005년에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어 갬비노 패밀리를 장악한 존 다미코는 패밀리의 수괴가 맞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존 고티의 과거 답변을 패러디 해 "내 집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그땐 내가 보스요.(When I go in my house and my bathroom and close the door, I'm the boss)"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