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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30:15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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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반전4. 왜 재일 한국-조선인 유학생들은 타겟이 되었는가?5. 구명을 위한 노력과 재심6. 사건 이후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삶7. 관련 매체

1. 개요



당시 대한뉴스의 보도 영상. 물론 당시 정부 입장의 선전이니만큼 영상의 내용은 당연히 완전 거짓말이다.

1975년 11월 22일 발생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으로, 공안사건이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이 사건의 명칭은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이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 서울과 부산 지역의 대학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 위주로 큰 타격을 가한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

이 사건의 수사 기획자로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이던 김기춘이다.[2]

2017년 기준으로 해당 사건에 대해서 비교적 비중 있게 다뤘던 최신 미디어 컨텐츠는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자백이 있으며 2017년 그것이 알고싶다 1060회 김기춘 편에서도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룬 바 있다.

2. 전개

1975년 11월 22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임받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 국장이었던 김기춘은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 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하였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다.

이 사건으로 재일동포 10여명을 포함한 21명을 간첩으로 발표하고 구속, 수감시켰다. 이 중 한국 유학을 위해 한국에서 살던 재일동포 학생들은 대부분 중형 혹은 사형을 받아 장기간 구속 수감 후 일본으로 추방되거나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사건은 종료되었고 이는 간첩단을 대량으로 검거한 김기춘의 업적으로 남게 되었을 줄 알았다.

3. 반전

사건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2000년대에 유죄 판결을 받았던 학생들의 일부가 재심 청구를 했다.

피해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끌려간 뒤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 자백할 때까지 구타 등의 고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70년대는 한국의 반공주의가 21세기보다 굉장히 강했던 시절이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남북간 교류보다도 일본북한의 교류가 더 활발했다. 실제로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 중에도 북한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에서는 민단이건 조총련이건 별로 구분 없이 잘 지냈다는 것이다. 물론 간부급에서는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일이 있었고 두 단체의 통일을 위해 한민통 같은 단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인간적으로는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했다. 조총련 사람을 만난 것, 조선학교에 가 본 것, 북한의 선전물을 접해 본 것 등 별의별 사소한 것을 다 엮어서 집어넣었다. 물론 이러한 재일동포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이들의 간첩이고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러한 사실에 착안해서 이들을 미행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뭔가 이상하거나 수상쩍다 싶거나 하면 그냥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끌고 온 것이다.

끌려온 학생들은 어느 순간 이들도 모르는 사이에 간첩단의 간부가 돼있거나 약혼녀와 같이 동시에 끌려와서 둘 다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으로 이러한 것들이 다 사실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유학생들은 아무리 명문대생이었다지만 법정에서 능수능란하게 변론하기엔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상황일 수 밖에 없었다.

4. 왜 재일 한국-조선인 유학생들은 타겟이 되었는가?

1945년 8.15 광복 당시 일본에는 220만 명 가량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이 조선으로의 귀국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귀환자는 1인당 현금 1천엔 이내만을 지참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 재산을 축적하였거나 부양할 가족이 있는 조선인의 경우 귀국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인 등록자 가운데 80%가량이 귀국을 희망하였고 적지 않은 조선인이 일본에 잔류하게 되었다.[3]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들에게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남북분단 문제였다.

한반도에서 이념 대립에 의해 남한과 북한이 갈라서자 재일 한국-조선인[4]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동포를 중심으로 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남한을 지지하는 동포를 중심으로 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발족했다.

일본 내 조선인들의 이념 대립은 당시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민감한 주제였다. 그렇다 보니 1950년대 재일 한국-조선인 북송 문제는 매우 중요한 주제였는데, 북한은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북송 추진에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 조총련이 북송 추진 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재일 한국-조선인이 북한으로 이동했다.

재일 한국-조선인의 북송 문제는 반공 정책을 펼치던 이승만 정부에게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정부는 북한 송환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항의하였고, 1959년 제 4차 한일회담은 재일 한국-조선인 북한 송환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정부는 조총련을 재일 한국-조선인 북송의 배후로 지목하였고 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조총련과 연관된 재일 한국-조선인을 북한과 연결된 사람으로 생각하며 비판하였다.#

남한의 반공주의 정서 하에서 재일 한국-조선인은 “북한을 지지하는 간첩”, “조국의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 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상되었다. 특히 엘리트 재일 한국-조선인의 경우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하기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띈다는 인식이 강했고 이러한 인식은 엘리트 재일 한국-조선인일수록 조총련과의 커넥션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상황과 그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중앙정보부가 재일 한국-조선인을 타겟으로 하는 배경이 되었다. 모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학을 온 재일 한국-조선인들은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

중앙정보부는 일본에서 조총련 사람을 만난 것, 북한의 선전물을 본 것 등 다양한 이유를 찾아 재일 한국-조선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웠고 그들이 한국어가 서툴다는 점, 한국에 기반이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거짓 자백을 하도록 하였다. 증거가 부족했지만 국가의 압력과 당시의 사회적 인식 하에서 사법부는 그들에게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하였다.

5. 구명을 위한 노력과 재심

일본 시민 사회는 그들을 위한 구명 사업을 펼쳤다.

사건 조작에 대한 의혹을 일본 언론에서 보도하고 일본 변호사들이 그들을 위한 변호 활동을 하였다. 특히 일본의 구원회는 옥중에 있는 재일 한국-조선인에게 엽서를 보내며 응원하고 구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출소한 재일 한국-조선인들이 구원회에 참여하여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가 발족되었고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이후 재일동포 재심 변호단이 꾸려지고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재심이 진행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재기한 재심 청구에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범인으로 조작당한 사람들은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2011년 무죄 판결 - #
2012년 무죄 판결 - #
2015년 무죄 판결 - #
2016년 무죄 판결 - #
2020년 무죄 판결 - #
2022년 무죄 판결 - #

엄밀히 이들이 간첩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확증은 없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대부분 자백에 의존하여 판결을 내렸고 자백 또한 고문으로 얻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무죄가 판결되었다.

여기서 실제 간첩 활동을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정상적인 사법체계에서는 물증이 없다면 죄를 선고하는 것이 불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심증만 있다면 유죄 판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또 자백은 고문으로 획득되었을 경우에는 그 효력을 상실하므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판결이 가능했던 것은 박정희 정권 하의 다른 많은 간첩 조작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독재 정권 하에서 사법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당시 중정의 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은 이들의 무죄가 밝혀질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은폐하려는 행동을[5] (기사) 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반공 기조를 위해 억울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억울하게 수감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고 건강도 좋지 않아 재심 자체를 청구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사례도 영화 자백을 통해 알려졌다.

6. 사건 이후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삶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된 재일 한국-조선인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깨닫고 유학을 왔던 젊은 꿈들은 무참히 무너졌다. 그들은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고 이는 가족들에게도 번졌다. 소위 명문대생으로 미래가 밝았던 그들은 젊은 시절을 옥중에서 보내야 했으며 간첩이라는 낙인 아래 평생을 살아야 했다.

출소한 재일 한국-조선인 피해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명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일본 구원회 활동을 하며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며 도움을 주고 피해자 모임을 만들어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재심 이후 무죄를 받고 명예를 회복한 재일 한국-조선인 중에는 아픔을 딛고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2018년에는 1975년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재학 중이었던 이동석 씨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학부 4학년으로 재입학했다. 65살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2월에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다.#[6]

구명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과 재심을 통한 무죄 판결 등을 통해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었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오사카에서 열린 동포 간담회에서 재일교포 간첩 조작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서울대학교는 2021년 8월 학위수여식에서 재일 한국-조선인 유학생이었던 의학과 72학번 강종헌(70)ㆍ73학번 허경조(78), 영어영문학과 74학번 박영식(70), 사회계열 74학번 故 김승효(71)ㆍ77학번 김정사(66)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을 두려워하고 누군가가 자신들을 암살할 수 있다는 공포에 떠는 가족들이 존재할 만큼 모국에서의 경험은 그들에게 인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모진 고문과 혹독한 옥중 생활은 후유증으로 남아 평생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간첩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재일교포 김승효는 2020년 12월 27일 향년 70세로 사망할 때까지 정신적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다.#

7. 관련 매체



2016년 개봉된 영화 자백에서 뉴스타파최승호 PD는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고 있는데 어떤 심정이냐고 김기춘에게 묻자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본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건이라며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1987의 오프닝에 땡전뉴스와 함께 잠시 나온다.

2021년 8월 19일. KBS 1TV(한국방송)에서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내용을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스파이'로 제작하여 광복절 특집 기획으로 공개했다. 방송 이후 KBS 다큐 유튜브 채널에 풀영상으로 공개되었다. #

2021년 말에 개봉된 다큐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므로 참고할 만하다. 짧게는 4년, 길게는 사형을 선고받고 13년을 복역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무고한 감옥살이를 했음에도 한국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을 가지지 않고 한일 양국 간의 우호에 대해 강연하거나 한국어 강사를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1] 사실 이 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악독하다고 할 수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재일교포 유학생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것을 이용한 것.[2]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각종 공안 사건들 바탕으로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에 '5.16 민족상' 안보분야에서 훈장을 받았다. #[3]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51888[4] 다양한 문헌과 매체에서 재일교포, 재일 조선인, 재일 한국인 등 여러 단어가 혼용되고 있다. 각각의 단어는 서로 다른 것을 포함하고 배제하며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자 한다.[5] 용의자의 알리바이 조작하기 위한 행동을 주일대사관에 요청하는 쪽지[6] 신입이 아닌 재입학인지라 학번도 73으로 시작하는 번호 그대로였고 학과의 원로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다가 자기보다 선배라고 멋쩍게 웃는 경우도 생겼다. 학교에서는 멋있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