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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1:14:44

전병철(독립운동가)

파일:전병철.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명보(明甫)
본관 경산 전씨[1]
출생 1926년 9월 9일[2]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 남전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3]
사망 2010년 6월 12일 (향년 83세)
부산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67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2.1. 노다이 사건(乃台事件)2.2. 울산비행장 동맹파업2.3. 수감 생활2.4. 광복 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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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기업인.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전병철은 1926년 9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에서 아버지 전진한(全振瀚)과 어머니 광주 안씨 안종우(安鍾右)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천자문·동몽선습·사략(史略)·통감절요·추구 등 한문을 수학하고, 1934년 하남공립보통학교[4]에 입학하였다.

하남보통학교 6학년 때이던 1939년, 그는 교내 검도씨름 선수로서 밀양군내 각 학교를 비롯해 대전부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검도용 죽도로 학생들의 머리를 잘 때리는 사가와 나오토(佐川直人)[5] 교장에게 "머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위이고 급소인데 죽도로 제자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애정이 부족한 탓이 아니냐"고 항의하여 교장의 그런 버릇은 전에 비해 줄어들었으나 그는 이 일로 1주일 간의 부당한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40년, 중등학교 입시에서 대구사범학교부산제2상업학교에 동시 합격했으나, 당시 전병국(全秉國)과 전병덕(全秉悳)[6] 등 두 사촌형이 부산제2상업학교의 3년 선배로 있었기에 그들의 영향으로 부산제2상업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2.1. 노다이 사건(乃台事件)

그해 1940년 11월 23일, 부산부내 각 학교를 대상으로 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구덕운동장에서 있었다. 당시 경기의 심판장은 경상남도지구 위수사령관이자 부산부지구 병참사령관으로서 부산시내 중등학교 배속장교 총책임자를 맡았던 노다이 켄지(乃台兼治) 일본 제국 육군 대좌였는데, 이 날 노다이 심판을 비롯한 심판진의 공정치 못한 처사로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가 우승하자, 이에 항의하는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 1천여명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장기 하강 시에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 대신에 '아리랑'을 제창하였고, 식이 끝난 후 '황성옛터' 등 당시 금지곡을 부르고,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무엇이 내선일체냐" "무엇이 동아시아의 맹주냐"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을 외치며 시가행진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학생들은 경상남도청 앞과 대청정(현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을 거쳐 옛 부산역에 와서 해산하였으나, 일부 학생들은 영주동에 있던 노다이 대좌의 관사를 습격하여 돌을 던졌는데, 이때 전병철도 영주동까지 따라가 돌을 주워 상급생들에게 공급했으며, 이에 대문·전등 및 창문 유리 등이 파손되었고 노다이는 몇몇 학생들에게 구타당하기까지 했다.#

이 소위 '노다이 사건(乃台事件)'으로 2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상급생들이 퇴학 또는 투옥되었다. 또한 가메야마 리헤이(龜山利平)[7] 교장은 함경북도 경성중학교로 좌천되고 구루시마 가메오(來島龜雄)[8] 교장이 부임해 왔는데, 이때부터 학생들의 사상 동향에 대한 학교의 감시는 점차 엄중해져 갔다.

2.2. 울산비행장 동맹파업

2학년 재학 중이던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은 갈수록 가중되었고, 수학여행은 중지되었다. 또 4·5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1944년에는 철도 공장의 철물 정리, 창원군 대산면의 모내기 및 뽕밭 메기, 부두 대두박 콩깨묵 하역작업, 적 전투기 대비 고사포 진지 구축 등의 근로 작업을 하였으며, 1944년 9월 초에는 부산제2상업학교를 비롯해 마산고등보통학교·울산농업학교·김해농업학교 등의 재학생들이 울산비행장 확장 공사 및 부수 도로 건설 공사에 2개월 간 동원되었다.

이때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은 비행장에서 덕하역 쪽의 탄약고가 있는 곳까지 도로 건설공사를 맡았다. 처음 1개월분을 배정받아 마치면 또 1개월분을 배정받게 되는데, 일찍 마치면 일찍 학교로 돌려보낸다는 소위 청부제였다. 과거 각지의 근로 동원에서 몇 번이나 그런 술책에 속은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적당히 시간만 보내는 태업을 벌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인 관리자는 하루 작업량을 정해 놓고 그것을 마치면 일찍 보내 주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겨우 1개월의 작업량을 3주일 정도로 집중해서 마치고, 새로 배당된 1개월분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자는 처음 1개월분이 반개월분이라서 아직 반개월분이 남아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 날이 9월 28일이었는데, 학생들은 29일 집에 돌아가면 10월 1일의 추석을 집에서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부당함에 격분한 학생들은 평소에 제공하는 식사량의 부족, 외출 금지의 해제, 면회 허가, 입욕 허가 등을 요구한 것이 시정되지 않은 점과 아울러 석식의 엄청난 감량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윤진옥(尹瑨玉)과 전병철의 주도 하에 학생들은 다음날부터 파업에 들어갔으며, 아울러 일본군 학병에 지원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징병 기피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인 관리자 측은 회의를 열어 주모자를 퇴학시키는 것 등을 모의하였으나, 이를 미리 파악한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전부 부산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워낙 사람이 귀한 현장에서는 약 10일을 단축하여 작업을 끝내고 귀가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고, 결국 학생들은 11월 초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2.3. 수감 생활

그해 12월 22일, 3개월 앞당겨진 졸업을 맞아, 그는 부모에게 효도할 요량으로 집에서 6km 정도 거리에 자전거로 통근할 수 있는 밀양금융조합 수산지소에 12월 26일 취직을 했다. 그런데 취직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45년 1월 21일, 울산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체포되었으며, 자택에 있던 일기장 및 편지철·수필집 등을 압수당했다.

이유는 먼저 구금된 동기생 윤진옥·이용재 등의 진술 때문이었다. 그 진술을 토대로 일본 경찰은 "전병철이, '일본의 패전이 가깝다. 만주에도 가지 말고, 공군 지원도 하지 마라, 일본이 패전하면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이냐? 또 일본 성전 수행에 비판적이냐?"는 등 추상적인 추궁과 함께 심한 고문과 취조를 동반했다.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부분 시인해주고 유치된 지 4개월 반인 6월 2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부산 검사국에 송치되어 부산형무소 미결감방에 구류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이튿날인 8월 16일 석방되었는데, 울산에 구속된 지 7개월, 부산형무소에 구류된 지 2개월 반 만의 출옥이었다.#

2.4. 광복 후 행적

광복 후에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며, 교통부에 들어가 외국자본을 인수하는 직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경남우유협동조합과 주식회사 한립특수제강에서 전무이사를 지내는 등 기업인으로서 활동했다.

은퇴 후에는 성균관의 전학(典學)을 맡는 등 유림 활동을 했으며, 200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2010년 6월 12일 부산광역시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0년 6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1] 감무공파 25세 병(秉) 항렬.[2] 옥산(경산)전씨대동보에는 1926년 7월 2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경산 전씨 집성촌이다.[4] 1996년 하남대사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12년 수산초등학교 하남대사분교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3년 수산초등학교에 합병되어 폐교되었다.[5] 1925년 부산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단성보통학교 훈도를, 1929년부터 1933년까지는 생초보통학교 훈도를 지냈으며, 이 사이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오부보통학교 훈도를 겸직하기도 했고 1934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유 및 부민보통학교 훈도,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 시학을 겸임하였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마산보통학교 훈도를 지냈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하남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는 등 일제강점기 때 주로 경상남도에서 교원생활을 했다.#[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서울고등법원장에 올랐다.#[7] 1912년~1914년 경성용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 훈도, 1915년~1916년 영일공립보통학교 훈도, 1921년 대구공립심상소학교 훈도, 1922년 대구중학교 교유, 1923년~1926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교유, 1927년~1932년 춘천고등보통학교 교유, 1933년~1934년 대전중학교 교유, 1935년~1937년 강경상업학교 교유, 1938년~1940년 부산제2상업학교 교유, 1941년~1943년 함경북도 경성중학교 교유 등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에서 교원생활을 했다.#[8] 1927년 강경상업학교 교유, 1928년 대전고등여학교 교유, 1929년~1930년 공주고등보통학교 교유, 1930년 충청남도사범학교 교유 겸직, 1931년~193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교유, 1938년 경복중학교 교유, 1939년~1940년 강계중학교 교유, 1941년 부산제2상업학교 교유, 1942년~1943년 안주중학교 교유 등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교원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