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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0:06:42

방어적 민주주의

전투적 민주주의에서 넘어옴
1. 개요2. 의의
2.1. 기능
3. 탄생 배경4. 한계5. 한국에서의 용어의 성격과 역사
5.1. 개헌 전: 민주주의 제제도
5.1.1. 최초 헌법
5.2. 유신 개헌 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5.2.1. 유신정권하에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표현 5.2.2. 한국에서의 방어적 민주주의
6. 제도적 장치
6.1. 애매한 장치들
7. 관련 문서

1. 개요

외국어 표기
영어defensive democracy
독일어abwehrbereite Demokratie
streitbare Demokratie
한자
자유의 적에게 줄 자유는 없다.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민주주의는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기존 국가질서를 전복하려는 활동이 있을 경우 강압적 수단을 동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강압적 조치는 양날의 검이므로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가 폭정으로 변할 것이다.
우르호 케코넨
표현의 자유는 헌법의 적들을 위한 특별 허가증이 아니다.
Die Meinungsfreiheit ist kein Freibrief für Verfassungsfeinde.
독일 연방헌법수호청 청장 토마스 할덴방(Thomas Haldenwang), 2024년 4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한 사설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스스로 파괴되는 상황[1]으로부터 민주주의 자신을 수호하기 위하여 나타난 개념.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 핵심 개념이기 때문에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는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Pluralist Democracy)와 차이를 보인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는 개념을 제도적으로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투적 민주주의’(streitbare Demokratie)[2]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치즘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만큼,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에게는 말을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나치즘은 민주주의의 존속에 분명한 해가 된다. 방어적 민주주의는 그가 나치즘을 옹호하여 민주주의의 존속에 더 이상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그를 처벌하는 제도를 만든다.

2. 의의

생각의 자유, 다시 말해,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본래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하에 사상이 지나치게 극단화되면 기존 민주주의로서는 막는게 매우 힘든 위협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게 된다. 바로 국민 대다수가 일시적이거나 선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지라도 '미천한 백성인 우리에겐 주권이 없다', '나라 전체를 위해 자유로운 개인은 사라져야 한다', '세속적 규약 대신 단 하나의 율법만 따라야 한다'라는 식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여론으로 가득차게 될 경우로서, 민주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최고 수준의 위협이다. 다른 정부체제와는 달리 대중을 통한 정통성은 민주정권 하에선 그 누구도 직접 부정 불가능한 최고 수준의 정치적 명분인데, 그런 정통성이 자기 스스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3]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우리는 의회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독일 의회 구성원이 아니다. 면책 특권 보유자이자 무임 승차권 보유자이다. 면책 특권 보유자는 ‘바이마르 체제’를 모욕하고, 공화국은 월 750마르크의 봉급으로 답례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4], 의회 민주주의를 조롱하며[5]

이렇게 될 경우 민주주의 정부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파벌이 부상하며, 해당 민주주의 정치권은 커다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이 정치적으로 매장될 때 까지 서로간의 존립을 건 대립이 막을 올리게 되며 국정이 마비되고, 최악의 경우 상황을 오판하거나 선동된 국민 대다수의 동의하에 해당 민주주의 정부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살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렇게 정권을 차지한 해당 비민주적 정치파벌은 국민과 정부와의 소통구조를 왜곡함으로서 해당 사회를 사실상 민주주의 이전으로 되돌려 버린다. 결과적으론 국가의 주인이었던 국민들이 뒤늦게 선택을 철회하려고 해도, 이미 해당 민주주의 체제는 붕괴된 지 오래라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민주주의 체제가 전체주의 등 외부의 사상적 위협에 대처할 수 없게 되어 결국 붕괴되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주된 논지이다. 방어적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상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 방어적인 수단을 마련해줌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 체제의 존속을 도모하여, 결과적으로 반민주주의의 위협에 맞서 개별 시민들의 기본권의 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2.1. 기능

방어적 민주주의의 세 가지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치 구속적 민주주의이다. 방어적 민주주의는 어떤 내용의 가치질서로도 채울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상대주의적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일정한 가치에 구속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가치 구속적 민주주의관, 즉 절대주의적 세계관이 가미된 민주주의관을 전제로 한다.

둘째, 헌법 수호의 기능이다. 방어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내포된 일정한 가치질서를 지키고 헌법의 최고규범성과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헌법질서의 적으로부터 헌법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현대 미국이 제일 좋은 예로, 상•하원이 통과시키고 사실상 모든 주가 동의 및 비준해야만 개헌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횡포에 의해 기본적 인권과 같은 가치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소수자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방어적 민주주의의 장치의 대표적인 것으로 민주주의적 질서의 전복을 꾀한 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과 위헌정당심사제도 등이 있다.

사실 방어적 민주주의는 정치외교학에서보다는 법학에서 더 주목받는 개념이다. 한국 정치학계의 분위기 상 '가치절대주의가 가미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

3. 탄생 배경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급진파이자 좌파의 어원이 된 당인 자코뱅을 이끄는 정치가였던 생 쥐스트(Saint-Just, 1767-1794)가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명제를 남기면서 구체화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당파와의 유혈 투쟁의 산물로서 이와 같은 말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말을 했을 때의 생쥐스트는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혁명의 적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전체주의에 경도되어 있어 '말만 그대로 남았다.'[6] 오히려 방어적 민주주의가 최소한의 범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방어적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에 나치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반성으로 독일 학자들이 제기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 칼 뢰벤슈타인(K. Loewenstein)과 칼 만하임(K. Mannheim)이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바이마르 정부의 붕괴와 나치의 집권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현실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민주주의가 안고 있던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경고의 성격을 갖는 고찰 정도였으며 체계화 된 이론은 종전 후 당시 서독 기본법 하에서 비로소 형성되었다.

현재 독일 기본법인 서독 기본법이 담고 있던 시대적 교훈은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상대적 민주주의를 취한 탓에 당시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고, 결국 전체주의(파시즘)의 암흑기로 빠진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는 것. 사실 히틀러가 너무 유명해서 히틀러의 사례만 알려져 있지, 역사적으로는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와 같이 민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독재를 저지른 인물들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방어하고자 하는 약점은 바로 '민주주의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붕괴될 가능성'이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보자면, 지도자 원리를 추종하는 파시즘/나치즘 정당이나, 민주집중제를 따르는 공산주의 정당, 좀 더 이전 시대에는 왕당파나 민중파[7]가 이 민주적 절차를 악용하여 집권에 성공한 다음 민주주의 절차 그 자체를 파괴한 전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은 대개 민주주의의 파괴가 "국민의 뜻, 선거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정당화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생각은 시시각각 바뀌기 마련이며 영원히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내놓았다고 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민들이 바라는 바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굳이 절대 다수가 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의석을 손에 넣으면 유사 세력과의 연대를 통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민주적 조직'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4. 한계

바뤼흐 스피노자는 사상의 자유가 곧 자유의 핵심이라고 했을 만큼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다. 인간의 사상이란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법률에 의해 통제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며, 나아가 이를 막는 것은 진리와 진실에 대한 공동의 탐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자유의 핵심이자 민주주의 핵심이다. 곧 민주주의의 ‘정체성’이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을 가져도 자유라고 말했으며, 획일성과 전체성을 자유의 적으로 혐오했고, 진리의 다면성과 복잡성을 인정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관용’ 개념을 통해 방어적 민주주의의 역설을 설명했다. 그는 민주적 공동체 내부에서 특정한 권위가 관용의 대상을 규정하는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 및 호혜적인 상호 존중이라는 토대 위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선호나 가치관에 따라서 관용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핵심요소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탄압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알맹이는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게 된다. 따라서 알맹이 빠진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상적 이견이 있는 사람을 배척하기 위해 방어적 민주주의가 남용되거나 체제에 내제하는 반대세력에 대한 처벌의 수단이 될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방어적 민주주의의 개념이 다양한 면에서 논쟁의 중심을 이루는 이유는 이 개념이 ‘헌법에 대한 적대와 충성을 구분하는 척도’가 될 수 있으며, 실제의 적용과 관련한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변혁을 기도하는 혁신세력이나 정당은 기존의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현실과 타협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위헌’ 낙인을 받고 헌법보호의 대상에서 제외하든지의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된다.

인하대 법대 김민배 교수는 방어적 민주주의 위헌정당의 금지와 해산제도의 측면을 바라보면서, 방어적 민주주의에는 지배집단이 반대당이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대파들에게 헌법 적대적 의도가 있다고 몰아세울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당이 없는 정당정치 형성이라는 목적과 과도한 정당규제는 확대적용과 남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의 위기관리체제를 옹호하는 듯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결국 이는 민중의 억압구조로 이어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정치적 억압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수호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헌법 논리가 ‘기득권 수호’를 위한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나라에서는 위의 '기득권 수호'와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방어적 민주주의의 논리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위안스카이가 권력장악을 위해 1913년 중국국민당을 반역정당으로 낙인찍어 해산하고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한 일이 있고, 한국에서도 여러 대통령이 북한의 민주주의 위협을 근거로 야당을 탄압하고 독재를 구축한 바 있으며, 북한 역시 공화국을 자칭하면서 독재를 유지하는 논리 중 하나로 '악랄한 미제의 자국 민주주의 위협'이 꼭 들어간다.

또한 정치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비정부 조직이나, 세속사회의 상식과 분리된 종교와 같은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계층에 대해선 방어적 민주주의는 원활히 작동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8] 방치할 경우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에 악영향이 갈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역에까지 방어적 민주주의를 심도 깊게 적용해 버릴 경우 파시즘과 다를 바 없는 다수결의 폭정이 일어나버리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대다수의 민주주의 체제 국가는 이러한 광풍에 대해 본질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거나, 오히려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으려다 독재로 역행하거나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모습을 보였다.

5. 한국에서의 용어의 성격과 역사

5.1. 개헌 전: 민주주의 제제도

한국에서 방어적 민주주의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질서 및 가치는 1공화국 수립 후 부터 생겨나고 유신 개헌 이후 삭제 된 "민주주의 제제도"와 유신개헌 이후 추가 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며 사이의 연관성과 비교가 학술적으로 이뤄진 바 있다. 대표적으로 남침유도설을 학계에서 추방시킨 박명림 교수의 논문이 있다. [9]

5.1.1. 최초 헌법

"민주주의 제(諸 여러) 제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民主主義諸制度를 樹立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부칙
대한민국국회의장은 대한민국국회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을 이에 공포한다.
단기 4281년 7월 17일
대한민국국회의장 이승만

5.2. 유신 개헌 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5.2.1. 유신정권하에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표현

10월 유신이 일어난 뒤 헌법은 이렇게 바뀌었다.
시행 1972.12.27. 헌법 제8호, 1972.12.27., 전부개정
"민주주의 제(民主主義諸)"는 사라지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이라는 내용이 추가됐다. 그리고 이 표현은 현 헌법에도 이어가고 있다.

5.2.2. 한국에서의 방어적 민주주의

시행 1988.2.25. 헌법 제10호, 1987.10.29., 전부개정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제1장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Enforcement Date 25. Feb, 1988. No.10, 29. Oct, 1987.,
『PREAMBLE
We, the people of Korea, proud of a resplendent history and traditions dating from time immemorial, upholding the cause of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born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and the democratic ideals of the April Nineteenth Uprising of 1960 against injustice, having assumed the mission of democratic reform and peaceful unification of our homeland and having determined to consolidate national unity with justice, humanitarianism and brotherly love, and To destroy all social vices and injustice, and To afford equal opportunities to every person and provide for the fullest development of individual capabilities in all fields, including political,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life by further strengthening 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conducive to private initiative and public harmony, and To help each person discharge those duties and responsibilities concomitant to freedoms and rights, and To elevate the quality of life for all citizens and contribute to lasting world peace and the common prosperity of mankind and thereby to ensure security, liberty and happiness for ourselves and our posterity forever, Do hereby amend, through national referendum following a resolution by the National Assembly, the Constitution, ordained and established on the Twelfth Day of July anno Domini Nineteen hundred and forty-eight, and amended eight times subsequently. Oct. 29, 1987
CHAPTER I GENERAL PROVISIONS』
『(CHAPTER I Article 4 )
The Republic of Korea shall seek unification and shall formulate and carry out a policy of peaceful unification based on 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대한민국 제10호 헌법의 "자유민주적"이란 표현은 대한민국의 사상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뜻은 거의 상통하지만) "자유롭고 민주적인"(free and democratic)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한국 헌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요소라고 꼽히고 있다.

6. 제도적 장치

6.1. 애매한 장치들

방어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는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에 의해 사실상 방어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로 간주되는 것들도 있다. 다만 아래에 나온 제도적 장치들은 위에 나온 제도적 장치들과 다르게 직접적인 보호법익을 '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가 아닌, 국가 혹은 국민의 안전, 보존을 두고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7. 관련 문서



[1] 대표적인 예로, 나치당바이마르 공화국 장악의 예를 들기도 하지만 군부가 나치당을 지지하여 밀어준 결과였음으로 의회정의 실패면 몰라도 민주제의 실패로 볼 수는 없는 예시다. 다만 수권법 문서에서 지적하듯, 저 모든 게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도를 구성하는 법률에 구멍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한국 외의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이 표현을 번역해 쓰기도 한다. 일본어의 戦う民主主義, 불어의 Démocratie combative 등.[3] 군주제 국가로 비유하자면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왕가 혈통 전체를 제 손으로 멸족시키는 것과 비유할 수 있을 수준의 대참사다.[4] 나치당의 선전 장관.[5] 민주주의 하에서의 표현의 자유로 운을 떼지만 사상이 점점 극한으로 치닫아 전체주의로 변해버린다.[6] 유명한 명언이자 경구로 사용되는 표현들 중에서 처음 발언한 사람의 의사와 무관하게 인용되는 예는 수도 없이 많고, 이 발언을 사용한다는 것이 초기 발언자에게 동의한다는 의미도 아니다.[7] 플라톤 등에게서 중우정치라고 비판받은 그것이다.[8] 극단주의에 의거한 반민주적인 정당을 만드는 것 정도는 정당 해산으로 방어할 수 있겠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하는 것,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을 사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막기 힘들다. 또한, 무슬림 형제단마냥 종교적일 뿐 반민주 정당은 아니라고 우기는 경우에는 심히 골치가 아파진다.(물론 무슬림 형제단은 실제로는 반민주주의적인 집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9] 자세한건 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 정신과 내용의 해석,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96호, 2011 참고[10] 독일 사회주의국가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후신이었기 때문에 해산되었고, 독일 공산당의 경우 당 강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며, 폭력 혁명과 투쟁 노선을 내세운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