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2:51:17

카를로 감비노

<colbgcolor=#000><colcolor=#fff> 카를로 감비노
Carlo Gambino
파일:카를로 감비노.jpg
출생 1902년 8월 24일
이탈리아 왕국 시칠리아 팔레르모
사망 1976년 10월 15일 (향년 74세)
미국 뉴욕 주 매서피쿠아(Massapequa)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마피아
신체 168cm
배우자 카테리나 카스텔라노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

일명 돈 카를로(Don Carlo)

러키 루치아노 이후 20세기 중반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2. 생애

카를로 감비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마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12월 23일에 밀항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이후 삼촌 가족이 소유한 작은 트럭 운송 회사에서 일했다.

1930년 카를로 감비노는 당시 금주법으로 인한 밀주 유통이 한창이었던 조직범죄 세계에 발을 들였다. 동시기 뉴욕에서는 미국 마피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쟁인 카스텔람마레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항쟁이 끝난 후 미국의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은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이름하에 체계화되었고 최종 승자는 전설의 마피아 두목(Boss) 러키 루치아노가 되었다.

카를로 감비노는 빈센트 망가노(사진)가 이끌던 망가노 패밀리(현 갬비노 패밀리)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1937년에 체포되어 탈세 혐의로 22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는 감비노의 범죄 인생을 통틀어 유일한 수감 기록이다.

1951년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가 빈센트 망가노를 살해하고 두목(Boss)이 되었다.

1957년 당시 미국 마피아 내 최대 파벌이던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는 내부 항쟁이 한창이었다. 카를로 감비노는 그 과정에서 비토 제노비스(사진)와 손잡고 부하 두 명을 보내 자신의 두목(Boss)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이발소에서 살해한 뒤[1] 패밀리를 장악했다.

1959년 카를로 감비노는 이탈리아로 추방되어 있던 러키 루치아노와 손잡고 비토 제노비스를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계획을 성공시켰다. 이 유죄판결로 제노비스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2]

1962년 카를로 감비노는 러키 루치아노의 뉴욕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같은 해 감비노는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토마스 루케시(사진)와 사돈을 맺었다. 이 암흑가 정략결혼은 당시 1000명이 넘는 하객이 참석했다.

카를로 감비노는 이후 보나노 패밀리 두목(Boss) 조셉 보나노(사진)와 '바나나 항쟁'을 치러 승리했다. 감비노는 이류 조직에 불과했던 자신의 패밀리를 제노비스 패밀리(구 루치아노 패밀리)를 뛰어넘는 미국 마피아 내 최대 파벌로 만들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2006년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 '정부 분석 결과, 1960년대 20여 개 미국 마피아 패밀리의 범죄수익은 연간 7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당시 미국 10대 대기업의 수익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범죄수익에 대한 제일 좋은 몫은 라 코사 노스트라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인 뉴욕의 5대 갱단이 거둬들였다.'라고 서술했다. 상술했듯 1960년대 미국 마피아계 정점에 위치한 두목(Boss)은 다름 아닌 카를로 감비노였다.

카를로 감비노를 겨냥한 연방정부의 추방 시도는 1953년부터 시작했지만 감비노의 심장 상태와 지속적인 입원 때문에 몇 년 간 아무 진전이 없었다. 1970년엔 연방대법원이 ‘감비노는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추방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가 이 판결을 실행하려 하자 감비노는 중대한 심장마비를 겪은 후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결국 추방은 없던 일이 되었다.[3]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미켈레 신도나는 갬비노 패밀리의 헤로인 사업 수익을 세탁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6년 카를로 감비노는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서 제럴드 포드대통령이 4번 바뀌는 약 19년 동안 암흑가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미국 마피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두목(Boss)으로 남았다. 감비노는 사망 직전 자신의 처남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로 감비노의 장례행렬은 13대의 리무진, 12대의 자가용, 1대의 꽃차로 구성되었다. 후계자 폴 카스텔라노가 참석했고 일부 조문객이 감비노의 죽음에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를로 감비노의 장례식

3. 여담

4. 어록

판사, 변호사 그리고 정치인들은 도둑질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우린 자격증이 필요 없다.
Judges, lawyers and politicians have a license to steal. We don't need one.
사자와 여우처럼 되어야 한다. 여우는 덫을 알아챌 만큼 똑똑하고, 사자는 늑대 무리를 쫓아낼 정도로 강하다. 사자와 여우처럼 되어라. 그러면 아무도 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You have to be like a lion and a fox. The fox is smart enough to recognize traps, and the lion is strong enough to scare away the wolves. Be like a lion and a fox, and no one will ever beat you.

5. 관련 문서


[1] 당시 아나스타시아와 동행한 부하 한명은 이발소 밖에 있었고, 이로 인해 아나스타시아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사살당한다. 이 때 아나스타시아는 자신이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자신을 쏜 자객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사실 자객은 아나스타시아의 뒤에 있었으며, 아나스타시아 본인은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발소 거울에 반사된 자객의 모습을 잘못 보고선 거기에 달려들었다가 계속 총격을 당해 결국 사망한다.[2] 당시 제노비스 휘하 행동대원(Soldier)이었던 빈센트 지간테도 함께 수감되어 약 5년간 복역했다.[3] 바꿔 말하면 당시 감비노는 미국 최고법원의 판결을 흐지부지 시킬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4] 1992년에 카를로 감비노의 아들 토마스 감비노가 정부에 신고한 재산이 7500만 달러(약 890억 원)였다. 카를로 감비노는 토마스 감비노 외에도 3명의 자녀가 더 있는 데다, 범죄수익 특성상 차명 자산과 은닉 자산까지 감안하면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상속 재산이 최소 1억 달러(약 1000억 원) 이상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카를로 감비노의 자녀들은 '라켓(Racket)'이라고 부르는 부정한 돈벌이 수단들을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아 부를 쌓았다.[5]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은 필립 롬바르도(사진)였지만 그는 티에리를 자신의 간판으로 내세웠다.[6] 수감 중인 카마인 페르시코(사진)의 대리인.[7] 수감 중인 필립 라스텔리의 대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