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버나딘 추기경
1. 개요
1928년 4월 2일 ~ 1996년 11월 14일.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톨릭 추기경. 풀네임은 '조지프 루이스 버나딘(Joseph Louis Bernardin)'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요셉 베르나르딘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이주민 출신으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의사가 되고자 했던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195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9년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몬시뇰의 호칭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66년에는 애틀랜타 부주교, 1968년엔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총장, 1972년 신시내티 대교구장, 1982년 시카고 대교구장 및 주교회의 의장을 거쳐, 55세인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사목표어는 'As Those Who Serve(섬기는 사람처럼)'.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때 미국 전역을 들쑤셨던 성직자 성추문 사건에 휩쓸려 가히 정점에 섰던 인물이자, 대인배이다.
그의 이름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버나딘 센터, 버나딘 스쿨, 버나딘 아동 센터 등의 기관이 시카고 등지에 존재한다.
2. 성추행 누명
1993년 11월 10일, 조지프 버나딘 추기경은 강의를 위해 존 오코너 추기경과 뉴욕에 체류하던 중이었다. 오코너 추기경은 한 추기경이 성추문으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고 버나딘 추기경은 제법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데, 그 용의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바로 다음날에 전해듣고 정신붕괴 수준으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사건이 마무리된 후 암 선고를 받을 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고소인은 에이즈에 걸린 34살의 '스티븐 쿡'이며, 버나딘 추기경이 신시내티 교구장으로 있었던 1975년에 성 그레고리 신학교의 프로그램에 참석한 자신을 불러내어 성행위를 했다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런데 정작 버나딘 추기경은 쿡이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고, 추문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고, 측근들은 그 시점에서 결혼가정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성직자 성 비행의 근절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버나딘 추기경을 파멸시키기 위한 음모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버나딘 추기경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모함한 것에 대해 화가 나고 치욕스러웠지만, 그 순간 자신을 고소한 쿡 역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해 본의 아니게 자신을 고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그는 쿡을 맞고소하기보다 그를 앞에 세우고 자신을 무너뜨릴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뒤를 캐기로 하고, 용기를 내어 쿡을 만나고자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쿡의 변호인이 이 편지를 당사자에게 전해주지 않아 마음은 전해지지 못했다.
교황청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버나딘 추기경 편이었지만 여론은 그렇지 못했다. TV 방송국은 그에게 불리한 증거물들을 매주 방영했고, 성직자에 의한 성적 학대 피해자 모임의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14번에 걸쳐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다소 자극적인 기자들의 질문에 "평생 동정으로 독신 생활을 해왔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맞고소를 하지 않겠다, 변호비용에 교구의 돈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에 따라 추기경을 무료 변호하겠다는 법률회사들이 줄을 섰고, 그들의 도움으로 누명은 차차 풀려갔다. 그의 예상대로 이 사건은 자신을 싫어했던 신부에 의해 꾸며진 음모로 쿡은 그들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쿡 본인이 1994년 2월 28일 이 고소를 취하해 버렸다. 그 역시 어떤 신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마음에 상처를 받아 신학교를 자퇴한 뒤, 다사다난한(...) 생활을 해오다 에이즈에 걸려 필라델피아에 있는 친구의 집에 있었다. 버나딘 추기경은 그 해 12월 30일에 그를 만나기로 했다. 추기경은 쿡이 나타나기 직전까지 그가 자신을 만나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친구를 대동하고 나타나 주었다.
그 때서야 버나딘 추기경은 쿡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쿡은 자신을 성추행한 신부를 고소하기 위해 어떤 변호사를 찾았고 그를 통해 어떤 사제를 소개받았는데, 그 사제가 버나딘 추기경에게 원한이 있었는지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고소 대상자에 포함시키면 그가 교회에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부추겼고, 그 신부는 라디오 토크쇼에까지 출연하여 버나딘 추기경을 유죄라고 몰아붙였다고. 버나딘 추기경은 쿡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넌지시 떠보았지만 쿡은 성경을 벽에 내던졌던 이야기를 꺼내며 망설였기 때문에 강요할 수 없었다. 대신 미리 선물로 준비해 온 성경과 익명의 누군가가 쿡을 위해 봉헌한 백 년 된 낡은 성작[1]을 건네주었더니, 쿡은 눈물을 흘리며 미사 참례를 하겠다고 답했고 그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비신자 친구도 함께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추기경은 쿡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1995년 9월 22일, 스티븐 쿡은 교회와 화해할 수 있었음을 기뻐하며 세상을 떠났다.
3. 췌장암 투병
1995년 6월, 버나딘 추기경은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이 6살 때 아버지를 똑같이 암으로 여의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자신의 현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교구 차원에서 자신의 투병 사실을 신자들에게 알리고, 교황 및 스티븐 쿡을 비롯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로욜라 중앙병원에 입원했다. 물론 교구에 대한 책임은 다른 주교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이 로욜라 중앙병원에 있는 암센터는 추기경 사망 수 주 전인 1996년 10월 29일에 '버나딘 추기경 암센터(Cardinal Bernadin Cancer Center)'라는 이름이 붙는다.버나딘 추기경은 자신이 환자이기 이전에 사제라는 마음가짐으로, 병실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나름대로의 짧은 사목활동을 한 뒤 퇴원했다. 그 뒤에도 여러 암환자들과 연락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당초 5년 이상 살까 말까 했던 예상과는 달리, 1년 만인 1996년 8월 30일 수술이 불가능한 지경의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사실 수술을 받고 나서 별다른 이상징후가 없어 치료되었다고 믿었던 암세포가 간으로 옮겨져 자라고 있었던 것. 예전처럼 사목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이젠 몸이 버티지 못하여 이 때부터
1996년 9월 9일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고, 9월 20일에는 보스턴 대교구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상(Caritas Christi Medal)'을 받았다. 또한 9월 23일에는 로마로 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아시시로 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을 만났다.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유품 및 유서, 자신이 맡았던 임무의 이양 문제 등을 정리하고 자신의 장례식과 남겨지게 될 어머니에 대한 지시사항을 마련했다.
11월 1일에는 인생 마지막 3년 간의 회고록 《평화의 선물(The Gift of Peace)》 집필을 끝마쳤고, 11월 14일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석했다.
4. 천국에서 온 크리스마스 편지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성탄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보냅니다.
이번 성탄은 내게 특별한 성탄입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이지상에서의 마지막 성탄일 테니까요.
이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있습니다. 다가올 세상, 곧 천국에서 주님과 보다 깊이 친밀하게 하나 되는 희망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하늘 고향을 향하여 나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될 때, 내 마음은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에게 베풀어 준 우정과 친절, 특히 협조와 기도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번 성탄은 내게 특별한 성탄입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이지상에서의 마지막 성탄일 테니까요.
이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있습니다. 다가올 세상, 곧 천국에서 주님과 보다 깊이 친밀하게 하나 되는 희망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하늘 고향을 향하여 나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될 때, 내 마음은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에게 베풀어 준 우정과 친절, 특히 협조와 기도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버나딘 추기경은 사망 직전 이 내용을 일일이 친필로 쓴 카드를 써서 그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도록 지시했고, 이 카드는 그가 죽고 몇 시간 후에 우체국으로 전달되어 전세계 각지의 수신인들에게 전해졌다. 그 중에서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도 있었는데, 이 카드를 받고 죽음은 고통스럽고 슬프지만 오히려 하느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즉 삶을 감사하게 여기는 과정임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